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죽은 자들의 성
“받아야 할 빛이 있다고 하셨소?”
“그래.”
“그게 무슨 빚이오? 그리고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요?”
“지금 그걸 다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없군.”
“예?”
로셀소의 물음은 흔들리는 건물의 소음으로 답을 받았다.
쿠르르르릉.
내려앉은 지반 때문에 발쿠르티스의 한쪽 축대가 무너졌고 그곳을 기점으로 건물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지체 없이 흔들리는 땅과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땅, 뭐라 이름 붙이기 힘든 잡동사니가 바닥에 떨어졌다.
로셀소는 놀란 얼굴로 떨리는 몸을 통제하려 애쓰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걸음을 갓 배운 아기 같은 몸짓이나 겨우 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때 러셀이 그의 팔을 잡고 지탱해 주었다.
“고, 고맙소.”
“됐다. 아샤린, 여기서 나갈 길을 찾을 수 있겠나?”
자신의 왼쪽 어깨에 난 상처를 돌보고 있던 아샤린이 고개를 들었다.
“찾는다기보다는 만들 수 있지.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는 길이 있어.”
“길이 오고 있다고?”
콰앙!
큰 소리와 함께 러셀과 아샤린이 있는 지하 위쪽, 무대가 있던 지상 1층의 한쪽 벽면이 달걀 껍데기처럼 터져나갔다. 흙먼지와 돌조각, 잔해가 물러나자 그 뒤로 네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가장 선두에 있던 자는 뚫고 나온 벽 너머를 보다가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러셀!”
칼리아였다. 그녀의 뒤로 따라오던 사람 중 한 명의 소녀가 탁, 하고 발구름을 하며 뛰어올랐다가 지하에 내려앉았다. 허공에 나풀거리던 하얀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가라앉기까지 기다리던 그녀는 러셀을 보고 미소를 짓다가 누군가를 발견했다.
“카르고니안 맙소사. 설마?”
그 누군가 또한 아엘라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샤린이었다. 아샤린은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와 아엘라를 내려다보았다.
아엘라 또한 아샤린을 올려다보았다. 둘의 키 차이는 거진 15센티미터는 차이가 났기에 아엘라는 약간 뻐근하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샤린은 놀람과 흥분에 젖은 표정으로 아엘라를 보았다. 그러던 중 아샤린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군. 설마, 진실로, 사라진 종족이 이곳에······.”
“용족?”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는 아샤린과 그녀의 뿔, 귀, 꼬리를 통해 용족임을 알아본 아엘라가 입을 열 때 다시 건물이 신음을 토했다.
쿠르르르릉!
“뭔가 대단히 감명받았다는 건 알겠다만, 아샤린. 이러고 있을 시간 없다.”
“······길을 열지. 날 따라오도록.”
몸을 일으킨 아샤린은 착용하고 있던 갑옷을 허공으로 흩어지게 만들더니 보다 가벼운 차림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허공으로 손을 휘젓자 막혀있던 벽이 사라지고 기다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리아와 바이젠, 실리오가 가볍게 지하에 내려서자 아샤린이 앞장서며 통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러셀은 그녀를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일단 나가도록 하지. 생매장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하에 묻히는 건 썩 즐거운 경험이 아니니라.”
“아니, 여기까지 와놓고 바로 나간다고? 왜 들어온 거야?”
“조용히 하고 있어, 멍청아. 뒤에 로셀소 안 보여?”
“어, 그렇네.”
아샤린의 뒤를 아엘라와 칼리아, 바이젠과 실리오를 보낸 러셀은 로셀소를 바라보았다. 로셀소는 기절한 자신의 호위 기사 둘을 끙끙거리며 들거나 깨우려 하고 있었다.
“도, 도와주게나. 왜 아직도 안 깨어나는 것인지-”
“용족의 마법에 당했으니 웬만한 저항력이 없으면 때려도 일어나지 못할 것이오. 내가 짊어지고 가지.”
“드, 들 수 있겠나?”
두 호위 기사는 완전 무장, 그러니까 전신 갑옷을 착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흉갑과 견갑, 완갑과 정강이 보호대를 착용한 만큼 육중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로셀소는 지푸라기를 들어 올리는 듯한 동작으로 두 짐덩이를 어깨에 매는 러셀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들 수 있으니 한 말이지. 빨리 나가시오. 죽기 싫다면.”
“알겠네.”
계속 들려오는 건물이 기울어지는 소리는 귀청을 따갑게 할 정도로 크게 나고 있었다. 로셀소를 앞장 세워 먼저 보낸 러셀이 통로에 들어서자 바로 벽이 막히며 입구가 사라졌다.
하지만 러셀은 그의 뒤편에서 떨어지는 벽과 기둥 잔해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고 걸어나갔다.
***
밤과 새벽의 자리바뀜. 검은 천에 푸른 물이 배어 들어오지만 푸름은 어둠에 잡아먹히지 않고 도리어 어둠을 밀어낸다. 짙은 푸름은 시시각각 연해졌다.
오지 않을 것 같은 아침이 오고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밤이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 그 아래에서 시민들이 고개를 바깥으로 내밀었다. 바깥의 위험이 모두 사라졌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자정을 넘어서까지 이어지던 폭음과 비명은 새벽의 어느 순간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짙게 드리운 어둠과 빛의 부재로 사람들은 섣불리 나가지 않고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30분 전 브라실트에 도착한 렉시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 참사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난리야?”
밝는 밤눈 덕분에 해가 없어도 밝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완전히 박살 난 중앙 거리를 걸었다.
“여긴 경매장으로 향하는 길목인데.”
렉시는 곧 무너진 건물과 틈새 사이에서 죽은 시체들을 발견했다. 처음 그녀가 만난 시체는 똑같은 얼굴을 가진 여섯 구의 시체였다. 쌍둥이들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같은 생김새를 가진 그 시체들은 무언가를 보고 경악한 듯한 얼굴로 죽어 있었다.
그 시체들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것을 안 렉시는 코를 막고 숙였던 허리를 뒤로 젖혔다.
“마약이잖아. 엄청 지독한데.”
발끝으로 그 시체를 뒤집어본 렉시는 그것이 가볍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쪽에 들어가 있어야 할 내용물들, 그러니까 내장이나 피 같은 것이 없었다.
가벼운 시체를 살핀 렉시는 섬뜩한 결론을 얻었다.
“치환 마법의 종류잖아. 육신의 장기를 소모하는 대가로 마력을 얻는······.”
제정신이 아니라면 그런 흑마법은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체들은 생전에 마약을 했다. 마약 중독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떠오르는 생각들로 답을 얻은 렉시는 이 시체들이 살아 있었을 때 무엇을 목적으로 했는지 생각해보았다. 파괴된 거리와 멀쩡하게 남아있는 건물, 상점들을 볼 때 도시에 대한 무차별 폭력은 아니다.
렉시는 길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건물이 원근감을 무시한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경매장, 발쿠르티스였다. 인근에 위치한 경매장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와 귀한 노예만 취급하는 이름난 노예 경매장.
범죄자만 취급하는 다른 중소 도시들의 노예 경매와는 달리 이종족, 아인종 까지 비밀리에 수입하여 팔아먹는 곳은 넓은 제국에서도 이 경매장 밖에 없다.
그렇기에 몇 명의 흑요정들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렉시가 아샤린에게 그들을 빼와 달라고 요청할 수 있던 것이다.
렉시는 빠른 걸음으로 경매장을 향해 나아갔다. 흑요정의 걸음걸이는 인간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보통 사람이 전력을 내서 달리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주파한 렉시는 다른 것들을 발견했다.
이곳은 건물들의 파괴가 조금 더 심했다. 아까 죽어 나자빠져 있던 쌍둥이 시체 여섯 구가 있던 곳은 길의 판석만 조금 패이거나 깨져 있던 것을 제외하면 이곳은 아예 투석기에 실린 탄환이 떨어진 것 같았다.
성한 건물들은 거의 없었고 거의 기둥만 남아 있거나 1층만 건재했다. 또 가장 시체들의 상태가 나빴다. 커다란 양날 도끼를 쥔 채 엎어져 있는 놈은 머리가 부서졌고 검사인 듯한 여자는 목과 상반신이 갈라져 있었다.
그밖에는 수북한 얼음 알갱이가 작은 더미를 이뤘거나 검은 핏물 자국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는 곳이 있었다. 렉시는 그 흔적들에서 높은 수준의 마력과 주문을 느꼈다. 칼잡이인 자신이 소름이 돋을 만큼의 마력을 투사할 줄 아는 마법사가 이곳에 두 명이나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작게 투덜거린 렉시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그녀의 길쭉한 귀가 쫑긋거리며 움직였다.
쿠드드드등······.
렉시는 놀란 눈으로 경매장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 커다란 건물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무게를 버티지 못한 몇몇 기둥이 중간부터 부러져 나가고 벽면이 와르르 무너지며 쏟아졌다.
“어, 안 돼!”
아직 아샤린으로부터 같은 동포들을 구했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경매장이 열리는 날에 마약 중독자들이 습격을 가했다. 또 우연찮게도 그 마약 중독자들은 모두 수준급의 마력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다.
아마 용병이었을 것이다. 기사의 표식을 가지고 있던 자는 한 명도 없었고 시체에서 풍기는 마력의 냄새 또한 투박한 것이었으니.
습격과 경매장, 브라실트라는 도시가 가진 특징과 그 주인에 대한 연결점이 뜻하는 바를 렉시가 바로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대신 렉시는 바닥을 박차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무너지는 건물에 그녀의 친구 아샤린과 다른 흑요정들이 있다면 구해야 했다. 아샤린이 대단한 마법사임과 동시에 용족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저만한 건물이 통째로 짓눌리는데 무사할 수 있을지는······.
뛰어가던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쿠르티스 경매장 바로 옆에 부속물처럼 붙어있는 작은 창고 같은 건물이었다. 곧장 발을 멈춰세운 렉시가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문을 열고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걸어나왔다. 아샤린이었다.
“아샤린!”
“······.”
“아샤린?”
부름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샤린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나, 그녀를 밀어내고 얼굴을 바깥으로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
“아오, 왜 이렇게 빨리 안 나가! 답답해 뒤지는 줄 알았구만!”
“너나 빨리 나가, 멍청아!”
“악! 엉덩이! 엉덩이 차지 마쇼, 누님!”
“그럼 빨리 나가던가!”
곧 작은 창고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밀려 나왔다. 길쭉한 눈매에 얄팍한 얼굴의 남자와 그런 남자와 비슷하지만 눈은 조금 더 크고 콧대는 날렵한 여자, 그리고 검붉은 머리카락에 고풍스런 가죽 옷을 입은 미인과 백발의 소녀였다.
“어? 흑요정이다.”
“그러게. 오랜만에 보는데.”
“아니, 당신들은 누구······.”
아샤린과 같이 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짓던 렉시는 곧 뒤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그림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그 빚이란 게······.”
“나가시오.”
뭔가 말을 하던 삼십 대의 남성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잊을 수 없는 외모와 키를 가진 거구의 남자였다.
어깨에 기절한 사람 둘을 들쳐매고 걸어나오던 러셀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렉시?”
“러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뤄진 재회에 두 사람 또한 멍하면서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
아직 밤이 채 물러가지 못한 들판 위. 바람에 산들거리는 풀과 그 풀을 뜯던 맷토끼들이 입을 우물거렸다.
풀은 그다지 영양가가 있는 음식이라고 말하기 어렵고 그렇기에 초식 동물들은 하루 종일을 먹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그러던 중 맷토끼 몇 마리가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쳐든 즉시 토끼들은 생기를 잃었다.
순식간에 가죽이 말라붙고 눈알이 쪼그라졌다. 초록색의 풀잎들 또한 노랗게 말라붙어가다가 바스라졌다.
징조도 없이 허공에서 나타난 그것은 거대한 성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떠 있었다.
성이란 본래 지상에 건설된다는 상식을 깡그리 깨부수고 있는 그 성은 아래에 거대하고 푸르게 빛나는 마름모꼴의 수정체에 의지한 채 공중에 자리했다.
자세히 보면 그 수정체에서 푸르게 빛나는 것이 레이스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백, 아니 수천이라 해도 좋을 숫자의 영체 형 언데드들이 성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렇게 언데드들과 마법의 힘으로 공중에 떠 있는 성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