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교차로 (4)
***
전쟁은 돈을 빨아먹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다.
아드리칸 황자의 군대가 크게 전열을 물리고 그만큼 진지를 확장 공사할 수 있게 된 페르거 평원에서 황녀는 수많은 전리품과 장비들, 미처 회수하지 못한 군량을 수거했다.
“더 깊게 파라! 폭은 더 넓게!”
평원의 구석에서 병사들이 십인장, 백인장의 지휘를 받으며 삽으로 구덩이를 팠다. 죽은 시체들을 몰아넣을 곳이었다.
정오에 올랐던 해가 조금씩 기울어지고, 전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해치워야 할 일은 산더미 같았다.
구덩이를 다 판 다음에는 시체를 한데 모아 밀어넣어야 했고 그다음에는 병사들에게 밥을 배불리 먹여야 했다.
유리아가 직접 군을 지휘하기 시작할 때부터 신경을 기울인 것이 바로 보급이었다. 보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는다면 전쟁은 고사하고 작은 회전마저 제대로 임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부서진 칼과 창, 갑옷과 투구의 교체는 물론이지만 밥이 가장 중요했다. 병사들은 하루 2끼가 주어진다는 것과 그 끼니에 고기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평생을 농노나 노예로 살면서 살코기 한 번 먹어보지 못한 자들은 전쟁에 참여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고기를 뜯어보기도 했다.
“전하, 페르젠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라.”
유리아 혼자 쓰는 넓은 막사에 투구를 겨드랑이에 낀 기사가 들어왔다. 기사는 황녀에게 예를 취한 뒤 보고했다.
“병력의 재배치를 완료했습니다. 구덩이는 계속 파는 중입니다. 전사자는······.”
유리아는 기사의 보고를 들으며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아드리칸은 이번의 패배에서 최소한 2만의 병사를 잃었다. 남은 군대는 이제 3만에서 4만 가량.
반면 그녀가 지휘하고 있는 군대는 2만을 간신히 넘긴다. 대부분은 징집병에 창도 제대로 쥘 줄 모르는 농민들이었지만 그녀는 막대한 훈련과 질 좋은 식사로 봉합했다.
임시적인 봉합이었다. 실밥은 언젠가 뜯어질 것이고, 상대방은 그 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상적인 수는 당장 병력을 전진시켜 후퇴한 황자의 군대를 점진적으로 압박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급선을 그렇게 길게 늘릴 수는 없고, 무엇보다 성과 너무 멀어지게 된다. 또 지원군을 무시할 수 없다.
인근의 도시 중 브라실트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었다. 황자의 가장 큰 후원자인 제이비르 백작이 다스리는 영지의 주도主都다.
가장 날랜 말로 달린다면 하루에서 이틀 거리의 도시. 영역을 넓혀서 그 도시까지 점령할 수 있다면 아드리칸과 제이비르 백작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터.
다만 명분이 없다. 명분이······.
“전하? 전하!”
유리아는 어느새 자신이 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차마 그녀의 몸을 건들이지 못한 기사가 소리 높여 부른 것에 깨어난 유리아가 뻑뻑한 눈꺼풀을 애써 움직이며 고개를 들었다.
“알겠다. 이만 돌아가 쉬어라.”
경례를 한 기사가 돌아가자 유리아는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마력을 다루며 육체를 강화할 수 있는 초인인 그녀에게 육체적인 피곤함은 적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정신적인 피로함이었다. 황궁에 돌아오자마자 유리아에게 닥친 것은 아버지의 쓰러짐, 부평초처럼 나부끼는 후계자라는 자리, 이미 오래 전부터 물밑으로 눈치를 보고 암묵적으로 의사를 전달한 귀족들의 첨예한 대립이었다.
1년간의 정쟁과 전쟁. 그리고 언제나 부족한 것은 사람이었다.
유리아는 오랫동안 생각과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그러나 그녀가 알았던 사람 중 가장 커다란 등을 가지고 있던 남자를 조용히 읊어보았다.
***
러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빨간 눈동자는 전생의 지구나 이곳에서나 희귀한 편이다. 그리고 그는 저 빨간 눈동자를 가진 인물을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후드를 뒤집어쓴 흑요정은 가만히 러셀을 응시하다가 한쪽 눈을 깜박이며 윙크를 날렸다.
그때 흑요정을 끌고 있던 노예 상인이 뭐라 외치며 밧줄을 세게 잡아당겼다. 머리에 쓰고 있는 큼직한 터번과 수십 겹의 천을 이어서 만든 옷이 인상적이다.
선명하고도 짙은 외모와 피부색, 수북한 수염을 보면 사막 쪽에서 온 모양. 그 당김에 러셀에게 눈을 깜박인 흑요정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걸어갔다.
노예들의 행렬은 사람들의 많은 시선을 받았다.
입고 있는 옷이 허름하기도 했지만 드러나 있는 살 면적이 더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자와 여자의 비율은 대략 3대 7로 여자가 더 많았고, 모두 평균적으로 괜찮은 외모와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 틈을 타며 은근슬쩍 노예들의 얼굴이나 팔,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는 사람들도 많았다. 행렬을 지키며 노예가 탈출하지는 않나 감시하는 병사들 또한 그것을 알면서 묵인하거나 때로는 자신들이 먼저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굳이 번잡한 시장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것에서 노예 상인의 상술을 엿볼 수 있었다. 그 행렬을 따라 노예를 거래하는 구획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야? 왜 안 오는 거요?”
궁시렁거리며 앞장서던 바이젠이 걸음을 멈추고 서 있는 러셀에게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그가 보는 곳을 기웃거렸다. 바이젠 또한 러셀이 본 것이 노예들의 행렬임을 깨닫고는 말했다.
“뭐 보고 있었소? 노예들?”
“시장이 꽤 활발한가 보군.”
“그런 편이지. 아무래도 여러모로 편하지 않겠소?”
“······.”
그 ‘편하다’, 라는 범주에는 꽤 많은 개념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왜? 하나 사실 거요?”
“아니. 가던 길이나 가지.”
러셀이 바이젠의 어깨를 가볍게 밀자 그는 어어 거리면서도 다시 가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 빨간 눈동자의 주인이 이전에 만났던 인연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일단 외모가 달랐고, 가지고 있는 마력 또한 러셀이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적었기 때문이었다.
시선이 마주친 것이야 우연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한쪽 눈을 깜박인 건······.
“도움 요청은 아닌 것 같았는데.”
“뭐요?”
“아무것도 아니다.”
대로를 돌아 계속 걷기 시작하자 길에 가득했던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말로 가득한 소음 또한 같이 줄어든다.
깔끔했던 거리가 점차 지저분해지며 건물 역시 관리를 하지 않은 듯 낡고 후줄근해졌다.
이윽고 그들은 뒷골목에 이르렀다. 습기가 가득 찬 뒷골목에는 뭔가 톡 쏘는 냄새와 바닥에 낮게 깔린 하얀 연기, 그리고 축축한 물기가 가득했다.
그 톡 쏘는 냄새가 비강을 타고 허파에 도달하고 뇌에 전달된 순간 러셀은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마약이었다.
굳게 닫힌 낡은 나무 건물들의 창문 틈이나 문틈에서 슬금슬금 베어져 나오는 마약의 냄새. 얼마나 짙게 피워대는 것인지 러셀의 시야가 살짝 일그러지며 기분이 좋아지려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러셀이 굳이 묻지 않았음에도 바이젠이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마력으로 향기를 차단하시오. 이쪽 거리에 사는 놈들은 다 마약쟁이들이니까.”
“아는 놈들이라도 있나?”
“오다가다 얼굴만 마주친 것들이지. 잘 상대하지는 않소.”
급격하게 풍화되기 시작한 거리를 지나 거의 끝에 다다르자 3층의 건물이 튀어나왔다. 주변의 1층 건물들 사이에서 유독 높게 지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 앞에는 지루한 표정의 가드 두 명이 무장한 채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한 명은 벽에 기대어 서 있고 다른 한 명은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뻑뻑 피웠다. 러셀은 그 담배 향에서도 약간의 마약 냄새를 맡았다.
그 3층 건물의 입구를 향해 바이젠과 러셀이 성큼성큼 걸어가니 두 가드가 자세를 바로 하며 똑바로 일어섰다.
러셀은 가드들이 이 골목에 들어섰을 때부터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벽에 기대고 있던 놈이 허리에 맨 칼 손잡이를 왼손으로 슬쩍 잡으며 말했다.
“뭐 볼 일 있소?”
바이젠이 먼저 나섰다.
“케텔즈는 안에 있나?”
“약 사러 오셨수?”
“있는지나 말해, 따까리 새꺄. 네가 말하면 알아?”
“아니 이 새끼가······. 넌 뭐 하는 새끼야? 엉?”
쭈그려 앉아있던 놈이 발끈한 표정으로 당장 손을 등 뒤로 뻗었다. 등에 메고 있던 검을 뽑으려는 모양새에 먼저 나섰던 가드가 팔을 들었다.
“약 사러 온 게 아니면?”
그 침착한 태도에 바이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생각한 것보다 도발을 넘기는 것에 익숙하다.
초장부터 기세를 잡고 들어가려던 바이젠의 시도가 틀어졌음을 직감한 러셀이 입을 열었다.
“북방의 영지들에 관한 일이라고 하면 알 거다.”
그제야 가드들의 시선이 러셀에게 옮겨갔다. 바이젠도 작은 덩치가 아니었지만, 그 뒤에 서 있는 러셀은 그야말로 보기 드문 덩치의 소유자였다.
뱃일을 하는 선원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단정하게 내려앉은 코트로도 숨길 수 없는 두툼한 근육. 무장은 하지 않았지만 러셀에 대한 긴장감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성질이 급한 가드를 남기고는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러셀의 눈이 찬찬히 건물을 훑었다.
그의 시야를 방해하는 결계가 건물을 감싸고 있었다. 투명한 역장으로 생성되어 있는 결계는 물리적인 타격, 투사체, 그리고 마법에 대한 강한 반反 마력의 성질을 가졌다.
바이젠과 남은 가드가 서로 눈싸움을 하고 있는 사이, 몇 분 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들어갔던 남자가 안쪽으로 턱짓했다.
“들어가 보시오.”
러셀은 말없이 남자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어두웠다. 일정한 간격으로 벽에서 튀어나와 있는 받침대에 얹어진 등불이 미약한 빛을 발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안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건물이 넓은 것을 감안해도 스무 명은 있는 듯했다.
대부분 남자였지만 드물게 여자도 있었고, 모두 간단한 갑옷이든 칼이든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러셀은 그 광경에서 제대로 된 치안대가 도시에 대한 관리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성문에서 대놓고 금품을 요구하는 관리, 아무렇게나 마약 향기를 풀풀 풍겨대면서 장사하는 뒷골목의 건달들, 완전 무장을 갖춘 무뢰배들이 모여서 운영하는 사무소 등.
제이비르 백작이 어떤 경영 감각을 지니고 도시를 통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생의 안정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올라오시오.”
계단으로 안내한 가드가 먼저 올라갔다. 러셀과 바이젠은 1층에 가득 모여 앉은 칼잡이들의 무수한 시선을 받으며 올라갔다.
러셀이 조용하게 말했다.
-저번에 찾아왔을 때도 이랬나?
귓속으로 파고든 러셀의 목소리에 바이젠이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말은 하지 말고 입 모양만 움직여라. 알아볼 수 있으니까.
도대체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말을 알아보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바이젠은 납득했다.
이 남자가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애저녁에 알았다.
‘······난 약도가 그려진 쪽지만 받았었소. 케텔즈라는 사람을 찾으라는 문구가 같이 적혀 있었지. 직접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오.’
한 명은 목소리를 마력에 담아 뒤에서 걸어오는 바이젠에게 질문하고, 한 명은 앞을 보며 걷고 있는 러셀에게 입모양만으로 대답하는 기괴한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맨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가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계단을 올라갈 뿐이었다.
가공할 공간감을 이용해 바이젠이 움직이는 입술 모양을 해석한 러셀이 이어서 질문했다.
-그럼 처음 만난 곳은 어디였지?
‘그야 날 지명했던 놈이 부른 장소였지. 여기가 아니라 외곽의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다고.’
-호위는?
‘세 명이 있었소. 방금 1층에 있던 놈들 중에는 없었고.’
그 잠깐 사이에 안에 있던 칼잡이들을 훑은 것은 바이젠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였나?
‘내가 봤을 때는. 뭐 유물이나 아티팩트를 들고 있다면 또 달랐겠지만, 애초에 그런 걸 눈치챌 정도면 이런 일은 안 하고 있겠지.’
-흠.
바이젠은 러셀의 마지막 전성이 의도적인 것을 간파했다.
느낌이 좋지 않은걸. 바이젠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계단은 3층에서 끝났고, 자연스럽게 질답도 끝났다. 가드가 방문을 가리켰다.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그리고 문은 저절로 열렸다. 방은 3층을 통째로 쓰고 있는 듯했다. 방안은 살풍경했다. 제대로 된 가구는 가장 안쪽의 탁자와 의자, 하나뿐이었다. 손님을 대접하는 낮은 테이블과 의자는 있지도 않았다.
그 안쪽의 의자에서 한 중년의 남자가 앉은 채 말을 걸었다.
“내가 케텔즈다. 어느 쪽이지? 의뢰를 맡았다는 용병이.”
바이젠이 앞으로 나섰다.
“난데. 보수금을 받으러 왔다.”
케텔즈는 바이젠과 러셀을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저자는 누구냐?”
“알 것 없고, 돈이나 내놔.”
“성공했다는 건가?”
“성공했으니 돈을 달라는 거겠지.”
“그럼 그 흑요정은? 그 어린 애송이 놈은 어디 있지?”
케텔즈는 근육질에 구릿빛 피부를 가졌고, 대머리였다. 아예 몸의 체모가 없는 듯 눈썹도 없었다.
등지고 선 창문에서 기울어진 햇빛을 받았기에 사내의 얼굴은 눈썹이 없는 것과 맞물린 음영 탓에 더 기괴하게 보였다.
케텔즈의 물음에 바이젠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 그놈은 죽었어.”
“죽었다고?”
“자하드 영지를 너무 얕본 건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북방에서 가장 세가 큰 군주인데 말이야. 잘 선전하나 싶었지만 결국에는 기사들한테 포위당해서 죽었어. 막판에 그 이상한 향로로 괴물 같은 걸로 변하더니 난동을 부리더군.”
“······.”
케텔즈 또한 네멘스토의 숨결이라는 향로에 대해 알고 있는지 놀란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뭔 그리고야, 죽었다니까. 기사가 여섯이 달려드는데 오거라도 죽지. 시체랑 향로는 회수 못 했어. 그래도 개판은 만들어놓고 왔잖아? 의뢰자가 원한 게 그런 거 아니었나?”
“얼추 맞기는 하지.”
케텔즈가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맨들맨들한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롭고도 살벌한 웃음이었다.
“그럼 네놈들에게 남은 볼일은 한 가지밖에 없군.”
쌔애애애액!
직후 러셀의 등을 향해 길쭉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날아들었고,
콰자자자작!
바이젠이 서 있던 3층 바닥이 무너지며 수십 개의 칼날과 사슬, 철퇴가 솟구쳤다.
“우와악!”
비명을 지르며 바이젠이 2층으로 떨어지는 사이, 러셀의 고개가 돌아갔다. 처음 그를 안내했던 가드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칼은 러셀이 뻗은 오른손에 잡혀 있었다.
“입막음인가?”
“머리가 빠르······군!”
끝마디를 강하게 내뱉은 케텔즈가 무언가를 쏘아냈다. 고갯짓만으로 피한 러셀의 눈이 쏘아낸 것을 빠르게 훑었다. 짤막한 단검이었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으로 칼을 부러뜨린 러셀이 가드를 걷어찼다. 부지불식간에 왼팔로 발차기를 막으려 시도한 가드는 러셀의 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부러진 팔뼈와 갈비뼈가 내장을 찌르는 충격에 가드가 피를 뿜으며 날아가 반대편 벽에 부딪혔다. 발차기를 날린 러셀은 뒤에서 날아드는 음습하고도 날카로운 살기에 반응하며 몸을 돌렸다.
파바바바박!
그 잠깐 사이에 수십 개의 단검이 빗발처럼 쏟아져 들어왔고, 그에 맞춰 러셀의 손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단검이 빼곡히 잡혀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 단검들을 바닥에 내던진 러셀을 보고 케텔즈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어줍잖은 저항은 그만둬라. 원하는 대답만 들으면 편하게 죽여주지.”
“유언치고는 시답잖아.”
피식 웃은 러셀이 그리 말한 순간, 빈틈이라고 본 케텔즈가 러셀의 가슴팍을 향해 섬광을 내질렀다.
쓰아아아악!
정체된 공기가 길쭉한 칼날에 베이며 내지르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
깔끔하면서도 정확한 일격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빠르게 러셀의 심장을 노렸다. 투검술 또한 그리 부족한 편은 아니었던 케텔즈가 가지고 있던 진정한 실력은 이것이었던 걸까.
자신의 공격에 확신을 밀어 담으며 케텔즈는 이 일격으로 러셀이 죽으리라 예상했다.
웅-
마력이 일어나며 케텔즈의 손목과 어깨에 각기 다른 충격과 압박을 때려넣었다. 그러자 휘둘러지던 칼날의 궤적이 휘어지더니 러셀의 가슴팍이 아니라 애꿎은 나무 벽을 통째로 갈랐다.
인지 내에 들어온 영역의 마력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데 성공한 러셀이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
퍼어억!
정통으로 얼굴을 맞은 케텔즈가 코피를 줄줄 흘리며 방을 가로질러 창문에 부딪쳤다.
쾅!
창문 유리는 부서지지 않았고, 도리에 무슨 벽에 부딪힌 것처럼 단단한 소음을 냈다. 러셀은 멀쩡한 유리 창문의 바깥이 기묘하게 왜곡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애초에 함정이었군.”
“큭, 이제 알아차려 봐도, 늦었어. 쿨럭! 퉤.”
역류한 코피를 쓱 훔쳐낸 케텔즈가 핏물에 젖은 잇몸을 드러내며 흐 웃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규칙적인 빛을 흘리는 작은 돌멩이가 쥐어져 있었다.
보아하니 충격을 주면서 부수면 내장되어 있는 술식을 발동, 마법을 구현하는 종류의 룬석으로 보였다.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러셀은 픽 웃고는 말했다.
“그래, 준비한 거 꺼내 봐라. 다 쓰지도 못하고 죽으면 억울하지 않겠냐.”
“언제까지 그딴 태도를 유지하는지 봐주지!”
콰작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룬석을 부수자 눈부신 섬광이 뿜어지며 러셀을 덮쳤다. 그 섬광을 향해 정면으로 걸어가는 러셀의 눈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