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91화 (192/225)

191화 교차로 (13)

“저곳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도록 하시오. 똑바로 가면 통로가 나오고 그 다음은 출구가 있을 것이오.”

데르번이 입을 열었을 때 러셀이 먼저 말했다.

“더 이상의 습격자는 없소. 바깥은 깨끗하고 탁 트여있소. 돌아가서 그대들의 주인을 데리고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

방금까지 했던 생각을 부정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데르번은 러셀이 어떻게 그런 결론에 다다른 것인지 묻고 싶었다.

사실 아까부터 그러했다. 러셀은 이 건물의 내부 구조와 지리를 완전히 통달한 것처럼 거침없이 그들을 이끌었다. 사위가 어둠에 잠기고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칼날이 번뜩이며 날아오는 가운데서도 그는 흔들림 없이 칼날을 부수고 길을 찾아냈다.

무수한 질문이 떠돌았지만 데르번이 물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

“당신은?”

“난 아직 찾아야 할 사람이 있소. 먼저 나가시오.”

기사는 러셀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 덩치 크고 하얀 도끼를 들고 있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신장은 190센티미터를 약간 넘는다. 오른손잡이지만 왼손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 데르번은 그것을 왼손으로 도끼를 바꿔 쥔 러셀이 달려든 세 명의 습격자들을 간단하게 토막쳤을 때 실감했다.

상당한 신장이지만 너무 이르게 자란 키 때문에 휘청거리고 마른 몸을 가진 여타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육중한 무게와 그에 뒤지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을 지녔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합일은 싸움에 파괴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얼굴에 솜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성인이 분명한데 깊고 우묵 패인 눈가나 눈빛은 여느 애송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종합적으로 종잡을 수 없는 남자라는 것이 기사 데르번의 평이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길을 틔워준 것 또한 러셀이었다.

“누굴 찾는다는 거요?”

러셀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제이비르 백작의 아들. 로셀소. 여기 있는 걸로 아는데.”

데르번은 놀란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소? 하긴, 그 백작의 아들이니까 당연히 올 수 있지만······ 하지만 당신도 봤다시피 귀족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비밀리에 이곳으로 왔소. 아인종은 약간 까다로우니까. 데피너스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런 경매장은 짓지도 못했겠지.”

“데피너스? 그게 누구지?”

인간만 거래한다면 브라실트의 노예 경매장 발쿠르티스가 이토록 커다란 부지와 건물, 그리고 재화를 축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재화의 이면에는 아인종들을 구속하고 있는 사슬이 있다.

대개의 경우 엘프와 드워프는 자신들의 동족을 인간이 노예로 부리게끔 하는 짓을 용납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대개의 경우다. 인간이 모두 똑같지 않은 것처럼 엘프와 아인종들 또한 자신만의 생각과 행복의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엘프 데피너스가 바로 그런 엘프 중 하나였다. 자신의 동족들에 대해 지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그가 아니었다면 노예 경매에 아인종을 추가시키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일련의 지식들을 대화를 통해 알아내면서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줘서 고맙군. 이제 가시오.”

기사는 질문을 더 하려 했다. 당신이 칼리스덴에서 괴물들의 준동을 막아내고 북서부의 외딴 마을에서 고대의 악마를 물리쳤으며 에란디스에서 피의 환란을 이겨낸 그 남자가 맞느냐고.

다음에 질문할 기회가 있을 것이었다. 러셀은 질문들을 받아줄 시간도 남겨두지 않은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 출렁이는 코트 자락과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뿌리는 도끼만이 걸음의 증거였다.

출구가 내보이는 하얀 빛을 향해 자신의 주인과 다른 무리를 통솔하는 입장이 된 데르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다리를 움직였다.

어둠이 바로 눈앞에서 일렁이지만 러셀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둠은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그 시도에서 느껴지는 장난기에 가까운 마력의 움직임을 느낀 러셀이 걸음을 멈췄다.

“거기 있는 걸 안다. 나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메아리를 던진 것 같았다. 순간 공간이 뒤바뀌었다. 러셀은 자신이 통째로 어딘가로 이동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빛이 타올랐다. 아니, 그것은 허공에 줄지어 선 불꽃들의 군무였다.

러셀은 자신의 뒤에서부터 나타난 불꽃들이 커다란 원을 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주위는 이제 복도와 양옆으로 줄지어진 방이 아니었다. 그곳은 무수한 계단과 앉을 수 있도록 단이 평평한 장소였다. 계단은 반원형으로 둥글게 호선을 그리며 지어져 있었고, 그 반원의 중심에는 커다란 무대가 있었다. 러셀은 그곳이 노예를 소개하고 값을 흥정하는 무대임을 알아챘다.

그 무대 위에는 의자에 앉아있는 여인이 있었다. 회색빛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에 구릿빛의 피부, 뾰족한 귀에 빨간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그 여자는 기다랗고 얇은 사슬을 손에 쥐고 있었고, 그 사슬의 끝은 무대 뒤편의 어둠으로 향하고 있었다. 러셀은 그 어둠을 꿰뚫어볼 수 없다는 것에 놀라진 않았다.

“여기가 어딘 줄 아는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답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러셀이 말했다.

“경매장이지.”

“그렇다. 인간이 생명에게 값을 매기고 사는 자리지. 신기하지 않아?”

“뭐가?”

“그런 발상 자체가. 난 신기하다고 생각해. 열등함이 우월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경멸하는 건 신기할 것도 없는 일이지. 우자가 현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터벅, 터벅하고 러셀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넓고 커다란 공간이었기에 소리는 메아리를 치며 울렸다. 그 메아리를 배경으로 여인은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또 그렇기에 우자는 현자를 자신이 있는 자리까지 끌어내리고 싶어하지. 이곳은 바로 그런 욕망이 실현되는 곳이다. 상대방을 끌어내리고 날 높이기 위한 가장 저열하고 천박한 시도.”

“인간을 경멸하나?”

“아니. 신기하다고 말했잖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해서 직접 경험해볼 정도로.”

“지젤이라는 마녀를 아나?”

“아니.”

두 번의 부정. 거짓은 없다. 러셀은 이번의 습격과 저 여인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경매장 내부의 어둠은 기이할 정도로 짙었다. 지젤이 약물과 마법을 통해 정신을 속박하고 구속하고 억압한 꼭두각시 인형들이 경매장에 모인 황자파의 귀족들과 황녀파의 귀족들 모두를 말살하기 위해선 이런 어둠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 증거로 러셀은 발쿠르티스 내부의 복잡한 구조와 빛을 빨아들이는 인위적인 어둠 속에서 길과 목표물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습격자들을 손쉽게 죽일 수 있었다.

여기서 손쉽게라는 기준은 러셀의 기준이다. 데르번이나 다른 기사들이 러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어처구니 없어 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칼날을 피해내는 데에는 날카로운 감각과 많은 마력, 그리고 높은 운용이 필요한 일이다.

여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깥이 시끄럽던데. 칼을 든 놈들도 많이 들어오더군. 이 경매장에 온 귀족들을 죽이려는 자들인가?”

“정치를 잘 아는군.”

“그럼. 내가 얼마나 너희들 속에서 살아왔는데.”

“그런데 왜 그들을 방해했지? 인간을 싫어하는 게 아닌가?”

여인이 일어서며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노예 생활이라는 것이 좀 궁금했을 뿐이야. 내가 살던 곳에서는 없던 법이라. 직접 해보니까 할만한 짓은 못되더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그녀가 질문한 대상은 러셀이 아니었다. 여인이 사슬을 획 잡아당기자 장막 뒤에 있던 것이 끌려 나왔다. 러셀은 그 남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남쪽 지방의 굵고 진한 이목구비에 짙은 눈썹을 가진 노예 상인이었다.

노예 상인, 보르세오는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애원했다.

“제,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위대한 분이시어. 저는 정말, 정말 몰랐습니다······.”

“네가 알 정도면 내가 마법을 허투로 배웠다는 뜻이겠지. 알아보지 못했다는 데에는 네 죄가 없어. 네 죄는 다른 곳에 있지.”

딱, 하고 여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남자의 전신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노예 상인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의 목에 잠겨있는 구속구와 사슬은 손쉽게 움직임을 제약했다.

불꽃은 한번에 노예 상인을 태우지 않았다. 그 과정은 느릿했다. 피부가 녹고 근육이 눌어붙으며 그 안을 파헤쳐지는 과정이 천천히 진행됐다.

불꽃의 수의를 입은 노예 상인이 힘을 잃고 무릎을 꿇을 때까지 여인의 얼굴은 무표정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러셀에게 향했다.

“네가 어떻게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다른 자들을 바깥으로 보낼 수 있는지 궁금하군.”

“좋은 눈과 감각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난 그 누구나를 150년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내 이름은 아샤린. 너는?”

“러셀이다.”

이윽고 계단을 다 내려온 러셀은 무대 앞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무대는 계단과 관중 및 구매자들이 앉아있는 곳보다 약간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고 그렇기에 둘 사이의 거리는 못해도 6, 7미터는 되었다.

러셀에게는 지척인 거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샤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내 마법을 다 헤치고 내가 있는 곳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는지 알아내야겠어. 이건 내 자존심의 문제야.”

“다른 귀족들은 어디에 있지?”

“날 이기면 말해주지. 한번은 내 마법을 벗어나서 다른 사람들을 풀어줄 수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야.”

호승심을 드러내는 아샤린을 보며 러셀은 한숨을 푹 쉬는 척 하다가 기습적으로 마지막 서리를 날렸다. 빛살처럼 날아오는 도끼를 보며 아샤린이 미소를 지었다.

“인상적이야.”

손안에서 길쭉한 화염의 창을 뽑아든 아샤린은 그것을 그대로 바닥에 던지듯 내리꽂았다.

푸화확!

바닥을 타고 들불처럼 번져나간 불꽃은 그대로 장벽이 되어 마지막 서리를 막아 세웠다. 불꽃과 얼음이 충돌했다.

수증기가 거세게 폭발했다.

허공에서 갑자기 구멍이 뚫리며 거대한 구름을 토해내는 듯한 광경이었다. 산더미처럼 치솟은 뜨거운 수증기 덩어리가 삽시간에 주위를 가득 매우며 공간을 잠식했다.

안개처럼 퍼진 수증기는 넓은 경매장의 가장자리를 장식한 타오르는 불꽃들의 원 덕분에 주홍빛으로 빛나며 붉게 물들었다.

파지지지직-!

붉게 물든 수증기를 거침없이 찢어발기며 내달린 것은 새파란 전격이었다. 무수한 가지를 뻗으며 거목 같은 번개가 수증기를 단번에 흐트러트리며 건너편의 아샤린을 덮쳤다.

콰아앙!

전격은 아샤린의 바로 앞에서 깨진 거울 조각처럼 빛을 산란시키는 역장을 뚫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허공을 꿈틀거리다가 사라지는 지렁이 같은 푸른 전격을 보던 아샤린이 러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속성을 쓰는군. 전해 들은 대로야. 어디서 배웠지?”

아까의 장난스런 어조는 온데간데 없다. 한결 신중해진 태도와 차갑게 가라앉은 채 언제든지 쏘아질 준비를 마친 마력이 그녀의 발밑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방금의 공방에서 러셀이 만만찮은 전사이자 마법사임을 인지한 것이다.

바닥에 떨어져 박혀있던 마지막 서리를 한손으로 불러 당겨 잡은 러셀이 담담하게 말했다.

“너와 같은 도마뱀들한테 배웠지.”

“아주 모욕적인 표현인걸.”

피식 웃은 아샤린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겉을 위장하고 있던 주문이 풀리며 그녀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갈색의 피부는 희게 변하고 요정 같이 뾰족했던 귀는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형상으로 되돌아간다. 등뼈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곳에는 살랑거리는 청색의 도마뱀 꼬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머리에 돋아나 있는 뿔을 보인 그녀의 모습은 인간과 용을 반반섞은 듯한 모습이었다. 드레코니안. 파충류보다는 확연히 인간의 모습을 많이 드러내고 있는 용족이다.

“난 다른 용족들처럼 추위를 많이 안 타. 오히려 내 고향은 설원에 가깝다고.”

푸념하듯이 내뱉은 그때, 아샤린의 손끝에서 불씨가 하나 튀어올랐다.

화르르르르륵!

이윽고 방대한 마력을 주입받은 불씨가 폭발하듯이 커지며 맹렬한 불꽃으로 화하더니 몸을 부풀리며 거대한 화염의 구체가 되었다.

집채만한 화염구를 한 손가락 위로 들어올린 아샤린이 희게 웃으며 물었다.

“순순히 잡혀줄래?”

“무슨 소리를.”

피식 웃은 러셀이 마지막 서리를 고쳐잡자 아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 치유 마법이 숯덩이가 된 것도 되살려낼 수 있는지 보자고. 한 번쯤 시험해보고 싶었어.”

그리고 거대한 화염구가 무지무지한 속도로 쏘아졌다. 그 크기와 담고 있는 마력의 양을 보면 믿기지 않는 빠름이지만 러셀은 피하지 않았다. 애초에 피할 곳이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밤하늘을 뚫고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불타버린 하늘을 다시 환하게 비추는 불기둥은 도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굵고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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