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교차로 (6)
기절한 케텔즈를 바닥에 놓은 순간, 아래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러셀은 감각에 집중했다.
3층 방에 들어와 케텔즈가 무언가를 조작한 순간부터 그의 감각은 건물 밖으로 뻗치지 못했다. 아직 건물을 뒤덮고 있는 투명한 역장이 풀리지 않은 탓이다.
러셀은 그대로 바이젠이 아래로 떨어진 구멍으로 다가간 다음 그 아래로 내려갔다.
그 육중한 덩치가 떨어졌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가 나고, 러셀은 2층을 둘러보았다.
위에서처럼 바이젠 또한 격렬한 환대를 받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러셀은 신발을 축축히 젖게 만든 것이 물이 아님을 알았다.
사방에 가득한 시체들 사이에서 러셀은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바이젠을 발견했다. 그의 주위에 무수히 꽂혀있는 부러진 칼날도.
그의 앞에는 한 명이 서 있었다. 그의 외견은 특이했다. 검은 붕대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것이 특이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쿨럭, 시발. 형씨, 이놈 겁나 세······.”
바이젠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그리 외치다가 툭, 하고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죽은 것은 아니다. 아직 심장이 뛰고 있으니. 하지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러셀이 이 2층 바닥에 내려섰을 때부터 저 붕대를 감은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영역에 러셀이 마음대로 침입했기 때문이었다.
러셀은 자신의 인지 감각이 무언가에 가로막혀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억지로 확장시켰다. 그것은 마치 호수에 커다란 부피와 밀도를 가지고 있는 돌을 떨어뜨린 것과 같은 효과를 일으켰다.
마력을 느낄 수 없는 자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파문이 번졌다. 2층의 세계는 둘로 양단되었고, 붕대를 감은 자는 밀려난 자신의 영역을 확실하게 느꼈다.
“좋은 나들이 복장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을 걸면서 러셀은 자신의 감각을 점검했다. 환상이나 환각이 아니었다. 코앞에서 보고 있음에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생명체라면 응당 나야 할 체취나 심장의 박동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러셀은 바위나 벽이 사람의 형태를 한 채로 서 있다는 감상을 받았다.
그의 눈은 곧 붕대로 향했다. 의복 하나 없이 전신을 칭칭 감고 있는 붕대는 일반적인 것처럼 희지 않고 검은색이었다.
그 검은 바탕에는 아주 희미한 빛을 반사하는 금빛의 문자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저 붕대가 사용자의 기척을 감추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런가?”
러셀에게 등을 지고 서 있던 붕대의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얼굴에도 붕대가 감겨 있을 것이라는 러셀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사람의 살가죽을 벗겨낸 가면이라는 것이었다.
눈이 없는 텅 빈 구멍과 축 늘어진 창백한 피부의 가면. 나무도 아니고 돌도 아니며, 차가운 쇠도 아닌 살가죽이 러셀을 보다가 저절로 움직였다.
“상관없다. 다른 상대를 찾으면 되니까.”
쉬고 거친 목소리였다. 녹슨 강철검을 숯돌에 가는 것과 비슷한.
입꼬리가 좌우로 말려 올라가며 미소 비슷한 것을 짓는 가면을 보며 러셀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런 놈이 있다는 말은 케텔즈에게 전달받지 못했는데. 일처리 제대로 한다는 것 하나로 뽑은 놈이었건만. 실망이군.”
러셀은 대꾸하는 대신 씩 웃어주었다. 살가죽 가면이 저절로 움직이며 이번에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재밌는 놈이군. 여기 널브러져 있는 놈보다도 더. 어떤 사이냐?”
“나한테 줘터진 놈이지.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걱정해야 하는것 아닌가? 많이들 모은 것 같은데.”
“상관없다. 어차피 한번 쓰이다 버릴 버러지들이다. 뒷골목에 저런 군상들은 차고 넘치지. 한 줌 퍼다 버리는 걸로는 티도 안 날 만큼.”
말을 마친 붕대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실력을 모르는 상황은 러셀에게 많이 찾아오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눈으로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 가진 마력의 보유량과 버릇 등을 유추할 수 있었으니까.
겉으로 관찰되는 부분이 실력의 전부는 물론 아니지만,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 붕대 괴인의 마력은 쌀알 한 톨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 바이젠보다는 강하군. 그것도 가진 무기를 모두 부러뜨리고 농락할 정도.’
걸어오면서 붕대 괴인의 살가죽 가면은 계속 표정을 바꾸었다. 기쁨, 슬픔, 괴로움, 감탄, 놀람 그 밖의 여러 표정들.
“생쥐를 잡는데 소 잡을 칼을 쓰는 것이 아닌가 했던 걱정은 덜어줄 수 있겠군. 이만한 놈을 잡아가면 그놈들도 꽤 놀라워하겠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도 모를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진 가면은 종국에 무표정이 되었다.
그 직후 쏘아진 검은 섬광이 러셀을 강타했다. 날카롭게 반응한 러셀의 도끼가 그 섬광을 맞받아치며 뒤로 몸을 날렸다.
마지막 서리를 쥐고 있던 왼손이 잘게 떨릴 정도의 위력이다. 그리고 그 위력을 감당하지 못한 2층의 바닥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산산이 부서지는 나무와 돌의 잔해가 일으키는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 먼지가 확 걷히며 가라앉았다.
“네 얼굴 가죽을 벗길 때는 무슨 신음을 흘릴까?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나도 오랜만이라 흥분되는데.”
“이거 순 변태 새끼 아니야.”
슈아아아악!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늦게 울렸다. 붕대 괴인의 존재감이 사라졌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러셀은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오감으로 알아차리려 하면 늦는다. 퍼트린 그의 마력을 헤치고 들어오는 불균형한 움직임을 잡아채야 했다.
마력 감지에 걸리는 기시감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러셀의 몸이 비틀렸다.
동시에 그의 전방에서 나타난 붕대 괴인이 붕대에 감긴 자신의 왼 주먹을 휘둘렀다.
그 움직임을 선명하게 꿰뚫은 러셀의 오른손이 손바닥을 쫙 펼쳤다,
콰아아아앙!
두 사람을 중심으로 막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1층의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땅에 내려앉았던 먼지가 다시 크게 일어나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온 사방이 뿌연 잿빛으로 가득 찬 시야 속에서 붕대 괴인이 예의 비틀린 미소를 가면을 통해 만들었다.
“괜찮군. 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러셀은 대꾸하지 않고 씩 웃음만 지었다.
그의 도끼를 쥐지 않은 손에서 전격이 넘실거리며 일어났다.
파지지지지직······!
어두운 실내를 고색창연한 푸른색으로 덧칠하며 러셀이 말했다.
“위에서도 그랬지만, 말들이 너무 많군.”
침묵한 붕대 괴인이 바닥을 박차며 덤벼들었다. 두 갈래의 마력이 격돌하며 다시 한 번 무수한 섬광과 충격파를 만들었다.
괴인의 몸에서 검은 붕대가 끝도 없이 늘어나며 사방을 가득 채우고 넘실거리더니 그대로 쏘아졌다. 그 검은 붕대를 러셀의 마지막 서리가 가르며 얼리고 전격이 찢어발겼다.
한 호흡을 내쉬기도 전에 내뻗고 수거되는 수백 번의 공방. 범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쏘아지고 휘둘러지는 검은 붕대가 바닥과 벽, 천장에 부딪치자 그대로 반사되며 러셀을 가두고 공격했다.
건물의 실내를 이용하는 노련한 공격 방법이었다. 마력이 부여된 검은 붕대는 강철과 비견되는 강도와 절삭력으로 호시탐탐 러셀의 신체를 가르기 위해 날아들었다.
마치 수십 개의 거미줄이 몰아치며 러셀을 꽁꽁 묶으려 두는 모양새 속에서 러셀은 날파리처럼 감금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러셀은 날파리가 아니었다. 그의 손에서 마지막 서리가 소리 없이 한기를 내뿜자 붕대가 얼어붙었다. 러셀이 내뿜는 냉기는 이제 사물을 얼리는 개념을 넘어 마력 그 자체를 얼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마력을 매개로 생성된 냉기가 그대로 붕대에 스며들어있는 괴인의 마력을 얼려버렸다. 자연히 동력을 잃은 붕대는 힘을 잃은 채 늘어졌고, 그 위로 새파란 전격이 달렸다.
“카하하아아!”
괴인이 기합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전격을 뿌리쳤다. 주인의 몸에서 멀어진 만큼 마력의 통제가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
괴인은 얼려지고 잘려나간 붕대를 신경쓰지도 않은 채 발을 굴렀다.
쿠우웅-!
러셀보다 머리 한 개는 작은 몸집이 구른 발길질이었지만 결과는 딴판이었다. 1층의 바닥이 거칠게 진동하며 흔들리더니 처음의 검은 섬광이 동심원을 그리며 러셀을 덮쳤다.
일순 확 퍼져나간 공기와 그 안에 담긴 의념이 러셀의 마력을 밀어냈다. 러셀은 도끼에 서려있던 냉기와 오른손에 맺혀있던 전격의 창이 휘날리며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괴인이 왼발을 축으로 삼아 오른발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
강철조자 절단해버릴 기세의 발차기가 날아오는 순간, 러셀의 허리가 뒤로 젖혀졌다.
가슴과 코끝을 스쳐가는 궤적은 그대로 러셀 뒤의 벽에 명중하며 와르릉, 와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벽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역장에 타격이 간 것은 분명해 보였다. 투명한 역장은 이제 한계에 달한 듯 거슬린 소음을 내며 깨진 균열들을 수복했다.
검은 붕대를 두르고 인간의 안면에서 뜯어낸 살가죽을 가면처럼 착용한 괴인이 다시 러셀에게 돌진해왔다.
비틀린 목소리와 사상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정신이 온전치 않은 적임은 확실했다. 그리고 놈이 지니고 있는 무술의 수준이 높은 것 또한 확실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배웠다기보다는 길 위에서 만든 것처럼 난잡하고, 보다 살기가 짙은 공격들이었고, 그렇기에 러셀의 눈에는 그 타격점과 궤도가 눈에 잡힐 듯 선명했다.
필요한 것은 단 한 방이면 된다. 단단한 바위를 깨는 데에 필요한 힘은 딱 그 균열을 깨는 정도면 충분하다.
여전히 괴인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반응하는 데에는 오감이 아니 마력의 감지다. 다른 말로는 육감이라 부르는 그 감각이 러셀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고, 그는 그 길 위를 천천히 나아갔다.
왼쪽 옆구리를 타격하는 주먹을 도끼의 옆면으로 막아내 흘리고, 뒤로 반바튀 돌리며 목을 노리는 왼팔을 막아낸다.
바닥에 부딪쳤다가 반사되며 튀어오르는 섬뜩한 절삭면을 가진 붕대는 코트에 최소한의 마력을 담아 방호력을 끌어올려 막아낸다.
언젠가부터 러셀은 코트를 갑옷으로 변환시키는 것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를 러셀은 안다. 나태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단단하고 두꺼운 갑옷은 확실히 착용자에게 안정감을 선사해준다.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고, 내 공격은 무사하게 상대를 도륙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감각에 취하게 되면 죽음이 턱밑까지 차올라도 알아차리는 것이 늦게 된다. 러셀은 흔들리는 줄다리기 위로 걸음을 내디뎠다.
출렁이며 흔들리지만, 동시에 균형을 잡고 믿음을 가진 자에게 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단한 길이 될 수도, 허공이 될 수도 있다.
지독할 정도로 쌓아온 전투 경험과 직관이 러셀이 걸어왔던, 그리고 걸어갈 길을 비췄다.
괴인의 능력은 상당 부분을 붕대의 강도와 절삭력, 예상하지 못할 반사각을 노리며 튀어오를 예측불허의 공격에 의지하고 있다.
공격의 경로는 다종다양하고 복잡하지만 살기가 짙게 밴 공격이 아닌 것은 의외로 격파하기 어렵지 않았다.
안전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것에는 자신이 두르고 있는 유물에 대한 압도적인 자신감이 바탕에 있는 것일까.
쑤아아아아악!
러셀을 빗겨간 충격파가 바로 위의 천장을 꿰뚫고 올라가며 무수한 파편을 흩날렸다. 그 아래로 떨어지는 시체들과 살점들은 덤이다.
그 핏물과 살점을 굳이 피하려 하지도 않으면서 러셀의 발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괴인이 쏘아낸 오른팔의 아래를 파고들며 들어가는 한순간의 빈틈. 괴인의 들리지 않는 호흡과 러셀의 심호흡이 교차하며 엇갈리고.
한참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으나 공세의 빈틈만을 찾아 기회를 엿보고 있던 러셀의 전투감각이 운동신경의 보조를 받으며 목표한 지점으로 내달렸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러셀의 오른손이 주먹을 쥐지 않고 내뻗어진다. 다섯 손가락은 구부리고 손바닥만을 내민 기묘한 자세.
괴인의 보이지 않는 시선이 경악을 담아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마력 감지로 느끼며 러셀의 장저가 괴인의 가슴팍에 닿았다.
이때를 위해 꾹꾹 응축되었던 마력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질주하며 러셀의 마력 회로를 뜨겁게 달궜다. 근육이 부푼 자신의 오른팔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러셀은 그대로 괴인의 가슴팍 속으로 밀어넣었다.
한껏 압축된 벼락의 폭포가 장심에서 부풀어 오르고, 그대로 괴인의 체내에서 폭발했다.
콰자자자자자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