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69화 (170/225)

169화 단서 (2)

“단서라니?”

러셀은 쥐고 있던 것을 칼리아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페르쿠스의 몸속에서 주문을 발동시킨 매개체였다. 검은색의 피가 응고된 그것은 마치 타오르는 불꽃 같은 형상이었다.

“검은 로브를 쓰고 있던 놈 기억나나?”

“어찌 잊겠느냐.”

“그놈이 쓰던 마력과 같은 것 같다.”

그리고 러셀이 칼리아에게 그것을 던지니 그녀가 그것을 손쉽게 받아내고는 살피기 시작했다.

“네 말이 맞다. 익숙한 마력이 느껴지는구나. 이걸로 그놈을 추적하려는 거냐?”

“되나?”

“나와 이루실도 한 번에 나가떨어지게 만든 놈이다. 물론 우리가 마수들을 해치운 이후이기는 했지만······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핑계나 변명은 의미가 없는 것이지. 강한 마법사로 보였다. 그렇게 제자리에서 순식간에 공간 이동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드물다. 대부분은 무척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마법진을 고르고, 좌표를 탐색하고 연결해야 하지. 들어가는 마력 또한 상상을 초월하고······. 내가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놈이 알아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준비를 했다가 하도록 하지.”

***

식당에 들어가자 상석에는 라하르트 혼자만이 앉아 있었다. 레이라나 이루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녀들이 다 먹은 2인분의 식기를 치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먼저 왔다 간 듯했다.

“좀 늦었구나. 위에서 큰 소리가 들리던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

“별일 아니었습니다.”

러셀은 그가 잡은 흑요정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미 자하드 가문의 영지에 일어난 테러가 제국의 짓이었다는 게 밝혀진 것만으로도 라하르트에게는 부담감이 막중했다.

무너진 건물과 박살난 도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위로와 장례까지, 해야 할 일들이 그야말로 산더미인 것이다. 러셀은 거기에 이상한 검은 로브를 쓰고 있는 놈이나 자신이 여정에서 겪었던 이상한 일들의 배후에 있을 조직까지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네가 별일이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뼈 있는 말을 던진 라하르트가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카트를 밀며 다가왔다. 그와 같이 의자에 앉은 칼리아와 아엘라시스 앞에 여전히 따뜻한 김을 올리고 있는 식사가 차려졌다.

식사는 빠르게 끝났다. 러셀이나 다른 일행이나 야영과 노숙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원체 밥 먹는 속도가 빨랐던 탓이다.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빈 접시를 치우러 들어온 하인들이 물러갔을 때 라하르트가 말했다.

“네 엄마와 이루실은 먼저 바깥으로 나갔다. 레이라는 시찰 겸 북쪽 성문을 살펴본다고 했고, 이루실은 무너진 건물들을 다시 세우는 보수 공사를 관리 감독하러 갔지.”

“그렇습니까.”

러셀은 접시를 치우고 내어온 차를 홀짝거리며 답했다. 칼리아는 기품있게 마셨고, 아엘라시스는 두 손으로 찻잔을 잡은 뒤 고양이처럼 혀 끝으로 할짝거렸다. 아직 차가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그런 아엘라시스를 귀엽게 보던 하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과자를 줄까 물어보니,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차를 마시는 러셀에게 라하르트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뭘 그렇게 남의 일처럼 말하는 거냐?”

남은 차를 다 마신 러셀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하고 도자기가 찻잔 받침대에 닿으며 소리를 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아버지.”

“해야 할 일이 있다니? 무슨 일인데?”

“일단 이것부터 좀 받으시죠.”

“어?”

라하르트는 러셀이 갑자기 꺼내든 나무 상자를 받아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이게 뭐냐?”

“열어보세요.”

러셀의 말대로 뚜껑을 잠그고 있는 덮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걸 열자 천장의 조명 빛을 반사한 알록달록한 빛깔이 라하르트의 얼굴을 물들였다.

그건 이전 에란디스 영지에서 영주에게 받았던 보석과 황금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라하르트가 그 보석함과 러셀을 번갈아보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이게 어디서 난 돈이냐?”

“여행 중에 얻었습니다. 도시 재건 비용에 보태십시오.”

“재건 비용?”

“예. 바이젠이라는 용병을 잡을 때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거든요.”

자신과 바이젠의 싸움으로 영지의 북쪽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다. 예기치 못한 만남과 싸움이었기에 전장을 고를 여유가 없었다.

인명피해가 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그 여파로 최소 200미터, 최대 800미터 너머까지 충격이 퍼지면서 거리와 구획이 무너지고 박살났다. 아마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인력이 소모될 것이었다.

“아, 거기 말이냐. 안 그래도 시모스가 강력한 마력이 부딪힌 흔적이라고 보고를 해왔는데. 그게 너와 그놈 때문이었다니.”

러셀과 바이젠이 싸웠던 곳을 시모스가 영상으로 담아왔기에 라하르트 또한 황폐해진 북쪽 구역을 알고는 있었다.

거대한 크레이터와 빗자루로 쓸듯이 밀려버린 건물들, 형체도 찾아볼 수 없이 초토화된 거리 등.

“그리고 그 바이젠이라는 용병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그놈은 또 왜?”

“제가 좀 써먹으려 합니다. 아버지도 알다시피 놈이 죽을 죄를 지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바이젠이 맡았던 의뢰는 페르쿠스의 배달과 호위, 그리고 다시 배달이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다른 누군가가 할 수 있었던 일. 거기에 바이젠은 그가 호위하던 대상인 페르쿠스가 자하드 영지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게는 충분히 죽을 죄다.”

착잡한 표정을 짓던 라하르트가 물었다.

“이왕 다시 돌아왔잖느냐. 남아서 네 누나를 도우는 건 어떠냐. 다른 가문들과의 교류도 다시 시작해서-.”

“아버지.”

라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러셀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제게는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영지를 공격한 놈들의 배후가 짐작이 갑니다. 제국의 황자 뿐만 아니라 더 은밀하게 숨어 있는 놈들이 있습니다. 그중 둘은 이미 만나기까지 했고요.”

“만난 적이 있다고?”

“네. 두 번 싸웠고, 둘 다 제 앞에서 도망쳤습니다. 다음에는 놓치지 않을 겁니다.”

러셀의 눈을 마주 보던 라하르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이미 결심을 굳혔는데 거기에 대고 내가 뭐라 말하는 것도 우습구나. 알겠다. 간수를 시켜서 그 용병을 올리도록 하마. 떠나는 건 오늘이냐?”

“예. 어머님께는 안부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걱정하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누나는 제가 직접 만나서 인사하겠습니다.”

“알겠다.”

러셀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라하르트는 가만히 앉아서 인사를 받아주었다.

***

마구간지기가 일행의 말을 데려왔다. 고삐에 붙들려 오는 검정과 갈색, 연갈색의 말들은 그동안 잘 먹고 잘 쉬었는지 피둥피둥 살이 올라 있었다.

“잘 지냈냐?”

러셀이 그렇게 물으며 검은 갈기의 말, 크라이의 콧잔등을 쓸어내렸다. 크라이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푸르륵거렸다.

마구간지기가 해맑은 얼굴로 크라이의 덩치를 툭툭 두드렸다.

“대단히 좋은 품종의 말이더군요, 도련님. 저기 먼 초원에서나 달리는 말인 듯한데.”

“정확히 봤다. 별다른 일은 없었나?”

“뭐, 이놈이 다른 암말들에게 계속 추근덕 대기는 했습니다만. 저야 좋은 씨를 얻으면 좋으니 가만 놔뒀습니다. 하하, 도련님이 저 말을 맡겨두신 동안 저놈이 건들인 암말만 10마리가 넘습니다. 그중에 임신은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가?”

새끼, 좋은 시간은 자기만 보내고 있었다 이거지.

러셀이 한쪽 눈을 치켜뜨고 크라이를 바라보자 녀석은 뭐 못할 일 했냐는듯 머리로 러셀을 툭툭 밀었다.

“그동안 보살펴줘서 고맙군.”

“별말씀을요. 다시 떠나시는 겝니까?”

“그렇지.”

“알겠습니다. 몸만 건강하십시오. 제가 나이가 들어보니, 건강이 제일이더군요.”

“유의하지.”

꾸벅 허리를 숙인 마구간지기가 물러나고, 러셀은 몸을 돌렸다.

“가자.”

“응.”

러셀이 앞장서자 뒤로 자신의 말의 고삐를 잡은 칼리아와 아엘라시스가 뒤따랐다. 마구간을 나서자 저 앞에 기사와 간수가 보였다.

무장을 한 기사는 칼자루에 손을 올린 경계 태세였고, 간수는 그런 기사의 모습에 겁을 먹은 듯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사슬로 묶인 바이젠이 서서 러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날 때려눕힌 자식 아냐.”

“이 새끼가 감히 도련님에게!”

“악!”

묶인 두 손을 들어 천연덕스럽게 인사하려던 바이젠의 머리가 앞으로 홱 숙여졌다. 기사가 그의 뒤통수를 갈긴 것이다.

머리를 들어올린 바이젠이 입가를 끌어 당겨 웃으며 기사를 바라보았다.

“너 이 새끼, 내가 이 구속구만 없었으면 한 방도 안 돼. 알고 있냐?”

“이 자식이 그래도!”

“그만.”

러셀이 제지하자 기사가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저은 러셀이 기사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데이커 드만이라고 합니다! 도련님! 만나서 영광입니다!”

데이커라는 이름의 기사가 각이 잡힌 자세로 절도 있게 경례했다.

“라하르트님의 명을 따라 이 죄인을 도련님께 압송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예! 충성!”

다시 한번 절도 있는 경례를 남긴 기사 데이커는 간수를 데리고 물러났다. 바이젠은 삐딱한 자세로 서서는 러셀을 보다가 침을 찍 뱉었다.

“그래, 무슨 일이신가? 보아하니 귀족 나리신 거 같은데. 얼굴도 잘생겨, 키도 커, 귀족에다가 강하기까지. 이야, 세상 혼자 사시는 분인데. 그런 잘난 분이 난 왜- 억!”

“넌 입을 다무는 법을 좀 배워야겠다.”

러셀은 바이젠의 구속구를 해제하고 코트 안에 집어넣었다. 바이젠은 갑자기 구속구가 풀리면서 마력을 쓸 수 있게 되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뜻이지?”

“넌 이제 나랑 함께 간다. 너한테 의뢰를 한 놈한테 안내해.”

바이젠이 히죽 웃었다. 눈매가 가늘어지며 마치 여우 같은 웃음을 띄고 있지만, 그 안의 눈은 차갑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봐, 귀족 나리. 너 같은 놈은 용병 일 같은 천한 일은 해본 적이 없겠지만, 용병들한테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 법이야.”

“얼마 받기로 했나?”

“뭐?”

“얼마 받기로 했냐고. 의뢰자가.”

바이젠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응시하는 러셀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구속구가 풀리면서 마력이 완전히 돌아온 것이 느껴졌다.

하룻밤을 꼼짝없이 감옥에서 갇혀 지내고,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지만 이 정도의 몸 상태로도 병사 100은 무리없이 돌파할 수 있다. 설사 기사가 달려들어도 열 명까지는 괜찮았다.

그럼에도 눈앞의 러셀에게서만큼은 모든 가능성이 차단되는 느낌이었다. 바이젠의 눈이 바쁘게 구르며 도주 경로를 물색했다.

“······다 하고 나면 금화 100장을 받기로 했지.”

고작 사람 하나 배달하고 호위하는 것으로는 차고 넘치는 가격이다. 물론 바이젠 정도의 실력자를 고용하는데 썼다고 하면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러셀이 말했다.

“난 동화 한 장 주지. 의뢰자한테 안내해라.”

순식간에 줄어든 금액. 천분의 일 가까이 줄어든 돈으로 배신하라 종용하는 러셀에게 바이젠은 아까처럼 욕설을 내뱉지도, 화를 내지도 못했다.

가만히 서서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러셀의 눈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 어떤 말도, 협박도 하지 않았지만 바이젠은 이 요구를 거절하면 그대로 목숨이 끝장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축 늘어뜨린 바이젠의 손이 꿈틀거렸다. 비록 무장은 모두 빼앗겼어도 바이젠은 무술의 달인이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의 방심만이 주어진다면 이놈의 가슴과 목을 동시에 찌르고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순간 바이젠의 세상이 색을 잃었다.

밝은 하늘과 반짝이는 태양, 성 내를 오가는 기사와 훈련을 하는 병사들, 짐을 나르고 바삐 걸어가는 하인과 사용인들이 색을 잃은 인형처럼 변했다.

적어도 바이젠이 느낀 감상은 그러했다. 그 무채색의 공간에서 조금이나마 움직이는 것은 그와 러셀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유일했다.

바이젠은 자신의 손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며 투로를 그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수십 년 동안 반복한 익숙한 동작이 펼쳐졌다.

마력이 깃든 오른손이 수도로 세워지며 검기를 일으키고, 왼손은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구부리며 마력을 집약시켰다.

거의 동시에 펼쳐진 그의 양손이 러셀의 가슴팍과 목을 노리고 쏘아졌다.

그리고 러셀의 오른손 하나가 움직인 것도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그는 단 한 번 아래에서 위로 팔을 휘둘렀다. 그 팔의 움직임은 벼락같이 빨랐고, 진짜로 벼락을 머금고 있었다.

소리없는 충격이 일었다. 바이젠은 자신의 양팔이 팔꿈치 아래로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불구가 되어버린 자신의 앞에 허옇게 빛나는 손바닥이 덮쳐와 안면을 가렸다.

다음 순간, 바이젠은 정신을 차렸다.

“허억······!”

털썩, 하고 한쪽 무릎이 꿇리면서 침과 기침치 토해졌다. 뭐였지? 방금 자신이 무슨 장면을 본 것인지 바이젠은 알 수 없었으나, 동시에 알 수 있었다.

“말해 줄 생각이 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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