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단서 (3)
러셀은 얼이 빠진 바이젠을 내려다보며 마력을 갈무리했다.
방금 그가 한 것은 바이젠이 품은 살의가 마력에 맞물려 일어났을 실제의 상황을 여과없이 그의 머릿속으로 전달한 짓이었다.
경지에 달한 서로의 마력운용 능력과 살의에 인 심상이 서로 충돌한 순간 그의 눈과 바이젠의 눈이 마주치면서 정말 현실 같은 환상을 만들어냈다.
러셀이 의도한 현상이 아니었다. 바이젠이 몸속에서 마력을 끌어올이자마자 살의를 감지한 그의 마안이 작동하며 미래에 벌어질 일은 단편적으로 러셀과 바이젠에게 투사한 것이다.
환상 속에서 가슴과 목을 박살내고 쥐어뜯기 위해 덮쳐오던 갈고리 손과 수도가 그리던 투로와 자신이 그 투로를 박살내고 벼락을 내리꽂는 것은 제 3자의 시선에서 러셀에게 똑똑히 보였다.
“이게 무슨······.”
바이젠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멍하니 러셀을 올려다보았다. 정오에 상당히 가까워진 시간과 북부의 환경 덕분에 비스듬하게 올랐다가 비스듬하게 떨어진 태양의 위치 때문에 그의 신체는 반은 햇빛을 받고 반은 음영에 가려진 모습이었다.
워낙에 커다란 키 때문에 머리가 너무 멀게 보였지만, 그 얼굴에서 번쩍였다가 사그러진 자색 눈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러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난 두 번 말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그러니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거다.”
실질적으로 몸에 입혀진 충격이나 상해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충격이 바이젠의 심상에 남았다. 심상 속의 자신은 분명 두 팔이 잘려 나가고 머리통이 박살나 죽었다.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팔꿈치 아래에서 약한 환상통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쥐어지는 주먹의 감각이 자신의 것인지조차 헷갈렸다.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편 바이젠은 뒤를 옆과 뒤도 돌아보았다가 다시 러셀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자하드 가문의 성내였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니, 설사 근처에 몇백, 몇천 명의 병사들이 서서 발을 구르고 창대를 바닥에 찧어도 바로 눈앞의 남자에게서 눈을 돌리기는 불가능했다.
그는 마른 혀를 겨우 움직이며 대답했다.
“저번에 내가 제이비든 백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백작 사는 영지로 가면 되는 것을 왜 굳이 나한테······.”
“의뢰는 성공했다고 말하고.”
“뭐?”
러셀의 손이 바이젠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바이젠 또한 작지 않은 덩치에 키였지만 러셀의 큼직한 손이 움직이자 어른이 어린아이를 일으켜 세우듯 가볍게 일으켜졌다.
“넌 안내만 해라.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난 네가 아니라 그놈들한테 볼일이 있는 거니까.”
“······그놈들?”
“할 거냐 안 할 거냐?”
러셀의 물음에 바이젠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볍게 바이젠의 멱살을 쥐고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그 손에서 검기가 돋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이젠으로서는 두 손과 양발이 자유로움에도 구속된 채 단두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심정이었다.
하지 않으면 목이 달아난다. 그것만으로도 배신은 손쉬웠다. 아직 그는 스스로의 목이 소중했다. 숨을 쉬는 데도 필요하고, 뭘 마시거나 먹는 데에도 써야 하고······ 하여튼 소중한 것은 확실했다.
“······하지.”
“좋은 선택이다.”
짤그랑.
러셀은 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바이젠의 손 위에 올렸다. 바이젠은 손바닥 위에 올려진 동화를 바라보다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하, 시발. 금화 100장이 동화 하나가 되다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지?”
동전을 주머니에 넣은 바이젠은 다리를 펴고 일어나며 무릎을 툭툭 털었다.
“두 번째 목숨을 주신 분이니 이거 참. 어머니라고 불러드릴까, 아버지라고 불러드릴까? 내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악!”
“헛소리는 그만해라.”
“억!”
러셀에게 다시 뒤통수를 맞은 바이젠이 구시렁거리는 사이, 그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칼리아와 아엘라시스를 불렀다.
“다 끝났느냐?”
“대충.”
두 여자를 발견한 바이젠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러셀의 일행들이니 놀랄 법도 했다. 거기에 살면서 한번 보기도 힘들 외모를 가진 여인들이니 더했다.
“와, 이런 미인분들은 또 어디서-쿠엑!”
“조용히 하고.”
다시 바이젠을 침묵시킨 러셀은 쯧쯧 소리를 냈다. 그러자 멀찍이 떨어져서 발굽으로 바닥을 긁고 있던 크라이가 다가왔다. 그 고삐를 다시 잡으며 러셀이 내성의 문을 향해 걸었다.
***
정오에 가까워지는 자하드 영지는 재건 공사가 한창이었다.
“거기, 거기! 모자 쓴 양반! 안 비키면 깔려 죽을지도 몰라!”
“이번에 고치게 되면 지붕을 아예 뜯어 버릴려고. 고쳐야 할 부분이 한 군데가 아니었는데 잘 됐지. 안 그래도 빗물 새는 곳이 있었는데 말이야······.”
“밥 좀 들고 일합시다!”
자재를 나르는 인부들, 어디를 보수할지 견적을 내며 종이에 무언가를 그리는 이들, 배를 문지르며 크게 외치는 사람들까지.
여전히 어딘가에서는 가족이나 친지, 친구를 잃은 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런 풍경을 찾기 어렵다. 사람들은 모두 어제의 일을 잊어버린 것처럼, 혹은 잊으려 애쓰는 것처럼 일에 몰두했다.
한쪽에서는 가지런하게 쌓아둔 통나무들이 옮겨지고, 다른 곳에서는 박살 난 건물의 잔해를 한데 모아 쓸고 닦으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말과 마차, 사람들이 미지근한 햇살을 받으며 도로를 걸었다. 넓은 판석이 깔린 길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무너진 건물들이 비스듬히 누워 있거나 안에서 폭탄이 터진 것처럼 내부가 훤히 드러나 있는 잔해들, 채 지워지지 못한 핏자국들은 분명 어제 참사가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태양이 어김없이 찾아와 등정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과거를 딛고 다시 걸어갈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러셀과 그 일행은 길을 걸어가며 자연스레 사람들을 헤쳐나갔다. 곧 러셀의 눈에 멀리서 그와 비슷하게 코트를 입고 장갑을 낀 이루실이 종이를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루실의 주변에는 안전모를 쓴 인부와 쌀쌀한 날씨에도 팔을 훤히 드러낸 채 망치를 들고 있는 난쟁이, 그리고 안경을 쓴 인간 여럿이 서 있었다.
정황상 인부와 목수, 석공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듯 보였다. 곧 순서대로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각자 데리고 온 도제로 짐작되는 의복을 입은 자들과 함께 멀어졌다.
“누나.”
“어? 러셀?”
“공사 감독하는 거야?”
“아······. 그렇게 됐어. 아버지가 얼굴 좀 비추라고 하도 말씀하셔서······.”
“차기 가주니까 당연하지. 좋은 선택이야.”
이루실은 러셀과 뒤의 일행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얼굴 한쪽이 벌겋게 부어오른 바이젠이 예의 여우 같은 실눈을 옆으로 길게 늘이며 웃음을 지었고, 칼리아와 아엘라시스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칼리아와 아엘라시스를 향해 미소를 지은 이루실이 다시 표정을 굳히고 러셀을 바라보았다.
“가려는 거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
이루실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때의 동작이나 몸짓이 아버지인 라하르트를 쏙 빼닮았기에 러셀은 저도 모르게 슬쩍 웃었다.
“너 잡아 오겠다고 아버지한테 그리 호언장담을 했었는데. 네 동생들은 어쩌고? 결국 안 보고 가는 거야? 지금쯤 너 왔다는 소식을 경계 지대에서 받아봤을 텐데.”
“다음에.”
“다음에 언제?”
러셀은 의뭉스런 미소만 지었다. 이루실은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다시금 내쉬더니 양팔을 벌렸다. 러셀은 조용히 걸어가 이루실을 꼭 껴안아 주었다.
“안 돌아오기만 해봐. 그때는 진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 대륙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서 사지를 분질러 놓을 거야. 그리고 방안에 가둬놓고 내가 주는 음식만 먹게 하면서 지내게 할 거고.”
“그동안 난 놀고 있나?”
품에서 벗어난 이루실의 주먹이 러셀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꽤나 힘이 실린 일격이라 러셀조차도 일순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숨을 캑캑거리던 러셀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이루실의 눈가에는 눈물이 아롱아롱 맺혀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손등으로 쓰윽 훔쳐냈다.
“잘가.”
“그래.”
이루실은 이후 칼리아와 아엘라시스도 순서대로 꼭 안아주었다. 은근슬쩍 자신도 팔을 벌리려는 바이젠의 뒤통수를 다시 후려갈긴 러셀은 그대로 길을 떠났다.
멀어지는 러셀과 그 일행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루실은 곧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로 몸을 돌렸다.
***
바이젠이 마련해두었던 은신처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저 그가 쓰던 가방과 여분의 옷가지, 날붙이들, 말이 한 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안내하면 되는 거요?”
순식간에 무장을 갖춘 바이젠이 물었다. 이틀 전 러셀과 싸울 때 다뤘던 칼과 단검들은 모두 부러지거나 망가졌기에 그가 매고 있는 것은 한 자루의 장검밖에 없었다.
“그래.”
“알았수다. 그럼 방향은 남서쪽으로 잡아야겠군. 제이비든 백작령까지 말을 타고 가면 이주일은 걸릴 것이오. 그리 알고 계시고.”
그리 말하던 바이젠의 고개가 칼리아 쪽을 향했다.
“숙녀분들께서는 꽤 험한 여정일지도 모른데, 괜찮으신가? 뭐 따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마나감지에 대해 소양이 부족한지 칼리아가 마법사인 것과 아엘라시스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물론 칼리아는 오랜 옛날에 살았다가 현세에 막 부활한 뱀파이어고, 아엘라시스는 용이니 당연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가 저런 아름다운 거죽 안쪽으로 그런 이물들이 들어있을 것이라 상상하겠는가.
칼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으니 길이나 안내하거라.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별자리는 무수하게 헤아렸으니.”
“오······.”
“출발하지. 칼리아?”
“준비 해뒀다.”
러셀의 부름에 칼리아는 그림자 속에서 향로를 꺼내들었다. 네멘스토의 숨결이라는 이름을 가진 향로였다.
대가를 제물로 바치면 그 본 주인의 힘이나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연기를 만드는 향로는, 흑요정 페르쿠스의 손에서 배달되어 자하드 영지에 괴물을 만드는 연기를 흩뿌렸다.
칼리아는 향로 속에서 사람을 네크놀로 만들었던 검은 피부의 말라 비틀어진 손을 꺼냈다. 석탄처럼 까맣고 바짝 마른 나뭇가지처럼 쪼그라든 그 손은 아엘라시스의 팔뚝보다도 얇았다.
이어서 그녀가 꺼낸 것은 페르쿠스의 시체에서 러셀이 뽑아든 검은 불꽃 형상의 돌이었다.
“리-베라.”
칼리아가 주문을 외우자 말라비틀어진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그녀가 허공에 띄운 검은 돌을 잡고는 으스러뜨렸다.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돌이 부서지자마자 흘러나온 푸른 불꽃이 손을 타고 화르륵 일어났다.
막대한 열기가 일어나면서 투명한 아지랑이를 동반했다. 상승한 열기는 자연스럽게 찬 공기의 하강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바람이 불었다.
가슴께 앞에서 두 손을 내민 체 푸른 불꽃을 띄우는 칼리아의 주변으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바이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러셀마저도 그 기묘한 마력의 운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것은 그가 가진 마안으로 발동 원리와 구조를 알아도 감히 따라할 수 없는 마법이었다. 저렇게 능숙하게 흑마력을 다루는 것은 아직 그로서도 숙련과 숙달이 요구되는 일이니 그랬다.
푸른 불꽃에 잠식되었던 팔이 점차 그 형체를 드러냈다. 놀랍게도 완전히 재가 되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열기가 있었음에도 손은 멀쩡했다. 오히려 말라비틀어졌던 피부는 사라지고, 윤기가 도는 깨끗한 피부로 바뀌어 있었다.
러셀이 물었다.
“뭘 어떻게 한 건가?”
“흑마력을 대가로 이 검었던 손의 과거 모습을 불러냈다. 이 손이 이제 흑마력의 주인을 탐지할 것이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이 홱, 움직였다. 팔꿈치 아래만 남은 팔뚝이 알아서 움직이며 뱀의 머리처럼 손을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기묘하고 끔찍했다.
“와, 마법으로 별의별 신기한 걸 다 봤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건 또 처음 보네.”
바이젠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팔뚝을 집어 들었다. 그가 자신의 몸-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을 만지자 손 또한 바이젠의 팔뚝을 마주 잡았다.
“욱, 난 토할 거 같은데······.”
아엘라시스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쓱 물러났다. 칼로 쪼개진 시체나 터진 내장도 잘 보던 그녀였지만, 이렇게 알아서 움직이는 신체 부위에는 비위가 자극되는 듯했다.
“호, 그래? 에비!”
“꺄아악!”
바이젠이 장난스레 휘두른 팔뚝에 아엘라시스가 비명을 지르며 러셀 뒤로 숨었다. 그는 히죽거리며 팔뚝을 들어 흔들어보다가 뭔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호, 이거 잘만 쓰면은······ 흐차!”
중얼거리던 바이젠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뒤돌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의 뒤에는 오른손을 치켜든 러셀이 있었다.
“뭐하냐?”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왜 손을 들고-쿠엑!”
왼주먹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바이젠으 뒤로 나가떨어지고, 러셀은 그가 놓친 팔뚝을 공중에서 잡아챘다.
“이게 그 시커먼 놈을 가리킨다는 거지?”
“그렇다. 지금은 전혀 감지가 안되나 보구나.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면.”
“일단은 알았다. 이게 원래 주인에게도 연결이 되는 건가?”
“그런 건 아니다. 아마 이 팔뚝의 원래 주인 정도면 새로운 팔이 돋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고작 팔을 매개로 해서 바치는 것만으로 인간을 괴물로 바꿀 정도의 힘을 지녔으니. 한번 만나보고 싶긴 하구나.”
“나도 그렇군.”
러셀은 그 손을 코트 속에 집어넣었다.
“그럼 출발하지. 너도 엄살 그만 피우고 일어나라.”
“엄살 아닌데······ 개새끼야.”
바이젠까지 말에 오르자 일행은 모두 고삐를 제쳤다. 활짝 열린 서문을 빠져나온 네 마리의 말이 각기 주인을 태운 채 길을 달렸다.
북부의 차가운 바람에서부터 멀어지자 선선한 공기와 뜨거운 햇살이 점차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시 중부에 가까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