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교차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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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각, 실리오와 바이젠 남매, 칼리아와 아엘라시스 또한 정체불명의 무리들과 마주했다. 무리의 숫자는 모두 6명이었고 남녀로 혼성되어 있었다.
겉보기로는 갑옷과 날붙이등으로 무장한 여느 용병과 다를 것 없는 이들이었지만,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퀭한 눈으로 걸어 다니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벅다리를 닭다리처럼 뜯지 않는다.
그 끔찍하고 혐오스런 광경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바이젠이 다른 것을 지적했다.
“저것들 피부 왜 저래? 마약이라도 처먹었나?”
그들의 피부에는 혈관이 튀어나와 있었다. 옅은 푸른빛이 도는 혈관이 아니라 검은색의 혈관이었다. 피 대신 다른 무언가가 그 속을 휘돌고 있었다. 혈관처럼 눈 또한 검은색이었다. 홍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흰자위도 검게 변색되어 있다는 뜻이다.
언뜻 보면 시커먼 눈구멍을 그대로 내보이고 오는 것 같았지만 빛에 반사되는 눈알의 번들거리는 반짝임이 그것이 눈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침묵 한 채 텅 빈 거리의 한가운데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양손에 들린 흉악한 날붙이, 장검과 단검, 곡도, 톱날처럼 삐죽삐죽한 이빨을 가진 칼이 땅바닥을 긁었다.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 아엘라시스가 입을 열었다.
“저거 인간이야? 아닌 것 같은데.”
“먹으면 안 될 것을 먹었다. 생전에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아니구나.”
“죽었다는 거야, 칼리아?”
칼리아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희생을 바탕으로 한 마법에 몸이 변질되었다. 이지도 없고 생존에 대한 갈망도 없어. 살아있지만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이 거세된 꼭두각시에 가깝다. 저들을 움직이고 있는 술사의 의지를 완수하면 죽어버릴 것이다.”
아엘라시스가 물었다.
“그 전까지는?”
“많은 인간이 죽을 것이다.”
인간이 죽는다. 많은 인간이 죽는다? 스스로 인간의 모습을 빌리긴 했으되 아엘라시스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모습을 취한 이유는 간단하다.
세계가 자라고 성숙해지는 데에는 지성체들의 의식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상은 조금씩, 하지만 꾸준하게 자신의 부속품을 바꿔나갔다.
식물에서 짐승, 짐승에서 용과 거인, 용과 거인에서 인간과 요정, 난쟁이······.
또 갑작스럽게 머리 한켠에서 떠오른 지식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엘라시스는 그렇게 미미한 두통을 치워버리고는 마력을 일으켰다. 용에게는 사명이 있다. 거의 모든 용이 사라지고 자신의 흔적만을 남긴 이 세계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용일지도 모르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건 별로 바라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다.”
칼리아 또한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이 전조도 없이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검붉은 피가 뭉클거리며 흘러나왔다. 핏물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길게 늘어나더니 길쭉한 한 자루의 창이 되었다.
실리오가 놀란 눈이 되어 칼리아를 바라보았다.
“와. 언니, 그런 마법도 쓸 줄 알아요? 무슨 마법이야?”
“언제 봤다고 언니라고 부르느냐?”
“에이, 우리 사이에. 설마 어제 내가 한 말 담아두고 있는 건 아니죠?”
칼리아는 실리오의 말에 픽 웃으며 손에 쥔 혈창을 빙글 돌렸다. 매끄러운 창대와 날카로운 창날을 가진 피의 창이 두 바퀴를 회전하다가 걸어오는 무리를 겨냥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속에 든 것은 인간이 아니다. 사악한 마력과 금술이 혼합되어 있어.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힘을 얻는 종류이니 악마의 종자라고 봐도 부족하지 않다. 칼을 뽑아라.”
예리한 눈과 오랜 세월 마법을 수련한 마녀로서의 판단이 저 앞의 인간들이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도와주었다.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눈알이 돌아가 있다는 것만으로 정상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몸속의 피가 제멋대로 돌다가 멈추고, 때로는 빨라졌다가 느려지기를 반복하는 현상은 정상적인 내장 구조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로선 불가능한 일이다. 외부의 힘이 작용했다면 다르다.
무엇보다 칼리아는 저들의 벌어진 입, 그리고 이빨 사이에서 핏물과 살점을 발견했다. 오면서 생닭이나 개를 물어뜯은 것이 아니라면 저건 사람을 씹은 흔적이다. 칼리아는 짐승과 인간의 피를 구별할 수 있었다.
아직 형태를 굳히지 않은 마력을 위로 띄운 채 아엘라시스가 말했다.
“경비병 같은 건 안 오는 거야? 지금 저 이상한 사람들이 도시를 습격한 거잖아. 치안대는?”
“와, 엄청 똑똑한 꼬마구나. 몇 살이라고 했지?”
“나 꼬마 아니야. 그리고 반말 하지마,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표독스럽기도 해라. 생긴 건 요정 같이 생겨가지고.”
아엘라시스의 성난 말을 가볍게 넘긴 실리오가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제이비르 백작은 도시의 치안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 그 양반 숙원은 더 큰 권력이니까. 자기 발밑까지는 돌볼 여량이 없다는 거지. 덕분에 나같은 년이나 가진 게 힘밖에 없는 머저리들이 길드장이랍시고 뻗대고 있는 거지만. 걔네들도 지금 머리 열심히 굴리고 있을 거야.”
실리오의 말에 곰곰히 생각하던 아엘라시스가 말했다.
“자기네 힘을 보존하면서 생색은 크게 내려고?”
“똑똑해! 너 엄청 귀엽다, 에구구구구.”
“얼굴 만지지 맛! 저리 가!”
아엘라시스의 볼을 이리저리 일그러뜨리는 실리오의 모습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들리는 비명소리나 굉음, 혼란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런 누나를 보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바이젠이 말했다.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는 거군. 끝내줘. 아주 좋아.”
실리오는 어떤 무기도 꺼내 들지 않았다. 다만 소매와 바짓단에 달린 줄을 당겨 묶는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 전날 바이젠을 손쉽게 제압했던 것처럼 그녀는 주먹과 발기술을 쓰는데 자신감을 보였다.
‘아, 그 남자가 있었어야 했는데.’
실리오는 아쉬워했다. 자신의 멋진 비각술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에. 하지만 이곳에도 구경꾼은 많았다. 저 멀리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고개를 기웃거리는 어린 남자애들이 그렇다.
스르르르르릉······ 따당!
땅을 칼끝으로 긁으며 다가오던 6명의 무리가 돌연 다리에 힘을 주며 달려왔다. 그들의 사고회로 속에 박힌 명령은 간단했다.
사람을 죽이고 마력으로 전환할 것, 그리고 커다란 원형의 건물로 들어가는 것. 거기까지가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의 시작과 끝이었고 약으로 절여진 머리는 자의적으로 판단할 의지는 없었다.
남은 것은 몸에 익은 살인기술과 강제로 새겨진 식인에 대한 기호 뿐이었다.
시장통에서 마력과 날붙이, 손발이 어우러지며 충격파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
“끄으으윽!!”
비명을 지르며 지젤은 발작하는 자신의 몸을 억눌렀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몸이 주체없이 부들거렸다. 자신의 정신을 억지로 꺼뜨리면서 찾아온 부작용이다.
지젤의 팔다리가 그녀 주위에 놓여 있던 양초를 넘어뜨리며 고여있던 촛농을 바닥에 쏟았다. 뜨거운 하얀 촛농은 바닥에 검게 그려진 마법진에 닿으며 하얀 연기를 피워올렸다.
지젤이 있는 곳은 페르거 평원의 아드리칸 군대가 주둔한 진지의 중심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것인지 천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바람의 호곡성을 들으며 겨우 자신을 억누른 지젤은 벌벌 떨면서 직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지금의 대법을 이룩하기 위해 지젤이 치른 희생은 엄청난 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재산이나 목숨을 썼다는 말은 아니다. 그 재산과 목숨은 황자 휘하의 영주들, 그리고 병사들이 내었다.
핏물로 그려진 마법진의 곳곳에는 인간을 이루는 다양한 것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몸속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밖으로 꺼내놓기는 꺼리는 것들이었다.
천막 안쪽에 가득한 혈향과 썩은 내장이 풍기는 냄새는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이가 천막으로 들어온다 해도 이 광경이나 냄새를 보거나 맡지도 못할 것이다. 인간의 감각은 주문 앞에서 무력하다.
“쿨럭, 그워억!”
그럼에도 지젤은 누군가 휘장을 들추고 들어와 자신의 등을 두드려줬으면 했다. 마법사나 마녀에게 기절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공들여 만든 십자수를 북 찢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이 지젤이 방금 누군지도 모를 남자에게 당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언가에게 속박당해 비밀을 누설한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공할 두려움과 꺼림칙함이 그 정체를 의식의 수면 위로 불러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불타는 것 같은 두 눈동자였다······.
겨우 발작을 멈춘 지젤은 손을 휘저었다. 평상시보다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약한 마력이 일며 바닥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을 지우고 내장을 검은 가루로 만들었다.
천막 안을 정리한 지젤은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 해야 일이 남아 있었고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건물 안은 어두웠다. 등불이나 마력석을 동력으로 하는 빛, 또는 주문을 통해서 이뤄진 빛의 구슬도 없었다.
러셀은 한 손에 마지막 서리를 들고 복도를 걸었다. 나힐니르 같은 거대한 대검을 다루기에 복도는 그리 넓지 않았다.
곧 그는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에 도착했다. 전투는 한쪽의 비정상적인 침묵과 반대편의 드높은 고함으로 이뤄져 있었다.
“뭐냐, 이 괴물들은!”
“주인님, 어서 자리에서 피하셔야-끄악!”
“에본!”
한 무리의 사람들과 표정 없는 무장한 사람들이 대치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화려하고 때깔 좋은 옷과 모자를 쓴 뚱뚱한 남자를 중심으로 한 기사들과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 한눈에 알아보기 쉬운 구성이었다.
호위기사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벌써 두엇이 죽은 모양인지 저편에 쓰러져 있는 기사가 보인다. 그때 남은 호위 기사 셋의 틈바구니 속에서 귀족이 시뻘건 얼굴로 소리쳤다.
“내 이놈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온 것인줄은 모르겠으나 난 황녀님의 비호를 받는 피첼론이다! 당장 물러가지, 으악!”
거세진 습격자의 공격에 피첼론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가까스로 검을 막은 호위 기사가 왼쪽 팔뚝에 장착한 작은 방패를 휘둘러 적을 떨어뜨렸다.
“괜찮으십니까, 자작님!”
“빠, 빨리 죽여! 빨리! 그러고도 네놈들이 내 돈을 먹고 일하는 기사들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사기를 돋우는데 썩 좋은 응원은 아니었지만 호위 기사들은 힘을 내었다. 하지만 힘을 낸다고 적의 숫자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여덟 명이나 되는 마력을 사용하는 초인들의 공격에서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호위 기사들의 실력과 오랜 시간 합을 맞춰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벌써 기사 둘이 죽었고 남은 건 고작 셋이었다. 기사 데르번은 죽음을 각오했다.
“이켈, 코벤, 내가 마력을 폭발시킬테니 자네가 길을 뚫게.”
“뭐?”
“같이 가야지, 그게 무슨-”
“적들의 상태가 심상찮아.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피칠갑을 한 채로 죽자사자 달려드는 놈들이잖나. 아까 터져나온 굉음도 신경 쓰여. 그러니 잔말말고-”
데르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시야 한 구석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하얀 도끼 때문이었다. 어두워진 건물 내부에서 혼자 빛을 발하는 것은 그 도끼 하나 밖에 없었다.
마력을 눈으로 집중시켜 적과 스스로를 분간하던 기사들은 갑작스런 도끼의 출현에 놀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피륙음과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는 그들을 경악하게 했다.
“저, 저게 뭐야?”
그것을 사람의 움직임이라고 감히 칭할 수 있을까. 최소한 데르번은 자신이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휘두르고, 가르고, 베고, 찢는다. 그 단순한 네 가지 동작 속에는 간결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죽음이라는.
새로운 상대를 맞이한 무표정한 습격자들은 기사들이 이제까지 맞서 싸웠던 놈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허무하게 쓰러졌다.
머리를 노린 칼날은 머리를 맞추지 못해 빗나갔고, 그 대가로 어깨죽지가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다. 피 쏟아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모래알 같은 것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데르번은 갑작스러운 한기를 느꼈고,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임을 깨달았다. 그 한기는 저 도끼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냉기의 춤사위는 몇 분 되지 않아 끝났다. 발목을 차갑게 하는 한기가 느껴졌다. 데르번은 그 도끼의 주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그의 눈높이가 자신보다 한참은 위에 있음을 알았다. 도끼를 든 남자가 말했다.
“난 러셀이라고 하는데. 그쪽은?”
“데, 데르번이라고 합니다.”
데르번은 자신이 존댓말을 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