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북부에 부는 바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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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넓은 저택의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지르며 걸었다. 그녀의 뒤로는 하녀 서너 명이 노심초사하며 뒤따르고 있었다.
이곳 자하드의 성은 아주 크고 넓었으며, 그만큼 그 성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사용인들과 하인들도 많았다.
성을 철통경비하는 경비병들 또한 모퉁이에 서서 혹시 모를 침입자를 경계하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러나 복도를 가로지르는 여인 앞에서는 모두들 고개와 허리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그것은 그만큼 이 여인이 성안에서 존중과 경외를 사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름다운 얼굴의 여인은 검은 머리카락과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지닌 미인이었다. 눈가와 입가에 주름이 새겨져 있기는 했지만, 아무도 그런 그녀가 자식을 세 명이나 낳은 어머니라고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단련된 신체는 균형 있게 짜여 있고, 입고 있는 옷 또한 여느 중앙의 정계, 혹은 재계 귀족들과는 달리 실용성을 중시한 옷이었다. 마력 전도율이 높은 마수의 가죽을 이용해 방호력과 보온성을 중시한 의복은 그 자체로 갑옷과 비등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다.
북부는 사계절 내내 추운 날씨와 이상 마력 현상이 찾아오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나고 자란 강인한 사람들은 항상 만약의 때를 대비하는 자들이었다.
“어디에 있다고?”
“지금은 이루실 영애님의 방에······.”
“알았어.”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고, 걸음걸이 또한 화가 난 것처럼 힘이 실려 있었다.
여인은 금세 목적지에 도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의 눈에 들어선 것은 세 명이었다.
한 명은 자신의 남편이자 넓은 자하드 영지를 다스리고 한 가문의 수장인 라하르트,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의 딸, 이루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라하르트보다도 한 뼘 이상 키가 큰 남자. 러셀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그래.”
러셀이 먼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하자 레이라가 고개를 마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녀는 곧장 방안을 가로질러 침대로 향했다. 그곳에 그녀의 딸인 이루실이 누워있었다.
레이라가 떨리는 손을 뻗어 이루실의 얼굴을 메만졌다.
“······왜 이렇게 된 거니?”
창백해진 얼굴과 마른 입술. 숨소리는 고르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도 균일하다. 하지만 이미 사흘 넘게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무의식에 잠겨있는 상태가 정상인 것은 아니다.
침대에 누운 이루실의 오른편에서 러셀이 말했다.
“정체불명의 적과 싸우는 도중 흑마력에 침식 당했습니다.”
라하르트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정체불명의 적? 그리고 흑마력이라니?”
“흑마력을 다루는 술사였습니다. 마법을 곧잘 다루고 공간을 뛰는 어넘는 마법을 쓰더군요.”
라하르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종류는? 악마와 계약을 한 것이냐, 아니면······.”
“생명을 죽일 때 터져 나오는 원념과 사기를 응축한 형태입니다.”
“원념이라. 그 숫자는? 짐작이 가더냐?”
러셀은 잠시 그때를 회상했다. 이루실의 심장을 찌르려던 흑마력의 기세를 억지로 비튼 다음 자신의 손과 팔로 경로를 틀었을 때를.
그때 흑마력 안에 내재되어 있던 원념의 숫자는 족히 백에 달했다. 그마저도 신성력에 의해 정화된 숫자였으니 본래는 더 많았다는 뜻.
이루실의 몸에 침투한 흑마력이 그의 전력은 아니었으니 검은 로브의 남자가 수백, 혹은 수천의 생명을 착취한 것은 확실했다.
“백에 약간 못 미쳤습니다.”
“백에 달하는 원념이라. 몸을 빼앗기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구나. 자칫하면 군령자가 될 수도 있었을 터.”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이라가 이루실의 손을 쥐었다.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건 잔재한 사념 때문인 건가.”
레이라는 금세 이루실이 깨어나지 못하는 원인을 파악했다. 흑마력은 모두 몰아냈지만 흑마력이 상처 입히고 지나간 신경과 골수가 정신을 깨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무의식속에 잠겨버린 정신이 육신을 가사상태로 만들고, 그리 되면 식물과도 같은 상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숨쉬는 것 말고는 움직일 수 없는.
“깨어나기 위해서는 저나 아버지의 마력 외에 어머니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누나는 알레드마 가문의 구현 능력을 이어받았으니까요.”
“알고 있다. 넌······.”
레이라의 눈이 러셀을 향했다. 10개월, 아니 그 이전부터 식사 자리나 공적인 자리 외에는 별달리 마주칠 일이 없었던 얼굴이다.
아비를 닮아 멋들어지게 생긴 외모이긴 했으나 저 눈동자. 지금은 빛을 뿌리지도, 섬뜩하게 빛나지도 않은 저 자색 눈 때문에 차마 오래 마주하지 못했던 얼굴.
거기에 어른들의 불편함을 먼저 알아채기라도 한듯한 말과 행동까지. 여러모로 소름끼치게 만들었던 꼬마가 어느새 훌쩍 자라 자신과 자신의 딸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모습에 레이라는 다시 한번 마음을 굳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뭐?”
“어머니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이 말하는 러셀을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하던 레이라가 고개를 돌렸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그리고 그런 아내와 아들을 지켜보던 라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이십 년 이상 같이 한 집에서 살았어도 이리 관계가 호전되지 않다니.
웅-
그녀가 이루실의 손을 쥐고 마력을 흘려 넣었다. 그러자 바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으음.”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작은 신음이 들리고, 이루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
세 마리의 마수가 고함에 퍼뜩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곧게 서 있는 하얀 나무들 틈새로 어린 소년이 달려왔다.
저번에 이어지는 장면에서보다 키가 커지고, 오밀조밀한 근육이 붙어 있었다. 이루실은 저도 모르게 지금의 러셀이 10살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16살일터.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의 기억을 떠오르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휘이이이잉.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거세지고 있다. 바람에 떠밀리는 건 오직 어린 자신뿐이다. 마수들은 물론 백화된 나무들조차 나뭇가지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깟 추위로는 날 거꾸러트릴 수 없다. 눈보라 속에서 홀로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지닌 이루실이 바닥을 박차고 움직였다.
깨갱!
가장 먼저 일격을 당한 것은 비늘 늑대였다. 달려오는 소년 러셀에게 정신이 팔려 뒤에서 접근하는 이루실의 칼날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오른쪽 뒷다리가 베인 늑대가 남은 세 발로 껑충거리며 물러났다. 공간이 생겼고 어린 이루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어린 이루실의 몸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뻗은 디딤발이 지반을 깊게 파고 들어갔다. 지면에 서려 있던 빙결의 마력들이 그 발구름에서 일어난 충격파에 밀려났다.
쏘아진 화살보다 더 빠르게 날아간 이루실의 검이 비늘 늑대의 미간을 꿰뚫었다. 몸을 둔하게 만드는 눈보라와 시시각각 호흡기를 얼리려 드는 혹한의 마력 속에서 일궈낸 처치.
끄어어어엉!
그때 수정 곰의 앞발이 비늘 늑대의 미간을 꿰뚫은 채 서 있는 이루실을 향해 내리쳐졌다. 피할 자리가 마땅치 않음을 깨달은 그녀가 왼팔의 방패를 위로 치켜들었고, 충격이 작렬했다.
“꺄윽!”
한 방에 방패가 움푹 패이며 일그러지고, 방패를 쥐고 있던 왼손과 팔목 뼈가 부러졌다. 뼈가 부러진 통증에 이를 악물 새도 없이 이번에는 백사가 커다란 주둥이를 한껏 벌리고 어린 이루실을 덮쳐왔다.
날카로운 흰 종유석과 석순이 빼곡히 자란 동굴이 어둠과 함께 밀려들어왔다. 죽음이 코앞에 닥쳐왔음에도 어린 이루실은 겁먹지 않았다.
텁!
백사의 주둥이가 간발의 차로 어린 이루실의 코앞에서 닫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뒤로 흩날렸다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눈빛을 띄고 있던 백사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빨려들어갔다.
카아아악!
그 정체는 맨손으로 백사의 꼬리를 붙잡은 러셀이었다. 자신보다 네 배는 큰 괴물 뱀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은 그가 팔에 힘을 주었다.
우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백사의 뼈와 근육, 신경이 한꺼번에 부러지고 찢어졌다.
카아아아아아!
비명이 메아리를 치다가 곧장 그 방향을 바꿔 러셀을 향했다. 백화된 나무가 질주하는 백사의 머리와 몸통에 부서지며 잔해가 흩날리고.
괴물뱀은 어느새 먹잇감을 잡으려는 특유의 움직임으로 러셀을 가운데에 둔 똬리를 틀었다. 콱, 히고 일순 조여오는 하얀 비늘의 장벽.
뻐억!
그러나 둘둘 말려진 뱀의 똬리의 한쪽이 폭발하듯 터져나가고, 그 속에서 정권을 내지른 러셀의 모습이 드러났다. 몸통의 중간이 사라진 백사가 입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그때.
백사의 돌진에 튕겨났던 수정곰이 다시 자세를 잡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이루실을 향해 달려왔다. 눈에 어린 광망은 인간을 잡아먹고 자신의 힘을 키우려는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사실 북부에서 태어나거나 변질되는 마수, 괴물들이 다 이런 식이다. 지성체를 잡아먹고 자신의 격을 키우려는 것들.
놈들은 본능적으로 인간을 잡아먹으면 힘과 함께 지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렇기에 인간과 북부의 마수들은 양립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달려오는 수정곰을 향해 어린 자신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10년 후의 자신과 비교하면 아직 여리고, 굳은 살도 많지 않으며 단련되지 않은 손이었다.
그럼에도 남동생, 아니 러셀 앞에서 겁에 질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치기에 불과할지라도 누나로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커다란 앞발을 높이 치켜드는 수정곰 보다도 그 뒤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러셀에게 시선이 가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여섯 살 무렵 처음 자신의 품에 안아들어보인 어린 아기를 마주쳤을 때부터 그녀의 마음은 항상 러셀을 향해 있었다.
꼬물거리는 작은 손과 통통한 볼살도 좋았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역시 그 눈이다.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보석 같은 눈동자.
가만히 바라보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마력을 지닌. 사용인들과 하녀들은 은연중에 러셀의 외모와 눈동자를 두려워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러셀이 얼마나 자신의 눈을 싫어하는 동시에 통제하려 노력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가족들을 생각하는지 말이다.
콰앙!
수정곰의 앞발이 애꿎은 바닥을 파헤쳤다. 그 자리에 어린 이루실의 시체는 없었다.
“혼자 낙오 되었으면 신호탄을 쐈어야지. 찾는데 한참 걸렸잖아.”
“네가 와줬잖아. 그럼 됐어.”
“되긴 뭐가······ 말을 말자.”
한숨을 내쉰 어린 러셀은 어린 이루실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부러진 왼손과 팔에 닿았다.
“왼팔은? 괜찮아?”
“참을 만······ 윽.”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이루실이 고통어린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웅크렸다. 차디찬 눈보라는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었고, 바닥에는 그런 눈이 쌓이고 있었다.
러셀의 머리와 어깨에도 하얀 눈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러셀은 그런 눈을 쉽게 털어내 버리더니 곧바로 입고 있던 망토를 풀어 어린 이루실 위에 덮었다.
“여기 있어.”
그리고 러셀은 바로 몸을 돌려 바닥을 박찼다. 어느새 둘을 찾아낸 수정 곰이 다시금 달려오고 있었다.
어린 이루실은 망토를 여민 채 등을 보이며 수정곰을 향해 마주 달려가는 러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점차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추위와 싸우며 몸을 움직여 체온이 낮아지고 있었고, 체온을 유지해주던 마력 또한 기습을 위해 쓰였다.
아릿해지는 눈을 한껏 치뜨며 이루실은 남동생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수정곰이 가까워진 순간 살짝 자세를 낮추더니 양 주먹이 휘둘러졌다. 벼락같은 일격이 각각 수정곰의 턱과 목을 가격했다. 그러나 마력으로 폭주한 수정곰은 그 일격을 그대로 맞으며 계속 돌진했다.
이어지는 수정곰의 난폭한 공격들 속에서 러셀은 마치 버드나무 가지로 된 것처럼 움직였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을 종횡무진 나다니면서 발톱 하나도 스치지 않는 그의 움직임은 어린 이루실의 눈에는 춤사위 같았다.
이윽고 한껏 팔을 휘두르다가 헉헉 거리는 수정곰을 향해 러셀의 주먹이 다시 한번 휘둘러졌다.
쿵, 하고 낮으며 둔중한 울림이 흘렀다. 러셀은 주먹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서 있었고, 그것은 두 발로 일어서 있던 수정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곧 수정곰의 등짝이 퍽-하고 터지면서 가죽과 하얀 털, 붉고 검은 피를 흩뿌렸다. 이루실은 그것이 자신의 마력을 주먹에 담았다가 상대의 몸속에서 터트린 기술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어린 이루실은 앞으로 몇 년은 후에야 익힐 기술을 10살의 러셀은 이미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더······ 강해지고 싶다.’
그래서 그의 곁에 나란히 서고 싶다.
어린 이루실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그런 욕망이 싹 트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엄마?”
“이루실!”
이루실은 익숙한 천장과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러셀은요?”
일어나자마자 러셀부터 찾는 딸의 모습에 레이라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너 일어나는 거 보고는 나가더구나. 어째 어릴 때나 지금이나 속을 알 수 없는 건 매한가지-”
“어디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