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98화 (199/225)

198화 난동

“제스 체임버라면······.”

“원래는 제스였습니다. 정식 성기사가 되면서 성을 받았지요.”

갈색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그는 다듬지 못해 거칠게 자라난 턱수염을 움직이며 말했다. 엘레노아는 그가 성력을 잊지 않은 것을 알았지만 가까이 다가가진 않았다. 그녀가 물었다.

“그렇군요. 저를 어떻게 찾아오신 거죠?”

추격자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준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경계해야 한다. 가장 방심하고 있을 순간이니까 그렇다.

제스는 그녀의 의심을 이해했기에 천천히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제스의 손에는 작은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얇은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거기에 여닫이로 열 수 있는 펜던트가 걸린 목걸이였다.

그는 목걸이를 엘레노아에게 건네자 그녀가 침음성을 흘렸다.

“이건······.”

“하일른 경이 오크 대주술사의 주술에 걸려서 어디론가로 날아가기 직전 제게 던지신 겁니다. 하일른 경께서 가끔씩 꺼내 보신 덕분에 이 목걸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엘레노아는 한 손에 제스가 건넨 목걸이를 쥐고 다른 손을 품에 넣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똑같은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얇은 쇠사슬 줄과 걸려있는 목걸이에는 파랗고 작은 구슬이 덮개 안에 들어 있었는데, 개중 제스의 것은 깜박거리면서 붉은빛을 점멸하고 있었다. 추억이 담긴 눈으로 그 목걸이를 바라보며 엘레노아가 말했다.

“결속의 목걸이. 지니고 있는 자 중 한 명이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 오면 붉게 빛나면서 경고하는 마도구죠.”

“예. 저도 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목걸이가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갈수록 붉은빛이 더 빠르게 깜박이더군요. 그래서 성녀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목걸이를 꾹 쥐었다. 단단한 감촉이 손바닥안에서 그 질감과 촉감을 여실히 보내어왔다. 몇 번이나 쥐었는지 모를 감각을 느끼며 엘레노아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일른 오라버니가 어딨는지는 모르시나요?”

마찬가지로 무거운 표정이 된 제스가 입을 열었다.

“사실 비슷한 인상착의를 한 기사를 보았다는 목격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뜬 엘레노아가 다급히 물었다.

“거기가 어디죠?”

“제국 북서부 아발손 지방의 콜레호른 호수입니다.”

아발손 지방? 엘레노아가 아발손이라는 지명이 붙은 지방을 머릿속의 지도에서 찾아보고 있을 때 제스가 말을 이었다.

“5개월 전 호수 인근의 숲에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주민들이 가보니 다 부서진 갑옷과 상처를 입은 기사가 구덩이 속에 누워있었다고 합니다. 정황상, 그리고 외모와 갖추고 있던 무장의 생김새를 봤을 때 하일른 경이 확실했습니다. 주민들은 치료를 도와주고 정신을 찾게 도와줬다고 합니다.”

“그 마을이 어딘가요, 지금 당장이라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네?”

주먹을 꾹 쥔 제스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호수에서 기어 나온 수천의 언데드가 마을을 덮쳤다고 합니다. 밤중이었고 누구도 호수 속에서 그런 것들이 튀어나올 줄은 몰라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군요.”

“······콜레보른 호수라면 짐작가는 일이 하나 있긴 하지만. 설마 지금 이 시대까지?”

이제까지 알지도 못했던 하일른의 생사와 한 마을의 멸망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음에도 엘레노아는 생각의 고리를 끊지 않았다.

그녀는 교회가 기록한 오래된 역사서에서 등장하는 굵직한 사건들을 몇 개 알고 있었고, 그중 가장 최근의 사건 하나를 떠올렸다. 그녀가 직접 보지도, 볼 수도 없는 옛날의 일을 기록한 것이지만 전해지는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모든 마법사는 정신병자가 될 수 있다 라는 말은 그리 놀라운 말은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어떤 마법사, 마녀는 그 놀랍지도 않고 캐캐묵은 고사처럼 느껴지는 그 격언을 직접 실천함으로써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기도 한다.

400년 전의 한 마법사가 그랬다. 어느날 마법의 비의를 깨우쳤다고 생각한 그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분연히 자신의 동굴, 연구소, 혹은 오두막을 뛰쳐나왔다.

셋 중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일주일 만에 4개의 영지를 모두 거꾸러뜨리고 지배했다는 것에 있다.

스스로를 죽음을 정복하겠다고 죽음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인 마법사는 모든 지성체들을 자신과 같은 언데드로 만들고 싶어했다.

당시 왕국들이 보낸 기사단 여섯과 각 교단의 성기사와 사제들이 참전했다. 역대 최대 규모로 모인 성전 군단이었고 성전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죽음의 왕은 패퇴했지만 시체를 찾지는 못했다. 역사는 그렇게 기록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왔군요. 그 넓고 광대한 호수 속에서 힘을 기르며.”

엘레노아는 바닥에 놓여 있는 장검과 방패를 들어 제스에게 건넸다. 무릎을 세우고 일어선 제스가 검을 허리춤의 칼집에 넣고 방패는 등에 걸었다.

엘레노아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개는 여전히 자욱했지만 차츰 걷히고 있었다. 해가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들로 가득한 숲속이라도 알아차리기 쉬울 만큼 빛의 명도가 강해지고 있었다. 숲의 어둠은 흙바닥으로, 나뭇잎과 나뭇가지, 아름드리 나무의 기둥 뒤로 숨어들었다.

안개가 걷히면서 흙바닥 아래 죽어 쓰러진 성기사들의 시체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신성력과 칼날의 번뜩임만으로는 다 밝힐 수 없었던 그들의 시체는 햇빛 아래 서늘하게 빛났다.

시체들을 일별한 엘레노아가 제스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야기는 들은 게 없나요?”

“있습니다. 이게 가장 안 좋은 이야기죠.”

“무섭군요. 말해줘요. 얼른 듣고 잊어버리게.”

엘레노아가 너스레를 떨었지만 목소리에 장난기는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호수의 수면이 조금이지만 낮아졌고 커다란 성이 둥둥 날며 산맥을 넘어가는걸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껏해야 둘에서 셋 정도이고 시간대도 늦은 밤이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만. 호수 수면이 낮아진 건 사실이라고 합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두어야겠군요.”

엘레노아가 걸음을 옮겼다. 제스가 뒤에 따라붙었다. 안개에 서려있던 피 냄새가 차츰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또 다른 추격대의 존재를 계속 의식하며 뒤를 살피던 제스가 말했다.

“혹시 목적지가 따로 있으십니까? 없으시다면 제게 의견이 있습니다.”

“가고자 하는 곳이 있긴 하지만 당신 의견을 먼저 들어보고 싶군요. 말해봐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제스는 품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제국 전도다. 엘레노아가 그 지도를 보며 말했다.

“지도군요. 어디서 구한 거죠? 제국에서 엄밀하게 관리하는 물건일 텐데.”

“도움을 받았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거래는 확실하게 챙기는 사람이었죠. 넘어가서, 우리가 있는 곳은 여깁니다.”

지도에는 작은 그림과 깨알같이 써져 있는 글씨가 지명을 표시하고 있었다.

제스의 손가락이 그런 지도 한 자락을 가리켰다. 제국의 중앙에서 조금 아래, 그리고 오른쪽으로 치우쳐진 곳이다. 나무와 함께 나브락 군락지라는 글씨가 보였다.

“여기서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페르거 평원과 일바네스 강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강은 여기 아래, 대도시이자 주도인 브라실트로 이어져 있지요. 주인은 제이비르라는 이름의 백작이고, 제국의 변경에 위치해 있지만 회색 협곡과 아래 위치한 바다 때문에 변경백으로서의 위치는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왜냐면······”

“협곡을 통과하기에는 들일 수 있는 군의 병력이 많지 않고 바다는 사시사철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해역이기 때문이지요. 저도 잘 알고 있는 귀족의 도시입니다. 정계 진출을 위해서 대교회에도 여러 번 후원했더군요. 여기로 가자는 건가요?”

“예. 우리는 이곳으로 가야 합니다.”

“왜지요?”

“저한테 이 지도를 건네준 사람은 대단한 소식통이라고 자부하더군요. 믿건 안 믿건 마음대로 생각하라지만 그 브라실트에 용살자가 나타났다고 제게 말해줬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저흰 그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를 아나요?”

제스는 자랑스런 얼굴이 되더니 가슴을 폈다.

“물론이지요, 성녀님. 들으신 적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작년 겨울에 저와 하일른 경이 쫓던 흑마법사를 같이 찾아준 사람이 바로 그 용살자였습니다. 게다가 그 흑마법사는 무려 악마를 부활시키려고 했던 극악무도한 놈이었는데······.”

한도 없이 길어질 듯하는 그의 말에 엘레노아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리고 저도 그 사람을 압니다. 이전에 만나본 적도 있고요.”

“예? 언제 말입니까?”

“그 사람이 용살자라는 이명을 얻는 순간이었지요.”

엘레노아는 기억을 반추했다. 쉽사리 잊기 어려운 외모라 떠올리는데 어렵지 않았다.

보라색 눈동자를 중심으로 한 혼란의 소용돌이가 치는 광경을 그녀는 잊지 못했다. 신의 말씀과 의지를 전하며 떠돌던 그녀조차도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의견을 물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저도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 했었으니.”

그녀의 말에 제스가 물었다.

“어디 계신지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아니오. 하지만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의 물음에 엘레노아는 위를 가리켰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위로 차츰 햇살이 번지고 있었다.

***

날이 밝았고 러셀과 그 일행들은 무장한 병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괜찮은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그들은 여관을 반원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그 병사들 무리에서 나온 것은 길쭉한 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엘프였다. 그는 양쪽 귀 끄트머리가 잘려있었다. 인간들은 잘 알지 못하는 엘프의 범죄자 처벌법 중 하나다.

그는 뭉툭 귀 엘프, 데피너스 돌로렌이었다. 분명 엘프의 외모에 어울리는 밝은 피부와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훤히 드러나 있는 귀는 엘프의 보편적인 상식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었다.

데피너스가 자신의 귀를 어떻게 생각하는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누구도 묻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덮지 않았다. 그 귀를 그리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여관 정문을 향해 소리쳤다.

“브라실트 시의 공공 재산을 파괴하고 시민들을 해쳤으며 로셀소 도련님을 감금한 자들은 앞으로 나오라!”

데피너스는 가벼운 경갑옷과 길쭉한 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가 지팡이로 바닥을 쿵 두드리자 우르릉 소리를 내며 여관이 흔들렸다.

병사들은 간단한 동작만으로 건물 하나를 흔들 수 있는 마법사가 자신의 편이라는 것에 대단히 안심한 눈치였다.

콰앙!

그때 흔들리는 여관의 정문을 부수며 뭔가가 날아들었다. 데피너스는 귀가 잘려나갔을 뿐 요정의 감각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고 그렇기에 자신에게 날아오는 것이 무엇인지 윤곽을 훑을 수 있었다.

언뜻 하얀 원반처럼 보인 그것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도끼였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데피너스는 곧장 온힘을 끌어모아 지팡이를 위로 세웠다.

늙은 빙하가 쪼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데피너스가 뒤로 튕겨 나갔다. 뒤로 날아간 그를 병사들이 어어 거리면서 받아내려다가 한꺼번에 넘어졌다.

방어막에 가로막혀 위로 날아올랐던 도끼를 누군가가 잡아챘다.

코피를 줄줄 쏟고 있는 데피너스를 부축하거나 밀려서 쓰러진 병사들, 창을 든 병사들이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의 머리가 위치할 곳에 가슴이 있는 그는 커다란 몸과 균형 잡힌 몸매를 지닌 남자였다. 검은 셔츠와 바지, 부츠를 입은 그는 이빨 사이를 이쑤시개로 쑤시며 말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댔다. 어디서 온 뭐라고?”

“네, 네놈! 네 놈이 그놈이렷다! 감히 도시의 공공기물을 함부로 부수고 시민들을 죽인-으허억!”

뒷말은 기괴한 신음으로 대체되었다. 어느새 성큼 걸어온 남자가 도끼를 거꾸로 쥐어 자루 끝 부분으로 데피너스의 멱살 부분을 걸쳐 올렸기 때문이었다.

발이 바닥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버둥거리게 되자 뭉툭한 귀를 가진 엘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거기서 더 하얘질 수도 있군. 이름이 뭐라고?”

러셀이 씩 웃으며 얼굴을 들이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