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자하드 영지
“걱정마라, 떠난 건 아니니.”
“예?”
이루실이 의아한 표정과 목소리로 레이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레이라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니, 안색이······.”
“네가 성에 돌아온 지 벌써 하루가 꼬박 지났다. 네 아빠랑 나, 그리고 그 녀석이 번갈아 가면서 널 간호한 참이고. 네가 일어난다는 걸 어떻게 안 건지 날 부르고는 일행들에게 가더구나.”
“아······.”
이루실은 자신이 거의 나흘 만에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자각하고 나니 무서운 허기가 밀려왔다.
꼬르륵.
배에서 울리는 강렬한 소리에 이루실의 안색이 붉어졌다. 그런 딸을 보던 레이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식사할 수 있게 조치하마. 나흘 간 누워만 있었으니 죽 같은 걸 먹어야 속이 좀 편할 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후에 말하자꾸나.”
“······예.”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루실의 뺨을 쓸었다.
“잘 돌아왔다.”
딸의 뺨을 한차례 쓰다듬은 레이라는 곧 이루실의 방을 나갔다.
이루실은 레이라가 떠난 방을 물끄러미 둘러보았다. 석달 만에 돌아온 자신의 넓은 방은 러셀을 찾으러 떠나기 전과 똑같았다.
푹신한 침대와 부드러운 이불, 바닥에는 붉은색과 노란색이 어우러진 융단이 깔려 있고 벽에는 커다란 거울과 하얀 만년설이 쌓인 산맥이 그려진 그림이 걸려있었다.
사실 방대한 영지와 도시를 가지고 있는 자하드 가문의 장녀가 머무르는 방이라고 하기에는 검소한 방이었지만, 가주 라하르트부터 사치를 지양하는 성격이기에 자연스럽게 이루실 또한 그런 가풍을 따르고 있었다.
그녀 자신부터가 보석보다는 날카롭게 날이 잘 갈린 검과 날붙이를 더 마음에 들어하기도 했고.
방안은 훈훈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니 한쪽에 마석을 원료로 타오르는 간이 화로가 있었다.
그 옆에는 얼굴과 손을 씻을 물이 담긴 테이블이 근처에 놓여있었다.
손과 얼굴을 씻고 수건으로 닦아낸 이루실은 조용히 꿈속의 내용을 반추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일도 있었고, 이런 일이 있었나 싶은 일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기억의 공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던 그녀에게 러셀과의 일은 꽤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어릴 적 보석 같이 예쁘다고만 생각했던 러셀의 자안이 실제로는 마안처럼 사람의 정신과 기억을 흐트러트리고 지배했다는 것.
똑똑.
-아가씨. 식사를 대령했습니다. 들어가도 괜찮을지요?
“들어와.”
이루실은 죽이 담긴 그릇이 놓인 카트를 놓고 사라지는 하녀를 바라보다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날이 저문 하늘은 짙은 남색이었다. 하늘에는 옅은 은하수와 흩뿌려진 모래 가루 같은 별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자하드 가문이 기거하는 저택과 성, 그리고 넓게 펼쳐진 영지가 보였다.
***
“위치 추적 주문이 걸려있더구나. 어떻게 안 것이냐?”
“그렇게 쉽게 물러나면서 순순히 이런 걸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칼리아가 건네는 증명패를 받으며 러셀이 말했다. 오디스의 간부 쯤으로 추정되는 길라드가 준 그를 증명하는 신분패. 러셀은 이미 그가 필요할 때 쓰라며 준 이것이 사실은 자신의 위치를 특정하는데 쓰이는 매개체이자 위치 추적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래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증명패의 안쪽에 새겨져 있는 복잡한 마력 회로와 술식은 주인이 직접 시동어나 피를 맺히는 등의 본인 인식을 하지 않으면 작동되지 않는 구조였다.
어떤 조직이길래 간부들의 신분 증명패에 이런 위치 추적 주문이 새겨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길라드가 쉽게 러셀에게 넘겨준 걸로 봐서는 위치 추적 말고도 여러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것은 유추가 가능했다.
“그 밖에도 내가 모르는 주문들이 복잡하게 엮여있더구나. 뭔지는 몰라도 지니고 있어서 좋을 게 아니라는 건 알겠다.”
“걱정마.”
칼리아에게 건네받은 증명패를 바라보던 러셀의 자안이 반짝였다. 동시에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실처럼 가느다란 마력이 증명패 안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작동을 시켜도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는 없을 테니.”
섬세하게 뻗어나간 마력의 실이 안쪽에 새겨져 있는 회로를 따라 회전하다가 살짝살짝 그 구조와 문양을 고쳤다. 이리 작은 사각형의 금속패에 새겨진 술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법진과 같은 바, 복잡하게 얽힌 회로 하나만 틀어져도 제대로 된 마법은 구현되기 어려웠다.
러셀은 그 구조를 깨달은 즉시 위화감이 없는 선에서 회로의 방향을 틀고, 마력의 집적과 순환을 용이하게 해주는 마법적 기호의 문양의 순서나 위치를 바꿔버렸다.
가만히 러셀이 하는 양을 바라보던 칼리아가 감탄했다.
“마력사 운용이 빠르구나. 보통 마법사들은 그렇게 뽑아내는 것도, 다루는 것도 힘들어하는데······. 아, 러셀. 거기서 잠깐 멈춰줄 수 있겠느냐?”
“왜?”
“네가 하는 것을 보니 재밌는 것이 떠올라서 말이다.”
칼리아의 작고 흰 손이 러셀의 커다란 손을 덮었다. 사실 덮었다기보다는 얹어진 것에 가까웠다. 칼리아는 그렇게 러셀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위아래로 포개고는 낮은 주문을 외웠다.
주문은 그리 길지 않았고, 주문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목소리에 따라 요동치던 마력은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듯 러셀이 쥐고 있던 증명패 속으로 스며 들어갔다.
“뭘 한 거지?”
러셀의 물음에 칼리아는 손을 떼지 않은 자세를 고수하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상대방이 네 위치를 알려고 시도할 때 역으로 그쪽의 위치를 표시할 수 있게 했다. 신호가 오는 즉시 그 신호를 타고 역추적을 하는 것이지. 반대쪽에 나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가 있지 않는 이상 오히려 자신들의 위치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채긴 어려울 것이다.”
태연한 듯 말하지만 사실은 무척이나 정교하면서도 기술적인 난도가 높은 마법이었다. 자신이 건 마법이 아닌 타인이 걸어놓은 마법에 간섭해서 그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버리는 마법이라니.
“대단한데. 고맙다.”
러셀이 피식 웃으며 칼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칼리아가 눈을 깜빡이며 그런 러셀을 바라보았다.
“······뭐하는 것이냐?”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건데. 왜, 싫어?”
“아니, 싫다기보다는. 으으으음······.”
부정하던 칼리아는 침음성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아예 제대로 자리를 잡고는 러셀의 손바닥에 자신의 머리를 부볐다. 나른한 목소리가 빨간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뭔가, 뭔가 이상한 기분이구나. 그 누구도 나한테 이런 짓을 한 사람은 없었는데······. 이상해. 아주 이상해.”
이상하다고 되뇌이면서도 러셀의 손을 뿌리칠 생각은 안 하는 칼리아. 그녀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러셀은 증명패를 품에 넣었다.
“일단 방에 있어. 내 가족들이랑 만나고 올테니”
“나도 같이 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어차피 바로 갈 거야.”
“그렇다면야. 네 뜻대로 하겠다.”
러셀은 칼리아가 머무르는 접객용 방의 문을 닫고 나왔다. 복도에 서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십 년 동안 다녔던 길이었다. 눈을 감고도 원하는 곳에 이를 수 있었다.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헷갈릴지도 모르는 많은 모퉁이와 복도를 지난 러셀이 도착한 곳은 가주의 집무실이었다.
이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물론 그 감각을 일으킨 것은 한 사람이다.
러셀은 노크하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양쪽 벽면에 자리한 커다란 책장이다. 책장의 사이에는 간단한 다과가 놓여있는 낮은 탁자와 상석의 1인용 의자, 좌우의 기다란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서류와 이름 모를 조각상이 올려진 책상, 하얀 대설산과 영지의 북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발코니가 드리워져 있었다.
책상에 기대어 서 있던 자하드 가문의 가주, 라하르트가 문을 열고 들어선 러셀을 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놀랍구나. 그걸 느낀 것이냐?”
“이미 예상하고 계셨으면서 놀리는 건 여전하시군요. 아버지.”
“예상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놀람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희석되기야 하겠다만. 앉아라.”
라하르트의 손짓에 러셀은 기다란 의자에 앉았다. 상석에 앉은 라하르트는 그런 아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잠시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토하듯 약한 한숨을 내쉰 라하르트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이거 원. 얼마나 강해진 거냐?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구나.”
“시간이 시간이잖습니까.”
러셀의 대답에 라하르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집을 나간 지 고작 1년이다. 아니, 1년도 되지 않지. 아직 두어달은 남았으니. 그런데 지금 내 감지로도 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이런 경험을 한 게 언젯적 일 같으냐?”
러셀을 보면서도 라하르트는 믿을 수가 없었다.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손에 잡힐 듯 보였던 아들의 마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1년이 짧지 않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신체를 단련하고 마력을 수련하는 전사와 술사에게는 화살처럼 빠른 시간이기도 했다.
오직 스스로의 경지를 높이기 위해 수십 년을 외딴 동굴이나 연구실에 틀어박히는 자들도 수두룩하지만, 그들 중 진정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얻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을 재능의 차이, 노력의 차이, 혹은 운의 차이라고 뭉뚱그려 설명할 수는 있겠으나 러셀의 경지는 그것만으로는 쉬이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때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정말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때 러셀의 눈이 라하르트를 향했다. 자색의 눈이 반짝이며 자신의 눈을 마주 보자 라하르트의 손이 저절로 움찔했다.
찰나에 불과하지만 허리춤에 검이 있었다면 손잡이를 잡았을 지도 몰랐다. 그가 파악하지 못하는 괴물이 눈앞에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러셀은 그의 아들이었지만 그 태생이 비밀과 신비에 감싸여 있었다. 육아를 하는 과정에서도 이루실이나 다른 자녀들 같은 어려움은 없었고, 그렇기에 위화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러셀이 말했다.
“전 오래 있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 돌아온 것도 누나를 데려다 놓기 위해 온 것이니까요.”
“다시 떠나겠다고?”
“아직 세상을 다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가보지 못한 것도 많고요. 만나지 못한 종족들도 많습니다.”
라하르트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가족과 영지를 등지겠다는 거냐?”
러셀은 자신을 가족이라 생각은 하냐는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제 아주 오랜 꿈입니다.”
러셀의 대답에 라하르트는 관자놀이를 짚은 채 고개를 저었다.
“······블라디카 가문과의 약혼은? 아직 헬라가 널 기다리고 있다.”
“그녀에게는 예전에 말 해놓았습니다. 약혼은 끝난 것으로 하겠다고.”
“······참.”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라하르트가 바깥을 가리켰다.
“알겠으니 나가거라.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남은 대화는 내일 아침 식사에서 하자꾸나.”
“예, 아버지.”
러셀이 집무실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집무실의 여백이 눈에 들어왔다. 러셀이 있을 때는 꽉 차 있었던 듯한 공간이 그가 사라지자마자 참았던 숨을 내뱉듯이 존재감을 과시한다.
***
끼이익.
기름칠을 한 지 오래된 듯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러셀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를 두려워하는 사용인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의 외모와 눈에 관한 뒷소문과 뒷담화는 성의 그늘에서, 영지의 골목에서 은밀하고도 넓게 퍼져나가며 그 덩치를 키워갔다.
그의 눈에 마주친 동물들이 돌이라도 된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죽었다느니,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느니 하는 말들.
짜증나는 것은, 그것들이 아주 거짓은 아니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