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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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추장스러운 사제복의 밑단은 이미 잘라버린 지 오래다. 엘레노아 루네스는 매끈한 허벅지를 그대로 드러내며 숲을 달리고 있었다. 그 속도는 놀랄 만큼 빨랐다. 엘프들이 숲에서 뛰어다니는 것과 비견 될 만했다. 그러나 그녀의 뒤를 쫒는 성기사들도 빨랐다.
쉬아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엘레노아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앞으로 몸을 던졌다. 그 아래는 비탈길이었다. 허공에 몸을 던지면서 회전을 주었기에 엘레노아는 자신의 등을 노리고 날아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튼튼한 줄이 깃대에 묶여있는 석궁용 화살이었다.
화살촉은 뾰족했지만 박히는 순간 촉이 네 갈래로 갈라져 살갖을 고정 시키는 종류였다. 짐승을 잡는 사냥용 화살로 쓰이는 것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붉고 도톰한 입술을 깨물며 충격에 대비한 직후, 격통이 등을 강타했다. 엘레노아는 데굴데굴 굴렀다.
비탈길의 끝에서 엘레노아는 어느 개울 물에 떨어졌다. 졸졸 흐르는 개울물을 들으며 그녀는 애써 머리를 들었다.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저기다! 아래로 떨어졌다!”
“내려가라! 다시 잡아야 해!”
성력을 일으켜 온몸에 두른 엘레노아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추격의 연속. 보름달도 비치지 않는 밤 속의 숲이 하얀 땀을 흘렸다. 안개였다.
짙은 안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옅지도 않았다. 베일처럼 드리워진 안개 속으로 뛰어들면서도 엘레노아는 전혀 길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도가 없었지만 대신 나침반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직감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직감대로 몸을 움직였다.
“안개입니다! 잘 보이지 않습니다!”
“흩어져라! 멀리 가지 못했다! 너, 너, 너는 저쪽으로, 너, 너, 그리고 넌 저곳으로 가라! 나머지는 날 따라와!”
안개를 타고 들려오는 추격자들의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어느때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리는 잘 반사되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음에도 엘레노아는 멈추지 않았다. 나무와 나무의 연속, 끝없는 안개의 포말.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나무들 때문에 그녀는 마치 제자리에서 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안개 속에서 갑자기 갑옷을 입은 성기사가 나타났다. 엘레노아는 어깨 뒤로 손을 돌렸다. 단단하게 잡히는 감촉이 느껴졌고 그대로 휘둘렀다.
“여기 있-컥!”
얼굴에 철퇴를 얻어맞은 기사가 피를 뿌리며 뒤로 넘어갔다. 엘레노아는 성녀이기 이전에 기사 훈련을 받기도 했었다. 또 대륙 각지를 떠돌며 사제가 없는 마을을 전전하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녀만한 미인을 가만히 두는 곳은 어디에도 없고 그렇기에 엘레노아는 호신을 위한 무력을 충분히 쌓아두었다.
쓰러진 성기사를 뒤로 하고 그녀는 계속 달렸다. 하지만 추격자 하나를 상대하는 동안 낸 소리 때문에 다른 성기사들이 위치를 짐작하고 말았다. 곧 그녀는 자신을 둥그렇게 포위한 성기사들 때문에 멈춰서고 말았다.
잠시 간 서로가 호흡을 고르는 소리 말고는 정적이 흘렀다. 갑옷을 입고 뛰었기 때문에 시뻘게진 얼굴과 비오듯이 흘리는 땀으로 범벅이 된 성기사들이 씨근거리며 엘레노아를 노려보았다.
개중 수염이 덮수룩하게 자라고 늘어진 볼살을 가진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다른 기사들과 달리 그는 왼쪽 어깨에 붉은 견장을 달고 있었다.
“후욱, 이만, 돌아가시지요, 성녀님, 후욱.”
“헉, 어디로 돌아가란, 말이지요? 교회의 심처로? 아니면 비처? 그도 아니면, 제 방인가요?”
“당연히 기도실이지요, 성녀님. 성녀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신도들이 많습니다.”
엘레노아가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든 죽음을 유예시키고 싶어하는 늙은이들이겠지요. 신도는 무슨. 그들이 내놓는 재물이 그렇게도 좋습니까?”
“말씀이 거치십니다, 성녀님.”
“더 거칠어질 테니 귓구멍 씻어놓고 잘 들어요, 이보트. 이딴 게 성녀라면 난 후보에도 들지 않았어요. 매일 같이 어린 소년, 소녀를 방에 들이고 육욕에 찌든 사제들의 수발을 들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죠. 당신의 비역질만큼이나 역겨운 자들을 위해 내가 왜?”
그녀의 날카로운 말에 이보트의 입가가 실룩였다. 공공연히 드러낸 사실이 아니건만 엘레노아는 이미 대교회의 치부들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당신들이 신성력을 잃은 건 내 탓이 아닙니다. 목청이 터져라 회개하라고 외치고 다니면서 정작 스스로를 볼 줄 모르는 당신들 탓이지요. 먼저 그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주께서는 앞으로도 당신의 빛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더 이상 못 들어주겠군요, 성녀님. 나머지는 대교회에서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보트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명색이 성기사들이지만 그들 중 신성력을 쓸 줄 아는 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기사로서의 체력 단련과 검술을 연마하긴 했지만 마음에는 한 톨의 자비심도 없다.
침을 꿀꺽 삼키며 다가오는 성기사들의 눈에 가득한 것은 추잡한 욕망의 덩어리들이다. 그들의 앞에서 가녀리게 서 있는 성녀는 흙먼지와 땀으로도 감추기 어려운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금발은 금을 녹여 실로 짜낸 듯하고 눈동자는 사파이어를 박은 듯 푸르게 반짝거린다. 나뭇가지에 베이고 뜯겨진 사제복은 물에 젖기까지 해 엘레노아의 육감적인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들개같이 눈을 번쩍거리며 다가오는 기사들을 향한 엘레노아의 눈이 먼 곳을 향했다.
‘하일른 오빠.’
누구보다 신실했으며 여동생인 자신을 향해 참 많은 것을 배려해준 그가 지금만큼 그리웠던 적이 없었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 한지 벌써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실종 상태다.
“성녀님, 반항은 하지 마시고······ 크악!”
한 손에는 검집에 씌운 검 손잡이를 든 채 엘레노아의 뒤로 움직여 어깨를 잡으려던 기사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언제 휘두른 것인지 그녀의 철퇴가 기사의 흉갑 부분을 강타한 것이다.
흉갑이 크게 우그러진 성기사는 바닥에서 몇번 파들거리다가 축 늘어지며 기절했다. 갑옷을 뚫고 들어간 충격 탓이다.
여러 개의 철판이 서로 맞물리는 구조로 제작되어 있는 철퇴의 머리 부분이 눈부신 황금빛 성력에 횝싸여 빛나기 시작했다.
푸른 눈동자에서 어느새 노란 안광을 빛내기 시작한 엘레노아가 말했다.
“덤벼, 개자식들아.”
고함과 함께 남은 성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합격술도 연마하지 않은 자들이 무작정 달려드는 것은 오히려 비효율적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공격 궤도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칼집이 부딪힌 성기사 둘이 성난 어조를 내뱉었다.
“젠장, 비켜!”
“너나 비켜!”
쾅, 쾅!
두 성기사의 머리통에 사이좋게 철퇴를 날린 엘레노아가 앞으로 몸을 굴렸다. 뒤늦게 떨어진 검이 애꿎은 바닥을 후려쳤다. 성기사들은 검에 검집을 씌운 그대로 싸워야 했다.
“주교님의 명이다! 절대로 죽여서는 안된다!”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이보트가 그리 외치며 다른 자들과 똑같이 검을 뽑지 않은 그대로 휘둘렀다. 검처럼 살상력이 높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 무게는 웬만한 둔기 이상이고 바위를 부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개에서 한 명, 기습으로 한 명 처리하긴 했지만 아직 여섯이 남아 있었다. 성기사로서의 훈련량은 상상을 초월하고 그들은 신성력을 통해 체력과 근력을 상승시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쉽사리 엘레노아를 무릎 꿇리지 못했다.
“빛이 이 자리에 임하니, 직시하라!”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엘레노아의 왼손에서 엄청난 광량이 터져 나왔다. 잠깐이지만 태양이 지상에 내려온 듯한 밀도의 빛이 번쩍이자 안개와 어둠이 사라지고 사위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눈을 감아라! 뜨면 안 된다!”
이보트의 다급한 외침에 성기사들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땅으로 몸을 던졌다. 몇몇 성기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으아악! 누, 눈이!”
“안 보여! 안 보여!”
시력을 잃은 성기사 둘이 허우적거리다가 바닥에 넘어졌다. 여전히 왼손에서 엄청난 빛을 쏘아내던 엘레노아가 철퇴를 휘둘러 침묵시켰다.
그때 이보트가 개입했다. 등에 짊어지고 있던 방패를 앞세운 채 돌진한 것이다. 방패에 얻어맞은 엘레노아가 뒤로 넘어지면서 섬광이 꺼졌다.
숲 한켠을 환하게 만들었던 빛이 갑작스레 사라지자 다시 주위는 깜깜해졌다. 이전에 너무 밝은 빛을 맞닥뜨렸기 때문인지 숲의 어둠은 아까보다 짙어진 듯했다.
꾹 눈을 감고 있던 이보트는 빛이 사라진 것을 알자 입속으로 약속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의 뱃속이 뜨거워지더니 미증유의 힘이 혈관을 타고 퍼지기 시작했다.
“크으악!”
고통 어린 신음을 고함으로 대신하며 이보트가 칼집을 휘둘렀다. 넘어진 자세에서 겨우 몸을 굴려 칼집을 피한 엘레노아가 얼굴을 굳혔다.
“이 느낌은······ 당신! 마력을 몸에 품었습니까?”
“큭큭. 허락하에 쓸 수 있는 힘이라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알았을 뿐이지. 마력은 많은 걸 요구하지 않아. 신실함도, 자비심도, 욕망의 절제도.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가지라고 하지. 난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이보트가 중얼거렸다. 이미 엘레노아의 말에 대답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되되는 것에 가까웠다.
피맛을 느낀 엘레노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교회의 병폐와 타락이 진행되어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한낱 성기사 단장마저 타락해 흑마력을 몸에 품었다면 이미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은 넘었다고 봐야 했다.
이보트가 먼저 흑마력을 풀풀 풍기자 다른 성기사들도 힘을 숨기지 않았다. 이보트를 포함한 다섯의 성기사가 사악한 기운을 흘리며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여기엔 태양도 별빛도 비치지 않아. 그 같잖은 신성력은 더 이상 일으키기 어려울 것이다. 순순히 잡혀라. 네년의 목숨은 가치가 떨어지는 그날 창부보다도 못한 처지가 될 것-커헉!”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내뱉던 이보트의 가슴팍에 갑자기 칼자루가 돋아났다. 아니 칼이 날아와 그의 가슴팍에 박혀든 것이었다.
이보트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있는 칼 손잡이를 두 손으로 더듬었다. 그러다 뒤로 넘어가며 쓰러졌다. 등을 뚫은 검이 바닥에 밀리며 칼자루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루-바타르여! 사악한 괴물들을 무찌를 힘을!”
숲의 어둠 속에서 찬란한 광휘와 함께 한 사내가 뛰쳐나왔다. 갈색 머리카락에 부서진 갑옷만 입고 있는 호리호리한 몸의 남자는 한손에 사각형의 방패를 들고 돌진했다.
그 방패에서 번쩍이며 하얀 문장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쏘아지며 타락한 성기사들을 후려쳤다.
빛의 화살처럼 날아드는 문장들을 검집으로 쳐내며 성기사들이 물러섰다. 몇몇은 자신의 몸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며 휘청거리다가 넘어지거나 엎어졌다.
엘레노아는 뭔지는 몰라도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기도문을 외우자 피부 위로 옅은 황금빛 문자열들이 깨어나더니 물결을 치듯 일렁였다.
그 일렁이는 문자열들은 곧 발끝과 손끝에서 위로 올라가더니 엘레노아가 쥐고 있는 철퇴를 물들였다. 철퇴의 위로 빛의 형상이 그려지며 거대한 빛의 망치가 나타났다.
엘레노아는 그것을 쥐고 우왕좌왕하는 성기사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날아드는 검집을 쳐내고 흉갑을 강타하자 공성추에 맞은 것마냥 움푹 패인 채 나무 세 그루를 무너뜨리며 날아간다.
위력과는 별개로 빛으로 이뤄져 있기에 무게가 없는 망치는 그녀의 손에서 자유롭게 움직였다. 바닥에 부딪쳐 궤도가 틀어지거나 힘이 분산될 일도 없기에 허리를 옆으로 튼다거나 무릎을 굽힐 필요 없이 엘레노아는 망치를 휘둘렀다.
곧 피떡이 된 성기사들의 신음 소리만이 안개처럼 낮게 흘렀다.
“죽이지 않으십니까?”
“사지를 분질렀으니 어차피 이 숲에서 살아나가기도 힘들 거예요.”
신성력을 꺼트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카락의 사내를 보던 엘레노아는 표정을 찡그렸다.
“누구죠?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긴 한데······.”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성녀님.”
사내는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제스 체임버라고 합니다. 하일른 경의 종자이자 수습 성기사로서 그분의 곁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