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교차로 (8)
러셀이 칼리아의 연락-그의 그림자에서 불쑥 빠져나와 봄날의 망아지라고 말한 까마귀-을 받고 골목길을 걸었다.
좁아졌다가 넓어졌다가를 반복하는 골목길은 구불텅거리며 오가는 사람의 공간감을 흐트리려 했다. 거리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길을 잃겠지만 러셀은 온 것만큼이나 빠르게 뒷골목을 나와 주거지로 나올 수 있었다.
대도시임을 증명하듯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었다. 여전히 너무 많은 사람이 가지각색의 외모와 의복을 입은 채 걸어 다녔다.
기다란 장포를 입고 무리를 지어 다니는 자들, 머리에 삿갓 비슷한 모자를 쓰고 있는 자, 후줄근한 후드와 로브를 입고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여인, 자신에게 맞지 않는 커다란 흉갑을 품에 안고 뛰어가는 종자로 보이는 소년.
한없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 속으로 러셀이 발을 내디뎠다.
그의 키는 인간 중에서는 마주 댈 자가 드물고 그렇기에 남들보다 높은 시야에서 주위를 볼 수 있었다.
짧은 등반을 마무리하고 빠르게 하산하기 시작한 태양은 이제 정면으로 바라보아도 눈이 아프지 않았다.
눈부신 햇살을 구름 속으로 사그라뜨리고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도시의 서북쪽으로 기울어지며 노을빛을 뿌렸다.
건물을 비스듬히 타고 내려온 적금색의 빛이 정갈한 포석이 깔린 도로와 그 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비추고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 위의 사람들이 러셀을 보며 슬슬 피했다. 놀란 눈과 휘둥그레 뜬 눈, 호승심이 담긴 눈, 두려움과 불안이 섞인 눈들을 뒤로 하고 러셀은 걸었다.
봄날의 망아지 여관은 그 이름만큼이나 쾌활한 망아지 그림이 그려진 간판을 달고 있는 여관이었다. 무려 5층이나 되는 그 커다란 여관은 아래에 지하층과 1층을 통째로 주점과 식당으로 쓰고 있었다. 그 외에는 모두 객실이었다.
러셀은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기 전부터 떠들썩 했던 소음이 문을 열자 확 커졌다.
슬슬 오후로 접어들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술과 음악으로 몸을 데우기 위해 찾은 손님들이 보였다. 종일 한 자리에서 술만 마시며 시간을 죽이는 주정뱅이, 손가락으로 현을 당기거나 튕기면서 음을 조율하는 악사, 곳곳에서 테이블을 닦는 점원들이 있었다.
러셀은 곧 일행을 찾을 수 있었다. 바와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칼리아와 아엘라시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엘라시스는 칼리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고, 칼리아는 그런 아엘라시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문을 바라보는 쪽으로 앉아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칼리아가 고개를 들었고, 러셀을 발견했다.
반가운 표정을 지으려던 것 같았다. 곧 놀란 얼굴과 동그래진 눈이 된 칼리아는 러셀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다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일이 잘 풀리진 않은 것 같구나.”
그녀의 말대로 러셀과 바이젠은 먼지가 묻어 더럽고 옷이 여기저기 찢어진 모습이었다. 뺨과 목, 팔뚝과 몸통에 묻은 시커먼 핏자국들은 전투를 하고 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러셀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 편이지. 아엘라는?”
“보다시피, 술을 진탕 마시고는 취해서 잠들었다. 도수가 높더구나.”
아엘라시스의 앞에는 작은 유리잔 서너 개가 놓여 있었다. 유리잔의 움푹 패인 곳에 투명한 빛깔의 붉거나 푸른 기운이 도는 액체가 고여 있는 것이, 칵테일을 마신 듯했다.
“큰 도시이긴 한 것 같구나. 여러가지 술을 섞어서 내놓는다니, 난 상상도 못 했던 방식이다. 저기 바텐더가 워낙에 손기술이 좋다보니 홀린 듯 다 마셔버렸다.”
칼리아가 턱짓한 곳에는 바 뒤편에 서서 정갈한 옷을 입고 수건으로 유리잔을 닦는 초로의 남자가 있었다. 주점을 관리하는 관리인인 듯했다.
“저녁은?”
“먼저 먹었다. 너희들도 먹어야겠구나. 그전에 좀 씻어야겠다만. 베티?”
“아, 예!”
어디선가 점원이 후다닥 뛰어왔다. 머릿수건을 질끈 묶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당차 보이는 얼굴의 여자애였다. 베티가 오자 칼리아는 러셀을 보며 말했다.
“먼저 씻고 오거라. 여관 뒤편에 우물이 있더구나. 음식은 미리 주문해 놓겠다.”
러셀은 칼리아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안 그래도 목과 가슴팍에 묻은 핏자국이 거슬리던 참이었다. 그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바이젠을 던지듯 의자에 앉혀놓자 기다리고 있던 베티가 앞장섰다.
“따라오세요”
베티를 따라가자 좁은 마당에 우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켠에는 마구간의 뒤편이 보였다. 초가로 지은 지붕과 통나무로 울타리를 세운 곳 안쪽에 러셀의 말 크라이와 일행의 말이 들어가서 자고 있었다. 다른 말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우물이요. 두레박은 저기 걸려 있고요. 저, 그런데 혹시 귀족이세요?”
“왜?”
“아니예요?”
“그건 왜 묻는 거냐?”
베티는 우물쭈물했다. 이걸 말해도 되나 고민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하지만 곧 베티는 허리를 푹 숙이며 인사하더니 뒤로 돌아 달려갔다.
달려가는 꼬마 베티를 보던 러셀은 코트를 두레박이 걸려 있던 나무 걸이에 걸어둔 다음 상의를 벗었다. 직전의 전투로 인해 찢어지고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천 옷은 옷의 기능을 모두 잃고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천 쪼가리를 바닥에 던진 그는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퍼 올린 다음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차가운 물을 몇 번 뒤집어 쓰는 것으로 먼지와 핏물을 닦아낸 러셀은 코트 속에서 새 천 옷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두레박에 물을 담아 식당으로 돌아갔다.
식당에는 칼리아 혼자만 있었다. 아엘라시스는 없는 것이 방에 들어가 자고 있는 듯했다. 마력 감지로 그 사실을 확인한 러셀은 두레박을 들고 칼리아와 바이젠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직 의자에 걸터앉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바이젠의 머리 위에 물을 부어주었다.
“으아악! 우풉, 에퉤퉤! 시발, 뭐야?!”
날카로운 충격에 벌떡 일어선 바이젠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바이젠의 뒤통수를 러셀이 툭 치며 말했다.
“물이다. 일어났으면 밥 먹을 준비해라.”
“어, 엉?”
때에 맞춰 베티가 쟁반에 음식을 담아 종종걸음으로 걸어왔다. 바이젠은 어리둥절한 표정 그대로 의자에 앉았다.
“뭐야. 당신이 이겼소?”
“밥 먹어라.”
“아, 예.”
늦은 저녁을 해치운 뒤 입가심으로 나온 맥주를 홀짝이며 바이젠이 말했다.
“그 붕대 감고 개같은 가면 쓴 놈이 만만찮은 놈이 아니었는데. 완전히 죽인 거요?”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더군.”
“그건 뭔 헛소리요?”
“그건 껍데기였다.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전령하고 다니는.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놈이었지. 아마 본체는 다른 곳에 있을 거다. 거기서 꼭두각시를 부리고 있겠지.”
“아니, 그게 인형이었다고······?”
고작 인형에게 졌다는 사실에 바이젠이 어이없어했다. 그런 그를 러셀이 현실로 이끌었다.
“사냥개를 잡아먹는 놈이라는 건 알았다. 자기 손을 더럽히는 작자가 아니라면 기꺼이 더러워질 손이 많다는 의미도 되겠지. 아는 놈들 있나?”
“딱히. 난 그냥 적당한 의뢰만 받아서 해결하고 밥 빌어먹던 놈이야. 주로는 사람을 데려오거나 배달했지. 난 그리 참을성이 높은 편이 아니었거든. 누나랑은 다르······ 게.”
당연하지만 암살에 필요한 것은 날카로운 비수나 어두운 밤이 아닌 인내다.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진작에 알고 있었으니 넘어가고. 그 누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데. 알다시피 난 그쪽 세계에 연이 없으니까. 너도 넓어보이는 건 아닌 듯하고.”
바이젠은 자신의 입을 떼려주고 싶다는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토하듯 말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피붙이를 만나겠다고.”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네 누나는 청부업 일을 하고 있나?”
바이젠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망이 좋은 직업은 아니지만 배운 게 배운 거니까. 알았소. 우리 누나를 만나고 싶다는 거지?”
“길을 찾으려면 길잡이를 찾아야 하니까.”
“젠장. 알았소.”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칼리아가 뒤를 가리켰다.
“굳이 찾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뭐? 허억.”
의문성을 흘리며 뒤를 돌아본 바이젠이 숨막히는 소리를 냈다. 그곳에는 전체적으로 보면 닯지 않았지만, 요모조모를 따져보면 바이젠과 비슷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인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이 개잡놈의 새끼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이제서 기어 들어왔군. 나한테는 한마디 말도 없이 말이지.”
“이런 시발.”
바이젠은 탈출을 시도했고 간단히 저지당했다. 벌떡 일어서려는 그의 뒤통수를 빡 소리가 내게 치고는 정강이를 걷어차 고꾸라지게 하는 솜씨는 썩 괜찮은 것이었다.
“아으으윽······ 미, 미안하오 누님. 근데 나도 사정이 있어서······.”
“뭔 사정?”
바이젠의 등에 발을 얹어놓고 힘을 주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둥근 테이블에 자리하고 있는 러셀과 칼리아를 면밀히 살피던 그녀는 러셀의 얼굴에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
그리고는 칼리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넌 불합격.”
칼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알 것 같다만, 왜 불합격이지?”
“나보다 예쁘니까. 그리고 저 남자는 잘생겼으니까.”
씨익 웃은 여인은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자리에 동석했다. 그러면서도 한쪽 발은 바이젠의 등위에서 치우지 않았다.
“난 실리오라고 해. 그쪽들은?”
“러셀.”
“칼리아다.”
“귀족들인가? 범상찮은 외모들인 걸 보면 거의 확실한데. 물론 귀족들이라고 전부 미남미녀는 아니지만.”
“의뢰가 있다. 받아줄 텐가?”
실리오는 물끄러미 러셀을 보다가 한쪽 입꼬리만 당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말하기 싫다는 거군. 이해해. 어떤 의뢰지? 내용은 들어보고 판단해야지.”
“네 남동생한테 듣기로 청부업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맞나?”
“겸사겸사. 일거리가 많이 들어오는 편은 아니지만 한 번 들어오면 적어도 석 달은 놀고먹을 수 있는 직업이지.”
“너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도 있을 테고. 그런 사람들 중에 내가 말하는 인상착의와 비슷한 자를 아나?”
러셀은 그가 상대했던 붕대를 감고 인간 가죽으로 가면을 만들어 쓰고 다니는 남자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실리오는 턱을 쓰다듬으며 침묵했다.
침묵이 길어지면서 그녀의 발에 밟힌 바이젠이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인상착의를 가지고 있는 놈이 둘이나 있지는 않겠지.”
“알고 있는 것 같군.”
“나도 소문으로만 들어본 거야. 직접 본 적은 없어.”
“누구지?”
“내 질문부터. 그놈은 왜 찾는 건데?”
러셀은 턱짓으로 실리오의 발에 깔려 있는 바이젠을 가리켰다.
“네 남동생이 한 의뢰가 나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고, 난 그 의뢰자를 족치러 왔기 때문이지.”
“이런 멍청한 놈.”
“악!”
퍽 하고 실리오의 신발이 바이젠의 머리를 걷어찼다. 주점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남동생을 바라보며 혀를 찬 실리오가 말했다.
“그놈 이름은 리벤부스야. 다른 말로는 마약왕이라고도 불리는 놈이지. 왜냐면 이쪽 골목 상권의 마약은 그놈이 재배하고 유통하고 있으니까. 제이비르 백작의 가장 큰 돈줄 중에 하나이기도 하지.”
“백작이 직접 마약을 재배한다고?”
“아니. 제국법으로 당연히 마약 재배는 금지야. 연금술과 마탑의 재료를 위해 키우는 것 말고는. 하지만 지금 제국 사정이 어떻지?”
러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내전 중이지.”
“맞아. 황제가 독에 중독된 지는 이미 1년이 넘었지.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아있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태라고 하더군. 그 상황에서 황녀와 황자는 서로가 정통한 후계자를 자리매김하기 위해 각지에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고. 당연히 행정이 제대로 돌아가겠어? 리벤부스는 그 틈을 노려서 백작에게 접근한 놈이야. 그리고 백작은 받아들였지. 정상적인 군주라면 마약 같은 쓰레기를 재배하지도, 유통시키지도 말아야 하지만 그놈은 제정신이 아닌 귀족이니까.”
러셀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제이비르 백작에게 자식이 있나?”
실리오의 얼굴에 비틀리지 않은 미소가 지어졌다.
“마음에 드는 질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