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56화 (157/225)

156화 북부에 부는 바람 (4)

***

후웅!

러셀의 나힐니르가 파공성을 내며 반월의 궤적을 그렸다. 깔끔한 일격에 프리트의 머리가 한순간에 분리되었고, 잘려 나간 목의 단면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털썩, 하고 시체가 흙바닥에 모로 누우며 쓰러졌다. 목에서 쏟아지는 피 때문에 흙과 모래 알갱이가 검게 물들었다. 나힐니르를 획 하고 휘둘러 피를 털어낸 러셀이 코트 속으로 갈무리하려던 그때였다.

가장 먼저 이상을 알아챈 것은 러셀의 초인적인 감각권이었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마력에 대한 감응력과 조작력을 꾸준히 높여온 러셀에게 있어서 자신을 중심으로 두고 전개한 감각권은 방대하고 또 세밀하다.

그런 감각권에 터무니없이 강대한 기척이 잡히기 시작했다. 잠깐이지만 유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강렬한 기세.

빠른 속도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기척의 착륙지점이 어디인지 깨달은 러셀이 뒤로 물러섰다. 그가 서 있던 바닥이 러셀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퍽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흙과 돌멩이를 튀겼다.

그리고 러셀이 몸을 뒤로 피함과 거의 같은 순간에 검은 형체가 그가 있던 자리에 내려찍혔다.

꽈아아앙-!

굉음과 폭발. 상당한 무게를 암시하듯 일어난 소리가 폭력으로 다가올 만큼 굉음을 터트리고, 엄청난 충격량이 일어났다. 검은 형체는 그 굉음과 충격량의 한가운데서도 멀쩡한 듯했다.

멀쩡하지 못한 것은 그 검은 형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었다. 대기가 웅웅-떨리면서 진동하고 맨땅은 통째로 갈아엎어지며 커다란 흙의 파도를 일으켰다.

콰아아아아!

원형으로 퍼지는 황토색의 파도는 이미 그 자체로 마력이 담긴 공격이나 다름없었고 그 기세를 몰아 멀찍이 떨어진 러셀에게까지 몰아닥쳤다.

러셀의 키를 훌쩍 넘어 덮쳐오는 흙의 파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금방이라도 파도에 휩쓸려 파묻힐 것 같은 상황 앞에서 러셀은 오른발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쏴아아아아···!

러셀의 오른발을 기점으로 퍼져나간 마력이 빙결의 속성력으로 바뀌더니 지면을 얼렸다. 당장이라도 러셀을 덮칠 듯했던 흙의 파도가 빠른 속도로 얼어붙더니 그대로 고정되었다.

곧 얼어붙은 토사가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자 저 멀리서 이 참사를 일으킨 범인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이거이거, 아래 애들이 실례를 한 모양인데.”

적당한 구름과 적당한 햇빛이 번갈아가면서 지상에 자연적 규모의 그림자를 만들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시점.

추운 날씨임에도 별다른 방한복을 입지 않고, 오히려 가벼운 옷차림에 무기 하나 들고 있지 않은 거한이 목을 까딱이면서 걸어나왔다.

연한 푸른색의 셔츠에 가죽 바지, 짧은 머리카락에 흉터가 가득한 근육질의 몸뚱아리. 승모근과 어깨를 돌리면서 오는 행색은 건달이나 다름없지만 남자의 전신에서 새어나오는 마력은 이제까지 러셀이 만났던 강자들 중 수위에 들 정도로 강력했다.

이루실나 칼리아보다는 확실히 윗줄.

걸어오던 남자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먼저 사과를 건네지. 미안해, 형씨.”

가만히 서 있던 러셀이 피식 웃었다.

“오디스인가?”

“음.”

대충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러셀의 앞에 섰다. 물론 바로 앞에 선 것은 아니고 5, 6미터 정도 되는 거리였다. 초인들에게는 체감상 10센티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

무겁게 내리찍는 강력한 압박이 남자에게서 느껴졌다. 사방을 짓누르는 마력이 남자를 중심으로 퍼져나오며 공간을 장악한다.

아직 채 내려앉지 못한 흙먼지가 남자의 시선과 숨결에 맞춰 요동치고 회전하며 느릭한 파문을 그렸다.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마나 흐름에 영향을 주는 기세.

이렇게 강력한 기세를 흩뿌리는 인간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기왕 비교를 하자면 루드비히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루드비히는 오래 전에 죽은 영과 육신이 마법으로 구현된 미궁 속에서 재현되어 있던 존재. 실제의 육체와 한없이 같다고는 하지만, 결국 환상 속에서 이뤄진 환영과 마찬가지였다.

강력한 마력을 가진 존재들, 이를 테면 용 이스메니오스나 뱀파이어 칼리아, 악마 로고스, 겔리오투스 같이 인외의 존재들 외에 이렇게 강한 마력을 가진 인간은 처음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칫, 파칫!

평소였다면 들리지 않았을 마력의 부딪침이 가시적으로 일어나며 허공에서 불씨를 튀겼다. 러셀과 남자가 은연중에 내뿜은 마력이 그 중간지점에서 만난 것이다.

그렇게 러셀의 마력과 부딪치며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가 3, 40여미터 바깥에 세워져 있는 마차를 보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안 봐도 그려지네. 마차를 타고 가던 도중 우리 애들한테 습격을 받은 모양이군?”

“그래. 3번 대라고 하던데.”

러셀이 프리드가 자신을 소개할 때 내뱉었던 말을 꺼내자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일 덜떨어지는 놈들이랑 만났구만. 하여튼간에 아무거나 주워먹지 말라니까. 언젠가 큰코 다친다고 누누이 말했건만. 혹시 다 죽였나? 아니, 다 죽였겠지. 나 같아도 다 죽였지. 그래도 한 놈은 살아 있으면 했는데······.”

남자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지면을 훑었다. 당연하지만 남자가 처음 땅을 박살내며 떨어진 자리는 러셀이 프리드의 목을 친 자리다. 작은 크레이터가 생길 정도의 충격 속에서 한낱 시체가 제 형태를 보존하고 있을 리는 만무. 프리드의 시체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길을 거슬러 가면 그쪽 부하들 시체가 있을 거다. 회수할 거면 그거라도 회수해가던가.”

“그런가? 친절하시군. 아, 내 정신 좀 보게. 아직 내 소개도 안 했지?”

너털웃음을 지은 거한이 허리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몸을 풀었다.

“길라드.”

“러셀.”

“러셀? 왠지 익숙한 이름이군. 언제 한 번 들어봤던 것 같아. 어디서 들었더라······. 어디서 들었나아······.”

말꼬리를 길게 잡아 늘어트리는 길라드의 눈동자가 홱 하고 치켜들더니 그대로 러셀을 시야에 담았다.

“그래. 요즘 중서부와 중북부에서 떠들썩한 이름이군. 뱀파이어와 오크, 오우거를 쳐죽이고 악마까지 처 잡았다는. 떠오르는 신성.”

씩, 하게 길라드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귀밑까지 찢어진다.

“이만한 놈을 그냥 보내기에는 몸이 너무 간지러운데. 잠깐만 놀아도 되나? 살아있는 단원도 없어 보이고 말이야. 응?”

말끝은 의문형으로 끝났으나 길라드의 몸은 이미 제자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순간이지만 러셀조차도 놓칠 정도의 고속 이동.

찰나와 찰나의 간격을 비집고 들어온 길라드의 오른 주먹이 러셀의 왼쪽 얼굴을 강타했다.

콰앙!

육체가 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뒤이어 찾아오고, 길라드의 눈이 둥근 호선을 그렸다.

“호.”

시야에 제대로 담지 못했음에도 반사적으로 움직인 러셀의 왼쪽 팔뚝은 길라드의 주먹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 위력을 완전히 경감시키진 못해 얼굴이 살짝 돌아가 있었다.

“소문이 영 거짓부렁은 아니었나 보군.”

“내가 워낙 뜬소문이 많긴 하지.”

길라드의 오른 주먹을 떨쳐낸 러셀이 오른 다리를 굽힌 다음 섬전처럼 치켜들었다. 공간을 미끄러트리는 듯 솟구친 러셀의 오른무릎이 길라드의 왼쪽 옆구리를 노렸다.

길라드가 왼손바닥을 펼쳐 그 슬격을 막아내자 곧바로 다리를 내린 다음 허리와 상체를 비튼 다음, 왼팔을 구부려 팔꿈치로 길라드의 안면을 가격했다.

빡-소리와 함께 목이 부러질 듯 젖혀진 길라드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바로 이어서 길라드의 멱살을 틀어잡으려던 러셀은 눈앞이 번쩍이는 섬광, 턱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뒤로 날아가면서 러셀은 무엇이 자신의 턱을 가격했는지 확인했다.

길라드가 허리를 뒤로 젖히다가 그대로 발끝을 위로 치켜들어 러셀의 턱을 걷어찬 것이었다.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유연성이었으나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두 남자가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의 마력이 전개되면서 마법과도 같은 현상을 일으켰다.

러셀이 오른손으로 땅바닥을 짚은 지점에서 냉기가 일어나며 반경 10미터의 지면을 통째로 얼리고, 얼어버린 지면 위를 푸른 번개가 달렸다.

“생긴 건 천상 전사 같은 자식이······!”

흉악한 미소와 웃음을 흘린 길라드가 왼주먹으로 바닥을 부수고 그 반동으로 공중으로 치솟았다.

자신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 반작용의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지면을 타고 미끄러진 번개를 피하는 움직임이었다.

허나 박살 난 얼음덩이의 평평한 면을 타고 번개가 반사각을 찾으며 지그재그로 길라드를 덮쳤다.

“재밌어! 으하하하하!”

그 푸른 번개 앞에서, 길라드는 그대로 주먹을 뒤로 당겼다가 쏘아냈다.

꽈앙!

푸른 벼락이 길라드의 마력이 서린 주먹에 부딪치자 허무하게 사그라졌다.

러셀의 공격을 상쇄한 길라드가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다시 그의 신형이 사라지고, 러셀의 양팔이 교차하며 하늘을 향했다.

“으하하하!”

러셀이 양팔을 교차하는 것과 길라드의 오른다리가 내려찍히는 것은 동시였다. 러셀이 딛고 서 있는 얼어붙은 바닥이 반구형으로 쩍-내려앉으면서 수백 개의 균열을 그렸다.

길라드의 표정이 이걸 막아? 라는 의미를 담아 휘둥그레진다. 속도는 길라드가 가장 자신이 있는 분야였다. 겉보기로만 보면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근육질로 가득 차 있어 둔해보이지만, 실상은 오디스에서 가장 빠른 스피드를 가지고 있는 전사였다.

하지만 러셀은 처음과 두 번의 가격 이후로 점점 그의 속도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양팔을 엑스 자로 교차한 상태로 길라드의 다리를 막고 있던 러셀이 중얼거렸다.

“내 차례다.”

지이이이잉······!

러셀의 두 눈에서 자청빛의 안광이 줄줄 흘러나왔다.

동시에 길라드는 자신이 내뿜고 있는 마력장이 출렁이면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러셀의 교차하고 있던 팔, 손이 그대로 꼬아지며 길라드의 다리를 붙잡았다. 길라드는 곧장 체내의 마력을 운용, 다리에 들러붙은 러셀을 떼어낼 작정으로 마력을 내뿜었으나.

어째서인지 체내에서 체외로 방사한 마력이 그대로 힘을 잃고 흐물거리며 대기의 마나에 녹아들어버렸다.

“······마력 간섭?”

그 현상을 제대로 곱씹어보기도 전에 러셀은 길라드의 다리를 붙잡은 그대로 지면에 내리 꽂아버렸다.

콰아앙!

두 번째로 크레이터가 생성되며 자욱한 흙먼지와 자잘한 얼음 알갱이가 파도처럼 일어났다가 스러졌다. 하지만 막상 길라드를 지면에 처박은 러셀은 텅 빈 손아귀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잽싸군.”

“그게 내 강점이지.”

시야를 차단하는 흙먼지가 한순간에 훅, 하고 퍼지면서 흩어지고. 모습을 드러낸 길라드의 양손에는 어느새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손잡이가 둥글게 되어 있어 손을 보호함과 동시에 일체형으로 쭉 뻗어져 있는 칼날.

장검이라기에는 짧고 단검이라기에는 길쭉한, 애매한 길이의 소검이었다.

“내가 팔람딧의 이빨을 꺼내들게 만들다니. 보기보다 제법이야. 이제까지 이걸 꺼내들게 한 놈 많지 않았어. 영광으로 알라고.”

“보기보다 입이 나불거리는 편이군. 아까부터 시끄럽다.”

“······!”

길라드의 미소가 한순간에 지워지고 눈가가 사납게 일그러진다. 의외로 자신도 알고 있던 버릇이었을까.

“아까부터 건방진 소리를 날리는 그 입을, 확 쥐어 뜯어주고 싶어지는데.”

“해 봐.”

러셀도 코트 속에서 나힐니르를 꺼내들었다. 이미 수 차례 피를 머금었어도 부족하다는 듯 묵색의 대검이 웅, 하고 검신을 떨었다.

그때 길라드의 발바닥 아래에서 검고 커다란 가시가 일렬로 솟아올랐다.

“큭! 뭐냐, 이건!”

검은 가시는 길라드에 대한 공격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형태를 일그러트리더니 다시 지면 아래로 사라졌다.

러셀은 곧장 저 주문의 마력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깨달았다.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칼리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는데, 입으로는 주문을 외우면서 한 손으로 땅바닥을 짚고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녀의 뒤로는 눈이 흐리멍덩해진 두 마리의 커다란 늑대와 안장에 엎어져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정체를 보아 살아남은 오디스의 단원들 중 하나로 보였고, 마법사였다.

“에이, 시발!”

뒤로 물러선 길라드는 사라진 검은 가시들이 지면을 갈아엎을 기세로 헤엄치며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여덟의 방위에서 제각기 다른 마력과 복잡한 회로를 그리면서 길라드를 중심으로 마법진을 이룬다.

마법진을 그리는 것과 동시에 공격으로 이어지는 일사불란한 움직임. 그를 향한 공격이 곧 마법진을 이루는 회로다.

“꺼져라!”

쿵!

허나 길라드가 오른발을 들었다가 내리찍는 것으로 마법진의 회로가 뒤틀리고 어긋났다.

그러자 그를 옭아매려던 마력의 움직임 또한 그에 반응하고 대처를 바꾼다.

길라드의 오른발에서 파동으로 뻗어나간 마력에 의해 마법진이 뒤틀리자마자 이루고 있던 회로를 모두 폐쇄, 새로운 마법을 그리며 보다 좁은 범위를 두고 솟구쳤다.

실패한 마법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파훼 되자마자 곧바로 다른 방향에서 길라드를 공격해갔다.

화르르르륵!

땅속에서 붉은 화염이 모든 걸 불사를 기세로 치솟았다.

여덟 개가 아니라 여섯 개의 방위를 두고 회전하며 갈아오는 불꽃의 기둥들.

시야가 하얀빛과 붉은 섬광으로 명멸하는, 평범한 자였다면 당장 시력을 잃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빛과 열기의 군무 속에서 길라드는 금방이라도 잿더미가 되어버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이윽고 회전하는 화염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길라드는 점차 한 점으로 수렴하는 불꽃의 회오리에 그대로 가려졌다.

“크아아아악!”

그때 화염의 벽을 박살내고 길라드가 뛰쳐나오며 바닥을 뒹굴었다. 잘 입고 있었던 셔츠와 바지가 검게 그슬리고 끄트머리가 타서 흩날리는 등, 정상적인 몰골은 아니었으나.

“시발! 더럽게 뜨겁네!”

불꽃을 정면으로 돌파한 것치고는 화상이나 별다른 외상을 입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열기에 꼬부라져 폭탄머리 비슷하게 되기는 했으나, 칼리아의 마법에 당한 것치로는 놀라울 정도로 멀쩡한 외양이다.

벌떡 일어선 길라드가 대검을 든 나힐니르와 무릎을 펴고 일어선 칼리아를 번갈아보더니 양손을 가슴의 중단쯤으로 들어올렸다.

“죽을 각오 좀 해야겠는데······.”

“기, 길라드님!”

“엉?”

길라드의 고개가 돌아가더니 자신을 부른 자를 찾아냈다. 그의 시선이 기울어졌다.

“타크만? 너 안 죽었었냐? 살아있었네?”

“그, 그렇습니다!”

“에이······ 다 죽은 줄 알고 날뛴 건데.”

길라드는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허리춤 뒤편에 쥐고 있던 소검을 꽂아 넣고는 양손을 들었다.

“지금 와서 그만하자니 염치가 없기는 한데, 그만할 수 있을까?”

러셀은 한량처럼 양손을 들고 짝다리를 짚고 선 길라드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태연하게 손을 들고는 있지만, 러셀과 칼리아가 공격할 경우 바로 대처할 수 있게 방대한 마력을 주변에 흘리고 있다.

러셀 또한 직접 주먹을 부딪쳐 본 입장에서 쉽지 않은 상대였다. 일단 러셀조차 따라잡기 힘든 속도를 가진 것과 칼리아의 불꽃으로도 태울 수 없는 내구력, 강력한 마력이 걸림돌이다.

만전의 사태를 기하고 붙는다면 또 모르겠으나 지금은 뒤편의 마차에 의식이 없는 이루실이 있다.

만에 하나 이루실을 직접 노리고 공세를 쏟아붓는다면 러셀도 불리한 싸움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다짜고짜 싸움을 걸어놓고는 목숨이 급박하니 그만두자라.”

저쪽에서 먼저 싸움을 그만하자는 제스처를 취했음에도 러셀은 방심하지 않았다.

바로 제안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이쪽이 싸움을 더 이어나가기 힘든 약점을 보일 수도 있다.

러셀이 강하게 나가자 길라드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아, 미안해. 미안하다고. 그나마 사람 구실 좀 하게 키워놓은 놈들이 다 죽어 나자빠지고, 그쪽은 소문으로 듣던 유명인이고. 몸이 근질근질한 걸 어떻게 참어? 어? 이건 못 참지. 그래도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니······.”

말을 잇던 길라드는 품속에서 금속패를 하나 꺼내 러셀에게 던졌다. 쐐액-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금속패를 러셀이 받아들었다.

금속패를 뒤집어 보니 둥근 고리에 칼과 방패가 교차되어 있는 문양, 그리고 길라드라는 이름이 양각되어 있었다.

“내 증명패다. 나중에 우리 힘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한 번쯤은 대가 없이 들어주지. 부탁이든 암살 의뢰든, 혹은 괴물 처치든. 들어줄 수 있는 한도 내라면. 이 정도면 납득해주겠어?”

러셀은 그 금속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코트 속에 넣었다. 합의의 표시였다.

러셀이 뒤를 돌아보자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타크만을 구속하고 있던 마법이 풀리고 그가 벌떡 일어섰다.

“허억······!

제 가슴팍을 만지작거리던 타크만은 두려운 눈길로 칼리아를 훔쳐보더니 다이어 울프 두 마리를 이끌고 길라드에게 다가갔다. 길라드는 곧장 가까이 온 타크만의 뒤통수를 후려치더니 윽박질렀다.

”어휴, 병신 같은 새꺄. 상대를 봐가면서 덤비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하냐?“

”죄, 죄송합니다.“

”넌 돌아가서 보자.“

그리 말한 길라드는 고개를 돌려 러셀을 바라보았다.

”어이 형씨. 꽤 세던데, 다음에는 이런 식으로 안 봐줄 거야. 알아서 몸 사리라고.“

러셀은 대꾸하지 않고 나힐니르를 코트에 집어넣었다. 혀를 찬 길라드는 그대로 다이어 울프 한 마리에 올라타더니 고삐를 쳤다. 두 마리의 커다란 다이어 울프가 그대로 지평선을 향해 달려갔다.

러셀은 그걸 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 옆으로 칼리아가 다가와 나란히 걸었다. 하늘을 보니 오후의 끝자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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