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60화 (161/225)

160화 자하드 영지 (2)

어릴 적 러셀의 삶은 눈을 통제하는데 심력을 기울이던 시간이었다. 아주 어린 아기일 적에는 잠잠했다.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나이와 성장이 갖춰졌을 때 그의 마안은 조금씩 그 능력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가 성장하면 할수록 눈의 힘이 하나씩 개화하는 것처럼.

옷을 넘어 피부 안쪽과 근육, 내장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은 예사에 동물과 눈을 오랫동안 마주치고 있으면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어버리는 등.

전생을 기억하고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기쁨도 잠시, 그는 자신의 눈을 통제하기 위해 온 힘을 들여야 했다. 다행히 노력이 헛되지 않아 15살이 되던 해에 마안을 통제하고 흘러나오는 힘을 가두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러셀과 그의 눈이 일으킨 일들은 그냥 어린아이가 했다고는 믿기지도, 믿을 수도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대련을 하던 도중 잠깐만 방심하면 러셀과 눈을 마주친 기사나 종자들은 갑작스럽게 부풀어오르는 분노나 스트레스에 발광하거나 마력을 다스리지 못하고 상처를 입었다.

가을 혹은 겨울마다 산맥에서 내려오는 마수들의 남하를 막기 위해 토벌대를 꾸려 출동할 때에도 러셀이 있는 자리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마수들의 폭주를 하는 일이 많았다.

뭐에 이끌리기라고 한 것처럼 러셀이 자리한 곳으로 마수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그를 시야에 담자마자 우렁찬 괴성을 내뱉으며 돌진해왔다.

다행히 그렇게 덤벼들었던 마수들 모두 러셀이 뛰어난 신체 능력과 검술로 잡아 죽였지만 뒷말이 흐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악마의 피가 흐른다, 악마의 눈을 가졌다······ 기타등등.

‘진짜 비슷한 것의 피가 내 반쪽이긴 한다는 말이지.’

어두운 암흑만이 가득한 공간. 러셀은 그 공간에서 눈구멍이 뻥 뚫려있는 얼굴 없는 소녀를 만났다. 아니, 그가 인식하기로 소녀의 목소리와 형상일 뿐 실제로는 아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태생부터 주어져 있던 신비한 눈과 불가사의한 육체능력, 마력을 다루는 기술에 대한 끝없는 재능 또한 그 존재에게서 이어져 내려온 것일 터였다.

다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까지 그 존재와 관련이 되어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방을 가로질러 걸어간 러셀이 창문을 열었다. 청소를 한다고 해도 구석에 쌓일 수 밖에 없는 먼지와 쿰쿰한 냄새가 창문을 타고 바깥으로 빠져 나갔다.

동시에 그의 감각 속으로 많은 것들이 들어왔다. 저 멀리 보이는 하얀 대설산의 산맥과 울창한 수림. 하나같이 하얀 눈을 모자처럼 쓰고 앉아서 우뚝 서 있는 모습은 사시사철 볼 수 있었다.

그 아래에는 영지의 모습이 보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많았다. 대부분 두꺼운 털옷을 껴입고 있었지만 갑옷이나 무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마력을 통해 털옷 없이도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전사들이거나 마법사들일 것이다. 북쪽에서만 자생하는 마력초나 마수들은 마탑과 상인들에게 높은 수요를 자랑한다.

아운힐나르 산맥을 타고 흐르는 마력의 기이한 현상을 조사하러 오는 탐사단, 고대에 사라진 왕국의 흔적을 찾는 유적발굴단, 골칫거리인 마수들을 없애는데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온 용병들까지.

늦은 밤이 된 시간임에도 거리 구석구석 켜진 불빛은 꺼질 줄 몰랐고, 오히려 더 밝아지고 있었다.

‘내일은 그곳에 한 번 들러봐야겠군.’

***

아침 식사의 자리에는 자하드 일가가 모두 모여 있었다. 가장 상석에는 라하르트가 앉았고, 그 오른편에는 부인 레이라와 장녀 이루실이 앉았다. 그의 왼편에는 러셀과 칼리아, 그리고 아엘라시스가 앉아 있었다.

식사 자리는 조용했다. 이따금씩 식기와 그릇이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났다. 아엘라시스는 복잡한 그릇의 가지 수와 접시마다 달리 사용해야 하는 식기의 종류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칼리아가 옆에서 시기적절하게 도움을 주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런 칼리아와 아엘라시스를 보던 레이라는 음식이 담겼던 그릇이 모두 나가고 식후 차가 나오자 입을 열었다.

“머리 색깔이 독특하구나. 무척 예쁘고.”

레이라의 질문 아닌 질문에 아엘라시스는 반사적으로 러셀을 바라보았다. 러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 저. 고마, 고맙습니다. 부인.”

“난 레이라라고 한다. 네 이름은?”

“아엘라시스입니다. 부인.”

“아엘라시스라. 예쁜 이름이구나. 그래. 내··· 아들과는 어떻게 같이 다니게 된 거니?”

“음. 저를 러셀이 태어나게 해줬어요.”

“······.”

경악을 담은 시선들이 아엘라시스를 향했다가 러셀에게 돌아갔다. 라하르트가 부릅뜬 눈으로 러셀을 보며 말했다.

“지, 지금 저 말이 사실이냐? 네가 저 아이의 아빠인 게야?”

“···아닙니다. 아엘라. 보여드려.”

“응.”

아엘라시스가 대답한 직후, 그녀의 머리에서 빛이 일렁였다. 빛이 일렁인 자리에는 하얀색의 나선형 뿔이 뾰족한 끝을 위로 한채 자라나 있었다.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도 더 굵어지고 커다래진 뿔에서 미약한 전류가 파칫, 하고 흘렀다.

동시에 아엘라시스의 동공 또한 파충류처럼 위아래로 가늘고 날카로워졌다. 그 모습에 레이라가 숨을 들이켜며 앞으로 내밀고 있었던 상체를 뒤로 젖혔다.

“용족······!”

용족의 상징인 뿔과 동공에 라하르트와 레이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용족들은 희귀한 종족들이고, 인간들의 눈에 띄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제가 칼리스덴에 있었던 것은 다들 아시겠지요. 아엘라는 그때 만났던 인연 중 하나입니다. 보호자가 없어서 제가 따로 데리고 다니고 있지요.”

“그럼 태어나게 해줬다는 말은? 그건 무슨 말이냐?”

“러셀이 내가 알에 있을 때 날 데리고 다녀줬고, 나한테 마력을 불어 넣어줬어요. 뭔가 아주 친숙한 마력이어서 원래 태어나야 할 때보다 일찍 일어났고, 악마와도 싸울 수 있었고요.”

“······알? 악마?”

아엘라시스의 중구난방인 설명을 따라가지 못한 라하르트와 레이라가 중얼거렸다. 러셀이 말했다.

“아엘라시스는 그냥 용족이 아니라 용입니다. 제대로 된 용이라 말하기에는 많이 어리지만.”

“나도 이제 다 큰 거 아냐?”

“아냐. 아직 멀었다.”

“용이라니······. 무슨 이야기책을 보는 것 같구나.”

“······.”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레이라가 아엘라시스를 바라보는 사이 아엘라시스는 마법으로 다시 뿔을 사라지게 하고 동공을 인간의 것으로 바꿨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레이라는 이어서 칼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때 칼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에란디스 영지에서 러셀에게 신세를 진 마법사, 칼리아라고 한다. 아주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을 때, 부인의 아들이 내 목숨을 구해주었지. 이후 같이 다니고 있다.”

“······곤란한 지경이라면?”

“사특한 무리들이 영지의 오래된 유적에 잠들어 있던 고대의 존재를 일으켰었지. 무려 모든 흡혈귀의 원류라고 일컬어지는 시조 흡혈귀였다.”

“흡혈귀의 시조라니. 자세히 말해줄 수 있겠소? 난 들어보지 못했던 일인데.”

칼리아의 말에 라하르트가 상체를 숙이며 관심을 보였다. 라하르트는 북부의 변경에 위치하면서 다른 대륙의 정세를 읽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만, 아직은 이렇게 늦게 귀에 들어오거나 때로는 소리 소문도 없이 잊히는 일들도 많았다.

칼리아가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사람의 생명을 정제해서 붉은 수정으로 만들어 막대한 힘을 뽑아내는 무리가 있었다. 그 무리는 붉은 수정으로 시조의 흡혈귀를 깨우고, 동시에 영지민 수십을 흡혈귀로 만들어 테러를 일으키게 했지. 러셀이 없었다면 영지를 몇 개는 잡아먹고 흡혈귀들만이 살아가는 왕국이 태어날 수도 있었을 거다.”

칼리아는 자신을 주목하는 라하르트와 레이라의 시선을 받으며 말을 잇다가 장난스럽게 러셀의 왼손을 쥐었다.

“그때 나도 그 뱀파이어와 맞서 싸우다가 죽을 뻔 했지만, 러셀 덕분에 그 고대의 존재를 함께 물리치고 죽일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분명 큰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물론 나도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고.”

칼리아의 붉은 눈이 레이라를 향하며 빙긋 휘어졌다.

“이후 러셀을 주인과 같이 따르고 있으니 부인께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그러시군요.”

칼리아의 당당한 대답에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쓰고 말았다. 하지만 자리한 누구도 칼리아의 말투를 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검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칼리아는 중부의 전형적인 미인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었고 몸가짐 또한 고풍스러웠던 까닭이었다. 레이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귀족인가요?”

“예전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아니다. 새로 태어난 지금은 러셀의 종복이나 마찬가지이니.”

약간 어색한 침묵 후, 라하르트가 러셀을 보며 말했다.

“이제 다시 나갈 생각이겠지?”

“예.”

“어디로 갈 생각이냐?”

“딱히 어디로 간다기보다는, 만나고 싶은 놈들이 있어서요. 그놈들이 어디 있는지 좀 알아보고 단서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겁니다.”

“만나고 싶은 놈들이라면?”

“아까 칼리아가 말했던 무리들입니다. 최소한 세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놈들입니다. 이상하게 제 여정길에 계속 등장해서 심심하지 않게 해주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재밌게 해줄 생각입니다.”

“······그러냐.”

러셀을 바라보던 라하르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알겠다. 네 결정이 그렇다면 내가 할 말은 딱히 없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러셀.”

성을 나서는 러셀을 이루실이 불러 세웠다. 러셀이 그녀를 돌아보자 이루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짓했다.

“마구간은 이쪽이야. 저번에 증축해서 자리를 옮겼어. 따라와.”

이루실이 앞장서서 러셀과 칼리아, 아엘라시스를 이끈 곳에는 커다란 마구간이 있었다. 건강하게 살이 오른 전투마들이 울타리 안쪽에서 투레질을 하며 들어서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통에 여물을 채우던 마구간지기가 이루실과 러셀을 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이마가 훤히 드러난 중년의 남자는 앞치마에 끼고 있던 장갑을 찔러넣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 아가씨! 도련님! 여기는 무슨 일로······.”

“데번 아저씨. 며칠 전에 들어온 말들 있죠? 꺼내주세요.”

“예? 아, 예. 그리 합지요.”

곧 마구간지기 데번이 러셀과 일행의 말을 끌고 나왔다. 쉬는 동안 관리가 좋았는지 갈기와 피부에 윤이 났다.

“수고했어요.”

“아, 아닙니다.”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낮에는 잠깐이나마 따뜻한 햇빛이 지상을 내리쬐었다.

성을 빠져나와 다리를 건너자 사람들이 내뿜는 왁자지껄한 소음과 활기가 확 와닿았다.

“가자.”

“어딜?”

“시장으로. 갈 땐 가더라도 물자는 제대로 챙겨놓고 가야지.”

러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루실의 태도가 이제까지와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무서운데.”

“뭐?”

“아니야.”

시장은 크고 복잡했다. 영지의 모든 도로가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각자 볼일을 위해 걷거나 뛰고 있었다.

서로가 어깨를 쳐놓고서는 자존심 탓에 이마를 부딪치며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용병 무리가 있었고, 그런 용병 무리를 보며 구경하는 상인들이나 어린 아이들이 있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커다란 가림막을 세운 상인들은 긴 장대에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높이 들어올리고는 목청을 높이며 상품을 판매했다.

그들의 가판대에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혹은 호위를 받으며 지방에서 가져온 말린 과일이나 향신료가 늘어져 있었다.

그들처럼 깃발을 세우지 못한 이들은 보다 영세하지 못한 상인들이었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듯한 공예품을 좌르륵 늘어놓고는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며 조는 사람이나 주판을 튕기며 뭔가를 계속해서 계산하는 사람도 있었다.

영지의 치안을 관리하는 경비병들이 사람들을 가르며 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까 본 용병들을 체포하러 간 것이거나, 아니면 다른 구역에서 사건이 일어난 것일 터였다.

러셀은 그 모습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커다란 그의 키와 덩치 탓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도 눈에 확 뜨이는 그는 곧 시선을 돌렸다.

“대장간으로 가자. 누나가 아는 곳 있어?”

“성내에 정기적으로 납품을 하는 곳이라면. 그곳은 왜?”

“아엘라의 갑옷을 새로 맞춰야 할 것 같아서. 낡았어. 작아지기도 했고.”

그렇지 않아도 아엘라시스는 부쩍 키가 자라고 몸이 성숙해진 덕분에 입고 있는 옷이 안 맞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들은 광장시장을 벗어나 동문 쪽으로 향했다. 그 길에 쭉 펼쳐져 있는 것이 장인 골목이었다. 갑옷과 투구, 각종 날붙이들이 좌판에 늘어서 있거나 완전한 한 세트를 이룬 채 전시되어 있었다.

골목에는 날붙이에 목숨을 거는 용병들 또한 많았는데, 그들은 제각기 날카로운 눈으로 칼을 들어 살피거나 자신이 들고 있던 무기와 비교해가며 흥정을 해댔다.

러셀은 오랜만에 찾은 대장간과 장인 골목을 보며 회상에 잠겼다.

입고 있는 코트와 나힐니르, 마지막 서리를 얻고 나서는 갑옷의 필요성이나 무기의 수리를 신경 쓰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각자 쇠를 땡깡거리는 장인들의 일정한 박자와 소음이 골목 사이사이에서 아스라하게 퍼지는 가운데, 러셀의 눈에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검은 로브를 푹 뒤집어 쓴 자는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러셀의 눈이 그에게 닿은 이유는 별 것 없었다. 뒤집어 쓴 후드의 옆으로 툭 튀어나온 귀가 유달리 뾰족했기 때문이었다.

러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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