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90화 (191/225)

190화 교차로 (12)

***

칼날이 날아들었다. 섬뜩한 일격이었다. 자칫하면 왼쪽 볼이 날아가 잇몸과 이빨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조금만 더 간다면 칼날은 그대로 입가를 찢은 다음 뒤통수로 빠져나올 것이다.

아엘라는 발아래를 얼리고 바람의 장벽으로 자신의 몸을 밀었다. 꼿꼿이 서 있는 자세 그대로 오른쪽으로 반 뼘만 움직이는 모습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검격을 피한 아엘라는 두 손을 내밀었다.

다리와 몸 일체를 움직이지 않았기에 그녀는 손쉽게 양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춤을 추듯이 두 손을 모았다가 내민 아엘라가 말했다.

“얼어라.”

주문도 아니고 영창도 외우지 않았지만 마력은 아엘라의 말에 호응했다. 그것이 용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내뻗은 열 개의 손가락 사이로 심상찮은 냉기가 흐르기 시작한 순간, 아엘라는 그 손을 그대로 인간의 모습을 한 이성 없는 괴물의 몸에 가져다 댔다.

화아아악!

눈을 시리게 만들 정도로 하얀 섬광이 아엘라의 손바닥과 남자의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피부를 타고 흐르는 저릿한 냉기가 닿은 순간 남자의 움직임이 뚝 멈춰버렸다.

검은 혈관이 돋아났던 피부가 꽁꽁 얼어버리고 입에서는 입김이 하얗게 뿜어졌다.

파삭!

순식간에 남자를 얼음 동상으로 만들고 부숴버린 그때, 하늘에서 파공음이 들려왔다. 몸보다 머리가 먼저 반응하며 마력이 움직였다.

파바바바박!

여섯 발의 화살이 아엘라가 서 있던 바닥에 꽂히며 판석을 박살 냈다. 화살에 실린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화살촉이 돌을 부수고 들어간데다가 꽁지깃이 겨우 머리를 보일 정도까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아까처럼 자신을 둘러싼 바람으로 몸을 움직이게 해 화살을 피한 아엘라는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려 하늘로 쏘아 보냈다. 그러자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서 새파란 섬광이 잠깐 번뜩이고, 곧장 벼락이 한 건물 옥상에 떨어졌다.

꽈릉-!

순식간에 사위를 환하게 비추는 빛과 천둥 소리 속에서 아엘라는 벼락을 피해 가까운 건물로 뛰어오른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다섯 시 방향 건물에 저격수! 높이는 4층!”

“드디어!”

아엘라가 특정해준 위치를 확인한 바이젠이 상대하고 있던 여자의 다리를 후려쳐 균형을 잃게 만든 그대로 양손의 검을 가위처럼 교차했다.

그 한 방에 목이 달아난 시체가 남은 팔다리를 우쭐거리다가 바닥에 철푸덕 쓰러졌다. 바이젠은 시체를 남겨두고 아엘라가 지시한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괴한들의 무리는 초반에 비해 서너 명이 더 합류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합류한 무리 중에 무시할 수 없는 궁수가 있었다.

저격의 존재는 자연히 행동을 제한한다.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을 주의하면서 동시에 바로 앞에서 휘둘러지는 검이나 도끼를 막아내는 건 단순히 적 하나가 늘어난 것 이상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강요하는 일이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제 겨우 10 여분이 흘렀을 뿐이지만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시간대에서 사는 전사와 마법사들에게 그 시간은 한 시간 이상의 체감 시간이다.

그리고 그 10분 동안 궁수는 칼리아나 아엘라, 실리오-바이젠 남매의 감지에도 잡히지 않은 채 화살을 날리며 전투를 방해했다.

“이 개새끼, 거기 딱 기다리고 있어라!”

쌍소리를 내뱉으며 바이젠이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그대로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갔다. 중력을 무시하며 벽을 디디고 달려가는 기예는 물론 수준급의 마력 운용과 신체 활용의 중거다.

4층 건물의 옥상 위로 뛰어오른 바이젠이었지만, 순간 아무것도 없는 모습에 당황했다. 하지만 곧 시야의 한구석에서 희미하게 일그러지는 아지랑이 같은 것을 발견하고는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투명 망토!”

빛의 산란을 통해 시야를 왜곡하게 만드는 마도구를 파악한 바이젠은 그대로 쥐고 있는 두 자루의 검에 마력을 불어넣은 다음 그대로 휘둘렀다.

엑스자로 교차되며 날아간 푸른 검기가 옥상에 떨어지기 직전 서로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부릅뜬 눈으로 부서진 돌의 잔해를 훑던 바이젠은 곧 그 잔해를 밟고 도망치는 한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기의 폭발 때문에 투명 망토 자락이 찢어진 것인지 움직이는 다리가 언뜻언뜻 보였다.

“새끼, 죽어라!”

잠깐의 체공 후 떨어지던 바이젠이 잔해 속으로 파고 들어가며 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궁수의 몸이 휘릭 돌더니 한 번에 세 개의 화살을 시위에 얹더니 쏘아냈다.

세 발의 화살들은 가로막는 돌덩이와 잔해를 꿰뚫으며 바이젠을 향해 올곧게 날아갔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푸르스름한 마력의 기운이 화살에 스며들며 그 위력을 증가시키고 있었다.

콰앙-!

바이젠의 쌍검과 화살이 부딪치며 허공에 구형의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비처럼 쏟아지는 돌가루를 뒤집어쓰며 허옇게 샌 머리카락을 드러낸 바이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만 먼지를 뒤집어 쓴 것이 아니기에 저 멀리서 몸을 날리는 출렁거리는 먼지덩어리가 보였다. 그 덩어리가 활을 가로로 눕힌 것을 본 바이젠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가 잘 알지는 않지만, 많이 들어본 사격 자세였기 때문이다.

쐐애애애액!

생각을 이을 틈도 없이 화살들이 쏟아졌다. 바이젠은 몸통으로 날아오는 것은 빗겨내고 다리를 노리는 것들은 재빠르게 피하며 거리를 좁혔다.

원거리 투사 무기를 든 자에게 거리는 필수불가결인 것이었다. 그걸 알기에 바이젠은 거리를 좁히기 위해 달렸고 궁수는 거리를 벌리기 위해 몸을 내뺐다. 하지만 일전 검기의 충돌로 만들어낸 폭발에 다리를 다친 것인지 빠르진 못했다.

바이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들고 있던 검을 내던졌다.

“이야악!”

자신에게도 이상하게 들리는 기합을 지르며 던져진 투검은 놀라운 속도로 날아가 궁수에게 도달했다. 그 속도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것인지 궁수가 뒤집어 쓰고 있던 투명 망토가 지이익 찢어지며 옆구리가 훤히 드러나는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투명 망토의 효력은 다했다. 간당간당하게 유지되고 있던 주문이 깨지자 궁수의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거기 서라, 쥐새끼!”

멀리서 화살을 쏘아대며 테러리스트들의 죽음을 지연시키던 궁수가 바이젠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안 다른 일행들이 움츠렸던 몸을 펴며 기지개를 켰다.

“에라이 새끼야! 이 괴물 새끼! 개새끼!”

남동생과 비슷할 정도의 쌍소리를 구사하며 실리오가 주먹을 뻗고 다리를 위로 차올렸다. 그 발차기에 도끼가 튕겨나다가 자세를 다잡았다. 그녀가 상대하는 것은 커다란 양날 도끼를 든 거한이었다.

피부 가득히 검은 혈관이 돋아난 채로 시뻘건 이빨을 내보이며 거한이 괴성을 질렀다.

“우어어어어-!”

이미 제대로 된 발음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한은 이성을 잃고 살육의 본능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어지럽게 흔들리는 현기증의 집합과 흐물흐물한 사물들 뿐이었다.

거한은 되는 대로 양날 도끼를 휘둘렀다. 양쪽으로 날개처럼 대칭을 이루며 돋아난 양날 도끼는 다루는 것이 까다로운 무기였지만 거한은 그것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파공성을 일으켰다.

양날 도끼가 한번 휘저어질 때마다 세워졌던 천막과 가판대가 소형 폭풍을 만난 것처럼 박살 나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단단한 돌벽이 무너지며 불똥과 먼지를 일으켰다.

단순하고 직선적이지만 주체가 넘치는 힘과 속도를 가지고 있다면 기술은 빛을 바래는 법이다. 양날 도끼의 궤적을 피해냈지만 뒤따르는 주먹을 얼굴로 맞은 실리오가 나가떨어지며 어느 가게를 앞 점포를 부쉈다.

“시발······ 아프잖아 새끼야!”

버럭 성을 낸 실리오가 그 자리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녀가 피한 자리로 도끼가 떨어지며 판석과 가게를 산산이 박살냈다.

“미안!”

거한이 아니라 그 가게의 주인에게 닿을 수 없는 사과를 보내며 그녀는 바닥을 박찼다. 깊숙이 박힌 도끼 탓에 거한이 잠깐 손잡이를 잡고 당기는 잠깐의 틈이 목표였다.

채찍 같은 발차기가 파고들어왔다.

“으랴아악!”

파아아앙!

신체 능력은 거한보다 낮을지 몰라도, 마력의 수발은 거한보다 더 자유로웠다. 발에 푸른 불길 같은 마력을 집중시킨 발차기에 얻어맞자 거한의 입에서 핏물이 울컥 토해졌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주먹이 날아왔다.

배에 두 방, 가슴에 세 방, 턱에 두 방을 연달아 꽂는 주먹 세례에 거한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비틀거리는 거한에게 돌진해 거리를 좁힌 실리오가 바닥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한쪽 무릎을 꼿꼿이 세워 복부를 올려치자 거한의 입에서 숨막히는 신음과 함께 허리가 완전히 숙여졌다.

“흐아압!”

왼다리를 축 삼아 빙글 돌아간 실리오는 거한의 바로 오른쪽에서 오른다리를 높이 들어올렸다가 그대로 내리찍었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양날 도끼를 놓친 거한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꿈틀거렸다. 어떻게든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지만, 바위도 조약돌로 만들 수 있는 힘이 더 이상 끌어올려지지 않았다. 척추가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퍽!

머리를 부숴서 확인사살을 마친 실리오는 코 밑을 쓱 닦으며 피를 훔쳤다.

“시발놈이, 숙녀의 얼굴을 때려서 쓰나.”

동일한 시각 칼리아는 한 번에 세 명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따다다다다당!

풍차처럼 회전하는 혈창이 두 개의 소검과 한 자루의 장검, 큼직한 철퇴를 받아냈다. 그 혈창을 돌리고 있는 것은 가녀린 여인이다. 그녀를 둘러싼 채 공세를 퍼붓고 있는 장신의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에서 둘은 작다.

그러나 힘은 그 이상이었다. 그 체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괴력이 나오는 것에 세 테러리스트들은 믿을 수 없는 심경을 교환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은 이성은 놀람이나 경악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끝없는 임무의 되새김질뿐이다.

그리고 그런 주문의 작용을 칼리아 또한 바로 앞에서 느끼고 있었다. 칼리아는 동정심을 느꼈다. 자유의지를 잃은 인간의 말로는 이토록 슬픈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희미한 분노를 느꼈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퍼어어엉!

그들이 디디고 서 있는 바닥에 고여있는 핏물 웅덩이에서 붉은 회오리가 솟구쳤다.

자리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칼리아와 세 남자가 서로 싸우며 흘린 피는 적지 않은 양이었다. 상처를 입는 즉시 피를 통해 치료할 수 있는 칼리아처럼 세 테러리스트 또한 주문과 약물을 통해 강화된 만큼 트롤보다 약간 못한 재생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달했다. 무한한 자원은 없다. 떨어지는 마력과 점점 느려지는 육체를 통제하기 위해서 그들을 조종하는 마법은 인간의 살과 뼈, 피를 섭취하라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곳에 다른 인간들은 모두 도망치고 없다. 점차 더 포악해지는 약물에 의해 변질 된 본능과 이성의 줄타기 위에서 그들은 정처없이 흔들렸다.

혼란 속에서 칼리아는 가슴을 찌르는 두 자루의 소검을 걷어내고 머리를 박살 내려는 철퇴를 빗겨낸 다음 등뒤에서 찔러오는 길쭉한 장검을 보지도 않고 옆구리로 흘렸다.

넷이 서로 합을 맞춘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유려한 공격과 방어였지만 넷은 연극 단원들이 아니다. 그 증거는 위로 치솟은 피의 소용돌이가 다시 혈우가 되어 쏟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소적인 지역에서 내리는 핏줄기들. 그 속에서 피의 주인이 눈을 떴다.

콰아아아아!

때아닌 파도가 몰아쳤다. 그것은 짜디 짠 담수로 이뤄진 파도가 아니다. 피로 이뤄진 파도였다. 하얀 포말이 아니라 붉은 거품을 부글거리며 파도가 세 테러리스트를 몰아쳤다.

아무리 봐도 바닥에 고여있던 핏물만으로 만들 수 있는 파도가 아니었지만 마법은 애초에 세상을 속이는 기술이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피의 강에서 수십 개의 손이 튀어 올랐다. 그대로 세 명의 적을 잡고, 당기고, 밀어낸다. 지옥의 망자들이 산자를 데려가려는 듯한 섬뜩한 광경이었다.

“아아아악!”

“아아아아!”

비명이 되지 못한 비명과 괴성이 메아리쳤다. 하지만 마법은 충실하게 그 주인의 의지를 이행했다. 붉은 피로 이뤄진 손을 뿌리치며 어떻게든 칼리아를 향해 마력을 투사하고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보다는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더 빨랐다.

마치 폭포를 거슬러 오르려는 물고기처럼, 혹은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격랑 속으로 사라지는 조각배처럼. 나부끼는 팔다리를 휘두르며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했지만 혈수와 소용돌이는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콰우우우우······ 퐁.

거대한 깔데기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피로 만들어진 강과 웅덩이는 경쾌하고 맑은 물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시체도 남지 않았다.

동일한 시각 바이젠은 길과 길, 골목과 골목, 벽과 벽을 오가는 숨가쁜 추격전의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허억, 허억. 시발, 성가시게 하고 있어.”

몸 곳곳에 꽂힌 화살들은 격전의 치열함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급소를 맞지 않기 위해 불가피하게 내밀 수밖에 없었던 신체 부위들이다. 불타는 듯한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바이젠은 시체에서 칼을 뽑았다.

팍 하고 검은 피가 튀어 오르며 엎어진 시체가 경련했다. 저도 모르게 움찔한 바이젠은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칼을 획 털었다. 그리고는 완전히 찢어진 투명 망토를 벗기고는 그 착용자를 살폈다.

일어선 그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바이젠은 이 망토의 주인을 어렴풋이나마 알았다.

“뭐야? 아는 놈이야?”

“응. 코힘, 기억나?”

“잡화 구역 먹고 있는 놈 아냐. 똘마니들 데리고 다니는······. 잠깐. 그놈이라고?”

“맞아. 아무래도 뒷골목 상당수가 이상한 놈들한테 먹힌 모양인데.”

실리오 또한 바이젠처럼 표정을 굳힌 채 자신이 죽였던 거한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코힘과 같이 다니며 어깨에 힘 좀 주던 놈이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검게 변색 된 혈관들을 얼굴 위로 띄워놓으니 곧장 얼굴이 떠오르지 않은 것이었다. 애초에 뒷골목 건달이나 용병 놈들이 자신들의 도시를 습격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던 것이긴 했지만.

“왜 브라실트를 분탕으로 만들고 있는 거지?”

“나도 모르지. 굳이 오늘을 고른 것도 그렇고, 수상한 건 맞아. 아무래도 경매장에 들어가봐야겠어.”

***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안광이 소리없이 움직였다. 그 안광은 자청색을 지니고 있었다. 러셀은 빠르게 어둠을 주파하며 복도와 방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테러리스트를 상대했다.

아니, 상대했다는 상대방에게 과분한 표현이다. 러셀은 도끼를 두 번 휘두르지 않았다. 한 번이었다. 그리고 한 번이면 상대방의 목이나 허리를 반으로 갈라 버리는데 충분했다.

러셀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휘두르는 모습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남겨진 시체 뿐이었다. 피첼론을 모시는 기사, 데르번은 시체의 모습이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진작부터 알고 있던 것이었다. 환한 빛이 아니라 등불이나 주문으로 이뤄진 빛의 구슬이 모두 깨진 상황에서 식별하긴 어려웠으나, 이 습격자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했다.

습격자들이 노리는 것은 분명했다. 경매장에 모인 귀족들의 말살. 그리고 그 귀족들은 하나같이 황녀의 편에 서 있는 귀족들의 휘하에 있거나 중립을 표방한 귀족의 휘하 영주들인 경우가 많았다.

‘브라실트가 제이비르 백작의 영지 주도이고 제이비르 백작이 황자의 후원자를 자처하는 귀족이긴 하지만, 이건 도를 넘은 공격이다. 황자가 제위에 오르고서도 논란은 피하지 못할 텐데.’

“데, 데르번. 왜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는 거지? 어서 이 끔찍한 곳을 나가야지 않나? 어?”

“안 됩니다, 자작님. 바깥의 상황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나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이곳에 있는 게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 그런가? 알겠네, 자네 뜻대로 하지.”

몇 십 분 사이에 죽음의 위기를 너무 많이 겪은 탓인지 피첼론은 한껏 소심해져 있었다. 저택의 사용인을 채우기 위해 들렀을 뿐인 노예 경매장에서 이런 습격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데르번은 그런 주인을 뒤에 두고 다시 앞을 보았다. 그들 말고도 러셀을 따라가고 있는 다른 무리가 있었다. 모두 목숨을 구함받은 귀족들이다. 살아남은 기사는 몇 되지 않았지만, 데르번은 기이하리만큼 걱정이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저 앞에서 앞장서 길을 뚫고 있는 남자 덕분이다. 그때 러셀이 멈춰섰다. 제자리에 서서 좌우를 둘러본 그는 곧 한 곳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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