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교차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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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로셀스는 후드가 달린 로브를 뒤집어쓰고 거리를 걸었다. 그의 뒤에는 칼과 작은 방패로 무장한 호위 기사가 둘 뒤따르고 있었다.
차가운 밤이다. 계절이 그랬다. 하얀 입김을 훅훅 내뿜으며 로셀스는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대외적으로는 연극과 서커스를 감상할 수 있는 커다란 5층의 둥근 극장이었다.
그러나 매달 15일이 되면 그 극장은 돈과 권력을 짜릿하게 실감할 수 있는 장소로 변모한다. 근방의 도시들 중 가장 커다란 노예 경매장, 발쿠르티스가 바로 그것이다.
점차 경매장에 가까워짐에 따라 로셀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노예를 사러 경매장에 가고 있고 그 목적 또한 잘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중앙 정계의 진출이 달린 시급한 일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 자연히 그의 아버지가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중 몇 가지가 로셀소에게 내려왔다. 그중 하나가 노예를 사는 것이었다.
그 노예를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 아는 로셀소로서는 구역질이 났다. 로셀소는 과거를 회상했다.
몇 달 전 갑자기 나타나 그의 아버지에게 동업을 제안한 남자가 매타작을 맞고 쫓겨나지 않은 것은 간단하다. 매타작을 할 팔을 모두 부러뜨린 것이다.
호위로 뽑은 출중한 기량의 기사들을 순식간에 전투불능으로 만들어버린 그 남자는 공포에 질린 로셀소의 아버지에게 제안을 했다.
암살이나 경고가 아니라 동업 제안에 로셀소의 아버지, 제이비르 브라실트는 궁금증을 표했고 제안을 들은 후에는 수락의 표시를 건넸다.
이후 일어난 일들은 로셀소 브라실트가 아는 그대로다.
성의 경작지 중 하나를 몰수한 다음 그 경작지에 기상천외한 모양의 종자를 심었고 그를 마법사들이 관리했다.
그 종자에서 난 새싹과 풀, 열매는 엄중한 관리와 보존 방식을 거쳐 마탑, 연금술 공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량은 브라실트의 뒷골목으로 흘러내려갔다.
영지민을 데리고 마약을 유통하는 상식 선 바깥의 일을 하면서도 로셀소가 침묵을 택해야 했던 이유는 그 남자가 두려울만큼 강하며 얼굴도 마주치기 싫은 혐오스런 외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일 저녁, 그 남자의 거처에서 무시무시한 비명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출동했던 경비병들이 혼절과 구토를 반복하며 겨우 보고한 내용에 로셀소는 두통과 메슥거림을 느꼈다.
남자에게 주어졌던 노예 모두가 참혹하게 죽어 안의 것을 모두 바깥으로 꺼낸 채 죽은 광경 속에서, 로셀소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가 묻자 남자 리벤부스는 차분하게 고개를 돌렸다. 붉은 피를 뒤집어쓴 리벤부스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남자의 알몸 따위에 혐오감을 일으키기보다는 끔찍함이 앞을 치고 나왔다.
전신화상을 당한 것처럼 짓무르고 일그러진 피부가 일렁였다. 로셀소는 리벤부스가 무슨 저주를 당한 것인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다만 그가 리벤부스에 대해 아는 것은 그는 눈을 뜨고 있는 내내, 잠을 자면서까지 전신이 불에 타고 있는 통증과 화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몸에 의식을 전령시키는 흑마법의 비술을 터득하지 못했다면 그는 예전에 광증으로 미쳐 스스로를 죽였을 것이다.
리벤부스는 로셀소에게 노예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성에 거주하진 않지만 성내에 거주지를 따로 마련해줌으로써 그에 대한 호의와 편의를 제공한 제이비르 백작은 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경매장으로 향하게 된 로셀소에게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발쿠르티스의 문지기는 도련님인 로셀소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잠시 서 있던 것이 뭔가 명령을 내리기 위해 뜸을 들이는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셀소는 굳은 표정으로 문을 열라는 눈짓만 해보였을 뿐이었다. 문지기는 문을 열었다.
경매장의 뒷문을 통해 들어선 로셀소는 어느새 따라붙은 아름다운 미녀의 안내인을 따라 윗층으로 향했다. 경매장 안은 대낮처럼 환했다. 마법사들이 띄워올린 광구가 천장에 붙어서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내인이 열어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밀폐된 공간이 나타났다. 좁은 공간에 있는 것은 한눈에 보아도 엉덩이가 만족스러워할 듯한 양털과 가죽으로 만들어진 푹신한 의자와 다과가 놓여 있는 물푸레나무 탁자 뿐이었다.
로셀소가 의자에 앉아 정면의 어둠이 물러가고 한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방에 앉아있는 자들도 똑같은 영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영상의 주인공은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콧수염의 중년 남성이었다. 머리에 쓴 모자를 한바퀴 휘저으면서 허리를 숙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와주신-”
콰아아아아앙!
그리고 폭발과 굉음이 발쿠르티스를 덮쳤다.
***
노예들이 갇혀있는 곳은 경매장의 지하였다. 엄격한 간수들은 예정된 순번에 맞춰 우리의 문을 열고 줄을 잡아끌었다. 그럴 때마다 조용한 침묵의 갈채가 노예를 무대로 이끌었고 다시 장막이 내려오며 빛은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노예들은 무력하게 앉아있을 수밖에 없다. 큰 덩치와 근육질을 가지고 있든, 혹은 방대한 마력과 수준 높은 술식을 가지고 있든 마찬가지다.
목에 감긴 구속구와 연결되어 있는 줄은 간수의 조작에 따라 강력한 물리, 마법적인 충격을 일으키는 마법 도구다. 신경과 마력 회로에 타격을 주기 때문에 근육과 마력의 방대함은 상관없다.
물론 제작하는데 아주 비싸고 사용 및 관리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지만 누군가를 무력화시키는데는 말할 필요도 없이 효과적이다.
오랜 관리 덕분에 노예들은 자신의 남은 삶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어떤 성격이나 신념을 가지고 있어도 옷과 밥, 주거지의 자유를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통제하고 있게 되면 늦든 빠르든 찾아온다.
노예주가 얼마나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노예의 상태에 달려있다.
사람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다양한 곳에 적용되는 그 논리는 당연히 노예에게도 적용되었다. 노예주의 밤낮없는 관심과 보살핌 덕에 노예들은 때 하나 묻지 않은 피부와 질 좋은 식사를 받을 수 있었다.
노예주, 도레 말틴푸스는 언제 자유를 갈망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질 좋은 식사와 청결한 몸, 깨끗한 옷까지 주어지자 노예들은 자신들이 노예라는 것을 망각하고 말았다.
그들의 손목과 발목, 목에 채워진 구속구는 어느샌가 색다른 장식품 비슷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환상이 깨질 때의 표정이 가장 가치 있는 법이지.’
노예가 자신을 노예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헐벗은 옷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내던져져 사방을 둘러보게 되는 자신.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는 수십 명의 탐욕스런 시선과 그 위의 상품을 관찰하는 보이지 않는 시선 속에서 노예는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벌써 남은 노예는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은 유난히 열기가 뜨겁다고 생각하며 노예주 말틴푸스는 가장 안쪽에 모셔둔 오늘의 상품을 향해 다가갔다.
모두가 알지만 요정은 노예로 부리기 어려운 종족이다.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는 거주지에서 나오지 않는 전통과 더불어 강력한 무력과 마법은 그들을 잡는데 가장 큰 방해물이다.
하지만 일단 잡기만 한다면 막대한 재화가 보장되는 이 상품을 잡는데 포기하는 상인은 없다. 일단 노예를 취급하는 상인 중에서는.
그런 면에서 이 흑요정은 제발로 굴러온 복덩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런 마력도 지니지 않은 채 아사할 위기에 처한 흑요정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아름다운.
성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요정은 어디에서든 수요가 있다. 공급이 그 막대한 수요를 따라잡지 못할 뿐.
말틴푸스는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의 문을 열었다. 창살에 걸려있는 줄의 손잡이를 틀어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이리 나와라-”
말은 끝까지 뱉어지지 못했다. 귀신 같은 붉은 눈을 한 무언가가 그의 목을 틀어쥔 것이다.
컥컥거리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말틴푸스가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의 목을 쥔 흑요정은 그야말로 작은 숨 하나조차 입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말틴푸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구속구를 착용한 상태에선 간수나 그가 약간만 조작을 가해도 갓난아기 이상의 힘을 낼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말틴푸스는 벌써 눈앞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꼈다. 산소가 뇌로 공급되지 않았다. 의식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 무언가가 찰칵 하고 그의 목에 걸리는 느낌과 함께 숨이 돌아왔다.
“커헉! 쿨럭, 흐어어억!”
말틴푸스가 거세게 기침을 토했다가 다급히 공기를 들이마셨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그것뿐이었다. 이상을 알아차린 것은 자신의 목에 익숙하지만 절대 채우고 싶지 않은 것이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자신의 목을 더듬은 그는 구속구의 단단한 감촉과 손가락 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냉기를 느꼈다. 말틴푸스는 고개를 들었다.
“너, 너······?”
간신히 사물을 알아볼 수 있을만큼의 빛이 지하에 머물렀다. 말틴푸스는 처음부터 그 빛의 세기에 대해 생각했어야 했음을 알았다. 원래는 노예의 상태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밝은 구체가 떠 있어야 했는데······.
“이건가?”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말틴푸스를 습격했던 누군가가 뭔가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파란 불을 밝혔다. 파츳!
그리고 엄청난 충격이 말틴푸스의 전신을 꿰뚫었다. 온몸의 근육이 한순간에 오그라들었다가 펴지는 기이한 감각이 수 초간 이어졌다. 그 수 초는 말틴푸스에게 이제까지 살아온 38년의 생애와 같은 시간이었다.
벼락에 감전된 사람도 보여주지 않을 떨림을 장시간 보여주던 말틴푸스는 구속구의 조작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철푸덕 쓰러졌다.
“몇 번 보긴 했지만 정말 효과가 좋은 도구야. 채울 수만 있으면 용족도 잡아서 부릴 수 있을까?”
“큭, 크극, 아니, 그건······ 불가능······ 해. 출력을 조절하는 마정석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내놓는 대답 속에서 말틴푸스는 경악과 거부감을 느꼈다. 그의 입은 자신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머릿속에 든 지식을 마음대로 내뱉고 있었다.
“그렇구나. 대답 고마워. 그럼 이제 나가볼까?”
흑요정이 줄을 이끌자 말틴푸스는 황급히 따라 움직였다.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마음 속에서만 기능했다. 그의 시선은 흑요정이 오른손에 쥐고 있는 줄의 끝, 구속구를 작동시키는 손잡이를 향했다.
뺐을 수 있을까? 아니, 뺐는 건 불가능하다. 말틴푸스는 38년 동안 숨쉬기 운동 말고 더 활동적인 운동은 해본 적이 없는 사내였다. 그는 주판을 굴리고 돈을 세면서 사람을 부리는 일에만 일가견이 있었다. 당연히 칼잡이의 소양 따위는 없다.
설령 칼잡이의 소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흑요정을 상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말틴푸스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위기의 순간 발휘된다는 초인적인 힘 같은 것은 드물기에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이다.
개처럼 순종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걷던 말틴푸스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곳은 노예를 전시하는 무대로 가는 길이 아니다.
“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자연스러운 존댓말이 흘러나왔지만 말하는 말틴푸스나 듣는 흑요정이나 신경쓰지 않았다. 흑요정이 말했다.
“우리는 이 건물을 폭파시킬 생각이야.”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 대답은 말틴푸스를 공황상태로 몰아넣는데는 충분했다.
***
“여기가 그 경매장이야.”
“꽤 소란스럽군.”
러셀의 말대로 발쿠르티스의 주위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종족은 거의 보이지 않고 거의 사람뿐이었다. 그건 러셀에게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러셀과 실리오, 바이젠과 칼리아는 실리오의 안내를 받으며 도시의 구역을 지났다. 밟혔던 등을 문지르는 바이젠과 주변을 둘러보며 신기해하는 칼리아가 잘 정비된 길 위를 걸었다.
외국인, 혹은 지방의 군도나 대륙에서 온 것이 분명한 피부와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에서 소리를 질렀다.
네 명 중 한 명은 어디론가로 뛰어갔고 나머지는 열렬한 태도로 자신이 홍보하는 상품의 값어치를 외치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시장의 건너편에는 커다랗고 외벽이 둥근 경매장이 보였다. 정문으로 들어서는 곳에는 엄격한 표정의 문지기와 경비병이 손님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신분을 확인시켜주는 건 대부분 마부나 하인이었다. 그들 뒤로는 화려한 조각이 양각된 4인용, 혹은 6인용의 마차가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오늘은 15일이고 경매장에서 노예를 파는 날이지. 로셀소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때 폭발음이 들리며 시장의 모든 소음을 앗아가버렸다.
저도 모르게 허리와 고개를 낮춘 사람들이 그 굉음이 난 곳을 바라보았다. 발쿠르티스의 천장에서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는 밤중에도 잘 보였다.
“······뭔가 일이 난 것 같네.”
“그런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