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61화 (162/225)

161화 자하드 영지 (3)

‘요정?’

평범한 요정은 아니었다. 후드 아래 언뜻 드러나 있는 피부는 보라색에 가까운 짙은 색을 가지고 있었다. 흰 피부를 가지고 있는 다른 요정들과는 다른 피부색. 흑요정이었다.

흑요정과는 약간의 인연이 있었다. 칼리스덴이라는 이름의 도시에서 클레이모어를 샀던 대장간을 운영하던 자가 바로 흑요정 여인이었고, 그 흑요정의 언니 또한 만나서 같이 괴물들과 싸운 적이 있었다.

벌써 구개월 전의 이야기다. 이후 에란디스 영지에서 평범한 요정을 만난 이후로는 딱히 다른 요정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북방에서 그냥 요정도 아니고 흑요정을 보게 된 것은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었다.

러셀의 시선이 닿은 그 요정은 뭔가를 느끼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 방향은 정확히 러셀이 서 있는 쪽이었다. 두건이 얼굴을 짙게 가리고 있었지만 러셀에게는 의미가 없었고, 그는 그 안쪽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군.’

분명 요정다운 외모이긴 했으나 그가 알던 얼굴은 아니었다. 거기에 그 흑요정은 남자였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불안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인파 속으로 숨어들었다. 누군가에게 쫒기는 중이라도 되는 듯 빠른 몸놀림이었다. 러셀조차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놓쳤을 정도.

그건 그 남자의 몸놀림도 몸놀림이지만, 몸 주변에서 옅게 일렁거리는 은밀한 마나의 움직임이 남자를 군중 속에 더 쉽게 스며들게 하고 주의를 돌리고 있는 덕분이었다. 마법을 쓰고 있던가, 아니면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러셀? 어디 보고 있는 거야?”

“···아니야.”

아엘라시스의 물음에 러셀은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흑요정이 보통의 요정보다도 보기 힘든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여기 없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처럼 방랑을 하거나 떠돌아다니는 자들이 한 둘은 아닐 테니. 하는 움직임이 여간 수상한 게 아니었으나 그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장인 거리를 나아가며 이루실이 안내한 곳은 꽤 규모가 있는 대장간이었다. 뒤집힌 브이자 형태의 간판에는 모루와 망치의 형상이 양각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강철의 그림자’라는 이름이 걸려있었다.

그런 대장간 앞에서 이루실이 누군가에게 인사를 받더니 아엘라시스에게 손짓했다.

“아엘라, 잠깐 이리 와봐. 치수를 좀 재봐야 할 것 같은데.”

“알았어!”

맞춤 제작이라도 할 모양인지 이루실은 아예 줄자를 대며 아엘라시스의 상체 이곳저곳을 재기 시작했다.

양팔을 벌린 채 서 있는 아엘라시스를 두고 칼리아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정렬되어 있는 단도나 장검 등을 하나씩 들어보았다. 보기 드물게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손가락으로 날을 팅팅 두드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감탄과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역시 내가 살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구나. 왕이 받아볼 법한 무기들이 이런 골목에 아무렇지도 않게 전시되어 있다니.”

“무기에 관심이 많았나 보군.”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지. 당시 내 왕국은 전란에 횝싸여 있었으니. 기사와 병사들에게 쥐여줘야 할 병장기의 품질이 쓰레기여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

확실히 칼리아가 살았던 때는 800년도 더 전의 시대다. 그때보다 지금 더 야장 기술의 발전이 이뤄진 것이 당연했다.

진열대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던 칼리아의 눈이 잠시 멈칫했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손과 팔목을 일체형으로 감싸는 건틀릿이었다.

수십 개의 파츠로 나뉘어져 있어 손가락과 손등, 손목을 구부리는데 자유롭고 움직임이 용이한 것이었다. 러셀은 그 건틀릿의 표면에서 은은하게 흐르는 마나가 느껴지는 것을 보았다.

“이건 좀 신기하구나. 마력 전도율이 높아. 아무래도 그냥 쇳덩이가 아니라 마법 금속이 들어간 듯한데······. 알로듐이 아닌가 싶군.”

“알로듐?”

“연금술 재료로 들어가는 희소가치가 높은 마법 금속. 다만 무구에 들어가는 데는 단가가 높은 금속이었다. 다른 강철과 결합하는 데에는 그 구조가 잘 맞지 않았지. 열을 너무 높이면 한쪽이 녹고, 강성과 탄성, 연성을 조율하는 것도 까다로웠어. 아주 실력 있는 대장장이가 만든 것이 아니라면 형체조차도 제대로 유지를 못하는 게 태반이었기에 나 같은 왕이나 무력을 입증한 기사들이나 지닐 수 있었던 무구들이었지. 특징으로는 마력 전도율이 높은 만큼 마법이나 마력을 내뿜는데 탁월하다는 정도. 마법사의 지팡이 끝에도 장식되는 금속 중 하나였지.”

러셀이 그런가, 하는 눈으로 진열장에 놓여있는 반짝거리는 갑옷과 칼, 방패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다른 무구들에 비해 마나의 흡착빈도가 더 높아 보인다는 특징이 보이긴 했다.

“아가씨께서 보는 눈이 있으시구만.”

그때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진열대가 들어선 곳으로 걸어나왔다. 방금까지 화로 앞에서 망치를 두드리고 있었는지 얼굴이 벌겋게 되어 있는 노인이었다. 칼리아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되물었다.

“아가씨?”

“그럼 거기 아가씨가 따로 있나?”

“아니, 오랜만에 들은 호칭이라서 말이다. 신선하구나. 당신은 누구인가?”

“거 신기한 말투군. 나는 필로스요. 여기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지.”

필로스라고 자신을 밝힌 노인은 절뚝거리며 다가와 칼리아가 보고 있던 진열장 안의 갑옷과 무기들 앞에 섰다.

“보아하니 마법사 같은데, 어떻게 알로듐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지? 웬만한 마법사들도 그냥 마법 금속을 썼구나, 하고 넘어가는데.”

“알로듐과 강철을 결합했을 때 나타나는 특징을 알면 모를 수가 없지. 일단 두 금속이 섞이고 난 다음 굳을 때는 물결 같은 문양이 일어난다는 것과, 빛에 비춰보았을 때 옅은 푸른 빛을 띄게 된다는 것이 있지. 그리고······.”

“오오, 꽤 많이 알고 계시군!”

러셀은 한 발자국 물러서서 대장간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와 일행 말고는 다른 손님을 받지 않은 것인지 안은 널찍했다. 하지만 수십 개의 무구들을 진열하기 위한 진열대가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배치되어 있고, 벽면과 천장에도 흉갑과 완갑, 그리브나 부츠가 걸려있어 오히려 꽉 차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러셀, 여긴 다 됐어.”

“응?”

러셀이 뒤를 돌아보니 이루실이 아엘라시스를 데리고 오고 있었다. 아엘라시스는 이미 하나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갑옷은 안쪽에 아주 얇은 쇠사슬들이 촘촘하게 짜여져 있었고 그 바깥에는 화살촉 같은 날카로운 끝을 빗겨 흘려내기 위한 마감처리가 된 금속 장식들이 붙어 있었다.

가슴과 등, 어깨와 배를 모두 가리면서도 움직이는데 불편하지 않아 보였다. 아엘라시스가 팔을 휘적거리는 것을 보며 직원이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치수가 비슷한 것이 있었습니다. 저희 대장간에서 최근에 개발한 야장 기술로 단조한 갑옷이지요. 안쪽의 조임끈으로 더 조이거나 풀 수 있으니 나중에 몸이 더 커지거나 작아지는 일이 있어도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을 겁니다.”

“괜찮아?”

“응! 가볍고, 팔도 잘 움직여.”

러셀의 물음에 아엘라시스가 파닥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서 금속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이던 칼리아도 어느새 다가와 말했다.

“잘 어울리는구나.”

“칼리아, 넌 필요 없나?”

“괜찮다. 난 피만 있으면 언제든지 수복할 수 있으니. 물리적인 타격은 내게 별 소용이 없어.”

칼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자신이 마법으로 만들어낸 상의와 조끼, 자켓과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곧 그녀의 육체와도 같아서 찢어지거나 뜯어져도 간단한 손짓 한번으로 원상태로 복구 시킬 수 있었다.

러셀은 이틀 전 오디스의 전사들과 싸울 때 몸을 핏물로 변화시켰다가 다시 돌아왔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갑옷만 사면 될 것 같군.”

값을 치르고 나오자 직원과 필로스가 배웅을 나왔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대화 즐거웠네, 아가씨!”

비싼 갑옷을 팔았다는 것 덕분인지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옆에서 이루실이 말했다.

“내가 사줄려고 했는데.”

“됐어. 나 돈 많아.”

아직 칼리스덴 성주에게 받은 금화도 많이 있었고, 에란디스 영주에게 받은 금화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매여놓은 곳으로 가려던 그때, 시장의 한 편에서 커다란 소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꺄아악!”

“뭐, 뭐야?”

“괴, 괴물이다!”

여자의 비명소리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목소리, 그리고 다른 자들이 괴물이라 외치는 소리까지. 한순간에 인파로 가득 찬 길과 골목, 거리가 아수라장이 되더니 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러셀은 곧장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라 바로 옆의 건물로 뛰어올랐다. 가공할 도약력으로 3층 건물의 옥상에 내려앉은 러셀은 곧장 눈에 마력을 집중했다.

자안이 빛을 뿌리며 마안을 활성화시켰고 색안경을 낀 것처럼 시야가 뒤바뀌었다. 먼 곳의 거리가 줄로 잡아당긴 것처럼 가까워졌다.

“저게 뭐야?”

러셀이 발견한 것은 그림자로 만들어진 듯 온몸이 검게 변하고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괴물이었다. 막 골목에서 튀어나온 그것은 곧장 앞에 있던 사람 하나를 낚아채 집어삼켰다.

정확히는 입으로 집어삼킨 것이 아니라, 가슴팍에 사람을 쑤셔넣었다. 그러자 가슴과 배가 세로로 길쭉한 선이 그어지더니 좌우에 무수한 이빨이 달린 입으로 변하며 사람을 집어삼킨 것이었다.

사람 하나를 먹은 검은 괴물의 몸이 울룩불룩하며 형체를 일그러뜨리더니 둘로 나뉘어졌다. 러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저런 식으로 개체 수를 날리는 괴물이 있다고는 들은 적이 없었다. 통상적인 괴물이나 마수처럼 번식을 하는 것도 아닌, 사람을 먹고서 둘로 나뉘어지다니.

“염병.”

콰앙!

으아아악!

그때 다른 방향에서 굉음과 함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식당 거리였고, 그곳에서도 검은 괴물이 나타나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혼란이 퍼져나가며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앞다퉈 도망치고 있었다. 미늘 갑옷과 투구를 쓰고 창을 든 치안 병사들이 빠르게 결집하며 괴물을 상대했다.

그러나 검은 괴물의 힘이 너무 강했다. 방패로 막으니 방패와 함께 팔과 몸통이 부서진 병사들이 상점들을 부수며 안으로 틀어박히거나 바닥에 짓눌렸다.

“물러서지 마라! 우리는 자랑스런 자하드의 병사들이다! 사람들을 지켜라!”

“우아아아아아!”

치안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검을 높이 치켜들며 검은 괴물들의 공격을 받아냈다.

“···러셀.”

어느새 그와 같은 자리로 올라온 일행들이 굳은 표정으로 도시를 바라보았다.

“칼리아. 저게 뭔지 알겠어?”

”나도 잘 모르겠구나······ 저런 형태를 가진 괴물은 본 적이 없다. 다만 정상적인 생체구조를 가진 게 아닌 건 확실하구나. 피가 전혀 없어.“

“어? 저건 뭐야?”

그때 아엘라시스가 한 지점을 가리켰다. 러셀 또한 그쪽에 시선을 두고 시야를 당기니 한 엘프가 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자식······.”

자세히 보니 엘프의 품에는 검은 연기를 울컥울컥 쏟아내고 있는 향로가 보였다. 엘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향로에 손을 집어넣더니 안개로 이뤄진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그 안개 뭉치를 골목 구석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부랑자 하나에게 던졌다.

벽에 기대고 앉아 있던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리가 벗겨진 부랑자는 갑작스레 나타난 엘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얼굴을 움켜잡았다.

부랑자에게 던져진 안개 뭉치가 부랑자의 눈, 코, 입과 귀를 통해 들어간 것이다. 얼굴을 감싸쥐고 비명을 지르던 부랑자는 곧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는 곧 피부가 검게 물들고 덩치가 커지며 하나의 괴물로 변해갔다.

“······저런 식으로 만드는군.”

“뭐가 말이냐?”

러셀은 빠르게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 검은 연기를 내뿜는 향로라는 말을 들은 칼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네멘스토의 숨결······. 그렇다면 저 괴물은 네크놀이구나. 그 악마의 향로가 왜 저 엘프에게 들려있단 말이냐?”

“아는 물건인가?”

“······원래는 저런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아닌데. 일단은 저 네크놀들과 엘프를 붙잡는 게 우선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영지의 모든 사람들이 괴물로 변해 버릴 것이다.”

“안 돼.”

이루실이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러셀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뉘어서 괴물들을 잡아야겠군. 내가 엘프를 쫓을 테니 나머지 괴물들을 부탁한다.”

“응.”

“알겠다.”

곧장 떠나려는 러셀의 팔을 이루실이 붙잡았다. 러셀이 고개를 돌리니 이루실이었다.

“······부탁해.”

“알아. 내가 나고 자란 곳이잖아.”

이루실의 손을 꾹 쥔 러셀은 곧 그 손을 떼어내고 다른 건물의 옥상으로 건너뛰었다. 그리고 이미 수십 명을 삼키고 분열한 검은 괴물들, 네크놀 앞에 내려섰다.

쿵-하고 러셀의 발이 포석이 깔린 단단한 바닥에 닿자 마력의 파동이 일어나며 네크놀들을 통과했다.

가르르르르.

가슴팍에 달려 있는 입에서 알 수 없는 괴음을 흘리며 괴물들이 러셀을 바라보았다.

“말은 못 하나 보군.”

코트 속에서 나힐니르를 꺼내든 러셀이 몸을 오른쪽으로 틀며 뻗어나온 괴물의 팔을 피해냈다.

놈은 이제까지 그런 것처럼 도망치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서 죽음을 기다리는 먹잇감을 잡는 심정으로 느릿하게 팔을 뻗은 참이었다.

미세한 차이를 두고 빗겨간 공격에 괴물이 멍하니 러셀을 바라볼 때, 그 팔을 서걱 자르며 나힐니르가 한 바퀴 회전했다.

네크놀은 시야가 뒤틀리는 감각에 어리둥절했다. 대각선으로 나뉜 시야에 바닥이 가까워지더니 어두워졌다.

순식간에 동족인지 분신인지 모를 괴물이 죽었으나 다른 네크놀들은 큰 동요가 없었다. 괴물들에게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러셀은 괴물들이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처음 한 놈의 목을 친 이후 거침없이 움직이며 괴물들의 숫자를 줄여나갔다.

그렇게 셋이 더 죽어나가자 그제야 네크놀들이 거체를 움직이며 러셀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들은 서로가 서로의 동선을 방해하며 제대로 된 합공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들을 러셀은 아까처럼 미세한 차이를 두고 피해냈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보지도 않고 등을 향해 날아든 날카로운 손톱을 튕겨낸 러셀은 바로 나힐니르를 휘둘러 손목을 잘랐다.

가르르르르르!

이상한 비명을 지르는 괴물의 가슴팍에 나힐니르가 박히고, 그대로 위로 빠져나왔다. 입이 죽 찢어진 네크놀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더니 퍽하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묵색의 검신이 거침없는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밝은 대낮, 도망치던 사람들이 멍한 얼굴로 러셀과 괴물들이 싸우는 곳을 바라보았다. 잘린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목이나 허리가 갈라진 괴물이 무수한 가루가 되어 흩날리며 검은 모래를 쌓았다.

나힐니르가 긁고 지나간 포석 깔린 바닥에서 불티가 튀고 반경에 놓였던 가판들이 우수수 무너지고 박살났다.

러셀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마력을 방출하지 않은 채 싸우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신체.

두근거리며 뛰는 심장이 전신으로 피를 보내고, 의지에 따라 수축되고 이완되는 근육이 범인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팔다리를 휘두르게 했다.

가르르르르······.

어느덧 마지막 남은 네크놀이 가슴팍에 박힌 나힐니르를 양손으로 붙잡다가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퍽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후.”

대검을 획 털어낸 러셀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선들을 마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골목 저 너머에서 자신을 멍청하게 바라보는 흑요정 남자가 보였다.

“힉.”

딸꾹, 하고 딸꾹질을 한 흑요정이 사라지는 것과 러셀이 바닥을 박찬 것은 동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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