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자하드 영지 (3)
우웅-!
등뒤에서 심상찮은 진동과 소리가 함께 느껴졌다. 러셀은 날렸던 몸을 뒤집으면서 나힐니르의 검면을 들어 앞을 막았다.
굉음과 함께 충격이 그를 덮쳤다. 몸을 공중에 띄운 상태에서 억지로 몸을 돌려 막은 공격이었기에 러셀은 그대로 뒤로 날아가 건물 하나를 부수고 들어갔다.
러셀은 고개를 흔들었다. 가득 쌓인 먼지와 나무 쪼가리, 돌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를 덮친 공격에는 물리적인 타격 말고도 몸속을 찔러오는 송곳 같은 마력이 한껏 들어 있었다.
그가 적들을 상대할 때 겉이 아니라 속을 파괴하는 수법과 비슷한 일격이었다. 충격을 떨쳐낸 러셀이 문득 자신이 처박힌 곳을 살폈다.
그 건물은 어느 가정의 집이었던 듯했다. 부부로 짐작되는 중년의 남녀와 남매로 보이는 꼬마 둘이 주저앉아서 러셀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러셀은 난장판이 된 부엌과 자신이 부수고 들어온 벽들을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키와 체구를 가진 그가 일어서자 낮은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했다.
러셀이 바로 옆에 떨어져 있던 나힐니르를 쥐어들자 부부는 겁을 집어먹고 두 자식을 껴안은 채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엄마의 팔 사이를 빠져나온 남자아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우리 집 다 부수면 어떡해요! 내 방이랑 미엘 방이랑 다 부서졌잖아요!”
“하츠! 어서 이리 오지 못해!”
중년 여인이 숨죽인 목소리로 낮게 외쳤지만 남자아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씩 하고 웃은 러셀은 품을 뒤져 금화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집을 부숴서 미안하다. 이걸로 고치도록 해라.”
남자아이가 금화를 받아들자 러셀은 부수고 들어온 벽을 넘어 뻥 뚫린 구멍 앞에 섰다. 언제 더 나타났던 것인지 또 다른 네크놀 한 마리가 주먹을 주억거리고 있었다.
아까 러셀이 베어 죽였던 놈들과 달리 키가 1미터는 더 컸고, 온몸이 근육질에다가 팔이 여섯 개였다.
그 여섯 개의 팔을 가진 괴물은 일고여덟의 병사와 한 명의 기사를 상대하며 날뛰고 있었다. 보아하니 가장 처음에 희생양을 제물로 생성된 놈 같았다.
러셀이 죽였던 놈들과 달리 복제된 개체들을 하나로 통합한 듯한 괴물은 무시무시한 마력을 내뿜으며 거리를 횝쓸고 있었다.
“아아악!”
네크놀에게서 뻗어 나온 검은 연기가 병사 하나의 발목을 잡아채 높이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내리쳤다. 그 한 방에 병사는 피떡이 되어 죽었다.
죽은 병사를 그대로 몸통에 달린 커다란 입에 떨어뜨린 괴물이 우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도끼 한 자루가 틀어박혔다.
가슴팍에 도끼가 박힌 거인 네크놀이 그대로 튕겨 나가는가 싶더니 다시 줄에 매달린 것처럼 어딘가로 끌려갔다. 겨우 살아남은 병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손을 뻗고 있는 러셀이 있었다.
마지막 서리로 얼어붙은 거인 네크놀을 끌어당긴 러셀이 몸을 추스리고 있는 기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거기, 이름이 뭐지?”
“쿨럭, 라이암, 입니다. 당신께서는······? 어? 도련님?”
내상을 입은 듯 피를 토하느라 고개를 늦게 들었던 기사가 러셀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영지 곳곳에서 이런 괴물들이 일어서고 있다. 주범은 흑요정 남성이고, 마법적인 유물을 가지고 있다. 내가 쫓을 테니 그동안 영지민들을 대피시키고 괴물들 근처로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라. 사람을 잡아먹고 수를 불리며 힘을 키우는 종류의 괴물이다. 목을 베고,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라. 알겠나?”
“수, 숙지 완료했습니다!”
바짝 각이 오른 기사가 경례를 하며 외쳤다. 러셀은 다시 자신의 손에 잡힌 도끼에 얼어붙어 있는 거인 네크놀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얼어붙은 괴물은 그 와중에도 초록색의 안광을 빛내며 러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와 괴물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러셀은 얼음덩이 안쪽에서 무시무시하게 확산되는 마력을 느꼈다.
찰나에 찰나를 늘린 시간이 펼쳐진다. 보통 사람은 죽을 때까지 느낄 수 없는, 혹은 죽기 직전에서야 느껴지는 감각을 러셀은 숨쉬듯이 사용할 수 있다.
이제까지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지 꾹꾹 눌러놓고 응축한 마력이 폭탄처럼 터져 나오며 얼음덩이를 부수고 뛰쳐나왔다. 송곳처럼 날카롭게 다듬은 괴물의 육체가 변형되어 사방으로 날아들려 하고 있었다.
러셀이 움직였다. 그의 손에 들린 나힐니르가 무수한 잔영을 그렸다. 묵색의 검신이 그려내는 검은 궤적에 닿은 괴물의 공격은 모두 스러지고 박살나며 흩어졌다.
사람들의 눈에 보인 것은 번쩍이는 섬광과 흐릿한 그림자, 그리고 산산이 조각난 검은 괴물의 몸뚱아리들이었다.
눈 한 번 깜박이는 사이에 몇 번을 휘두른 것인지 그 커다랗던 검은 괴물은 수백 개의 조각이 되어 우수수 떨어졌다.
병사들과 기사가 입에서 침을 흘리고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진 채로 보고 있는 채로 러셀은 대검을 털었다. 남아있던 괴물의 잔재가 훅 하고 떨어지며 가루가 되었다.
“난 이 주범을 잡겠다. 아까도 말했지만 혼란을 가라앉히고 대피시키는데 초점을 맞추도록. 내 동료와 이루실이 돕고 있을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러셀은 대답을 듣자마자 아까 흑요정이 있던 거리를 훑어보았다. 마안이 활성화되고, 시야를 가렸던 장애물들이 사라졌다. 주변을 빙 둘러보던 러셀의 고개가 멈추고, 입가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찾았다.”
콰앙!
그의 각력을 고스란히 받아낸 포석 바닥이 움푹 패더니 주변으로 가지 친 금이 그려졌다. 포탄처럼 쏘아진 러셀은 바로 앞의 담벼락을 밟고 뛰어올라 옥상에 올랐다. 그리고 옥상과 옥상을 건너뛰며 저 멀리 재빠르게 달리고 있는 흑요정을 향해 쏘아졌다.
***
“허억, 허억, 허억.”
페르쿠스는 어느 골목 틈 사이에 숨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만하면, 못 쫓아오겠지.”
그는 아까 마주쳤던 눈의 주인을 떠올렸다. 처음 보는 자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그와 자신 사이에 거리가 족히 수백 미터는 되었고, 여기저기 뛰며 도망치는 사람 사이도 많았는데 정확하게 자신을 특정하며 잡았던 눈.
어찌나 뇌리에 깊게 박혀 들었는지 눈을 감아도 그 번쩍이는 안광이 떠올랐다.
차츰 진정되었다고 느낀 페르쿠스는 품에 안고 있던 향로를 들어보았다. 네멘스토의 숨결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법 유물이다.
고대의 악마 네멘스토가 자신의 숨을 불어 넣었다는 전설이 있는 이 유물은 끊임없이 검은 연기를 뿜어대고, 그 연기는 기체라는 성질을 무시하듯이 손으로 잡아 쥘 수 있었다.
페르쿠스는 자신이 이 향로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제물을 골라 검은 연기를 흡입시켜 괴물로 만들고 날뛰게 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진정한 목적은······. 상념을 이어가던 페르쿠스의 길쭉한 귀가 움찔 떨렸다.
콰앙!
굉음과 함께 페르쿠스가 기대고 있던 벽이 박살나며 손이 튀어나와 페르쿠스의 목을 틀어쥐었다. 경악한 페르쿠스가 버둥거릴 때 무너진 벽과 돌 잔해를 헤치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 뭐하는 놈이야?”
먼지를 뒤집어써서 회색 머리칼이 된 러셀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에 페르쿠스가 내뱉은 것은 주문이었다.
“레, 레페르마!”
러셀의 손아귀가 콱 쥐어졌다. 그러나 그의 손아귀에 압착된 흑요정의 목은 없었다. 주문과 함께 향로에서 빛이 나더니 페르쿠스의 몸이 검은 연기 뭉치가 되어 골목 안쪽으로 날아간 것이다.
“얼씨구.”
그걸 멍청하게 바라볼 러셀이 아니었다. 당장 그의 의지가 실린 마력이 오른손에 맺히고, 전격의 속성으로 변하며 푸른 불꽃을 빠직거렸다.
파츠츠츠!
공간을 격하고 날아간 번개 줄기가 검은 연기 뭉치를 타격했다.
“크아악!”
그러자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흑요정의 몸으로 변하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헉, 하고 고개를 든 페르쿠스는 저편에서 걸어오는 러셀을 보고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큭!”
잇소리를 낸 그는 곧장 몸을 일으키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고개를 까딱이며 목을 풀던 러셀이 바로 그의 뒤를 쫓았다.
흑요정은 거침없는 뜀박질로 담벼락과 거리의 골목 사이를 누볐다. 장애물이 많은 지역으로 도망치면서도 그 사이를 유연하고 잽싼 몸놀림으로 빠져나갔고, 위험한 틈새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졌다.
러셀은 마안으로 흑요정이 도망치는 방향을 보다가 뛰어올라 건물 틈새와 옥상을 주파하며 흑요정을 쫓았다.
“헉, 헉, 헉, 어떻게 인간이 나를, 헉!”
페르쿠스는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어디선가 러셀이 나타났다. 어떻게든 장애물이 넘치는 구간을 비집어 달리고, 사람이 드나들수 없는 틈으로 빠져나와도 다시 그가 나와 퇴로를 틀어막았다.
원래 계획했던 네크놀의 생성과 확산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마구잡이로 향로에서 연기를 뭉쳐내 뿌렸지만 그마저도 러셀이 쏘아보낸 전격에 박살이 나 힘없이 사라졌다.
다급해진 흑요정의 발걸음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을 향해 뛰었다. 러셀은 바로 그 움직임을 읽어냈다. 중구난방으로 도망치던 흑요정이 갑자기 어떤 방향을 잡고 직선으로 달려가니 모를 수가 없었다.
러셀은 거기서 속도를 높였다. 요정 다운 몸놀림으로 처마를 붙잡고 끌어당기며 가벼운 몸을 날리고 지붕과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모습은 사람들이 으레 상상하고 떠올리는 요정 그 자체였다.
그에 비해 러셀은 닿으면 부술 기세로 두 다리를 힘차게 뻗으며 바닥을 박찼다. 삽시간에 남은 거리가 줄어들었다.
“으아아아······!”
뒤를 돌아본 흑요정의 표정이 두려움과 공포로 젖어 창백해졌다.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못했는데 저 무시무시한 추적자가 등 뒤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죽어라-!”
지붕 하나를 거세게 밟고 뛰어오른 페르쿠스가 향로를 내밀었다. 왼손으로 둥근 몸통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작은 뚜껑을 잡아 연다.
푸화아아악!
그러자 그 안에서 검은 연기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며 러셀을 덮쳤다. 검은 연기는 그대로 러셀을 휘감더니 커다란 구체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쿵, 하고 묵직한 울림이 울리고 바닥을 깨며 검은 구체가 고정되었다. 그 앞으로 페르쿠그가 내려섰다.
“허억, 젠장, 허억.”
원래 이 한 번에 다 써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공포에 잠식된 페르쿠스는 그런 것을 따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까 눈에 마주쳤을 때 들었던 공포심이 아까부터 미친 듯이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쿵쿵쿵쿵-
심장이 더없이 박동하면서 피를 온몸으로 보냈다. 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숨결은 진정되지 못하고 점점 더 거칠어졌다. 페르쿠스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검은 연기로 횝싸인 인간이 보인다.
“됐어, 됐다······ 아니지, 이게 더 좋은 건가?”
원래라면 천 명은 더 괴물로 만들 수 있는 양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저 괴물 같은 인간을 변이시키는데 더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페르쿠스는 조심조심 검은 안개가 뭉쳐서 꾸물거리는 고치에 다가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의문과 동시에 고치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경악한 페르쿠스가 물러서려 할 때, 고치 속에서 주먹이 튀어나오며 그의 몸통에 틀어박혔다.
“커헉······!”
갈비뼈와 내장이 박살 난 페르쿠스가 무릎을 꿇고 엎어졌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조심성이 많군.”
포석을 부수고 들어갈 정도로 밀도가 높아지고 단단해진 네멘스토의 숨결을 종잇장처럼 우그러뜨린 러셀이 안에서 걸어나왔다.
그의 눈은 시퍼렇게 불타고 있었고, 그 시선이 닿을 때마다 네멘스토의 숨결은 불에 닿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사그라들었다.
러셀이 흑요정의 목을 쥐고 들어올렸다.
“이름이 뭐냐?”
“끄으으으으······.”
페르쿠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신음만 흘렀다. 강제로 목이 쥐어지며 펴지자 부러진 갈비뼈가 더 내장과 허파를 찌르고, 박살난 내장이 오그라들었다.
자신이 너무 세게 때렸음을 안 러셀이 오른손을 들었다.
“끄윽, 끄······ 어······?”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 같은 고통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안 페르쿠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를 쫓아온 추격자가 하얀빛을 내뿜는 오른손을 자신의 몸통에 대고 있었다.
부러졌던 갈비뼈가 다시 제자리를 되찾고, 박살났던 내장 또한 원래대로 돌아갔다. 인간과는 다른 요정의 강인한 육체가 가진 재생력이 치유 마법과 맞물리며 일어난 현상이었다.
여전히 왼손으로는 흑요정의 목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치유 마법을 구현 중이던 러셀이 물었다.
“이제 좀 살만한가 보군. 이름이 뭐냐?”
페르쿠스는 입을 꽉 다물었고,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빛을 내던 오른손이 전격에 휘감겼다.
파츠츠츠츠츠!
“그가가가가가!”
당장 전신을 난타하는 짜릿한 전격의 향연에 페르쿠스의 눈이 뒤집어지며 허옇게 변했다. 그리고 엄청난 충격이 얼굴에 작렬했다.
시야가 번쩍이고 난 다음에야 흑요정은 자신이 뺨을 맞았음을 알았고, 그 다음은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단단한 감촉을 느꼈다. 턱뼈가 부서진 것인지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서 피와 함께 부서진 이빨 조각들이 흘러나왔다.
샤아아아.
그리고 다시 러셀의 오른손이 흰빛을 내면서 페르쿠스의 턱뼈를 맞추고 찢어진 볼을 아물게 만들었다.
“이름?”
“페, 페르쿠스입니다!”
페르쿠스는 격렬하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