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굴라의 팔 (2)
***
콰과과과광-!
커다란 공동 속에서 세 번째의 격돌이 일어났다. 공동을 가로지르는 수십 발의 광선이 그대로 한 남자를 향해 내리꽂혔다.
검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달리는 남자가 힐끗 위를 살피더니 그대로 왼손에 쥐고 있던 묵색의 대검을 휘둘렀다.
따다다다당!
한 번의 휘두름에 수십 개의 광선이 일제히 튕겨나가며 사방을 꿰뚫었다. 공동의 천장과 천장을 받치고 있는 두꺼운 나무 기둥, 바닥에 움푹 패이는 흔적이 남았다.
[족쇄의 기억]
아까보다 확연히 빨라진 수인과 영창으로 마법이 구현되고 그림자가 일어났다. 섬광에 의해 곳곳에 드리워진 출렁이는 그림자가 물리적인 실체를 부여받고 러셀의 팔다리를 휘감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에 가로막혀 일정 거리 이상을 전진하지 못했다. 오히려 술식을 이루고 있는 마력을 빼앗기며 실체를 잃고 사라질 뿐.
“흠.”
그 현상을 보며 러셀은 자신이 들고 있는 팔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치 그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오른손 엄지를 치켜든다.
“······.”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팔이 마치 뇌가 달린 것마냥 움직이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혐오스럽기 그지 없었지만, 그는 가볍게 넘겼다.
이 괴상한 세계에서 저 혼자 움직이는 팔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익숙해졌다.
아직 제대로 된 정황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 급한 것은 아니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한다.
지금 그가 아는 것은 네멘스토의 숨결에 들어가 있던 이 팔뚝이 저 도마뱀 거인의 마력을 흡수한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저 용족의 몸에 들어가 있는 다른 영혼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빌어먹을, 뭐냐!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굴어놓고서는!”
뜯겨져 나간 오른팔 대신 나무줄기로 이뤄진 정교한 팔을 대신 가지게 된 릭투스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굴라의 팔이다.”
“그게 무슨 팔인데!”
“이곳에서 저 유해를 보게 될 줄이야. 아니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아직 살아있는 건가?”
“알아듣게 말해라!”
릭투스가 으르렁거렸지만 노인은 이미 깊은 생각에 잠긴 것인지 입의 주도권조차 내주었다. 그러면서도 두 손은 저절로 움직이며 새로운 마법을 짜올리고 있었다.
우우웅!
공간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전혀 다른 힘이 러셀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의 눈이 빛나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질량이 러셀을 후려갈겼다.
콰아아앙!
그를 덮친 것은 거대한 주먹이었다. 나무 줄기와 가지, 뿌리가 촘촘히 얽힌 주먹은 릭투스의 나무로 된 오른손이 크기를 키운 것이었다. 크기로만 보면 거인의 것이라 보아도 손색이 없다.
그 무거운 질량과 충격량에는 아무리 괴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날아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힘을 내는 것과 지닌 무게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
자욱한 먼지 속에서 러셀의 존재감이 사라졌다는 것에 릭투스가 입을 벌리며 놀라워했다.
“이렇게 쉽게?”
“멍청한 놈.”
다시 도마뱀의 입을 빌린 노인이 혀를 찼다. 릭투스의 눈가가 찌푸려지며 뭐라 말하려고 하는 찰나, 러셀이 먼지를 헤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모습은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의 갑옷으로 빈틈없이 덮여 있다. 얼굴까지 안면갑으로 완전히 가려진 틈새 사이에서 자청색의 안광이 빛나며 릭투스를 바라보았다.
“마력이 안 먹히니 질량이라. 유연하군.”
러셀이 두르고 있는 갑옷이 대단한 아티펙트임을 알아본 노인이 릭투스의 몸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굴라의 팔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공간변환 주문이 걸려 있는 갑옷이라니. 어쩌다가 저런 놈을 적으로 둬서. 그 오랜 시간을 거슬러서 다시 살아난 보람이 없다.”
노인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릭투스가 낮게 목소리를 깔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죽는 소리 하지 마라. 기왕 들어왔으면 저 빌어먹을 인간을 이길 생각을 하라고!”
“그래, 그래. 나도 여기서 다시 잠에 들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대화를 마친 죽시 릭투스의 거대해진 오른팔이 연둣빛의 섬광을 뿌렸다.
[목령(木靈)]
그러자 나무 주먹에서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이 폭발적으로 생장을 거듭하면서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눈 한번 깜박이는 순간에 5미터의 거인이 되어 그대로 러셀을 짓밟으려 다리를 들어올린다.
콰앙!
간단하게 몸을 뒤로 물린 것으로 거인의 공격에서 벗어난 러셀이었지만, 거인의 공격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거인이 내려찍은 발을 중심으로 형체가 무너지더니 바닥을 타며 수백, 수천 개의 나무 뿌리가 헤엄치며 러셀을 가두려 들었다.
나무 주먹에서 거인으로, 다시 러셀을 가두려고 하는 감옥으로 뒤바뀌는 과정은 매끄럽기 그지 없고 손실되는 마력 또한 미미하다.
릭투스의 마법과는 또다른 궤에 올라와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마력운용이다.
[가두고, 분쇄하라]
러셀의 발밑에서 치솟은 나무 뿌리줄기가 그대로 그의 신형을 휘감고 으스러뜨린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연이어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뿌리와 줄기가 10미터 반경을 통째로 집어삼킨 채 거대한 나무 기둥이 되었다.
노인이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입도 열지 않았-”
카가가가가강!
그때 커다래진 나무의 중심에서 수십 갈래의 균열이 일어나더니 그대로 반듯한 절단면으로 조각나 부서져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러셀이 멀쩡한 안색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 쥐어진 나힐니르의 칼날에서 흰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칼날에 잘려 나간 나무 줄기가 닿자 곧장 불씨가 붙더니 불이 피어올랐다.
그가 힘을 주어 휘두른 것만으로 나힐니르의 칼날이 마찰열로 달아오른 것이다.
그를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올려다보는 릭투스를 내려다보던 러셀이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왼손에 한기와 스파크가 공존하는 성질의 마력이 번뜩이다가 길쭉한 창의 형태로 단조되었다.
러셀의 손에서 휘몰아치는 냉기와 파괴적인 전격을 알아본 릭투스의 입에서 노인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두 가지의 속성을 저렇게 완벽하게 조합하다니! 이 도마뱀 대가리보단 훨씬 낫군!”
“안 닥쳐!”
파지지지직!
새파란 전광이 쏘아졌다. 주변을 순식간에 얼렸다가 부수는 파괴적인 창에 꿰뚫리기 직전, 릭투스의 몸을 차지한 노인이 수인을 맺으며 마력을 이끌어냈다.
[목령토벽(木靈土壁)]
푸화아아악!
릭투스의 바로 앞에서 두꺼운 거목의 벽이 솟구쳤다. 동시에 그의 몸을 잡아챈 나무줄기가 뒤로 잡아당기며 충격을 대비했다.
콰아아앙!
러셀이 던진 빙뢰의 창과 나무의 벽이 부딪치며 둔중한 굉음과 충격파를 뿌렸다.
러셀은 뒤로 물러나는 릭투스를 따라 잡으며 나힐니르를 휘둘렀다. 그 가공할 기세에 주문을 내뱉으려던 릭투스가 허리를 뒤로 젖히며 검격을 피했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내빼더니 나무로 이뤄져 있는 오른팔을 변형시켜 커다란 칼날을 형성했다.
그대로 러셀과 릭투스가 재차 격돌한다.
따다다다당!
묵색의 대검과 커다란 외날의 칼날이 부딪치며 무수한 불똥과 나무 파편을 흩뿌렸다.
단순히 식물을 이용한 마법이 아니라 마력을 빨아들이고 자라나는 특성을 가진 나무를 이용한 수법이다.
그 강도는 나힐니르의 칼날에 부딪히고도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예기는 머리카락조차 잘라버릴 정도로 날카롭다.
여덟 개의 방위를 점한 거대한 나무의 팔뚝이 러셀을 후려갈기고 대기를 가르는 채찍이 되어 공간을 둘로 갈랐다.
콰과과과과-!
맞붙었다가 다시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검은색의 섬광과 연둣빛의 섬광이 방대한 공동 이곳저곳에서 갈지자와 직선, 곡선을 그리며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어찌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지 둘이 스쳐 지나가고 나서야 기둥과 바닥이 박살나며 파편을 흩뿌릴 정도였다.
러셀 역시 대검을 휘두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굴라의 팔과 자신의 마력을 뽑아내며 냉기와 전격을 엮어 휘둘렀다.
수분 하나 없는 곳이었지만 마력을 그대로 얼음으로 변환하고 변환된 얼음이 전격으로 화하며 도마뱀 거인을 몰아붙였다.
검격을 교환하는 와중에도 바닥에서는 나무뿌리와 줄기가 회전하며 드릴이 되어 러셀의 발바닥과 다리, 복부를 노리며 쏘아졌다.
그 물량 공세의 절반은 굴라의 팔이 진동하며 마력을 흡수해 기세를 잃었지만, 그 반경에 들지 않았던 나머지 절반은 그대로 날아들었다.
떠더더덩!
하지만 그조차 러셀이 착용한 갑옷을 뚫지 못하고 송곳 끝이 부러졌다. 그가 입은 갑주가 상상이상으로 단단한 것을 재차 확인한 노인이 외쳤다.
“그럼 이것도 견뎌 보아라!”
마력을 가득 담은 손짓이 허공을 강하게 내리긋는다.
그 손짓에 따라 일어난 나무뿌리와 줄기가 굵직해지며 크기를 키우고 모여들더니 거대한 망치가 되었다.
공동 천장의 반을 가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크기와 압축된 마력. 러셀 또한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갑옷의 단단함만 믿고 저 질량을 받아넘길 수는 없다. 제대로 흘려내지 못한다면 갑옷은 멀쩡하더라도 그 안의 육체는 곤죽이 되어버릴 터.
단련에 단련을 거듭해오긴 했지만, 러셀은 자신의 육체가 아직 가지고 있는 한계를 명확히 인지했다. 아직 인간을 포기하지 못한 자신의 몸은 저 충격을 막아낼 수 없다.
우우우웅-!
엔진이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전신의 마력이 격렬하게 회전하며 혈류와 함께 몰아쳤다.
그의 발밑으로 퍼져나간 무채색의 파동이 동심원을 그렸고, 지반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며 콰득-내려앉았다.
양손으로 나힐니르의 칼 손잡이를 단단히 잡은 러셀이 그 모든 마력을 대검에 때려 넣었다.
연상하는 것은 무엇보다 날카로운 일점. 날아드는 것이 망치가 아니라 설사 산이라고 하더라도, 무엇이든 꿰뚫을 단 한 점에 모든 의식을 집중시킨다.
아까부터 불타오는 듯한 통증이 일어나고 있는 두 눈에서 다시 한번 고통이 들이닥쳤다. 눈알을 뽑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날아드는 망치를 노려보았다.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이룬 마력을 바라본다. 그 구조를, 그리고 구조를 엮는 결을 바라본다. 그 결이 핵심이었다.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가는 마력의 파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파동의 물결이 뚝 멈추고.
샤아아아아······.
러셀의 손에는 새하얀 전격에 휘감긴 대검이 들려 있었다. 전격 특유의 수천 마리 새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는 사라지고 없다.
커다란 뱀이 위협을 하는 것 같은 희미하고 높은 울림과 함께 냉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냉기에 닿은 즉시 얼어붙으면서 동시에 벼락에 맞은 것처럼 수십 개의 날카로운 조각으로 갈라지는 모습은 한기와 전격이 더없는 순환의 고리를 그리고 있다는 증거.
사방으로 냉기와 함께 전격을 흩뿌리는 나힐니르는 원래의 검은색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하얗게 달아올랐다.
러셀이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동시에 그를 노리며 안 그래도 거대했던 부피와 무게를 더욱 늘리고 있던 거대한 망치가 그 밑면을 아래로 향한 채 떨어져 내렸다.
평평한 면이 아니라 십이각형의 형태를 갖춘 채 그 첨단을 날카롭게 세운 망치. 저것이 그대로 공동의 바닥에 작렬하면 천장은 물론이고 위에 있는 산이 그대로 내려앉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망치가 떨어져 내렸다.
소리는 없었다.
망치의 첨단이 한점을 비집고 들어오는 대검의 검극에 짓눌러지며 뭉개졌다. 수백 개의 균열이 한순간에 그어지고, 그 틈새로 눈부신 섬광의 줄기가 치솟아 올랐다.
망치는 내부에서 피어오른 강력한 열기에 불타오르지도 않고 검은 재가 되어 흩날렸다. 사방에 가득찬 탄내와 잿더미를 가르며 대검은 어둠 속을 꿰뚫고 나아갔다.
망치의 위에서 허공에 뜬 채 두 손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 릭투스는 깊게 잠긴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깊고 어두운 지하 속에서 농축된 지맥의 마나와 생명을 빨아먹고 살던 생령목으로 만든 최후의 공격이 무너지고 있었다.
나선으로 회전하는 하얀 섬광이 나무를 얼렸다가 그대로 쪼개며 박살 내고 위로 솟구쳐 올랐다.
***
드드드드드드······.
협곡의 바로 위, 넓고 평평한 고원이 난데없는 지진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빗물을 머금고 잎사귀에 물방울을 맺혀두고 있던 이름 모를 잡초들이 땅의 흔들림에 몸을 떨었다.
그 고원의 한 지점에서 광선이 번쩍이며 나타나더니, 꽈과광-하고 암석과 젖은 흙이 폭발하며 대검에 몸통이 꿰뚫린 도마뱀 거인과 대검의 칼자루를 쥔 남자가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비구름으로 가득했던 밤하늘은 어느새 깨끗해져 있었다. 저 멀리 동쪽으로는 희미한 물빛이 선연하게 베어오며 아침의 전조를 알렸다.
새벽을 맞이하는 밤하늘의 별들이 과거에서 보낸 빛들을 이제서야 환하게 빛내는 와중에 두 신형이 그 별빛들을 가렸다.
휘이이익!
공중에 떠 있던 둘이 바닥에 떨어졌다. 단단한 얼음 석상이 된 릭투스가 바닥을 구르고, 러셀 또한 제대로 착지 하지 못한 채 바닥을 뒹굴었다.
“하아······.”
갑주의 착용이 해제되고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이마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느껴진다. 심호흡을 하는 그의 턱 아래로 땀방울이 뚝뚝 흘렀다.
“카학!”
비명을 토해낸 릭투스가 배에 박힌 대검을 뽑아냈다. 망치를 부수며 빙뢰를 담았던 검날에 의해 벌써 복부는 새파랗게 얼어가고 동시에 전격에 의해 부서지려 하고 있었다.
“산 것은 언젠가 죽는 법이라지만, 난 그 법칙을 따르고 싶지 않았지. 생령목에 기대어 미래로 죽음을 유예 시켰건만. 신의 저울은 공평하다는 건가? 저런 터무니 없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니.”
“닥쳐!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한 입으로 회한과 고함을 동시에 지른 릭투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러셀 또한 다리에 힘을 주며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마력은 쓸 수 없을지라도 체력은 남아 있었다.
제일 먼저 뻗어온 것은 단단한 주먹이었다. 키가 3미터에 달하는 거인의 주먹은 보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 주먹을 바라보며 러셀은 깊은 호흡을 들이켰다. 그러자 보다 세상이 명료해지며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커다란 주먹과 도마뱀 거인의 거친 숨소리, 디딘 발 아래에서 짓이겨지는 잡초와 물씬 맡아지는 비 냄새, 얼굴과 몸을 타고 흐르는 땀과 두근대는 심장박동까지.
들이켰던 숨은 허파를 가득 부풀렸다. 산소가 피에 녹아들고 그 피가 전신으로 퍼졌다가 다시 모여들었다. 의식이 한없이 가속되어 시간이 느려진 듯한 세계에서 그의 오른주먹이 분명한 선을 그렸다.
릭투스의 몸이 들썩였다. 그의 주먹은 정확히 러셀의 왼쪽 얼굴을 내려찍고 있었다. 그리고 러셀의 주먹 또한 자신의 복부와 가슴 사이, 명치 부근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퍼억!
뒤늦게 릭투스의 등 뒤의 공기가 터져나가며 뿌연 방사형의 충격파를 그렸고, 둘이 서 있던 바닥 아래로도 고리 형태의 파동이 확- 퍼지며 풀들이 일제히 바깥쪽을 향해 누우며 머금고 있던 빗방울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파충류 특유의 노랗고 길쭉한 동공이 깜박였다.
눈높이의 차이는 곧 다리에서 힘이 빠진 릭투스가 무릎을 꿇으며 뒤바뀌었다. 그의 앞에 자청색의 눈으로 어둠을 몰아내는 남자가 도마뱀 거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