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교차로
“······신기한 눈이야. 색깔도 그렇지만, 그 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놀랍군.”
릭투스의 머릿속에서 러셀과 치렀던 전투를 읽은 노인이 말했다.
‘본다’라는 개념을 증폭해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마나와 마력의 흐름을 읽는 것도 대단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흐름을 인위적으로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술식의 결을 정확하게 본다고 하더라도 그 결을 정확히 찌르는 것은 다른 문제지. 주제에 맞지 않는 능력이었다면 몸이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렸을 텐데, 아직 그러지 않은 걸 보면 잘 통제하고 있는 모양이군. 볼수록 그 혈통이 궁금해져. 혹시 부모가 어떻게 되나?”
“이 와중에 그런 게 궁금한가?”
“그럼. 마법사는 끊임없이 탐구하는 족속들이지. 이미 아는 것조차도 끊임없이 되새겨야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이야.”
“그래서 나무에 혼을 옮겨 심은 건가?”
노인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볼 수 있는 건가?”
러셀의 눈에 드래고닉 리저드맨의 심장에 단단히 뿌리박힌 씨앗이 보였다. 그 심장을 원형의 구체로 삼아 둥글게 뭉쳐져 있는 마력으로 이뤄져 있는 나무뿌리 덩어리 또한.
아까 러셀이 날렸던 일격은 아무리 강인한 용족의 심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터트릴 수 있는 위력이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릭투스의 몸이 살아있는 이유는 같은 몸을 공유하고 있는 저 노인이 수작을 부린 것으로 보였다.
“기본적으로는 씨앗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사방으로 뻗은 뿌리와 줄기를 통해서 마력을 빨아들이고 그를 통해 손실되는 영육을 보충하는 형태.”
“하지만 방금 자네의 일격을 버티느라 상당수가 무너져 내렸지······ 본다는 개념이 증폭되어 있는 줄은 알았지만 몸속까지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라니. 내가 살아있을 적에 자네 같은 눈이 있었다면 이런 헛짓거리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러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도마뱀은?”
“의식을 잃었네. 충격량이 너무 강했어. 심장을 보호해도 척추가 끊어지면 달리 도리가 없는 법이지.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의 말에 러셀이 시선을 돌려 등뼈를 살피니 부러져 있었다. 다만 그 끊어진 부분 또한 심장을 감싸고 있는 것과 동일한 마력의 실들이 이어져 연결되어 있었다.
신체의 구조에 대해 알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행위. 이 용족의 신체를 차지하고 있는 마법사의 영혼은 척추와 뇌, 그리고 심장 등 내장기관과 신경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름이 뭐지?”
“이제야 묻는 건가? 거참 빨리도 묻는군.”
“말하기나 하도록.”
의식을 잃은 드래고닉 리저드맨의 몸을 잠시나마 조종할 수 있게 된 노인이 말했다.
“마르티네스라고 하지. 혹시 아는 이름인가?”
“아니.”
고개를 저은 러셀은 품에서 팔꿈치 아래만 남은 팔뚝을 꺼내보이며 말했다.
“굴라라는 이름에 대해서 말해봐라. 어떻게 이 팔을 알고 있지?”
“내가 말해줄 성 싶은가?”
“그래야 할 거다. 그러면 고통스럽게 죽지 않아도 될 테니까.”
“큭큭큭······.”
마르티네스가 비늘 덮인 입가를 비죽이 당기며 웃었다.
“내가 다만 바란 것은 영생과, 지식의 탐구였지. 당장에는 풀리지 않을 난제도 미래의 언젠가는 풀려 있을 수도 있다. 난 그 가능성을 외면하지 못 했어. 언제, 어느 때나 그 생각이 머릿속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고, 결국 선택했지. 하지만 결과는 이 모양 이 꼴이군. 덜떨어지고, 나이를 헛 먹은 용족에 기생해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연명하는······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놈 앞에서 말이야.”
용족의 머리가 위를 바라보았다. 그의 노란 동공에 검은 밤하늘과 반짝이는 별빛이 비췄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왜 한 번도 죽음 이후는 궁금해하지 않았던 걸까. 부질없군.”
그 말과 함께 마르티네스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러셀은 헛웃음을 지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결국에는 그에게 굴라에 대해 알려주기도 싫어서 헛소리만 늘어놓다가 목숨을 놓아버린 것 아닌가.
물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릭투스의 신체가 부서져 있기는 했지만.
그는 언제 펄떡이며 움직였냐는 듯이 축 늘어진 굴라의 팔을 들어 보였다.
마치 진짜 시체의 팔처럼 늘어져 있지만, 그 피부에는 윤기가 흐르고 잘려 나간 팔꿈치의 단면은 여전히 근육의 결과 가느다란 신경 줄기가 보일 정도로 생생했다.
그 팔을 코트 안에 던져넣은 그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밤이 지나가고 먼 동쪽의 산등성이에서 태양이 떠올랐다.
언제 낀 것인지 모를 고원의 안개가 그 햇살을 맞았다. 자신의 희뿌연 몸을 노랑과 주황빛으로 찬란하게 채운 안개가 너풀거렸다.
***
“전하, 적군이 움직입니다.”
“드디어 움직이는군.”
소수의 병력으로 타격대를 조성해서 간만 보려는가, 아니면 본격적인 회전을 노리는가.
전황을 올바로 읽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이끄는 군주로서 가장 먼저 가져야 할 소양이다.
넓은 홀, 그 중심의 원형 탁자에 놓인 커다란 지도를 보는 여인을 보며 영주와 기사, 마법사와 장교들이 머리를 굴렸다.
“전하, 여기서는 기마병을 움직여서 적의 옆구리를 치는 걸로······.”
“무슨 소리요, 하미르 경. 기마병은 혼전이 일어났을 때 적군을 조각내는 것을 중심으로 운용하게끔 해야 하오. 망치와 모루 전술도 모르시는거요?”
“뭐요? 이 작자가-”
“나라면 기병대보다 전투 마법사들을 조금 더 유연하게 활용하겠소.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법사들을 보면 단번에 기세가 꺾이지 않겠소? 어차피 우리가 가진 마법사들의 수가 더 많은 반면에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 하늘을 날면서 동시에 마법을 시전하라니, 마력을 두 배로 낭비하라는 법 있습니까?”
“고작 마력의 양을 아끼는 것보다 적군의 기세를 낮추는 게 전투를 이기는 법이오!”
“우리는 전투가 아니라 전쟁을 하고 있소!”
회의장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서로 자신의 말이 옳다고 말하며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는 이들의 눈은, 그 와중에도 힐끔힐끔 한 곳만을 향하고 있었다.
회의장의 가장 상석, 다채로운 복장을 한 호위 기사들을 뒤에 두고 탁자를 두 손으로 짚고 있는 여성.
긴 은발을 한 갈래로 땋아내려 정리한 그녀가 고개를 슬쩍 들어올렸다.
신이 조각한 듯한 미형의 얼굴이지만, 표정은 서릿발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차갑기 그지 없었다.
반짝이는 금안을 든 그녀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모두 조용히 하라.”
회의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단연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모종의 마력이 그렇게 만들었다.
앉아있는 상태 그대로 전쟁의 중진들을 조용하게 만든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중갑 기마대를 준비시켜서 성문 앞으로 집결시키시오. 마법사들은 셋으로 나누시오. 하나는 하늘로 날아드는 무리를 감시하고, 다른 둘은 각자 가지고 있는 공격 마법을 미리 준비해서 언제든 바로 쏠 수 있게 기주하라고 하시오.”
명령을 마친 여인은 곧장 회의장을 나섰다. 그 뒤로 호위 기사들과 각지에서 모인 영주들, 마탑의 마법사들이 한데 뭉쳐 뒤따랐다.
“저, 전하! 참전하시려는 겁니까?”
“그럼 저 성탑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오? 하미르 경?”
“그, 그것이 아니옵고. 반란군들을 진압하는데 있어서 혹여나 옥체가 상하지는 않을까 염려되어······.”
“반란군이라니. 아직 아버지가 승하하지도 않으셨는데 무엄하오.”
“아, 죄, 죄송합니다.”
기사의 말을 끊은 황녀, 유리아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성벽의 계단을 올라 첨탑에 다다랐다.
그녀의 앞에 성문으로 다가오는 검은 물결이 보였다. 모두 제 오라버니의 아래로 들어가기를 원한 영주들의 군대였다.
“델란, 호스펠, 기트손, 두체스······ 이게 다인가?”
“그렇습니다. 이전의 승리에 취한 오합지졸들이지요.”
유리아의 물음에 옆에 선 여인이 답했다. 수정구를 들고 있는 마녀가 웃으며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모두 네 번의 승리를 맛보았기에 이 성이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전하가 마련해 두신 군대는 저들에게 적발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너무 많은 자들이 죽었다.”
여인의 조용한 목소리에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모두 폐하를 위해 죽은 것을 긍지 높게 여길 것입니다. 죽어서도 영광과 함께 할 것이고요.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승리하셔야 합니다.”
“······아직 난 황제가 아니다. 호칭을 똑바로 하도록.”
“실례했습니다. 전하.”
고개를 꾸벅 숙인 기사가 물러나자 황녀는 다시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출진한다.”
전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와아아아아아-!
전장을 휩쓰는 거대한 외침들. 하나하나는 보잘 것 없었지만, 한 데 모이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외침이 전장을 질주했다.
병사들은 보았다. 이 불합리한 피와 살육의 땅에서 그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를.
황녀 유리아는 투구를 쓰지 않았고, 그로 인해 무수한 마법사들의 원성을 들었으며, 저격수를 견제하기 위한 갖가지 방호 마법을 두르라 조언했다.
원성은 흘려넘기고 멀리서 날아든 화살 따위는 잡아챌 수 있다며 조언을 묵살한 유리아는 언제나처럼 환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체 외쳤다.
“나의 병사들이여! 칼을 들어라! 여기 너희들의 터전을 짓밟고, 가족을 범하고, 곡식을 빼앗으려 온 자들이 있다! 방패를 들어 그들을 막고, 가족을 지켜라! 무엇 하나 빼앗아가게 놔두지 마라!”
와아아아아아-!
그녀의 외침은 마력을 타고 보다 높이, 보다 멀리 전달되었다. 그 청아한 목소리를 들은 모든 병사들이 소리 높여 화답했다.
화답은 곧 전진이, 전진은 곧 질주가 되었다.
버석하게 메마른 땅 위를 병사들의 낡은 가죽 신발, 부츠가 지나가며 무수한 발자국과 흙먼지를 피워올렸다.
“옆으로-!”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용병들을 백인대의 대장으로 세우고, 그 백인대를 통솔하는 천인대의 대장들이 명령을 내렸다.
보병들이 둘로 갈라지자 그 사이로 말을 탄 황녀와 기사들, 마법사들이 달려 나왔다.
병사들은 그 선두에서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긴 은발과 황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우리들의 주인이다!
몇 점 없는 구름 아래 하늘은 청량한 푸른빛으로 빛났고, 그 하늘 아래 페르거 평원이 넓은 풀과 초목을 자랑하려 했다.
하지만 그 풀과 초목을 짓밟으며 다가오는 황자 알드리칸의 군대로 인해 녹색의 물결은 지워지고, 대신 검은색과 갈색, 붉은색으로 이뤄진 가죽과 갑옷들의 행렬이 대신했다.
징집병이라고 하기에는 무장이 썩 괜찮은 병력들이었지만, 제대로 된 진형을 갖추지 않은 채 저마다의 한 무리로 이뤄진 채 달려오고 있었다.
용병들이었다. 영주들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용병들은 각자의 무리, 혹은 용병단의 단장을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말을 탄 놈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이 훨씬 많았다.
황녀 유리아가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빛이 내게 임하니-”
그녀가 오른팔을 들어올리자 그 손에 어느 샌가 휘황찬란한 장검이 잡혔다. 보석과 황금으로 장식된 칼날에서 푸른 마력이 유형화하다가 하얀 섬광으로 화했다.
“천벌이 되리라-!”
검극에서 폭발한 한 줄기의 광선이 끝에 가서는 수십 개의 광선으로 분화하며 하늘로 쏘아졌다. 쏘아졌던 광선들은 어느 지점에 이르렀다가 갑자기 직선으로 뚝 꺾이며 방향을 틀더니 그대로 용병들을 향해 내리꽂혔다.
투두두두두두두!
“아악!”
“내 팔!”
“방패 들어! 방패 들-께엑.”
급작스러운 기색에 용병 무리가 혼비백산하는 것도 잠시, 그 무리의 중심에 황녀를 선두로 한 기마병이 충돌했다.
정확히 균열이 일어난 곳을 포착한 유리아가 말의 머리를 돌려 충돌하자마자 무리는 단번에 둘로 쪼개졌다.
“시바아알! 비켜엇!”
“으아, 으아악!”
“엄마아아!”
죽음 앞에서 도망치려는 자, 비명을 지르는 자, 어머니를 부르며 바지에 오줌을 지르는 자. 모두 공평하게 기사들의 검에 목이 날아가거나 정수리가 박살나며 땅에 몸을 뉘였다.
쐐기 형태로 용병들의 무리를 둘로 나누고 박살내자 그들의 뒤로 달려온 보병들이 제각기 지닌 창과 칼을 휘둘러 나머지를 정리했다.
그렇게 용병 대열이 두 동강이 나자 용병을 앞세운 채 천천히 다가오던 델란, 호스펠, 기트손, 두체스의 영주들은 바짝 굳어버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수성을 할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요!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다고!”
“이 상황에 그런 걸 따질 것입니까! 빨리 기사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그, 그쪽이 먼저 출진시키시오. 난 여기서 상황을 조금만 보다가······.”
“무슨 되도 않는 헛소리를-”
네 번의 승리에 취해 압도적인 병력을 데리고 수성전을 할 생각만 하고 있던 영주들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황녀는 어느새 그들의 지척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를 상징하는 빛의 마력이 주변에 넘실거렸다.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며 경외하는 모습 그대로, 빛의 신이 강림한 듯한 자태였다.
우우우우우웅-!
수천 마리의 벌떼가 웅웅거리며 우는 듯한 소리를 두르며 유리아가 검을 휘둘렀다.
검을 타고 전개된 빛의 마력이 길쭉한 칼날이 되어 병사들을 도륙했다.
고함, 비명, 굉음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