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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68화 (169/225)

168화 단서

남자는 귀라는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저 해골은 자신에게 없는 신체 부위를 따지는 말에 대꾸하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남자가 대꾸를 않자 해골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쪽은 순조롭다. 황녀는 이제 실패할 리 없다고 여겼던 전쟁에서 패할 것이다. 왕국군은 서쪽으로 진격하겠지.

“···지젤은 합류했소?”

-스며들었다는 연락을 받았지. 북쪽은 어떻게 할 건가? 그 남자를 이대로 내버려 둘 작정은 아니겠지.

“아니오.”

씹어뱉듯이 말한 남자가 마력을 일으켰다. 검붉은 불꽃이 그를 휘감더니 그의 몸이 차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 빌어먹을 놈은 내가 직접 찢어 죽일 것이오. 함부로 손대지 마시지.”

-그리 말하니 더욱 손대고 싶어지는군. 그대가 이리 비 맞은 개새끼마냥 깽깽거리는 걸 보니.

해골의 비아냥에 남자의 얼굴에 핏줄이 돋았다. 하지만 거기서 더 뭐라 하진 않았다. 이 성은 저 해골의 영역이다. 아무리 남자라도 저 리치의 마력이 살아 움직이는 곳에서 이길 수는 없었다.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면 또 모르겠지만, 그럴 이유가 없다. 속내야 어쨌든 지금은 같은 목적을 향해 걸어가는 자이니까.

“다음에 또 보지.”

그리고 검은 불꽃이 남자를 휘감았다가 불티만을 남겼다. 방에 남은 것은 청동 왕관과 갑옷을 입고 무장한 해골 하나 뿐이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고.

클클 거리는 웃음을 남기고는 리치 또한 몸의 형태가 희미해졌다.

***

“죽은 거 아니야?”

“아니다. 심장은 멀쩡하게 뛰고 있느니라.”

“곧 죽을 것 같은데?”

“그야 저 남자가 워낙 손속을 강하게 했으니까······.”

쭈그리고 앉아있던 아엘라시스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와 몸을 씻고 나온 러셀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다가오고 있었다.

상의를 벗고 바지만 입고 오고 있는 그의 상체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그대로 러셀의 상반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꿀꺽.

그 밝은 햇살이 근육의 곡선과 직전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던 아엘라시스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어째서인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느릿하게 보인다.

두 손으로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을 터는 것과 그 동작에 맞춰서 머리카락에 남아있던 작은 물방울들이 튕겨지는 것, 채 닦아내지 못한 남은 물방울들이 피부를 타고 흐르는 것 등등.

마법을 쓸 때나 직접 몸을 움직일 때 느꼈던 인지 감각이 그때처럼 활성화되어 러셀의 근육을 찬찬히 감상하게 만들었다. 그건 아엘라시스의 의지가 아니었으나 동시에 그녀의 의지이기도 했다.

“아엘라? 칼리아도 왔군. 무슨 일이야?”

러셀의 맨몸을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데 어째선지 요즘 들어서 눈길이 계속 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러고 보니 요즘은 예전처럼 자신을 안고 자주지도 않던데. 왜 그러지.

요즘 내 몸이 좀 변했다고 그러는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몸이 성장한 게 어디 내 탓인가? 자연스러운 성장이지. 용은 원래 정신이 성장하면 몸 또한 같이 성장함으로써 균형을 맞추는데······.

문득 아엘라시스는 생각 한 구석에서 떠오르는 지식들에 눈살을 찌푸렸다. 스스로가 평범한 다른 지성체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가끔씩 이런 식으로 자각하고는 한다.

용은 나이를 먹으면서 강해지고 지혜로워지는 생물. 그들은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수련을 하지 않아도 강해진다.

최초의 용과 그 이후 자손들로부터 배운 지식이 자연스레 후대에게까지 전수되기 때문이었다.

한 번에 찾아오는 것은 아니고, 마력량이나 정신의 성숙도에 따라 떠오르는 지식의 종류나 질이 달랐다.

방금 같은 경우는 스스로의 몸에 대한 변화를 궁금해하자 자연스럽게 떠오른 지식이었다.

아엘라시스가 그렇게 러셀의 몸을 보던 것도 잊고 생각에 잠겨 골몰하자 질문했던 러셀이 이번에는 칼리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그놈도 꺼내놨군.”

“그래. 심문을 해야지 않겠느냐? 어제 그놈에게서 별달리 얻어낸 것이 많지 않다면 이놈도 조사해봐야지.”

“잘 왔어. 조금 이르긴 하지만, 아침 식사 전에는 끝낼 수 있겠지.”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긴 러셀은 상의를 입고 가까이 다가왔다. 칼리아와 아엘라시스의 앞에는 흑요정 페르쿠스가 누워 있었다.

그림자로 만들어진 듯한 검은 밧줄이 페르쿠스를 꽁꽁 묶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얼핏 구속복과도 비슷했다.

“구속만 풀어봐. 깨우지는 말고.”

“알겠다.”

러셀의 말에 칼리아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림자로 만들어진 구속복이 술술 풀리며 바닥으로 가라앉아 사라지고, 온전한 몸의 페르쿠스가 바닥에 눕게 되었다.

하지만 구속이 풀렸음에도 페르쿠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러셀은 처음으로 페르쿠스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보기보다 앳된 얼굴이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칼리아가 말했다.

“어린 요정이구나. 기껏해야 사십 년 정도일까? 그보다 어릴 수도 있겠다만.”

“나이가 짐작이 가나?”

“바로 알아보는 방법이 있지.”

칼리아는 그대로 페르쿠스의 가슴팍 위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상처가 나지도 않았는데 피부에서 몇 개의 핏방울이 송글거리며 올라오더니 그대로 칼리아의 손바닥 위에서 회전했다.

그 핏방울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본 칼리아가 표정을 굳혔다.

“······내 짐작이 맞았다. 마흔둘 정도로 보이는구나. 무척 어린 흑요정이야. 보통 사막에 자리한 자신들만의 거주 공간이 있을 텐데. 이렇게 먼 북부까지 왜 올라왔을까? 그것도 성인식도 하지 않은 나이에.”

“드문 일인가 보군.”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얼굴은 굳은 채였다.

“보통 요정들은 함부로 어린 자식들을 내보내지 않는다. 그들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모를 탐내는 인간들이 많기 때문이지. 성인식을 한 이후의 요정에게나 바깥으로의 출입이 허락되는 편이다.”

“성인식이라.”

“평균적으로 쉰 살까지 제각기 마법이나 무술 등을 단련하고 자격을 얻는 시험을 성인식이라 부른다. 그 정도면 웬만한 위협은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격이 주어지는 셈이지. 하지만 이 흑요정이 성인식을 통과한 것이라 보기는 힘들구나. 가진 마력이 적어. 그렇다고 몸을 단련한 것도 아닌 것 같고.”

칼리아가 페르쿠스의 팔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 말대로 페르쿠스는 러셀을 상대로 마법을 보이거나 주먹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향로를 들고 온 힘을 다래 도망쳤을 뿐.

키가 껑충하니 크고 요정다운 몸놀림을 보여주긴 했지만 러셀에게 손쉽게 따라잡히지 않았나.

“요정족들은 배움이 느린 종족이지만 그만큼 올바르게 배우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 흑요정은 그 궤에서 약간 벗어난 것 같구나. 어차피 버린 목숨이라 그런 것인가?”

중얼거린 칼리아의 검지가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마력의 선이 그대로 어떤 마법진을 그렸고, 그 마법진은 그대로 페르쿠스의 이마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뭘 한 거지?”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망가진 의식을 손보았다. 어지간히 험하게 손을 댔던 모양이구나.”

도망치던 페르쿠스를 막 붙잡았을 때 강제적으로 정신을 열어젖힌 것 때문인 듯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페르쿠스의 정신이 마안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는 것이 빨랐다.

이제 와보니 요정족 기준으로 성인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얼뜨기를 상대로 너무 과한 힘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페르쿠스의 눈가가 움찔움찔 떨리더니 감겨져 있던 눈이 뜨였다. 페르쿠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눈을 끔뻑거렸다.

“어, 어? 여긴······? 난 분명, 쫓기고······ 여기가 어디지?”

러셀은 정신을 못 차리는 페르쿠스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웠다.

“나 기억하냐?”

그의 물음에 페르쿠스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곧장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러셀이 어깨를 잡고 주저앉히는 것으로 금세 저지당했다.

“쉽고 빠르게 가자. 새로운 세계란 건 무슨 뜻이냐? 북부의 도시들은 왜 멸망시키려는 거고?”

“······머지않아 이 세계는 붕괴한다. 세계와 세계의 벽들이 얇아지고 있어. 예정된 붕괴 속에서, 우리 흑요정들은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날 것이다.”

“어떻게?”

“······날 살려주면, 다 말해주-커헉!”

러셀의 오른손이 페르쿠스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아직 듣지 못한 대답이 있어 약하게 때렸으나, 그마저도 페르쿠스에겐 살인적이었다.

왼쪽 눈알이 터진 듯 새빨간 핏물과 투명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광대뼈는 부서져 움푹 내려앉았고 턱뼈가 빠지면서 왼쪽 입이 축 늘어졌다.

“커허허헐, 크러럭······.”

피 섞인 침과 부서진 이빨 조각을 줄줄 흘리며 페르쿠스가 벌벌 떨었다. 입이 그 모양이 되어서 말이고 뭐고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에겐 불행하게도 이곳에는 생명과 피를 다루는 데 전문가인 칼리아가 있었다.

“칼리아.”

“알겠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바닥에 뿌려졌던 피와 이빨 조각들이 둥실 떠오르더니 다시 페르쿠스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움푹 들어갔던 광대뼈가 다시 나오고 빠졌던 턱뼈가 맞춰지더니 박살났던 왼쪽 안구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대답할래 안 할래.”

“하, 하겠다. 그러니 더 이상 때리지 마라. 그만 때려라······.”

이대로 가다가는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페르쿠스가 몸을 움츠리며 덜덜 떨었다.

“······우, 우리와 함께하는 자들이 있다. 제국의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자들이지. 그중 한 명이 내게 저 향로를 주며 북부를 최대한 약화시키라고 말했다. 영지나 도시가 망하는 것도 좋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중요한 건, 사람들이 내뿜는 의념······ 컥?!”

그때 잘 말하던 페르쿠스가 갑자기 자신의 목을 부여잡았다. 러셀의 마안이 당장 빛을 발했다.

“모두 떨어져라!”

러셀이 외치면서 물러나고 칼리아와 아엘라시스가 보호막을 생성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흑요정은 몸속을 뚫고 나온 검은 촉수에 휘감겼다.

“끄악, 아아악!”

뭔가 알아챈 것인지 칼리아가 소리쳤다.

“비밀을 발설한 자에게 내려지는 저주다! 러셀! 어서 저 흑요정을 멀리 떨어뜨려야 한다! 발설한 자와 그걸 들은 자 모두 죽이기 위해 강력한 폭발이-”

“괜찮다.”

그리 말한 러셀이 눈을 빛내며 천천히 페르쿠스에게 다가갔다. 곧 칼리아도 예상한 것과 달리 폭발이 바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칼리아의 눈에 러셀이 허공에 대고 손을 허우적거리는 듯한 몸짓이 보였다. 얼핏 보면 시력을 잃은 시각장애인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더듬는 듯했다.

그러나 러셀의 눈에는 전혀 다른 것이 보였다. 그것은 발설자와 주변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완성되어가는 정팔면체의 입체적인 마법진이었다.

페르쿠스의 몸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온 술식이 주변의 마나와 마력을 빨아들이면서 마침표를 찍으려 했다. 총 서른두 개의 도형과 열여덟 개의 직선, 여덟 개의 휘어짐, 네 개로 겹치는 원.

러셀은 마력을 담은 손으로 그 마법진을 일일이 헤치며 술식을 어그러뜨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전 트롤의 화염을 막고, 용의 숨결을 반으로 가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저 불꽃의 속성이 담긴 마력을 해체하는 것과 주문이 연결되어 있는 마법을 해체하는 것의 차이였다.

물론 후자의 것이 더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력 간섭······! 그것이 이런 것도 가능한 것이었나?”

아스라히 들리는 칼리아의 감탄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러셀은 집중력을 이어갔다.

러셀의 강렬한 의지와 굳건한 정신력, 그리고 판단력이 말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의 눈동자가 짙은 안광을 흩뿌렸다.

곧 그의 날카롭게 세워진 수도가 마지막 술식을 끊었다.

쩌어어어엉!

밀도 높은 충격파가 굉음과 함께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 충격파는 러셀이 서 있는 반경 1미터를 중심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마력감응력과 함께 성장하고 있는 그의 마력조작능력은 고작 이런 충격파를 놓칠 만큼 약하지 않다.

순식간에 그 충격과 굉음을 온전히 받아낸 러셀은 잠시 후 주변을 억압하던 자신의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휘몰아치던 마력이 가라앉았다.

“이런.”

마법진의 중심에 있던 페르쿠스는 새까맣게 타 있었다. 마법진이 자체적으로 형성하려던 강력한 열기에 여과없이 노출되어 버린 탓이었다.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구나. 조금 더 제대로 된 단서를 잡았다면 좋았을 것을.”

칼리아가 아쉬워하는 가운데, 석탄 같은 꼴이 된 흑요정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러셀은 곧 그 잔해에서 뭔가를 주워들었다.

“단서라면 있는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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