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교차로 (3)
인간들이 지은 도시가 대개 그러하듯이 제이비든 백작령의 주도라고 할 수 있는 도시 브라실트 또한 장대한 성벽과 커다란 성문을 지니고 있었다.
“브라실트는 오래된 도시지. 예전에는 작은 왕국의 수도였다는 말도 있고. 뭐 지금 남아있는 대도시들이 대개 그런 식이지만 말이요. 다 예전에는 무슨 고대의 왕국이었네하는 소리들이지.”
다각, 다각하고 말발굽이 포석을 딛으며 소리를 냈다. 성문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행렬에 합류하자 자연히 속도는 느려졌다.
행렬을 따라 걷는 동안 바이젠은 자신이 몇 년 동안 의뢰를 맡으며 지냈던 도시에 대해 알려주겠다며 입을 열었다.
아직 성문까지 남은 거리가 꽤 되었기에 러셀과 일행은 잠자코 그의 설명을 들으며 말을 걸어가게 했다.
“일단은 제국의 관할에 들어가 있는 도시긴 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회색 계곡만 넘어가면 바로 왕국에 닿을 정도로 왕국과 가깝기도 한 곳이 이 브라실트지. 유명한 건 이 브라실트 성벽이고.”
허리를 짚던 손을 든 그가 성벽을 가리켰다. 단단해 보이는 암석으로 지어진 성벽은 굳건해 보였다.
“아주 오래전에, 이 도시의 성주가 한 마법사를 구해주고 그 마법사가 보답으로 성벽을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있는 성벽이지.”
“얼마나 오래전인데?”
“말이 다 다른데, 200년 전이라는 말도 뭐 천 년도 넘었다는 말도 있고······.”
바이젠이 도시의 성벽이 가진 전설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을 때 러셀은 행렬의 양옆을 바라보았다.
푸리움 강 저편에는 강물을 빨아들이고 생겨난 늪지대와 울창한 수림이 있었다. 꽤 먼 거리였지만 러셀의 시력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늪지대에서 다시 시선을 돌리면 그 앞으로 넓고 커다랗게 뻗은 강물이 햇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그 햇빛이 부서지는 물 위에는 작고 큰 배가 넓게 펼친 그물을 잡아당기며 물고기를 끌어당기는 어부들이 보였다.
늦가을이었지만 따끈한 햇살과 가끔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러셀이 바라보는 풍경은 평화롭고 고요해보였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달리해서 하늘을 보면, 그의 눈에만 보이는 색다른 광경이 들어왔다.
아주 얇게 그어진 실금 같은 균열이다. 이계에서 넘어온 나무 괴물을 잡고 난 직후부터 러셀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균열.
마치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하늘이 유리로 만들어진 천장이라는 듯 그어진 균열은 이전보다 조금 더 길어져 있었다.
그 틈새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너머 또한 아직 러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국과 왕국, 양쪽에 발을 걸칠 수 있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브라실트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무척 많지. 그만큼 인종이나 종족들도 다양한 편이고. 남부의 네브론인이나 바다를 건너가면 나오는 동대륙의 에시어인도 있고. 사건 사고도 귀찮을 정도로 많아서······”
“인종이 뭐야?”
아엘라시스의 질문이었다. 바이젠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슷하게 생겼는데, 얼굴 모양이나 피부 색깔이 다른 인간들. 남부의 네브론인 피부가 검은 편이지. 동대륙의 에시어인은 노랗고. 생김새도 미묘하게 달라.”
“피부가 노랗고 까맣다고? 어떻게 그래?”
“어······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이교도라서 그런 거 아닌가.”
바이젠이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답을 못하자 칼리아가 입을 열었다.
“어떤 신을 믿는지가 피부색이나 외모를 결정하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그냥 사는 곳이 달라서 그런 거겠지. 내가 살던 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이젠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는 저번부터 계속 내가 살던 때는, 내가 기억하기에는 이라고 자주 말하던데. 혹시 보기보다 나이가 많은가?”
“······.”
칼리아는 침묵했고 러셀은 피식 웃었다.
“신경쓰지 말고 하던 말이나 해봐. 그래서?”
“어? 어, 어.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사건 사고가 많다고.”
“아, 그랬지. 브라실트는 치안이 그리 좋은 도시는 아니요. 상비군을 많이 조직하지 않아서 뒷골목 범죄 조직들이 판을 치지.
백작은 자기 영지나 도시를 돈줄로만 여기거든. 그래서 힘 좀 있는 건달이나 용병들이 길드나 조직을 따로 차려서 보호비를 뜯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허구헌 날 사람이 죽어 나자빠져도 아무도 신경 안 쓰고, 다음 날이 되면 시체도 싹 사라져버리지. 여러모로 신나는 곳이였어.”
추억을 회상하려는 바이젠에게 러셀이 손가락을 튕기고는 말했다.
“그 백작에 대해 얘기해봐라.”
“제이비든 백작? 중앙에 대한 열망이 큰 노인네요.”
“중앙이라면, 제국?”
“맞소. 브라실트는 부유한 도시지만 중앙과는 지리적으로 거리나 너무 멀기도 하고, 변경이기 때문인지 끗발은 좋지 않았소.”
“않았다면, 지금은 다르다는 말이겠군.”
바이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소. 듣기로는 아버지 때부터 노력한 것이 지금의 제이비든 백작에게 내려 와서야 성과가 있었다는군. 황자 쪽에서 먼저 접촉을 해왔다고 하니까 말이요. 바로 후원자가 되어버렸지. 지금은 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알아볼 수 있나?”
“어렵지는 않은데······.”
“않은데?”
“······아니요. 그렇게 좋아하는 유적 탐험하러 갔겠지, 설마 아직까지 있을라고······.”
신경 쓰이는 말을 하는 바이젠을 무시하며 러셀은 앞을 바라보았다.
느릿느릿했던 행렬은 앞의 상단이 검사를 마치고 통과하자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성문을 지키고 검문하는 병사들은 대충 천에 덮인 수레나 마차를 들춰보는 시늉을 하더니 통과하라는 손짓을 했다.
고개를 꾸벅이는 상단주로부터 몰래 은화를 넘겨받은 성문의 관리자가 바로 뒤에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콧수염이 인상적인 관리가 고개를 들어 러셀 일행을 살폈다. 그가 일행을 살피는 것처럼 러셀 또한 그 관리를 내려다보았다.
쇠로 된 징이 박힌 가죽과 누비가 혼합된 갑옷을 입고 검을 찬 허리띠에 철 투구를 쓴 자였다. 다른 병사들과는 다른, 조금 더 계급이 높은 것을 의미하듯 그자의 투구는 눈가와 코를 덮는 T자형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코 아래 콧수염을 씰룩인 관리가 다가와 물었다.
“어디서들 오셨소?”
“계곡 너머에서.”
“그거야 온 방향을 보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얘기고.”
관리의 시선이 러셀과 그 뒤에 칼리아, 아엘라시스, 바이젠을 훑었다. 다른 병사들이 칼리아와 아엘라시스를 보며 입을 헤벌레 벌린 것과는 다르게 관리의 눈은 냉정한 빛을 유지했다.
“목적은 뭐요?”
“관광.”
질문이 짧은 것만큼이나 러셀의 대답 또한 짤막했다. 성문의 관리는 그리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러셀은 커다란 흑마에 타고 있었고, 그 자신의 키 또한 장대한 남자였다.
목젖이 튀어나올 지경까지 고개를 들어야 러셀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눈살을 크게 찌푸린 채로 관리가 말했다.
“뒤의 사람들은 관계가 어떻게 되시오?”
“동료들이오.”
“용병들이신가?”
“······.”
그때 뒤에서 대화를 지켜보던 바이젠이 표정을 찌푸린 채로 다가왔다.
“보자보자하니까, 왜 아까부터 꼬치꼬치 캐묻고 지랄이야? 뭐야?”
“통행세를 내시오.”
“뭐?”
“우리 도시가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주는 곳은 아니지. 도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시오. 그러면 들여보내 주겠소.”
“허 참,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새끼들이 누구한테······.”
바이젠이 눈을 희번득거리면서 기세를 끌어올리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관리의 뒤에서 창을 꼬나쥐고 있던 병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한 걸음 다가섰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러셀이었다.
“얼마요?”
“······예?”
“얼마냐고.”
침을 꿀꺽 삼킨 관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사람당, 은화 하나씩······.”
“여기.”
품에서 은화 네개를 꺼내든 러셀이 그것을 획 던지자 관리는 어이쿠, 소리를 내며 동전들을 받아 가슴께로 끌어안았다.
미처 받지 못한 동전 두 개가 바닥에 떨어지며 팅, 팅 굴러갔다. 다급히 은화를 줍는 관리를 일별한 러셀이 크라이를 걸어가게 하며 성문을 통과했다.
창을 들고 있는 병사들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통과시켰다. 바이젠이 당황한 얼굴로 러셀의 옆에 붙었다.
“아니, 그걸 그냥 달라는 대로 줘? 형씨 부자요?”
“네 생각보다는. 소란 피우지 말고 들어가자.”
여전히 러셀에게는 아직 쓰지도 않은 보석과 금화가 많이 남아있었다. 고작 은화 정도로 그의 지갑을 가볍게 하기엔 부족했다.
성문 안쪽의 거리는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높은 건물과 낮은 건물이 자유분방하게 서서 시야를 가렸고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수많은 곁가지를 그리며 뻗어나갔다.
“활기찬 도시구나. 네가 살던 도시와는 또 달라.”
침묵을 깬 칼리아가 도시에 대한 소감을 남겼다. 그녀의 말대로 브라실트는 나라가 내전 중이라는 것이 사실인가 싶을 정도로 활기가 가득했다.
그들이 들어온 문은 동문이었고, 동문을 넘어오자마자 그들을 반긴 것은 상점가와 시장 거리였다.
눈부신 햇살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시장가를 점령한 상인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긴 장대로 천막을 세우고 가판대를 내놓았다.
가판대 위에는 갓 잡은 생선과 막 도축된 생고기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주위로는 냄새를 맡고 몰려든 파리들과 상인이 한눈팔기를 기다리는 고양이, 그리고 그 고양이를 만지려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그 사이사이에 술이나 고기를 끼워서 꼬챙이에 꽂아 파는 노점들도 많았다.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주석 잔에 담긴 술을 마시는 주정뱅이나 여유롭게 꼬치를 뜯으며 돌아다니는 갑옷 입은 용병들까지.
브라실트의 시장거리는 고성과 음악, 도둑을 잡으라는 외침과 다급히 달려가는 달음박질이 합쳐진 혼란의 장소였다.
아엘라시스의 연한 푸른 눈동자에 그 풍경이 한가득 들어왔다. 문득 그녀의 눈에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그녀가 이제까지 봐왔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정말 피부색이 까맣거나 약간 누런 빛을 띄는 자들이었다.
“와, 정말 피부색이 다르네. 신기하다.”
“여관 거리는 조금 더 가야겠구나. 여관부터 들리겠느냐?”
“숙소를 잡아두는 게 편하겠지.”
크라이에서 내린 러셀이 고삐를 칼리아에게 넘겼다. 그의 눈짓에 바이젠 또한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렸다. 러셀이 칼리아에게 말했다.
“아엘라를 데리고 먼저 여관을 잡아놓고 있어.”
“그대는?”
“난 이놈이랑 일을 해야지. 저녁 전까지는 들어가지.”
“알겠다. 여관을 잡으면 따로 연락하마.”
러셀은 어떻게 연락할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워낙 다재다능하니 마법이든 뭐든 해서 알려줄 것이다.
“안내해.”
“아니,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알아듣소?”
“너한테 의뢰 건 작자가 제이비든 백작이긴 하지만, 그자가 직접 나와서 널 만난 건 아닐 거 아냐? 중간책이 있겠지. 의뢰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완수금을 받으러 오라고 언질을 준 장소도 있을 것이고.”
바이젠이 놀란 얼굴이 되어 휘파람을 불었다.
“오, 의외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쿠엑!”
“헛소리.”
“아우 시발, 진짜······ 나이도 어린놈이······.”
댓발 튀어나온 입으로 궁시렁거린 바이젠이 성큼성큼 앞장서 나갔다. 그 뒤를 러셀이 뒤따라 걸어갔다.
거리의 양쪽에 천막을 치고 앉거나 선 상인들이 큰소리로 호객을 하는 소리와 흥정을 하는 도시의 시민들이 겹쳐지며 주위는 웅웅거리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거의 전부는 인간들이었지만 아주 가끔 요정들이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 요정들은 대부분 노예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휘페리온 제국은 노예제 사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죄를 지으면 죽이는 것보다 살려서 부려먹는 것을 더 효율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러셀의 눈에 발목과 손목에 구속구와 사슬을 찬 노예들이 일렬로 걸으며 어디론가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 노예들 중 하나가 요정이었다.
어째서인지 다른 노예들과는 다르게 두꺼운 후드를 쓰고 있었지만 러셀은 그 노예가 흑요정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후드 속에서 빨갛게 빛나는 동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