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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80화 (181/225)

180화 교차로 (2)

사방은 아비규환의 소용돌이였다.

제국의 내전. 대륙의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나라는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힘을 아낌없이 풀어놓았다.

수십 년 동안 쌓인 힘은 수만의 병사와 그들을 한 달 동안 먹일 수 있는 막대한 군량이 되었고, 그 정도면 권력에 대한 욕심을 기르는 데 충분했다.

“으아아아아-!”

“아아아악!”

비명인지 기합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는 반사되는 장대한 절벽이나 산맥이 없어도 모든 곳에서 들려왔다. 죽어가는 자와 죽는 자 모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창날과 칼날이 부딪치며 이가 빠지고 불똥이 튀었다. 살갗을 찢고 근육을 가르며 뼈를 부쉈다.

“후퇴! 후퇴하라!”

“도망쳐! 도망쳐어!”

둘로 나뉜 용병 부대의 곳곳에서 전열을 벗어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영주들이나 행정관에게 큰돈을 약속받고 참전을 계약한 용병들이었지만 무섭게 돌진해오는 기병과 빛을 두른 황녀의 사신 같은 모습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도망치지 마라! 창을 들어! 방패를 세워라!”

깃털이나 알록달록한 천을 장식으로 한 지휘관과 용병단의 단장, 혹은 대장들이 도망치는 자들을 막아서며 목에 핏대가 서도록 악을 썼지만 이미 기세는 상대방에게 넘어가 있었다.

콰아앙!

불덩이가 인근에 떨어지며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거꾸로 뒤집어진 세상에서 하늘은 아래에, 땅은 위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이 마법사가 날린 공격에 의해 날아간 것을 깨달았다. 깨달음과 동시에 그녀는 바닥에 충돌했다.

콰당탕!

순간적으로 허파가 꽉 조이면서 숨이 막혔다. 극심한 흉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난 자리에 창날이 꽂혔다.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도 그녀는 아래에서 솟구치는 창날을 피하고 검을 내질렀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실성한 듯 마구잡이로 팔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용병의 턱을 빛살 같은 섬광이 갈랐다.

얼굴의 턱 아랫부분부터 이마까지 반듯하게 쪼개진 자가 쓰러지자 짧게 호흡을 들이마셨던 유리아가 검을 당기며 물러났다.

그녀를 향해 사방에서 적들이 달려들었다.

“황녀다! 황녀가 낙마했다!”

“사로 잡아!”

“아니야, 죽여!”

바닥에 떨어진 그녀를 보고 흥분한 적들이 달려들었다. 창과 검, 칼, 도끼가 유리아의 급소를 향해 차가운 혀를 들이밀었다.

유리아의 검이 눈부신 마력을 받으며 빛을 발했다. 갑작스런 섬광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이들은 이후로도 눈을 뜨지 못했다.

“아아아악!”

그녀를 주위로 둥글게 쓰러진 시체들 사이로,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귀가 하나 잘린 병사가 침을 튀기며 달려왔다.

눈가에 가득한 핏물 때문에 그는 자신이 덤벼든 상대가 황녀라는 것도 몰랐다. 시야 한쪽에서 번쩍거렸다는 것이 달려간 이유였고, 그 외에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던 기다란 도끼 창이 훌륭한 파공성을 내며 공기를 갈랐다. 유리아는 왼발을 오른발 뒤로 옮기고 몸을 살짝 비트는 것으로 도끼 창을 피했다.

퍽, 하고 단단한 흙바닥에 도끼날이 박히며 모래알을 튕겼다. 유리아는 그 도끼가 다시 들리기 전에 움직였다.

서늘했던 칼날이 병사의 배를 훑고 지나가자 누비 갑옷이 쩍 갈라지고 그 안쪽에서 벌건 내장이 주르륵 쏟아졌다.

도끼 창을 툭 떨어트린 병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의 내장을 주워담으려다 다리에 힘이 빠진 것인지 무릎을 꿇었다.

“어, 엄마······.”

뒤로 물러났던 유리아가 그 신음을 듣고 병사를 내려다보았다. 검이 병사의 목을 갈랐다. 목을 잃은 시체는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기우뚱 쓰러졌다.

그녀의 주위에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병사, 혹은 용병들이 없었다. 은패 이상의 용병이나 기사마저 그녀의 앞에서는 허수아비처럼 양단되어 쓰러지니, 유리아에게 다가갈 수 있는 거리의 적들은 보다 다른 상대를 찾기를 원했다.

잠깐 주어진 휴식의 시간. 유리아는 땀에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이마와 눈가, 볼에 달라붙어 간지럽히던 머리카락들이 거친 힘을 이기지 못하고 가닥가닥 끊어져 옅은 통증을 유발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머리카락을 좀 짧게 칠까, 하는 무의미한 생각을 했다. 그녀는 단발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이 어떻냐고 제의하는 상상을 했다. 참모들은 반대할 것이다. 군주의 외모가 변화하면 병사들이 동요할 것이라면서.

“후우, 후우······.”

날씨는 입김이 하얗게 물들 정도로 싸늘했다. 그러나 흉악한 전투의 연속에서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달아오른 열기는 비단 콧바람이나 입김에서 그치지 않고 정수리, 전신에서 하얀 김이 되어 피어오르고 있었다.

주위는 약간 고요해졌다. 물론 여전히 사방에서는 병장기가 부딪치는 살벌한 소리, 이따금씩 전투 마법사들이 쏘아낸 불덩이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다.

그리고 냄새, 냄새가 났다. 불에 탄 살덩이가 내는 고기 냄새, 피 냄새, 땀 냄새, 쇠 비린내까지.

반년 넘게 맡았던 냄새는 이제 코 안쪽 점막에 달라붙어 떨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싸움터로 복귀하기 전, 어쩐지 멍한 기분 속에서 유리아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방금 베어냈던 시체의 얼굴과 마주했다.

핏물이 가득 번진 젊은 남자의 얼굴. 동공은 이완이 풀려 확장되어 있었고 입은 크게 벌려져 있었다.

인간이 아닌 것과 싸운 것이 언제였더라,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편했던 때는?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1년 전으로 회귀했다. 아마 생애의 마지막이었을 대륙을 가로로 가로지른 여행. 서부에서 동부까지, 조상의 흔적 하나를 찾아 도착한 도시.

그곳에서 만났던 인연과 싸움, 그리고 만남까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몸속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막대한 마력을 그 도시의 지하 미궁에서 얻었다.

보라색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눈동자의 주인과 커다란 키도.

유리아는 곧 고개를 들고 크게 외쳤다.

“대열을 가다듬어라!”

그녀의 마력이 담긴 커다란 외침에 흩어졌던 기병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전투 마법사를 안쪽으로 두고 바깥쪽으로 긴 장창과 방패를 든 기사들이 원을 그리며 돌아서 덮치는 병사들을 분쇄했다.

이히히히힝.

그녀의 곁으로 나가떨어졌던 그녀의 말이 다가왔다. 천만다행으로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다. 부러졌다면 다른 말을 잡아서 탔어야 했을 것이다.

안장에 오른 그녀는 말의 옆구리를 세게 차며 달려나갔다.

경량화 마법이 걸린 갑주와 가벼운 그녀의 무게 덕분에 마갑까지 착용하고 있으면서도 말은 힘찬 발굽으로 땅을 찍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때쯤 보병들이 완전히 밀고 들어오며 각 지방에서 끌어모은 병사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지휘관들은 그제서야 후퇴를 명령했다. 쐐기꼴로 돌진해온 황녀와 기마병, 그리고 전투 마법사들의 마법이 초전부터 너무나 강력했다.

“이런, 개같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사와 병사들의 호위 아래 안전하게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클레이도스 백작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손에 쥐고 있던 지휘봉을 내던졌다.

“수성전만 준비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이곳 로톤펠트 성까지 몰아붙이자고 한 건 그대들이 아닌가! 수성전을 하기에 유리한 지형과 단단한 성벽을 가지고 있으니,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라고! 그동안 우리는 후속으로 도착하는 오천의 병력으로 천천히 말려 죽이기만 하면 된다고!”

그의 분노에 참모들이 목을 움츠렸다. 델란, 호스펠, 기트손, 두체스를 다스리는 영주들과 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저 황녀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고 있느냔 말이냐!”

“시, 실력을 숨기고 있던 것은 아닐지······.”

참모 하나가 간신히 손을 들고 목소리를 냈지만 클레이도스 백작의 화를 더 돋구는 것밖에 더 되지 않았다.

“황녀는 지금까지 무려 네 번이나 졌다! 잃은 병력이 이천이 넘어! 그년에게 남은 병사라고는 이제 삼천 조금밖에 되지 않을 텐데, 실력을 숨기면 얼마나 숨기고, 강하면 또 얼마나 강하느냔 말이야!”

그의 쏟아지는 분노를 누구도 정면에서 받아내려 하지 않았다. 아드리칸 황자에게 이번 승리로 황녀를 생포하거나, 적어도 수급이라도 취해 진상할 계획이 모두 어그러질 위기였으니 당연했다.

“각하. 일단 지금은 퇴각하심이 옳을 것 같습니다. 때가 좋지 않습니다.”

그때 백작의 뒤에서 누군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낮고 엄숙했지만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아름다운 목소이의 주인은 갈색 머리카락의 여자였다.

로브를 걸치고 가죽과 사슬이 혼합된 갑옷을 입은 그녀는 한 손에 큼직한 수정 구슬을 들고 있었다.

“지젤 경, 물러나야 한단 말이오?”

놀랍게도 클레이도스 백작이 언성을 낮췄다.

“기세가 넘어갔습니다. 이 상황에서 추가로 기사단이나 병사를 투입해 보아야 애꿎은 목숨과 체력만 버리게 될 것입니다. 남은 병사들을 물리고 진지를 제대로 구축하시지요.”

“그 다음은? 이미 많은 병력이 저 가증스런 황녀에게 죽은 후인데.”

지젤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일 보면 제 말뜻을 아실 겁니다.”

미소와 함께 그녀로부터 뿜어진 마력에 사람들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소름이 끼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목을 쥐여드는 듯한 오싹한 감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클레이도스 벡작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자 전하가 지원군이랍시고 보내준 여자이긴 하나, 너무나 꺼림칙하다. 이런 마녀를 어떻게 알아서 보낸 것인지······.’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곧 명령을 받은 나팔수가 길게 나팔을 불어 올렸다. 퇴각을 알리는 신호에 전선에 나가 있던 병사들이 뒤로 전열을 물리기 시작했다.

“적군이 퇴각한다!”

“이,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아!”

와아아아-!

막대한 병력 차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두자 살아남은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전하! 저희가 승리했습니다! 모두 전하의 혜안이 빛난 덕분입니다!”

승리의 선언과 쏟아지는 찬사 속에서 유리아는 도망치는 황자의 군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우리도 돌아간다.”

“예!”

***

제이비든 백작령은 회색 계곡 마을을 떠난 지 사흘 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근처의 구릉지에 선 러셀 일행은 보다 높은 시야에서 아래의 영지를 관찰했다.

근처에 바다와 연결되는 커다란 강, 푸리움 강을 끼고 있는 영지는 커다란 도시와 성벽을 자랑하고 있었다.

가을을 넘어 겨울에 성큼 다가선 날씨는 무척 화창했고, 눈부신 햇살을 아래로 뿌렸다. 강물이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였고, 그 위로 조막만 한 배가 항구에 뱃머리를 대고 있는 것이 러셀의 눈에 보였다.

“와아, 저게 강이야? 엄청 크다!”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는 강이다. 그건 그렇고, 배를 건조하는 기술이 많이 좋아졌구나. 내가 살던 때만 하더라도 저렇게 큰 배는 없었는데······.”

강에 감탄하는 아엘라시스와 세대 차이를 실감한 칼리아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눈에 마력을 조금 더 집중하자 그 조막만 한 배가 큼직해지고 개미처럼 꾸물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수건으로 머리를 묶고 반팔 조끼를 입은 채 짐을 하역하는 선원들이 있었다.

그 주위로는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이나 짐을 태우고 창고로 향하는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활발한 도시였다.

승마에 익숙하지 않은 바이젠이 허리를 두드렸다.

“아이고, 허리야. 저기가 제이비든 백작의 영지요. 운하와 상선, 무역으로 돈을 많이 벌었지. 황자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하나이기도 하고.”

“황자의 후원자라.”

“그래서 황녀랑은 사이가 나쁘지. 안 그래도 접전이 벌어진다는 페르거 평원이 멀지 않은 쪽에 있는데······. 일단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확인해 봐야겠수다.”

“넌 어느 쪽인데?”

“나?”

허리를 두드리던 손을 들어 턱을 짚은 바이젠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모르지. 난 그냥 돈 주면 일하는 용병 나부랭이라서. 뭐 호사가들 말만 들으면 둘 다 막상막하요. 황자 아드리칸은 어릴 적에는 총명했다는데, 어느 순간부터 수틀리면 지 부하고 뭐고 목이나 치고 여자에 빠져 산다는 놈이고. 황녀 유리아는 얼굴이 무진장 예쁘고 칼질 잘한다는군. 죽인 적군들의 해골로 방을 장식한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런 짓을 할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러셀은 칼리스덴에서 만났다가 헤어진 유리아를 떠올렸다. 은발에 금안을 가진 범상찮은 용모의 여자. 어쩌다보니 지하 미궁을 탐험하고, 삼백 년 전의 조상도 만나서 파워업도 시켜준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을 지 모르겠군.”

“엉? 누구? 저기 아는 사람 있소?”

“아니. 출발하지.”

“으악, 잠깐! 나 아직 허리가······!”

“헤헹, 나 먼저 간다! 바이젠은 뒤에서 열심히 쫒아오라고!”

“조심해서 오거라.”

러셀을 필두로 크라이가 달려나가자 뒤로 아엘라시스와 칼리아가 뒤따랐다. 허리를 부여잡은 바이젠이 죽겠다는 얼굴로 고삐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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