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교차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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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시작되었던 전투가 점심이 되기 전에 끝났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지는 않는다.
부상자들의 신음이 종군사제들의 치유 기도문과 성실한 외과적 치료를 통해 잦아들 즈음이었다.
전령은 허락도 없이 유리아의 막사에 데굴데굴 굴러들어오는 것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리고 유리아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무례보다는 더 중요한 것을 알고 있는 지휘자였다.
“똑바로 말하라. 뭐가 일어나고 있다고?”
그녀의 서릿발 같은 눈동자와 목소리에 전령은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침착하게 소리쳤다.
“시, 시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두 시간도 되지 않는 전투에서 사람이 죽으면 얼마나 죽겠냐고 생각할 수 있다. 병력의 양과 질은 의미없는 토론을 나누는 자들에게 유의미한 재료가 아니다.
그건 마치 책 겉표지를 뚫어져라 본다고 그 속의 내용을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바보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치들에게 직접 낡은 나무 창과 쇠 투구를 씌워주고 전쟁을 경험시킨다면 들을 말이 많을 것이다. 물론 살아 돌아온다면 말이지만.
시체를 파묻기 위해 만든 구덩이는 많았다. 전투를 치른 직후 돌입된 작업에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겠지만, 유리아는 직접 구덩이를 만듦으로써 불만을 일축했다.
구덩이를 판 게 아니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삽질이 아니라 칼질이 대지에 퍼부어졌기 때문이었다.
빛으로 버무려진 듯한 칼이 몇 번 그어지고, 커다랗고 깊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유리아는 이렇게 말했었다.
“제군들은 나보다는 깔끔하게 팔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병사들은 군말 없이 작업에 착수했다. 곧 육백 정도의 발가벗긴 시체들을 밀어 넣을 구덩이 수십 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전령은 그 구덩이들에서 시체들이 기어 나오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가장 먼저 발견한 병사가 죽은 다음 일어나서 그들과 같이 뛰어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 나는 표정으로 전한 전령은 명령을 기다렸다.
유리아의 명령은 그보다는 직관적이었다.
“전투 마법사들을 불러들여라.”
병사들이 판 구덩이는 주둔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파게 했다. 미관상 좋지도 않을뿐더러 썩기 시작한 시체에서 올라올 악취와 그 악취에 꼬일 들짐승, 날짐승들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구덩이들에서 언데드가 된 시체들이 기어 나올 줄은 유리아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이제까지 아드리칸 황자의 군대에서 흑마법이나 혈마법에 준하는 사악한 비술은 목격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막사에서 뛰어나온 유리아는, 그러나 그렇게 급하게 달릴 필요가 없음을 곧 깨달았다. 구덩이에서 기어 나온 시체들의 걸음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기껏해야 속보 정도일까.
주둔지의 먼 바깥, 대략 오백 미터의 거리를 두고 만들었던 구덩이에서 나온 시체들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유리아와 그녀의 호위 기사, 참모들, 종군사제들, 마법사들이 나란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기적거리면서 걸어오는 시체들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헛구역질을 유발하게 만들었다.
온전한 시체는 없다. 목이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이 가장 온건한 시체였다. 대개는 말발굽에 머리가 패여 죽었거나, 얼굴이 사라졌거나, 갈비뼈가 통째로 뜯어졌거나, 사지 중 한 개, 혹은 두 개 이상이 없는 몸이었다.
그런 것들이 펄떡이면서 오는 속도가 빠를 리는 없었다.
“오라버니가 드디어 그들의 힘을 빌리기로 작정했나 보군. 생각보다는 늦었어. 발사.”
중얼거림 이후 들린 명령은 그만큼 어조가 평이했기에 전투 마법사들은 약간 늦게 반응했다.
그들을 지휘하는 소대장이 한 마법사의 정강이를 발로 까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전투 마법사들은 제각기 주문을 외우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타오르는 냉엄한 열기여-”
“지옥에서 넘실거리는-”
“내가 폭풍이 되리라-!”
가지각색의 주문과 시동어가 내뱉어지자 전열의 위, 허공에 열기와 함께 바람이 뭉치기 시작했다.
모여든 열기는 격렬한 화염의 창극이 되었고, 몰아친 바람은 불꽃을 크게 키웠다.
“발사!”
소대장이 치켜들었던 팔을 내리자 마법사들의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화염 세례가 그대로 달려오는 시체들에게 쏘아졌다.
“키에에에에-!”
“꺄아아아악!”
성대에서 기괴한 비명과 신음을 외치며 불덩이에 맞은 시체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뛰어오르는 시체들은 겨드랑이에서 불꽃의 날개가 자라난 악마들처럼 보였다.
“한 점 집중보다는 넓게 퍼트려서 쏠 수 있도록. 여유가 되는 마법사들은 바람의 방향을 반대쪽으로 바꿔라.”
“예!”
전달되는 지시에 소대장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화염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는 시체들을 보며 유리아는 종군사제들을 뒤로 물리게 한 다음 찬송가를 부르게 했다.
전방에서 일어나는 화형과 더불어 사제들이 맑고 청량한 목소리로 토하듯 부르는 노래는 기묘한 감상을 만드는데 충분했다.
병사들은 각자 믿는 신을 속삭이거나 부르거나 외치면서 기도했다. 기도와 찬송가를 배경으로 시체들은 화형식을 마치고 드러누웠다.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시체들은 눕는 것도 갑작스러웠다.
짙은 육향이 바람을 타고 병사들 사이를 지나쳤다. 밥을 먹었음에도 그 향기는 식욕과 함께 침을 고이게 했고, 그 다음은 참을 수 없는 자괴감을 느끼게 했다. 지금 맡아지는 것은 인육이 구워진 향기였다.
유리아는 무심한 눈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까맣게 익은 시체가 곱아든 자세로 누워 있다.
불에 탄 인간의 신체는 안쪽으로 곱게 된다. 뜨거운 열기가 피부와 근육을 녹였다가 안으로 수축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형을 당하게 되면 대개 태아가 웅크린 것 같은 자세가 된다.
고기가 탄 내음과 평원에서 무수하게 피어오르는 하얗고 검은 연기를 보며 그녀는 사람의 가치에 대해 생각했다. 유리아가 말했다.
“회군한다.”
지휘관과 참모들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공기 중에 자욱한 인간 고기의 냄새를 피하려는 동작을 굳이 감추지 않으며 그들은 재빠르게 회군 명령을 내렸다.
도열했던 병사들은 빠르게 구축했던 진지를 허물고 막사와 천막을 철거하고 접었다.
하루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삭막한 계절은 해를 빠르게 종군하게 할 것이다. 유리아는 고개를 들어 성의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평야와 낮은 산릉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페르거 평원의 저편에 그녀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장난질을 쳐놓은 자 또한 거기 있을 것이다.
유리아는 이번의 장난질에 숨겨진 경고를 숙고했다.
어떤 경고일까. 시체를 일으켜 걸어가게 할 수 있는 마법을 그녀의 병사들이 감시하는 주둔지 내에서 시전할 수 있는 마법사의 존재?
아니면 사자死者를 모욕할 각오나 그를 개의치 않는다는 의지에 대한 표시?
아니면 이미 죽은 육백의 병사를 다시 죽이게 된 것일까. 이제 그녀는 죽은 것에 대한 죽음 또한 집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건 이제까지 그녀가 생각해두지 않았던 사형 집행의 방식이었다.
“······.”
수백의 죽은 시체들이 평야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은 몇 시간 전에도 똑같이 있었던 광경이다.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흑백의 차이가 있다. 냄새 또한.
유리아는 실감했다. 사람의 부재를. 유리아라는 인물이 없을 경우, 혹은 그녀가 자의적, 타의적으로 부재한 경우 이 군대와 병사들을 이끌 수 있을 만한 존재의 부재.
모든 집단에는 2인자가 있다. 그리고 지금 유리아의 세력에는 2인자가 없었다.
그 사실을 실감하며 유리아는 몸을 돌렸다.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그녀는 환멸을 느꼈다.
***
케텔즈가 부순 룬석의 이름은 감각 차단이라는 주문이 붙은 룬석이었다. 직관적인 주문 이름 그대로 감각을 차단하는 섬광을 내뿜는 이 룬석은 자칫하면 시전자 또한 그 주문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눈을 꾹 감고 돌을 부순 케텔즈는 다시 눈을 떴을 때 덩치에 맞지 않게 잽싼 덩치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아 있을 것을 기대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그러나 케텔즈는 실망감을 느낄 사이도 없이 옆으로 몸을 날려야 했다.
쩌엉-!
러셀의 주먹이 케텔즈의 머리통이 있던 자리를 강타하며 난 소리다. 유리는 깨지지 않았고, 대신 반투명한 푸른 역장이 파문을 그리며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졌다.
러셀은 마력이 가득 담긴 주먹질에 부서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는 창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건물 전체에 도배를 해놨군. 돈이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감당이 되던가?
“어떻게 멀쩡한 거지? 주문의 범위에 있는 걸 확인했는데!”
둘은 서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답을 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러셀이 다시 말했다.
“바이젠만 잡으려 한 게 아니군? 또 누가 표적이지?”
“이름이 뭐냐?”
러셀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 질문은 꽤 답하기 쉬운 것이었다.
“러셀.”
마안을 꺼트린 러셀이 뚜벅뚜벅 케텔즈에게 걸어갔다. 뒤로 한바퀴 구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케텔즈가 무언가를 쏘아냈다.
반사적으로 쳐낸 그것이 또 다른 룬석임을 깨달은 러셀은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것보다 쳐낸 충격에 박살난 룬석에서 새하얀 냉기가 터져 나오는 것이 더 빨랐다.
케텔즈는 이번에야말로,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과연 러셀은 냉기를 온몸에 휘감으면서 케텔즈에게 돌진했다.
그 순간 아래쪽에서 바이젠을 2층 바닥으로 추락시켰던 것과 동일한 과정이 일어났다.
바닥이 무너지면서 수십 개의 날붙이가 솟구쳐 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마저 같지는 않았다.
따다다다당!
쇠 부딪치는 소리와 불똥이 튀며 얼음 조각에 닿았다가 피식 꺼지며 사라졌다. 케텔즈는 러셀이 언제 저 도끼를 뽑아들었는지 보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러셀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러셀은 어느새 그의 주위로 수십 명이 도래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1층에서 봤던 얼굴들이었다.
“고작 두 명을 상대로 이게 무슨······.”
개중 우락부락한 남자가 유성추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하다가 쓰러졌다. 그리고 상체보다 조금 늦게 하체가 뒤로 넘어갔다. 피는 흐르지 않았고, 시선들은 곧 한 곳을 향해 모여들었다.
시선의 주인이 말했다.
“말은 필요 없다.”
그리고 러셀의 도끼가 얼어붙은 유혈의 조각들을 흩뿌리며 파괴적인 궤적을 그었다.
그 궤적에 맞서 습격자들은 각기 자신이 들고 있는 무기를 내밀었다. 단두대에 목을 내민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다종다양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가 충분히 수십 명의 사람을 학살할 수 있다는 실력과 믿음을 가지고 있던 용병들은 정작 자신이 그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썩둑 잘리는 근육과 뼈가 비명을 대신하고 쏟아지는 피가 신음을 대신했다. 얼어붙은 피 알갱이들이 모래알처럼 구르며 바닥을 수놓는 장면은 노련한 용병이라도 겁에 질리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콰아아앙!
러셀을 중심으로 터져나온 냉기의 폭사가 용병들을 덮쳤다. 가공할 냉기에 저항할 수 있던 사람은 소수였다.
실시간으로 사람이 ‘갈려나간다’라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된 케텔즈가 도망치려는 자세를 취한 것을 나무랄 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케텔즈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저 무지막지한 괴물을 잡아 죽이기 위해 등을 보였다.
“쏴라!”
“멈춰라.”
3층의 방을 격리시키고 있던 벽면들에서 갑자기 구멍이 생겨나며 쇠뇌가 쏘아졌고, 멈췄다.
케텔즈는 최소한 삼십 개는 넘는 쇠뇌가 러셀의 몸 바로 앞에서 거짓말처럼 멈춰 있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분명 날 놀리려고 일부러 말한 거겠지.’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성큼성큼 걸어온 러셀이 케텔즈가 휘두른 칼을 도끼날의 걸이로 휘감아 부러뜨린 다음 그의 멱살을 쥐고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발이 바닥에서 떠올라 버둥거리게 되었다. 코앞에서 번쩍이는 자색의 눈동자를 보며 케텔즈는 비굴하게 웃었다.
“아직 준비한 게 더 있는데, 그것만 보여주면 안 될까?”
러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안 돼.”
쾅!
순식간에 가까워져온 주먹이 케텔즈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