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66화 (167/225)

166화 심문

“······일단은 알겠다. 지하 감옥에 넣어두도록 하지. 데쉬번 경.”

“예.”

데쉬번이라는 이름의 기사가 앞으로 나서자 러셀은 군말없이 바이젠을 그에게 넘겼다. 기사는 조심스럽게 축 늘어진 바이젠을 걸머지고는 내성으로 달렸다.

기사가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던 라하르트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제국이라니. 이 무슨······. 서쪽의 제국이 왜 북방에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이득이 전혀 없을······ 설마?”

무언가를 떠올린 듯 라하르트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아버지? 뭔가 짐작가는 게 있으십니까?”

“······아니다. 지금은 수습이 먼저다. 도와주겠느냐?”

“물론입니다.”

라하르트는 잠시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고맙다.”

“별말씀을요.”

테러의 주범이었던 페르쿠스가 잡히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어갔다.

러셀과 이루실, 칼리아, 아엘라시스가 직접 네크놀들을 처리하는데 합류하니 그야말로 전광속화의 속도였다.

괴물들을 모두 처리하고 나자 남는 것은 폐허였다. 러셀은 전쟁터나 마찬가지로 변해버린 황폐해진 도시를 돌아다니며 인명 구조 작업을 도왔다.

전투 중에 무너진 집에 깔려 있던 사람들, 지하실에 숨었다가 입구가 막혀 갇힌 사람들도 많았다. 칼리아의 광역 마법이 없었으면 적어도 수백 단위의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을 것이다.

네크놀들의 난동은 2시간이 약간 안 되었지만 그 이후의 뒷수습에는 반나절이 꼬박 걸렸다. 도처에서 울음과 곡소리가 바닥을 타고 낮게 흘렀다. 시체를 찾은 경우는 그나마 나은 경우였다.

아예 안개에 접촉했거나 네크놀에게 삼켜진 자들은 손가락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숨결을 강제적으로 들이마신 이들은 그 육체가 치환되어 네크놀이 되었고, 그 네크놀에게 잡아먹힌 자들은 그대로 양분과 마력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직 자신의 가족, 친지, 친구가 괴물이 되어 죽었거나 잡아먹힌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들은 나중에야 자신의 가족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었다.

해는 저물었다. 영지를 붉게 비추던 노을빛도 완전히 저물자 어두운 밤하늘과 싸늘한 바람이 찾아왔다. 캄캄한 도시 여기저기에 모닥불과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꽃이 둥둥 떠다니며 주위를 밝혔다.

그런 도시를 내려다보며 러셀은 내성의 성벽 위에 서 있었다.

“······.”

그가 서 있는 성벽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근처에서 한번 붙기라도 한 것인지 핏자국이 찍혀 있고 한 곳을 중심으로 둥글게 일어난 균열도 보인다. 지금은 네크놀의 시체도, 사람의 시체도 없이 그저 을씨년스런 풍경일 뿐이었다.

“여기 있었네.”

러셀이 고개를 돌리자 이루실이 한 소녀를 안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행색은 말로도 깔끔하다고 할 수 없었다. 머리카락은 먼지와 피가 엉긴 채로 굳어 덩어리져 있었고 옷에도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다만 자신의 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 얘는 누구야?”

“아······ 엄마를 잃었어. 이름은 라나. 나한테서 떨어지려 하질 않아서.”

라나라는 이름의 소녀는 규칙적인 호흡으로 잠들어 있었다.

“아빠는?”

러셀의 물음에 이루실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물어봐도 말하지 않는 걸로 봐선 태어날 때부터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아.”

“어떻게 할 생각이야?”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성에서 일하게 해야지. 주방에서 일하든, 사용인으로 일하든.”

러셀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별말 하지 않았다. 소녀를 고쳐 안은 이루실이 그의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섰다. 이루실의 눈에도 엉망이 된 영지가 보였다.

“주동자는? 잡았어?”

“다행히. 지금 칼리아가 데리고 있어. 그리고 한 놈 더 잡기는 했는데, 호위로 온 용병이야. 꽤 세.”

“네가 세다고 할 정도면 유명한 용병일 텐데. 이름은 알아?”

“바이젠이라고 하던데.”

”외모는?”

“키가 크고 날붙이를 많이 가지고 다니더군. 장검, 장도, 단검, 단도. 다 수준급으로 다뤘어.”

“칼을 많이 지니는 데다가 바이젠이라는 이름을 가진 용병이라.”

잠시 이름을 입안에서 굴리던 이루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샤. 그리샤 남매 중 남동생의 이름이 바이젠이라고 들었던 것 같아.”

“그리샤?”

“응. 남매 중 누나 쪽은 에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에덴과 바이젠. 둘 다 용병 업계에서는 이름을 날리는 거물들인데. 어째서 제국이······”

라하르트에게 이미 귀띔을 받은 것인지 그녀는 이 테러의 배후에 제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녀는 아니야. 이제 완전히 차기 황제의 자리를 확실시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일을 꾸미진 않을 거야. 그렇다면 오히려 세를 잃고 있는 황자 측이 더 적절하다는 얘긴데. 황자가 북부의 영지를 건들여서 좋을 거라고는 없어.”

“찬찬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야. 수습을 모두 마무리 한 다음에 고민해도 늦지 않아.”

“그렇겠지.”

어두운 도시를 바라보는 이루실의 검은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여전히 한 구석에서는 비통한 통곡이 아스라하게 들렸다.

“감히 우리를 건든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

“흠.”

러셀이 흑요정 페르쿠스에게서 빼앗은 향로를 살피고 있던 칼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러셀이 물었다.

“뭔가 알아낸 게 있나?”

“잠시만.”

향로를 두 손으로 쥐고 있던 칼리아가 곧 말했다.

“지금으로선 두 가지 정도밖에 없구나. 하나는 이 안개에 접촉한 사람을 제물화시켜서 암흑계에 먹이로 넘겨버리고 그 차원의 존재를 소환하는 것. 두 번째는 향로를 들고 있는 자, 그러니까 주인의 명에 따르는 것.”

“뭐가 더 특이하지?”

향로를 바로 앞의 탁자에 내려놓은 칼리아가 검지와 중지를 들었다.

“두 개 전부지. 원래 네멘스토의 숨결은 여러 명에게 나눠줄 수 있을 만큼 많은 연기가 나오는 향로가 아니다. 진귀한 재료, 예를 들어 일각수의 뿔이나 거인의 심장, 마물의 신체 부위 등을 안에 넣으면 알아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그 재료에서 나온 연기를 들이마시는 용도지.”

“힘을 얻는 종류인가?”

칼리아가 긍정했다.

“맞다. 일시적이지만 향로에 태운 생명체가 지니고 있던 힘을 얻게 되지.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그 기간 또한 천차만별이고. 어떤 자는 플로코드의 재생력을 얻었다. 그 재생력의 지속 기간은 1년이었지.”

“플로코드?”

“남부에서도 아주 희귀한 도마뱀이지. 트롤보다 대단한 재생력을 지니고 있고. 하지만 그 수가 무척 적고 발견된 적도 드물어서 내가 왕국을 다스리던 당시에도 전설 취급을 받았던 괴물이었다. 어쨌든.”

주위를 환기시킨 칼리아가 말을 이었다.

“나한테도 한번 수중에 들어왔던 보물이기는 하지만 용도가 정해져 있기에 별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이후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나도 봉인되고, 왕국도 멸망했으니 계속 세계를 떠돌고 있었겠지. 다시 여기서 볼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본래 용도가 그랬다는 말은. 지금은 다른 마법적인 조치가 취해졌다는 뜻인가?”

“그래. 이 안에 들어있는 걸 확인하면 조금 더 확실하겠지만.”

파칫!

향로의 뚜껑에 손을 가져가던 찰나, 검은 불꽃이 튀며 칼리아의 손을 밀어냈다. 얼마나 강력한 저항이었는지 칼리아의 오른손이 새까맣게 그을릴 정도.

“보시다시피. 러셀, 네가 오기 전에 몇 번이나 저 뚜껑을 열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단순히 마법이 걸린 게 아니라 사념이 깃들어 있어. 섣불리 접근하다가는- 어어, 왜 가져가는 게냐?”

“내가 한번 해보지.”

“으음······ 조심하거라. 자칫하면 몸이 빼앗길 수도 있어.”

몸을 빼앗긴다라. 러셀은 씩 웃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마.”

그의 오른손이 덥석 하고 향로의 뚜껑을 잡았다. 동시에 무시무시한 기세의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며 러셀의 오른손을 덮었다.

화르르르륵!

“러셀!”

당장이라도 두 손을 들고 마법을 쏟아낼 것 같은 칼리아를 한 손으로 말리며, 러셀은 마력을 집중했다.

우우우우우······!

뭐라 특정할 수 없는 목소리들이 겹쳐서 들렸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늙은 것인지 젊은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불꽃은 이제 오른손을 넘어 손목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는 넘어가지 못한 채 주춤했다.

외계의 정신체에게 침식을 당한 경험은 차고 넘쳤다. 악마 로고스와 겔리오투스, 몇 시간 전 직접 향로의 안개를 뒤집어쓴 것까지.

찍어누른다. 압도적인 마력이 러셀에게는 존재했다.

선천적으로 가진 마안이나 육체가 아니더라도, 러셀이 살아오면서 단련한 마력은 거짓이 아니었다.

사선을 넘고 괴물을 베어 죽이며 피와 땀으로 물든 마력은 매 순간 그 밀도를 더해갔다.

파츠츠츠츠!

러셀의 팔뚝에서 일어난 청색의 마력광과 전격이 일어나며 검은 불꽃과 부딪쳤다.

러셀의 눈이 빛나기 시작한다. 불꽃의 구성, 그 구조와 본질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불꽃은 그저 가림막에 불과하다. 그리고 러셀의 마안은 그 너머를 궁금해하는 그에게 충실히 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불꽃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심상. 이 향로에 손을 대고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는 자가 보였다. 놀랍게도 그것은 일전 이계종 나무를 해치웠을 때 나타났던 검은 로브의 사내였다.

그때 주문을 외우며 향로에 손을 얹고 있던 사내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뭐지? 어디서 날 보고 있는 거냐?

분명 과거의 일을 보여주는 것일 텐데도 검은 로브의 사내는 러셀의 시선을 인지한 듯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그의 붉은 눈이 곧 러셀의 시선과 마주했다.

-너······!

“도망치는 솜씨가 제법이더군.”

그때 시야의 외곽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러셀의 마안을 차단하는 결계가 덧씌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일 것이다.

“그래. 내 앞에서도 꼭 그렇게 말하라고.”

이어서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러셀은 자신의 오른팔을 덮어가던 검은 불꽃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오······ 된 것이냐?”

칼리아는 러셀이 잠시간 검은 로브의 사내를 마주쳤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러셀은 고개를 끄덕이고 향로의 뚜껑을 열었다. 뚜껑은 저항없이 열렸다.

향로의 안에는 뼈만 남은 사람의 팔뚝이 곱게 들어가 있었다. 앙상하고 거무죽죽한 오른손이었다. 러셀은 거기서 향로의 내부 공간이 밖에서 보는 것보다 넓게 확장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보아도 향로만한 크기의 커다란 사람의 팔뚝이 들어가 있는데 무리없이 담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나?”

“나도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잠시 살펴봐도 되겠느냐?”

“그래.”

러셀이 다시 향로를 칼리아에게 건넬 때, 문에서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

라하르트가 러셀을 찾은 곳은 성의 지하 감옥이었다. 식량과 술을 보관하는 저장고를 지나 나선형의 계단을 죽 내려가면 지하감옥이 나왔다.

깊은 지하 특유의 습기와 비린내가 올라오는 감옥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외벽에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횃불조차도 일정 반경 이상으로 그 빛을 퍼트리지 못했다.

수감실은 대부분 비어있었다. 텅 빈 수감실들을 스무 개 정도 지나치자 저 앞에서 횃불을 들고 서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아버지는?”

“석실에 계십니다.”

러셀의 물음에 기사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리 들어가자 라하르트 가주와 마법사 시모스가 그를 맞이했다.

“부르셔서 왔습니다.”

“왔느냐? 이쪽으로 오거라.”

석실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단한 나무 의자에 바이젠이 묶여 있었다. 쇠사슬로 칭칭 감긴 것도 모자라 마력을 구속하기 위한 마력석이 석실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마법사 시모스가 한 손 위에 마법진을 떠올리고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바이젠의 마력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술식이었다. 라하르트가 말했다.

“깨워보려 했는데 일어나질 않더구나. 네가 기절시켰다는 사실을 떠올려서 널 데려오라 했는데. 내가 틀린 것이냐?”

“아닙니다. 아직 그의 몸속에 제 마력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러셀은 곧장 다가가 바이젠의 축 늘어진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의 척수에서 잔류하고 있는 마력을 도로 흡수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허억······!”

정신을 차린 바이젠이 바람 소리를 내며 고개를 쳐들었다. 잠시 숨을 헉헉거리던 그는 곧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일면들을 확인하더니 히죽 웃었다.

“하하······ 굳이 이렇게 안 잡아두셔도 다 말할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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