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선물
***
“젠장, 못 해 먹겠다.”
바이젠이 들고 있던 그릇을 놓고 숟가락까지 놓아버렸다. 뜨거운 모닥불의 빛과 열기가 그의 불만스런 얼굴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뭘 못 해 먹어?”
“아니, 이게 사람 음식이냐? 아무리 내가 험하게 자라고 전쟁터에서 굴렀다고 해도, 이건 먹을 수 있는 게 아냐! 차라리 말처럼 풀을 씹고 말지!”
“······.”
바이젠이 성난 얼굴로 자신이 내려놓은 그릇을 가리켰다. 적당한 크기의 나무 그릇에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 원래 색을 짐작하기 힘든 거무튀튀한 액체와 건더기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러셀은 자신의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바이젠의 것과 똑같은 스튜가 담겨져 있었다. 그는 오늘의 저녁 당번을 돌아보았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칼리아.”
“······미안하구나. 내가 살면서 요리를 해본 경험이 많지 않아서.”
면목 없다는 표정의 칼리아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했다. 바이젠은 한숨을 푹 쉬었다.
“다음부터는 그냥 내가 하겠수다. 이거 원, 역시 마법사라서 그런지 요리에 대해서는 영 젬병이로군. 전쟁통에서도 그러더니.”
“무슨 말이야? 마법사들이 요리를 잘 못 해? 난 별로 못 느끼겠던데.”
아엘라시스가 깨끗이 비운 나무 그릇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녀는 애초에 용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인간 형태로 변신할 때 미각의 설정치가 잘못되어서 그런지 웬만한 음식에는 별다른 호오를 표하지 않았다. 그나마 술에는 관심을 보였다만.
“이 꼬마애는 둘이 어려서부터 키운 거요? 그러면 이런 음식을 먹고도 별 반응을 안 보이는 게 이해가 가긴 하는데.”
“아니다. 다 먹었으면 닥치고 자라. 설거지는 네가 하고.”
러셀의 말에 바이젠은 궁시렁거리며 일행이 먹어치운 그릇을 수거해 개울로 걸어갔다. 그가 멀어지자 칼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입이 좀 험하고 솔직한 것만 빼면 나쁘지 않구나. 군말 없이 불침번이든 요리든 하는 것을 보니.”
“안 그러면 러셀한테 맞으니까 그렇지.”
아엘라시스가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큭큭 웃었다.
그릇을 씻고 바이젠이 돌아오자 일행은 익숙하게 침낭과 모포를 꺼내들고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중앙에서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은 밤새 동안 열기를 전해줄 것이었다.
그들이 자하드 영지를 나선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며칠 동안 그들은 별다른 탈 없이 대로를 따라 이동했다. 그동안 말을 독려하며 길을 재촉한 결과 그들은 중부의 서쪽 지방, 제이비든 령에 거의 도착했다.
오는 동안 도적이나 괴물들의 습격은 거의 없었다. 러셀의 코트 속에 있는 오른손 또한 조용했다. 그저 바이젠이 시답잖은 농담과 음담패설을 하다가 아엘라시스의 마법에 얼어붙고, 러셀의 손바닥에 뒤통수를 얻어맞았을 뿐이었다.
이제 가을로 완전히 접어든 것을 보여주듯 나뭇잎들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었다. 한낮의 태양이 밝은 빛으로 말을 타고 계곡의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일행을 비췄다.
가을의 햇살은 보기보다 뜨거웠고 바람은 차가웠다. 머리는 따가운데 얼굴은 찬 바람 탓에 쓰라린 이중적인 고통에 익숙해지기도 한참.
계곡을 전부 내려오자 해가 저물어갔다. 높이 솟은 산과 계곡 탓에 하루의 길이가 더 짧아진 탓이었다. 물론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해가 더 빨리 지는 것도 있었다.
일행의 앞에 마을이 보였다. 이틀 만에 본 마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일행은 모두 알게 모르게 꼬질꼬질한 상태였다.
그나마도 칼리아나 아엘라시스의 마법이 아니었으면 더 더럽고 심한 몰골이었을 것이다.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는 마을은 계곡을 근처로 둔 계곡 마을이었고, 목책 또한 그리 크지 않았다. 근처에 괴물들 서식지가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바이젠이 말했다.
“저기 들렀다 갑시다. 오면서 지나친 마을인데, 생선 요리가 썩 괜찮았어. 하룻밤만 들렀다 가기에 아쉬운 마을이었지.”
러셀 일행은 그의 의견에 따라 마을로 천천히 걸어갔다. 바닥이 자갈로 가득해서 말을 달리기에는 그리 적절치 않았다.
문득 러셀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거쳐 온 울퉁불퉁한 자갈길과 큼직한 바위들, 우거진 초목들, 저 멀리 지평선에 자리한 하얀 산맥이, 그리고 구름 몇 점이 떠 있는 하늘이 보였다.
“어이, 형씨? 안 가쇼?”
“간다.”
점차 길 위의 자갈들이 양옆으로 치워지고, 마을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곧 그들은 목책에서도 일행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마을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목책 앞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흔히 볼 수 있었던 누비 갑옷을 입고 낡은 쇠투구와 장대에 날붙이를 달아놓은 창을 든 경비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데 이거.”
시끄럽게 떠들던 바이젠이 입을 꾹 다물고 목책을 지나쳤다. 마을의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가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칼리아가 눈을 깜박거리고, 아엘라시스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아무도 안 다녀?”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다. 모두들 집안에 숨어 있구나.”
“엥?”
칼리아의 말에 아엘라시스가 거리와 그 양옆에 서 있는 건물들, 집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곧 창문과 창문, 그리고 문틈 사이에서 그들을 훔쳐보는 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숨어서 우릴 보는 거야?”
“외지인들을 경계하는 것 같은데······ 이유는 이제 알아봐야지.”
“따라와보쇼.”
바이젠이 다시 앞장서며 휑한 거리를 걸어갔다. 다각다각하는 말발굽 소리가 조용한 마을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여기가 저번에 들렀던 주점이오.”
주점은 2층이었다. 거의 모든 주점이 그렇듯이 1층은 식당이었고, 위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좁고 더러운 방에 사람 서넛이 들어가서 자는 구조였다.
조용한 마을과는 달리 그 주점의 안쪽에서는 왁자한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여럿이 모여서 떠드는 소리,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 우당탕 하면서 뭔가 넘어지거나 부서지는 소리 등.
러셀은 그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켠에 세워진 커다란 마구간 안에 말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다. 대충 대 여섯 마리는 되어보였다.
일행은 똑같이 그 마구간에 말들을 매어놓았다. 말구종도 보이지 않아 그들이 직접 고삐를 기둥에 묶어둬야 했다.
바이젠이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뒤를 러셀이 따라 들어섰다.
러셀의 눈에 바, 군데군데 술병이 빈 진열대와 직사각형의 탁자들이 보였다.
주점 안쪽에는 갑옷을 입은 장정들 여섯이 투구를 벗어두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안쪽에 두꺼운 누비 갑옷과 그 바깥에 얇고 촘촘한 사슬 갑옷, 그리고 강철판을 두드려 만든 흉갑이 겹쳐진 튼튼한 갑옷이었다. 나잇대는 모두 중년으로 보였다.
탁자를 세 개 이어붙이고 그 위에 구운 닭요리와 생선이 가득 담긴 접시가 차려져 있었고, 맥주와 와인이 채워진 술잔 또한 세워져 있었다.
그들 외에 다른 손님들은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들이었다. 울끈불끈한 근육질 팔을 훤히 드러낸 옷차림에 이마와 콧잔등, 뺨에 칼자국이 새겨진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온 바이젠과 러셀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기사들로 짐작되는 남자들도 갑자기 주점 문을 열고 들어선 러셀 일행을 보더니 대화를 뚝 멈췄다.
“······.”
“······.”
잠시 서로가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러셀의 시선이 주점 안쪽을 쭉 훑었다. 가장 먼저 살핀 것은 역시 갑옷을 차려입고 장검을 벽이나 탁자에 기대 세워놓은 남자들 쪽이었다.
다듬지 않은 머리카락이나 수염, 얼굴에 새겨진 오래된 흉터들이 그들이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때 러셀의 뒤로 따라 들어오려던 아엘라시스가 멈춘 러셀을 밀어내며 주점에 들어왔다.
“왜 안 들어가고 여기 서 있어?”
“앗, 아엘라, 잠시만, 그렇게 끌지 말거라.”
아엘라시스와 칼리아가 들어가자 대번에 시선이 쏠렸다. 하얀 머리카락이라는 보기 드문 모발과 요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엘라시스, 그리고 성숙한 외모와 몸매를 가진 칼리아의 외모는 남자들의 시선을 단숨에 휘어잡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여기 주인장 어딨어? 손님들이 왔는데 말이야. 주인장!”
여자들을 보며 눈을 반짝이던 기사들의 시선이 큰 소리로 주인을 외치는 바이젠을 향해 돌아갔다. 곧 주방으로 이어지는 문에서 머리가 반쯤 벗겨진 남자가 튀어나왔다.
“아, 예! 몇 명이신지요?”
“네 명! 각자 식사랑 좀 부탁하지. 그리고 잠자리도.”
“어, 잠자리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주점 주인의 눈이 조용해진 기사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보름달 같은 얼굴에 커다란 땀방울이 두어 개 흘러내렸다.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소. 식사 먼저 내어주시오.”
“알겠습니다!”
주점 주인이 다시 주방에 들어가려는 찰나, 근처에 있던 수염 난 남자가 주점 주인의 팔뚝을 잡아 세웠다.
“예, 예? 무슨 일이신지······.”
주점 주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던 수염은 품에서 동전을 꺼내더니 그에게 건넸다.
“그럼 술 더 부탁하지.”
“아, 알겠습니다······”
주점 주인이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러셀을 향해 칼리아가 손짓했다.
“거기 서서 뭐 하느냐. 와서 앉거라.”
일행은 여관의 구석에 모여서 둘러앉았다. 그들이 구석에 가자 주점은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투구를 벗었지만 흉갑과 완갑, 정강이받이와 부츠를 착용하고 있는 기사들은 술잔을 부딪치며 떠들어댔고, 다른 구석의 젊은 마을 주민 남자들 또한 욕설이 반 이상 섞인 대화를 이어나갔다.
러셀이 바이젠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조금 굳어져 있었다.
“여기 원래 이런 분위기였나?”
“······아니. 주점이 시끄러운 건 같지만, 저런 갑옷을 입은 놈들이 상주하고 있지는 않았어. 마을도 이렇게 조용하지는 않았는데.”
그때 주점 주인이 혼자서 커다란 쟁반에 스튜와 빵이 담긴 접시, 그리고 맥주가 가득 들어있는 나무 술잔도 내왔다.
“우린 술 안 시켰는데?”
바이젠의 물음에 주점 주인이 허리춤의 수건을 들어다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 식사에 포함되어있는 겁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주점 주인은 그렇게 땀을 닦으며 비질거리더니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일행은 식사를 시작했다.
러셀의 손이 빵을 반으로 쪼갠 다음 스튜를 찍고 입으로 가져갔다. 약간 짭짤한 스튜가 딱딱한 빵 속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양송이와 양파를 넣은 것이로구나. 그 두 개가 이리 잘 어울리는 줄은 몰랐는데.”
“캬. 나중에 해보게?”
“모르는 것은 배우면 되고, 못하는 것은 연습하면 되는 법.”
칼리아는 스튜에 들어간 재료를 보며 다음 저녁 식사에 대해 열의룰 불태웠고, 아엘라시스는 맥주잔부터 입에 가져갔다.
유일하게 바이젠만이 뭔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식사를 하다가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맥주를 한모금 들이킨 그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이거······”
그의 심상찮은 반응에 러셀 또한 맥주를 들이켰다. 쌉쌀한 맥주 특유의 맛과 꿀렁이는 목넘김에 이어, 혀의 뒷맛에 미묘한 단맛이 느껴졌다.
“왜 그러냐?”
“약 탄 거 같은데?”
“약?”
러셀이 남은 맥주를 한꺼번에 마셔버리자 바이젠이 사색이 되었다.
“뭐 하는 거야! 약 탄 것 같다니까!”
“이렇게 해야 일이 더 잘 풀려. 용병이라면서 잘 모르는군.”
“아니, 그게 무슨 개소리······ 큭?”
그때 바이젠이 관자놀이를 짚으며 머리를 휘청거렸다. 시야가 흐려지고 사물이 두 개, 세 개로 보였다. 급하게 마력을 일으켜 약효를 몰아내려 했으나, 그것이 더 역효과를 불러왔다.
마력이 움직이자마자 급물살을 탄 나룻배처럼 약효가 온몸을 타고 급속도로 퍼진 것이다.
“이런, 시발. 에킬루스잖아······!”
바이젠의 흐릿해지는 머릿속에서 약의 지식이 떠올랐다. 마수 에킬루의 피는 마력과 섞이면 급격한 확산 반응을 일으키는데, 알코올과 같이 섭취하게 될 경우 강력한 마취 효과를 만들었다.
각종 외과 의술에 필수적이면서 동시에 악용한다고 하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내포한 약물이었다.
아엘라시스의 고개가 꾸벅거리더니 탁자 위에 엎어졌다. 드르렁-하고 작은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엘라시스가 쓰러지고 바이젠도 비틀거리자 어느새 조용해진 주점에서 젊은 마을 주민들과 기사들이 불쑥불쑥 일어났다.
“이런 좁아터진 마을에 뭐 주워먹을 게 있다고 이런 연놈들이 굴러온 거야?”
“뭐 우리야 재미 보고 좋지만······ 큭큭큭.”
“야, 물러서. 나리들이 먼저야.”
건달 둘이 킬킬거릴 때 머리에 두건을 뒤집어 묶은 한 놈이 그 두 사람을 제지했다. 그러자 어느새 한손에 칼집을 든 기사들이 건달들 곁에 서서 수염 난 턱을 쓰다듬었다. 그들 중 제일 앞으로 나온 자가 그들을 보고 있는 러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흰 무슨 부랑자들이냐? 혹 귀족들인가?”
“그렇다면?”
눈가에 길게 그어진 상처가 있는 기사가 그 흉터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봤자 몰락귀족이겠지. 하인들이나 시종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들이. 꼴에 가진 건 있어뵈니, 재밌게 갖고 놀다가 죽여주지. 어때, 마음에 드나?”
러셀이 그들을 훑어보았다. 각자 단도를 들고 있는 솜털 부숭한 건달이 셋, 흉터쟁이 기사가 여섯이었다. 이미 약탄 술을 마신 것을 확인했다는 것인지 모두 반짝이는 눈과 흥분된 눈으로 러셀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후 있을 일들을 아주 기대하는 얼굴들이었다.
그 얼굴들을 찬찬히 살핀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아주 마음에 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