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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76화 (177/225)

176화 선물 (6)

시간을 벌려면?

릭투스는 협곡 안에 오랫동안 만들어놓은 자신의 레어를 생각했다.

짐승도 자신의 굴에서는 절반 이상 먹고 들어가는 법이다. 하물며 몇 달 동안 거처를 꾸린 마법사라면 더더욱. 마법사의 무서움은 철두철미할 정도의 준비성에 있다.

이번에는 그 덩치 큰 인간의 전력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해 타격을 입었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쿨럭! 커헉. 퉤.”

마지막까지 내장을 찌르던 그놈의 마력 잔재를 핏덩이와 함께 뱉어냈다. 속이 한결 편해진 릭투스는 숙였던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마력을 끌어모아 마법을 시전하자 오그라들었던 왼쪽 옆구리가 펴지면서 갈라진 비늘 조각들이 떨어졌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뭉개졌던 살점이 펴지면서 그 위로 단단한 비늘이 덮였다.

타박.

“도망치다 온 곳이 여기야?”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릭투스가 고개를 돌렸다. 비늘 덮인 길쭉한 머리가 돌아가고 세모꼴의 입에서 길쭉한 푸른 혀가 날름거렸다.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것이다.”

“썩 괜찮은 묫자리는 아닌데. 내가 양보하지. 네 묫자리 해라.”

널따란 협곡의 사이에는 커다란 암석들이 무분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약간 경사를 두고 있는 울퉁불퉁한 길 위에 빗물이 흐르며 여러 갈래의 물줄기를 만들어냈다.

릭투스는 약간 경사가 높은 곳에서 저 멀리 걸어오고 있는 러셀을 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그 눈동자······ 인간의 홍채치고는 희귀한 색깔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마안 보유자였군?”

빛 한 점 없는 협곡을 양옆에 둔 러셀과 릭투스. 둘 사의 거리는 족히 300미터는 넘게 떨어져 있었지만, 두 초인에게 그 정도 거리는 의미가 없는 간극에 불과했다.

열의 분포와 이동, 흐름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있는 릭투스에게 러셀의 모습은 붉게 보였다. 하늘에서 내리고 있는 빗줄기는 먹물과 같았고, 절벽은 남색과 검은색을 오간다.

오직 러셀의 두 눈만이 그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릭투스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러셀을 바라보면서 뒤로 걸음을 옮겼다.

“마력을 각성한다고 해도 손에 넣기가 극히 희귀하고 선천적이나 특별한 환경이 조성되어야만 개안이 가능한 체질인데. 인간이 마안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는 처음 보는군.”

거기에 눈가 주위로 아무런 이상반응이 없다는 것은 후천적, 혹은 인위적으로 얻은 것도 아닌 선천적으로 타고 났다는 증거.

“아까의 마나와 마력을 동결시킨 것도 그 마안의 힘이었겠지? 신기하구나. 한 인간에게 몰려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야. 마안이나 그 완력, 마법 도끼까지. 어디의 왕족이라도 되는 것이냐?”

“말이 많다. 해 뜰 때까지 입만 놀릴 생각이냐? 준비 다 했으면 빨리 시작하자.”

오만한 미소-도마뱀 머리의 표정을 제대로 읽은 것이 맞다면-를 짓고 있던 릭투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건방진 인간 놈.”

번쩍!

먹구름 사이에서 전광이 번뜩이고, 뒤이어 우렁찬 천둥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섬광이 번뜩였을 때 러셀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콰아앙!

뒤늦게 러셀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암석으로 이뤄진 말뚝이 꽂혀서 부르르 떨었다. 마치 총알이라도 날아든 듯한 속도로 쏘아진 말뚝이었지만 러셀은 그것을 한 발 비켜서는 것만으로 타점에서 벗어났다.

그때 부르르 떨던 암석 기둥의 표면이 쩌적, 하고 갈라지더니 그대로 안쪽에서 강렬한 화염을 토해냈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는지 러셀의 주변 10미터에 있던 모든 암석이 붉게 달아오르며 화염 기둥을 내뿜었다.

지옥의 열기가 도래한 것 같은 압도적인 화력에 돌이 흐물흐물해지며 액상화되어 용암처럼 흐르고 빗방울은 구름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기화해 수증기가 되었다.

짜자자자작!

하얀 섬광과 함께 섬뜻한 냉기가 바닥을 타고 퍼져나갔다. 러셀의 발이 닿는 부분마다 동심원을 그리며 냉기가 뻗어진다.

차갑게 굳어버린 용암의 잔해 위에서 러셀이 고개를 들어 릭투스를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준비한 게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그럼. 이게 전부가 아니지.”

화염 세레를 통해 시간을 벌었던 릭투스가 손아귀를 펼쳤다. 손바닥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마력이 구체적인 염상을 그리고 순식간에 붉은 마법진을 그린다.

직후 그가 마법진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손바닥을 바닥에 내려찍자 그곳을 중심으로 붉은색의 마력 파동이 터져 나오며 협곡을 검게 물들였다.

콰아아아아-!

어둠이 가라앉은 협곡의 내부. 머리카락을 적시던 빗방울이 느껴지지 않았고, 바람마저 멈췄다.

마나와 마력의 흐름을 육안으로 볼 수 있게 해줬던 마안조차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깃털 걸음, 악마의 발톱.”

순식간에 세 개의 마법이 중첩으로 펼쳐지고 그 중 두 개가 릭투스의 육체에 깃들었다. 붉은빛이 비늘 위로 은은하게 어리면서 투명한 아지랑이를 일으켰다.

도마뱀의 노란 눈이 번쩍 빛나더니 마지막 마법을 완성했다.

“중력 강화.”

그그그그극-

러셀의 발이 지면을 뚫고 들어갔다. 머리부터 어깨까지 짓누르는 압력 탓이다. 릭투스를 중심으로 뻗어진 거미줄 같은 마력 회로가 협곡 전체에 걸쳐져 있었다.

“마안 보유자는 극히 드물지. 그 눈에 얼마만한 가치가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군. 그 단단한 몸뚱이와 무구들, 모두 내가 알맞게 써주겠다. 네 작은 뇌로 판단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에 써주겠다고 약속하지.”

“가치의 기준은 내가 정한다, 도마뱀 대가리.”

이제 러셀을 바라보는 릭투스의 눈은 숫제 걸어다니는 금덩이를 바라보는 듯하다.

높은 마력과 마법적인 경지를 쌓는 데에 욕망과 감정이 관여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

갈망이든 소망이든,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은 무력을 쌓기 위한 훌륭한 성장의 동력원이 될 수 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원하고 필요하다면 죽여 빼앗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는 노골적이고 추악한 탐욕.

자신의 신체를 향한 욕심을 굳이 숨기지 않는 마법사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

강력한 중력의 압박 속에서 러셀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와봐라, 도마뱀 대가리.”

“하핫, 건방진 놈······!”

투쾅!

그 자리에서 허리를 비튼 릭투스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러셀의 눈이 찌푸려졌다.

권역이라고 말한 것이 헛소리가 아닌 듯 그 움직임은 아까 마을에 있을 때보다 3배 이상 빨라져 있었다.

러셀의 오른쪽 등 뒤에서 릭투스가 나타났다. 이미 자세는 잡혀 있다.

마법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육체를 제어하고 다루는데 능숙하다는 증거로, 3배 이상 빨라진 속도를 무리 없이 감내하는 것이 인상깊다.

허리를 숙이고 어깨를 비튼 릭투스가 그대로 주먹을 뻗어냈다. 회전력을 가미한 일격이 그대로 러셀에게 작렬했다.

반경의 모든 공간이 릭투스의 마력과 육체의 움직임을 보조하면서 이끌어 내는 동작은 순간이지만 공간마저 꿰뚫는 위력을 지녔다.

주먹 끝에서 세 번 중첩된 충격파와 섬광이 원형의 고리를 그리며 러셀의 오른쪽 등을 후려갈겼다.

파아아아아앗!

두 술사이자 전사인 초인들이 딛고 있던 단단한 암석으로 이뤄진 길이 한순간에 박살 나고 한 줌의 가루로 화하며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충격파가 미처 해소되기도 전에 두 번째로 릭투스와 러셀이 맞붙었다.

레어에서 한정이긴 하지만 국소적인 영역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마법을 수련했으면서도, 육체 또한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용족은 선천적으로 높은 마법적 재능과 마력을 별도로 저장할 수 있는 신체기관을 가지고 태어난다. 거기에 육체조차 힘은 오거와 견주고 재생력은 트롤보다 대단한데다가 수명 또한 수백 년을 거뜬히 살 정도로 길다.

긴 수명에 반 비례하는 낮은 출생율과 일생에 서너 번 밖에 찾아오지않는 산란기가 아니었다면 이미 인간과 다른 지성체들을 모두 몰아내고 대륙의 지배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투두두두두두!

마력과 마력, 주먹과 주먹의 공방이 오간다. 코트 속에 들어있는 무구를 꺼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틈이 없었다.

콰아앙!

영역 속에서 도마뱀 거인의 신체 능력은 한 차원 더 높이 도약하고, 술식 또한 모두 평상시의 서너 배 이상의 속도와 공격력을 지녔다.

릭투스는 이제까지 보였던 모든 속성의 마법을 러셀 하나에게 때려박았다.

중력의 사슬이 러셀의 전신에 감긴 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냉기가 한곳에 뭉치며 날카로운 창이 되어 날아들었다.

급격히 하강한 기온 덕에 위로 떠오른 열기가 보다 높은 곳에서 집채만한 불덩이가 되어 떨어지고, 소리와 섬광이 압축된 구체가 러셀의 등 뒤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공격들을 좌우와 뒤에서 때려박으며 릭투스는 전면에서 날카로운 손톱을 세운 손을 크게 할퀴었다.

손아귀에 어렸던 마력이 커다란 용의 발톱 형상이 되어 러셀의 가슴팍을 베었다.

콰아아아아!

숨 쉴 새도 없이 몰아붙인다. 하지만 그를 상대하는 러셀은 처음 도마뱀 거인이 마법진을 바닥에 내려찍었을 때부터 차가워져 있었다.

“큭······.”

성인의 머리통보다도 굵고 커다란 주먹, 그 위의 단단한 비늘들이 강렬한 열기와 충격에 타들어가고 깨진 채 흩날렸다.

“움직이기도 힘들 텐데, 어떻게?”

“칼리아의 피의 권역에 비해서는 조금 부족하군.”

러셀은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던 칼리아의 심상공간을 떠올리며 손을 털었다. 그의 손도 멀쩡하지는 못한 듯 과격한 마력의 운용으로 인해 핏줄이 불거지고 터지며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처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러셀은 손등과 손바닥에 고인 피를 획 털어냈다. 바닥에 흩뿌려진 핏방울이 달궈진 바닥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빠른 속도로 말라붙다가 바스라졌다.

도마뱀 거인이 왼팔을 중심으로 마력을 전개했다.

기이이이잉······!

묵직한 마력이 그 팔을 타고 회전하며 드릴 같은 형상을 취한다. 마법이나 주문이 아닌, 가진 마력을 형상구현하는 수법. 기사들의 검기와 똑같은 원리가 도마뱀 거인의 왼손에 어렸다.

그것을 보며 러셀 또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호흡은 가볍게, 손끝 발끝은 가볍게.

처음 마나를 느끼고 마력을 몸속에 쌓기 시작했을 때부터 여섯번째 감각은 꾸준히 그 날카로움을 세웠다.

거기에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줬던 눈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줬다.

이제 또 다른 것을 볼 차례였다

러셀의 눈동자에서 뿜어지던 안광이 점차 강해지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도리어 빛을 꺼트렸다. 하지만 동공 안쪽에서는 여전히 작은 불씨가 거세게 불타오를 준비를 마친 듯 반짝이고 있었다.

쾅!

가볍게 발을 구르자 릭투스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화살처럼 쏘아져왔다. 러셀 또한 찰나에 가까워지는 도마뱀 거인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릭투스의 마법으로 인해 강해진 중력의 압박이 전신에 매단 모래 주머니처럼 러셀을 아래로 끌어당겼지만, 그는 놀라운 괴력으로 압력을 떨쳐냈다.

쩌저저적!

도마뱀 거인이 움켜쥐었다가 내지른 마력이 그대로 삐죽삐죽한 냉기의 형상을 그리며 러셀을 덮쳤다.

동시에 불길과 벼락, 단단한 암석이 솟구치며 사방에서 쏘아진다.

러셀이 이런 종류의 마법사이자 전사인 적을 처음 상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이스칼리아라는 강적을 상대로 싸워봤고, 그 이전에는 드라칸 카루곤이나 악마 로고스 또한 맞상대 해보았다.

모두들 제각기 지닌 혈마력이나 흑마력, 혹은 자연의 원소를 마력에 녹여내며 다채로운 공격법을 선보였다.

마법과 체술을 능숙하게 다루는 전사와의 전투는 이제 러셀에게 있어 낯선 일이 아니다.

가진 기술의 한계를 앎과 동시에 그 너머의 지평을 엿볼 수 있게 도와주는 과정이었다.

우우우우웅-!

그 순간, 러셀을 노리며 득달같이 달려들던 마법들이 강렬한 햇살에 녹아내리는 얼음처럼 사라졌다.

그를 짓누르던 중력의 구속과 압박이 러셀을 중심으로 터져나온 파동을 이기지 못하고 밀려났다.

릭투스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아니, 이게 무슨······! 뭐하는 짓······!”

러셀의 동공 안쪽에서 타오르던 불씨가 기름이 부어진 것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력의 흐름이 멈춘 공간 속에서 마력에 대한 간섭 능력이 극도로 증폭되기 시작한다.

“안 돼!”

릭투스가 그리 외치며 달려들었지만, 그보다 러셀의 눈을 타고 흐르던 빛이 점차 강해지는 것이 더 빨랐다.

“한계를 넘은 환상은 국지적인 물리법칙이나 현상까지 왜곡할 수 있는 건가. 좋은 걸 배웠다.”

러셀을 중심으로 터져나온 마력의 파동이 암흑 공간을 타고 지평선 너머로 뻗어나갔다.

천장에 실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균열이 더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리로 표현될 수 없는 굉음을 내며 무너져내렸다.

방금 전까지 러셀을 끊임없이 압박하던 무형의 족쇄가 끊어지고 부스러지며 흩날렸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여전히 비가 내리는 먹구름 가득한 밤하늘과 좌우로 크게 무너진 협곡.

그리고 저 안쪽에서 시커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커다란 동굴이었다.

러셀은 처음 릭투스가 붉은 마법진을 내려찍었던 자리에서 뜯겨져 나간 왼팔을 주워들었다.

모든 피가 빨려나간 듯한 팔은 이전의 근육은 모두 사라진 채 미라 같은 형상이 되어 있었다. 러셀이 가볍게 힘을 준 것만으로도 파삭, 하고 부서졌다.

우우우우웅······.

러셀의 형형한 안광이 깊은 동굴로 향했다. 준비해뒀던 환상은 깨부쉈고, 그의 마안은 새로운 지평선을 바라보게 되었다.

협곡에서 도마뱀 거인이 뭘 찾아 연구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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