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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67화 (168/225)

167화 심문 (2)

태연하게 말하는 듯했지만 바이젠의 뺨에 흐르는 식은땀이나 불안하게 떨리는 동공은 그가 무척 긴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석실에 자리한 불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석실 바닥에 일정한 거리와 규칙을 두고 배열된 마력석이 옅은 푸른 빛을 흘리고, 석실의 벽에 걸린 횃대에서는 불그스름한 횃불이 활활 타올랐다.

라하르트가 한 발자국 나서며 말했다.

“왜 우리 영지를 공격했는지 말해라.”

그의 낮은 목소리에는 꾹꾹 억눌려진 분노가 가득했다. 하지만 라하르트의 마력은 굳이 억누르지 않겠다는 것처럼 거칠게 뿜어져 나와 바이젠을 압박했다.

“큭······!”

전신의 마력이 봉쇄된 지금, 평범한 일반인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진 상태에서 바이젠은 라하르트의 분노가 실린 마력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정신이 올곧지 못한 자라면 그 자리에서 심장에 마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압박이었다.

횃불이 거칠게 흔들리며 당장이라도 꺼질 듯 깜박이고 바람이 불었다. 모두의 그림자가 미친 듯이 춤추며 벽에 괴아한 그림을 그리고 옷깃이 펄럭였다.

“일······ 단, 틀린 걸 하나 바로 잡지요. 난 당신네 영지를 공격한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이젠은 고개를 들며 얼굴에 지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라하르트의 오른손이 당장 허리춤의 칼 손잡이를 잡았다.

“이 놈이······!”

“고정하십시오, 가주님. 더 몰아붙이다간 못 버틸 겁니다.”

시모스의 만류에 라하르트는 겨우 마력을 가라앉히고 숨을 골랐다. 그 대신 러셀이 말했다.

“영지를 공격한 건 아니지만 공격한 주범을 호위하는 역할은 맡지 않았나. 너를 사주한 자의 이름을 말해라.”

석실 안을 휘몰아치던 마력이 수그러들자 한결 편해진 숨을 내뱉던 바이젠이 입을 열었다.

“아까 다 알아놓고선 뭘 또 말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뭐. 말해드리지. 제국의 황자 측에서 우리에게 접근했었다. 흑요정 하나를 호위해서 자하드 영지에 데려다주고, 그의 일이 끝나는 대로 다시 흑요정을 데리고 제국으로 돌아올 것. 설사 흑요정이 죽어도 향로는 꼭 챙겨서 데려올 것. 이게 내가 맡은 의뢰의 내용이었다.”

“그렇다는군요.”

러셀이 라하르트를 보며 말하자 그는 두통이 인다는 얼굴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황녀가 아니라 황자라는 이유는?”

“그동안 황녀의 꽁무니에 따라붙은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끝까지 황자의 편에 남은 귀족이 있었지요. 제이비든 백작이 그 귀족인데, 그 귀족이 내게 거래를 제안하면서 여기로 가라고 했습죠. 나야 뭐 제국의 파벌들이 어떤 목적을 그리든, 돈만 많이 주면 장땡인지라.”

러셀이 말했다.

“생각이 없군. 황녀가 차기 황제로 확실시 되는 현 시국에서 황자의 의뢰를 맡으면 황녀가 널 적대하거나 죽이려 한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

“여기 나라가 제국밖에 없나? 수틀리면 그냥 딴 나라로 가면 그만이야. 자기 손 더럽히고 싶지 않은 사람은 넘쳐난다고. 난 그냥 그들의 마음 한켠을 깨끗하게 치워주는 사람이야. 물론 적당한 대가를 받고.”

바이젠이 비웃음을 흘리며 러셀을 올려다보았다.

“어차피 이 바닥에서 영원한 적은 없어. 영원한 아군이 없는 것처럼. 이번 의뢰가 성공적이면 반대로 황녀 측에서도 나한테 접선하는 자가 있을 수도 있지. 안 그래? 난 용병이야. 대가를 받고 움직이지.”

“알 만 하군.”

코웃음을 친 러셀이 뒤돌아 라하르트에게 말했다.

“거짓을 말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이라고 봐야겠지요.”

“음······.”

라하르트는 침음성을 흘리며 고민에 잠겼다. 바이젠의 처우를 생각하는 것이다.

“저놈이 말하던 그 흑요정이라는 놈도 심문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 제가 말씀을 안 드렸군요. 그 흑요정 또한 잡아놓았습니다. 지금 칼리아의 그림자······ 그러니까 마법에 갇혀있는 상태지요.”

“뭐?”

러셀의 말에 라하르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걸 언제······.”

“저 바이젠이라는 용병을 잡기 직전에 잡았습니다. 배후에 제국이 있다는 것 또한 그놈을 먼저 심문하다가 안 사실이고요. 다만 그 과정에서 놈의 정신이 버티질 못하기에 지금은 의식을 봉인해둔 상태입니다.”

아까 칼리아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러셀의 마안으로 직접 정신을 침투하는 과정에서 뭔가 잘못된 것인지 심맥이 끊어지고 심장이 멈추려 하길래 일단 심문을 멈추고 의식을 잠재워 놓았다.

“흑요정은 제가 따로 조치해 두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쉬시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러셀의 말에 시모스가 동조했다.

“도련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가주님은 쉬셔야 합니다. 벌써 12시간 동안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셨습니다.”

“······알겠소.”

라하르트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러셀은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마력을 일으켰다.

“그럼 저 용병은 다시 재우겠습니다.”

“어, 어? 이봐, 내가 이렇게 친절하게 다 말해줬으면 최소한 감옥에서는 내보내 줘야- 으그그극.”

다시 뒷목에 전격이 작렬하자 바이젠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시모스가 황당하다는 식으로 러셀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마력을 전격으로 변화시키는 재주는 많이 보았지만, 도련님이 쓰는 방식은 저조차도 처음 보는 것이군요. 죽은 것 아닙니까?”

“보시다시피.”

“어떻게 번개를 맞았는데도 의식을 잃는 것에 그치는 것인지. 까딱하면 신경이 완전히 망가져 버릴 텐데······.”

마력을 구속하는 마법진을 꺼트린 시모스가 놀랍기 그지 없다는 얼굴로 늘어진 바이젠을 이리저리 살폈다.

마나를 다루고 마법이라는 이적을 직접 구현하는 마법사로서 그는 방금 러셀이 한 짓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수준에서 이뤄지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바이젠이 구속당하고 마력이 봉인된 상태라고 해도 근육과 신경계에는 이상 없이 의식만 촛불을 끄듯이 꺼지게 했다가 다시 깨우는 짓은 잘못하면 정신이 뇌가 죽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였다.

시모스도 번개를 사람에게 쏘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리 하면 살갗이 완전히 검게 타버린 숯덩이를 만들게 될 것이다. 러셀처럼 아주 가늘게 쏘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러셀의 놀랍도록 섬세한 마력감응력과 운용능력이 받쳐줘야 가능한 기예였으니 당연했다. 손에 번개를 둘둘 감는다는 것 자체가 마력의 속성 변화와 번개라는 속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시모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몸에 찔러넣어서 파괴하지 않는 순으로 위력을 조절하고 시전자가 아니면 기절 상태에서 돌아오지도 못하게 하는 수법은 시모스도 처음 보는 기예였다.

“안 가나?”

“아, 죄송합니다, 가주님. 도련님이 하신 일이 워낙 신기하여.”

결국 라하르트가 채근하고 나서야 시모스는 바이젠을 살피는 것을 멈추고 석실에서 나왔다.

***

“빌어먹을!”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 손짓을 따라 방안에 광풍이 불면서 탁자가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벽 한쪽이 무너지며 반대쪽이 그대로 드러났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방은 사내의 손짓 한 번에 와지끈 무너지며 먼지를 풀풀 일으켰다. 방의 벽에 걸린 촛대에 걸린 촛불이 그 바람에 꺼질 듯 흔들렸다가 겨우 몸을 세웠다.

그 작고도 밝은 빛에 따라 사물들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요동쳤다. 사물들은 가만히 있는데 그림자는 쉬지 않고 움직이니 마치 방의 어둠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방에 자리하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푹신한 침대와 탁자, 의자.

아름다운 벽지가 천장과 벽을 수놓은 것에 비해 살풍경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구가 적었다. 검은 로브의 후드는 젖혀져 있었고, 그래서 남자의 얼굴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씩씩거리던 남자가 한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문을 두드리려 손을 들었던 어린 하녀가 벌벌 떨며 서 있었다.

쉬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쟁반을 들고 서 있던 어린 하녀가 남자의 손에 빨려 들어왔다. 손에서 놓친 쟁반과 그 위에 담겨 있던 뚜껑 덮인 접시가 바닥에 나뒹굴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사, 살려 주세요······.”

목이 졸리는 소리를 내며 하녀가 남자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하녀의 눈에 비친 남자는 그야말로 괴물과 같았다.

어릴 때, 마을의 대로를 가로지르며 마물이 잡힌 이동감옥이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이동감옥의 안에는 쇠창살에 갇힌 마물이 쇠사슬에 목과 사지가 완전히 결박된 채 숨만 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돌을 들어 그 마물을 던지는 와중에도 어린 그녀는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번뜩이는 마물의 붉은 눈이 사람들을 쏘아보는 것이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지금 그녀의 앞에는 이동감옥이나 쇠사슬에 전혀 묶여있지 않은 괴물이 그녀의 목을 틀어쥔 채 서 있었다.

숨을 고르던 남자는 하녀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저, 저녁을······ 들지 않으셨다 하여.”

남자는 오른손을 주억거렸다. 당장이라도 이 하녀를 쳐죽이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 성에 손님으로 온 상황이었다.

그가 온 성의 주인은 내어준 손님용 방을 무너뜨린 것까지는 용서해도, 사람까지 해치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주인의 것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그리고 이 성주는 예의에 어긋나는 짓을 무척 싫어했다.

“되었다. 들고 가라.”

“예, 예······.”

남자가 왼손을 펼치자 하녀는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하녀는 용케 다리에서 힘이 풀리지 않은 채 뒤로 물러나 접시와 쟁반을 들고 물러났다. 문짝이 박살나 있어 따로 문을 열거나 닫을 필요 없이 하녀는 방에서 나가 복도로 멀어졌다.

-왜 심기가 어지러워지셨나?

“······.”

육성이 아니라 마력이 직접 울리는 목소리.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걸어 다니는 해골이 있었다.

녹슨 청동 왕관과 갑옷을 입고 검은 찬 채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해골이라. 꿈에서라도 보기 두려운 모습이었지만, 이 해골은 군터-골리스 성의 주인이었다.

남자의 손이 무너진 방의 벽과 나뒹구는 의자를 향했다. 그의 손에서 마력이 일자 시간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무너졌던 벽이 다시 일어서며 빈틈없이 매워지고 균열이 수복되었다. 가루가 되었던 탁자 또한 그 가루가 뭉쳐들며 다리부터 세워지더니 다시 둥그런 테이블이 되어 바닥에 우뚝 섰다.

떨어졌던 잡동사니들 또한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니 방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처음의 상태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아닐세.”

-아무것도 아니긴. 여전히 이 방안에 자네의 폭급한 감정의 격류가 휘몰아치고 있는데.

웃음기 하나 띌 수 없는 창백한 해골이 딱딱거리며 방에 들어서더니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 마력이 마법으로 구현되기 전에 남자의 손이 마력을 그러모아 내리 찢었다.

맹수가 발톱을 휘두른 것 같은 다섯 갈래의 날카로운 상흔이 허공에 새겨지며 파동의 물결을 치고, 해골과 남자가 대치했다.

“······남의 비밀을 함부로 열어보려는 짓은 여전하군. 해골.”

-그렇지 않고서야 죽음 너머를 바라보는 짓은 못하지. 그렇지 않은가. 그대 또한 나와 비슷한 곳을 보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만.

“난 리치 따윈 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면 돌아가게.

결국 해골을 노려보던 남자가 먼저 물러났다. 그런 남자를 바라보던 해골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

“······북부의 일이 조금 늦어질 것 같다.”

-방해꾼이 있었나 보군. 누구지?

“저번에 만났던 검은 머리의 칼잡이.”

남자가 이를 갈자 바드득거리는 소리가 나며 입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눈이 인상적인 남자를 말하는군. 안 그래도 내 귀에 들려오는 소문들이 화려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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