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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88화 (189/225)

188화 교차로 (10)

혼란이 들개처럼 사람들 사이를 달려 나갔다. 발투르티스에서 솟아오른 연기와 때늦은 먼지가 뒤늦게 시장과 대로를 덮쳤다.

값을 흥정하던 상인들이 때아닌 굉음과 소란에 놀란 사이 같이 흥정하던 손님 몇몇은 날쌔게 상품을 잡고 달아났다. 상인들의 도둑 잡아라! 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에 묻혀버렸다.

러셀과 일행은 대로에 가만히 서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앞으로 두려움에 젖은 사람들이 달려와 옆을 스치며 뒤로 달려나갔다.

러셀의 의지에 따라 일어난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놀란 쥐 떼처럼 무수히 달아나는 사람들 사이로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서너 명씩 조를 이룬 채 후드를 뒤집어쓰고 달려가는 일련의 무리들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러셀.”

“봤다.”

러셀이 감지한 것을 칼리아 또한 보았다. 그들은 가만히 서서 그 일련의 무리들이 발쿠르티스로 달려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습격인가?”

“무엇에 대한?”

“노예 경매장이 열리는 날은 매달 15일이지. 하필 습격을 당한 날짜가 오늘인 건 우연이 아닐 거야. 그 장소가 발쿠르티스인 것도.”

“궁금하면 물어봐야지.”

러셀의 말에 일행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실리오가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옆에 있던 사람이 없어진 것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익숙해지거라. 앞으로 자주 느끼게 될 테니.”

부드럽고 기품 있는 목소리에 실리오가 시선을 돌렸다. 침착을 되찾은 칼리아가 앞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며 실리오가 물었다.

“내 동생을 아무렇지 않게 다루는 걸 보고 짐작하긴 했지만, 역시 그랬군. 마법사들인가?”

“난 그렇지만 그 남자까지 마법사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그는 세계나 진리에 관심이 없으니까.”

“전투 마법사도 있지.”

어릴 적부터 한가지, 혹은 두 가지의 마법만 반복 숙달한 전쟁 기계를 말하는 실리오에게 칼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런 직종도 있지. 하지만 러셀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럼?”

“나도 차차 알아가는 중이지.”

일행에게서 벗어난 러셀은 자신의 감각이 전해오는 정보를 되새겼다. 발쿠르티스의 정문으로 다가오고 있는 무리들은 총 다섯이다. 한 무리당 3명에서 5명 정도로 이뤄져 있고 부채꼴의 형태로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무리가 러셀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나뒹구는 그릇과 깨진 과일, 조각난 유기그릇, 바구니가 널브러져 있는 길 위에서 러셀과 4명의 후드가 대치했다. 러셀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난잡해진 거리의 풍경과 멀리 도망가는 사람들, 어디선가 치솟아 오르는 불꽃만 아니라면 친구를 만나 인사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가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4명은 답하고 싶은 게 없는 듯했다. 그들은 입을 다문 채로 러셀에게 쇄도했다. 4명의 습격자들은 각자 입고 있는 옷의 안쪽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매끄러운 쇳소리와 함께 길쭉한 칼날 넷이 러셀의 몸통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러셀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네 명의 입장에서 러셀의 움직임은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람이 질풍 같은 바람이 불었다는 것과 칼을 놓쳤다는 것이었다.

한 손에 네 개의 칼날을 쥔 러셀은 그들과 칼을 번갈아 보다가 손에 힘을 주었다.

까드드드득!

칼이 우그러지는 비명소리를 질렀다. 연성이 좋은 철을 썼던 것인지 칼은 부러지지 않고 다만 엿가락처럼 휘어버렸다. 날이 잘 든 칼 네자루를 순식간에 고철 더미로 만들어버린 러셀은 그것을 땅바닥에 놓았다.

탱그렁 소리와 함께 쇳덩이들이 바닥을 굴렀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러셀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칼을 잃고 물러난 네 명의 고개가 천천히 러셀을 향해 돌려졌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제이비르 백작의 협력자인가?”

러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목소리는 네 명 모두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아니.”

“그럼 비켜라. 우리의 목적은 그를 죽이는 것이다.”

“터너? 그게 누군데?”

“이 몸의 주인이다.”

이 몸의 주인이라는 말은 지금 말하는 자가 몸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도 된다. 자신을 3인칭으로 말하는 해괴한 말투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러셀이 짝다리를 짚었다.

“보통 누굴 죽일 거라는 말을 대놓고 하는 편인가?”

터너는 말하지 않았다. 그때 네 명이 똑같은 동작으로 손을 들며 머리에 뒤집어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뒤로 넘겼다.

러셀은 아까부터 보고 있었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똑같은 얼굴을 한 청년 넷이 그곳에 서 있었다. 네 쌍둥이인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쌍둥이라고 해도 저렇게 완벽하게 같은 모습일 수는 없다.

러셀이 그들의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눈에 마력을 담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마력의 흐름까지 관찰할 수 있는 러셀에게도 넷의 마력은 동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네 명으로 서 있을 뿐, 그들은 하나였다. 터너의 표정이 사납게 물들었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사나워진 사냥개 같은 표정이었다.

“방해자는 죽인다.”

“신기한 놈이군.”

답을 얻을 수 없는 혼잣말과 함께 다시 네 개의 육체를 가진 터너가 러셀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력이 들불처럼 일어나 몸을 덮는 것을 보며 러셀은 그들이 마력을 다루는 초인임을 알았다.

이상한 것은 그들의 몸속 어디에서도 마력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신에게 신성력을 전달받는 것마냥 그들의 마력은 경로를 알 수 없는 곳을 통해서 생성되어 몸 바깥으로 뿜어져 나왔다. 러셀의 입가가 비죽 올라가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이런 방법도 선호하는 편이지.”

잠깐 사이에 러셀의 상체에 네 번의 타격이 꽂혔다. 하지만 러셀은 쓰러지지 않았다. 다섯 번째로 발차기를 날리려던 터너 중 하나가 움찔했다. 러셀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마력을 담은 발차기가 러셀의 옆구리를 때렸지만 충분한 거리를 얻지 못한 탓에 위력은 제대로 실리지 못했다. 러셀은 이 발차기를 날린 놈을 터너 1이라고 지정했다.

터너 1의 세상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러셀의 왼손이 터너 1의 머리를 움켜쥔 것이었다. 그가 이를 악물며 러셀의 왼손을 움켜쥔 다음 뜯어내려 했지만 러셀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러셀의 손가락이 터너 1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끄아아아아-!”

고통은 터너 1이 받는데 비명은 모두가 질렀다. 아무런 상처를 입지도 않았는데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나머지를 보며 러셀이 씩 웃었다.

“이런 방식이군?”

터너 1의 몸이 채찍처럼 휘둘러져 바닥을 때렸다. 터너 1의 머리뼈나 목뼈가 박살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러셀이 손속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터너 1이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 자식!”

남은 터너 2, 3, 4가 러셀을 향해 뛰어들었다. 신성력처럼 러셀조차 딱 어디라고 특정할 수 없는 방향에서 마력이 그들의 몸에 흘러들어와 강력한 힘과 속도를 부여했다.

장난처럼 터너 하나를 거동불능으로 만들었지만 그들은 약하지 않다. 오히려 바이젠과 호각에 가까울 정도로 강했다.

주먹과 발길질은 모두 매끄러운 동선을 그리며 러셀을 노렸고, 그 과정에서 힘의 손실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필시 수 년 이상을 살인기술의 반복과 숙달에 투자한 움직임이었다.

“하압!”

기합소리와 함께 터너 2가 다리를 바닥에 내려찍었다.

콰아아앙!

다리에 실려있던 마력은 그대로 강력한 충격파가 되어 러셀을 후려갈겼다. 충격파의 방향이 한점으로 모여 일직선으로 날아갔기에 터너 2의 발바닥이 찍힌 자리부터 러셀이 있던 자리까지 길쭉한 직선의 흔적이 남았다.

희뿌연 먼지 속에서 러셀이 몸을 툭툭 털었다. 그만한 충격을 받아냈음에도 러셀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그럼에도 러셀을 향해 달려드는 터너 2, 3, 4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일체 묻어나지 않았다. 그 맹목적인 행동의 바탕에는 그 스스로의 의지라기보다는 조금 더 다른 것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러셀은 자신의 감각이 전해주는 정보를 머리 한 구석에 담아놓은 다음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치 그 자리에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처럼 터너 4가 러셀의 손아귀에 목이 틀어잡혔다.

“컥!”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터너 4가 발버둥을 쳤다. 발끝에 닿지 않는 지면은 그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두려움 속에서 터너 4는 손을 재빠르게 움직였다.

촤촹!

뒷허리에 교차로 꽂혀있던 단검 두 개가 동시에 뽑혀나오며 러셀의 두 눈을 노렸다.

“시도는 좋았다.”

뻐어어억!

터너 4의 옆구리에 러셀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기역자로 꺾인 터너 4의 얼굴이 고통으로 기이하게 요동쳤다. 눈이 한껏 크게 뜨이고 입은 쩍 벌어지며 목젖이 훤히 드러난다. 침방울이 튀었다.

콰아앙!

러셀은 주먹을 비틀어 터너 4의 몸을 거리 저편으로 날려 보내는 대신 땅에 내리꽂았다.

콰앙!

“커헉!”

터너 4, 혹은 아무런 숫자를 붙여도 말이 되는 터너 중 하나가 신음을 토했다. 그는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았지만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의 몸 안쪽을 타격한 러셀의 마력이 그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터너 2와 3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넷이 달려들었을 때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대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터너는 도주를 조금 더 고려해봐야 했을 것이다.

셋의 터너를 모두 전투 불능, 행동 불능, 발언 불능으로 만든 러셀이 남은 하나를 바라보았다. 러셀의 보랏빛 눈이 빛을 내기 시작하면서 터너의 쉴새없이 떨리는 눈과 시선을 맞췄다.

러셀은 자신의 몸이 한순간에 터너의 동공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착각이었다. 빨려들어간 것은 그의 의식이었다.

검은 공간 속에서 러셀은 투명하게 아지러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실?’

“뭐야?”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러셀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거인이 서 있었다. 그 거인은 여성이었고, 당황하고 있었다. 늘어뜨린 두 손, 손가락에는 투명하지만 흰빛을 내는 실이 무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러셀은 단번에 이 공간이 의식이 지배하는 정신적인 공간임을 알아차렸다. 알아차린 순간 러셀의 몸이 거대해졌다.

“이런!”

순식간에 러셀의 의식이 부풀어 오르면서 자신을 침범하는 것을 느끼자 거인 여성이 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손에 얽혀있던 실들이 빳빳해지더니 그대로 러셀을 향해 날아들며 러셀의 몸을 꽁꽁 묶었다. 러셀은 자신을 묶은 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마력사. 이렇게 정교하게 다루는 건 처음 보는데.”

“여기에 어떻게-”

당황한 채로 말을 이으려던 여자는 러셀의 빛나는 마안을 보더니 모든 걸 알아차린 표정이 되었다.

“마안 보유자! 그것도 이렇게 강력한? 너······, 그 러셀이라는 이름의 남자로군!”

“그러는 넌 정신 억압자로군. 이름은 지젤. 목적은······ 전선의 고착화와 황자를 향한 이중공작?”

“큭!”

의식만이 남아있는 공간에서 러셀은 빠르게 상대방의 정보를 읽어 들였다. 마음 속 깊숙한 무의식의 저변까지는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이 공간에 남아있는 심상을 눈으로 읽는 것만으로 의도를 알아내는 데는 충분했다.

그를 알아차린 것은 지젤이라는 마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네놈이 브라실트에······!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그래, 이럴 때가 아니지.”

뚜두두두둑!

러셀을 묶고 있던 마력의 실들이 그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졌다.

“어디에 있나?”

지젤의 표정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이제 러셀의 크기는 지젤의 몸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지젤의 몸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공간임에도 그랬다.

러셀 그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지젤의 눈에 들어오는 러셀의 모습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마치 불꽃이 타오로는 것 같은 형태 없는 일렁거림이 그의 전신을 아지렁이처럼 만들었고 눈구멍이 있는 부분에서는 보랏빛의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지젤의 입이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아드리칸의 군대.”

“정확히.”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끔 유도한 각 지방의 영주들이 끌어모은 군대.”

“상황은?”

“페르거 평원에서 고착되어 있으며 암살자의 난동으로 다수의 지휘관이 쓰러지며 연패 중. 황녀의 공작.”

그때 지젤의 손이 먼저 움직이더니 손끝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미처 러셀이 손을 쓸 틈도 없이 이뤄진 즉각적인 반응. 러셀이 지켜보는 사이 머리를 잃은 지젤의 의식은 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기절로 속박을 벗어나다니. 꽤 강단이 있는 마녀였다. 그와 동시에 마녀가 구축해놓은 의식 공간이 빠르게 무너졌고 러셀은 현실로 돌아왔다.

잊고 있었던 육체의 오감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러셀은 마력을 퍼뜨려 사방을 감지했다. 터너는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인격은 보이지 않았다.

러셀은 마녀의 주문에 정신이 속박된 생명을 손수 끊어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러셀이 아직 소란이 끊기지 않은 발쿠르티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발쿠르티스의 문은 문지기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이미 선봉이 들어간 듯했다. 러셀은 생기를 완전히 빨아먹혀 미라 같은 모습이 되어 있는 문지기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마녀의 조종을 받는 놈들은 많았다. 안에서 비명과 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러셀은 망설임 없이 그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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