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침식의 결말 (3)
“도망치는 데는 도가 튼 놈이군.”
혀를 찬 러셀은 일으켰던 마력을 가라앉히고 식도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꾸욱 삼켰다. 연이은 전투를 치룬 후 기절하고, 기절에서 깨어난 직후 다시 싸운 탓에 몸이 엉망이었다.
거기에 그가 기절한 이유는 마안의 과도한 사용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눈과 눈 주위의 근육이 욱신거리고 시야가 흐릿해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러셀은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그 모든 걸 이겨내고 로브의 사내와 대치했다. 전투가 더 이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갑자기 로브의 사내는 도망쳐버렸다.
도망치기 직전 사내에게 닿은 일정한 규칙을 지닌 마력이 온 것으로 보아 부름이 있었던 것 같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짧은 상념을 마친 러셀은 뒤로 돌아 이루실에게 달려갔다. 아엘라시스와 칼리아가 이미 그녀의 옆에 앉아서 상세를 살피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누나는?”
이루실의 가슴과 머리에 손을 올려놓은 칼리아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몸속에 너무 많은 흑마력이 침투했다. 그녀의 마력과 흑마력이 싸우고 있어.”
러셀 또한 한쪽 무릎을 꿇고 이루실의 얼굴을 살폈다. 혈관이 검은색으로 변색 되어 흉하게 일어나 있었다. 한눈에 봐도 괜찮은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
아엘라시스가 울상이 되어 이루실의 왼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루실···.”
러셀은 무거운 눈으로 이루실을 내려다보다가 일행의 모습도 살펴보았다. 아엘라시스와 칼리아 또한 연이은 격전으로 만신창이였다. 모두 제대로 된 휴식과 치료가 필요했다.
“일단 일어나지. 마을로 돌아가야 해.”
그가 먼저 이루실을 조심스럽게 업고 일어났다. 칼리아와 아엘라시스 또한 무거운 몸을 이끌었다.
***
이른 새벽.
데이지는 마을의 입구에 서서 두 손을 모아 쥐고 있었다. 어제 아침부터 밤이 찾아오는 시간까지 숲 저편에서는 폭음이 끊이지 않았다. 거기에 이따금 씩 하늘을 번쩍이는 섬광까지 보이니, 마을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제대로 잠에 들지도 못했다.
“괜찮으실지······.”
“괜찮으실 거야. 그렇게 강한 사람들인데.”
그녀의 곁에 오빠인 데이브가 다가와 어깨를 짚었다. 그때 뒤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어, 어?”
“이런!”
데이브가 데이지를 챙겨 옆으로 몸을 돌린 순간 검은 색의 무언가가 그들을 지나쳐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멍한 얼굴을 한 남매 중 데이지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바, 방금 그거. 러셀 님이 타던 말인데.”
“말?”
데이브도 머지않아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주인인 러셀처럼 커다란 몸을 지닌 흑마. 이름이 크라이라고 했던가?
“왜 갑자기 도망친 거지?”
“도망친 게 아냐. 그럼 숲 안쪽으로 들어갈 리가 없지. 내 생각에는······.”
데이브가 말끝을 흐릴 때였디. 숲 안쪽에서 나무와 수풀이 흔들리더니 검은 음영과 함께 러셀 일행들이 나타났다. 데이브가 환한 얼굴이 되어 소리쳤다.
“러셀 님!”
“인사는 나중에.”
“예?”
그는 러셀의 굳은 표정에 멈칫했다. 러셀은 지체하지 않고 이루실은 안은 채 마을에 들어섰다. 데이브와 데이지 남매 또한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눈을 크게 떴다.
“가서 토드를 불러와 주시오. 환자가 있소.”
“제, 제가 갈게요!”
러셀의 말에 데이지가 바로 몸을 돌려 토드가 사는 집으로 달려갔다. 데이브가 말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잘 해결되신 게 아닙니까?”
“숲의 안쪽에 살던 이계종······ 아니, 괴물은 처치했소. 괴상하게 생긴 나무였고, 그게 짐승들을 마수로 만들고 있었지.”
“그럼 이분이 다친 게······?”
“그건 아니지만······. 설명하긴 복잡하오. 일단 치료가 먼저 선행되었으면 하네만.”
“아, 알겠습니다.”
토드는 이른 새벽에 깨어났지만 불만도 내비치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무슨, 무슨 일입니까?”
“이루실이 다쳤소. 한 번 봐주실 수 있겠소?”
“알겠습니다.”
그들은 마을의 중심에 있는 교회로 향했다. 이른 새벽, 동쪽에서는 푸른 물감이 번지는 것처럼 파란 빛깔이 천천히 그 자리를 넓히고 있다.
일찍부터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하다가 일행들을 보고 놀랐다. 양동이에 물을 뜨러 가는 중년의 여인, 지게에 나무를 지던 청년, 어제 못 다한 벽돌을 마저 쌓고 있는 장인등등.
시선들을 등에 진 그들은 교회에 들어선 뒤 문을 닫았다. 교회 안은 어두웠지만, 양쪽 벽면과 천장의 유리를 통해 푸른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토드는 잡다한 것들, 책이나 촛대, 종이 봉투를 뜯을 때 쓰는 작은 칼 같은 것이 올려져 있는 책상을 말끔히 밀어내 자리를 만든 다음 그곳에 이루실을 눕히게 했다.
러셀은 쿠헬라움토가 뿌리를 틀었던 숲의 중심부에서 전속력으로 달려 마을에 도달했다. 그리고 마을의 인근에 거의 다다르자 휘파람으로 크라이를 불러 더 빠르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이유는 이루실의 몸에 침투한 흑마력이 점점 세를 늘리고 힘이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언제 생명이 꺼져도 이상하지 않는 상태였다.
“이건, 흑마력이로군요. 원흉이 흑마법사였건 겁니까?”
“흑마법사 본인은 아니었지만, 연관되어 있는 건 맞는 것 같소.”
러셀은 칼리아와 아엘라시스로부터 검은 로브의 사내가 쿠헬라움토와 연관이 있었음을 들었다. 전후 사정을 예측해보면 아마 그 흑마법사가 이계의 균열을 통해 이계목異界木 쿠헬러움토를 들여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흑마법사라니······.”
토드와 데이브, 데이지는 놀란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일반적인 마법사도 드물다. 거기에 흑마법사는 흑마력이라는, 음의 성질을 띈 마나를 다루고 사역하는 존재였다.
음의 마나는 그늘과 오래된 물이 고인 곳, 혹은 차가운 협곡이나 햇빛이 닿지 않는 깊디 깊은 수림 속에서 자연 발생하는 마나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이 다루는 음의 마나는 그런 자연 발생적인 마나를 이용하지 않는다. 보다 더 쉬운 방법, 그러니까 지적 생명체를 고통에 몰아넣고 죽음에 이르게 할 때 분출되는 폭발적인 음의 마나와 마력을 사역한다. 그게 더 쉽고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륙에서 흑마법사의 존재는 만인의 적과 같았다. 생명을 착취해서 얻는 마력이라는 것 자체가 그걸 직접 행하는 술자, 술사의 비틀린 사고방식과 지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악한 종자가······.”
표정을 찌푸렸던 토드는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흑마력에 뒤덮여 신음하는 이루실을 내려다보았다.
“일단은 이 마력을 몰아내는 것이 먼저겠군요.”
“되겠소?”
“최선을 다해보지요. 이래 보여도 성직자이니. 핸돈! 내 사제복 좀 부탁하네.”
교회에서 상주하며 청소와 관리를 도맡는 관리인이 급하게 토드의 사제복을 가지고 왔다. 사제복을 걸친 토드가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가 기도를 시작하자 손바닥 사이에서 연둣빛의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러셀은 의식적으로 마안을 발동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토드에게서 뿜어지는 연둣빛의 신성력이 이루실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화아악.
과연 흑마력과 상극인 성력의 힘은 강력했다. 이제는 피부가 검은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던 이루실의 안색이 차츰 밝아졌다. 얼굴에 떠올라 있던 검은 혈관이 피부 안쪽으로 사라지고, 흑마력의 기운이 목 아래로 사라져갔다. 하지만 호전될 것 같던 상황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쿨럭!”
이루실의 입에서 붉은 피가 울컥 튀어나왔다. 검은 피가 아니라 아니라 생명력이 가득 담긴 생혈이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러셀은 바로 이루실의 손목을 잡은 후 마력을 실처럼 가늘게 뽑아 밀어넣었다. 그는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러셀 님?”
“계속 신성력을 밀어넣으시오, 토드. 흑마력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소.”
이루실의 몸에 들어온 흑마력은 신성력에 밀려 주춤거리다가 도리어 똘똘 뭉쳐서는 그녀의 심장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대로 더 신성력을 밀어넣는다면 그만큼 흑마력이 이루실의 심장을 조이게 되고, 종국에는 심장을 터트릴 것이다.
흑마력 또한 본래의 주인이 아닌 타인의 몸에 기습적으로 침투해 온 만큼 이루실이 죽으면 자리를 잃고 흩어진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흑마력이 마치 자의를 가진 것처럼 이루실을 죽이려드는 모습에 러셀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마력을 주입했다.
“지금 흑마력이 이루실의 심장을 터트리려 하고 있소. 내가 먼저 마력을 불어넣어 심장을 감싼 다음 흑마력을 막을 테니, 토드 당신은 아까처럼 계속 신성력으로 흑마력을 정화시키시오.”
“아니, 그게······.”
말이 되나? 하고 토드가 생각했다.
“러셀 님, 당신의 마력이 뚫리면···.”
“그럴 일은 없소.”
단언하는 러셀의 말에 토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투실한 볼과 턱에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토드의 신호에 맞춰 러셀은 이루실의 심장 근처에 다다른 자신의 마력을 섬세하게 조정했다. 실처럼 가느다랗게 변한 그의 마력이 수십, 수백 개로 분화하며 심장을 감쌌다.
아직 정상적으로 돌아오지 않은 마력 회로가 피로와 고통을 호소했지만 참아 넘겼다. 잘못되면 그의 누나가 죽는다. 러셀은 절대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둥······!
러셀의 내면으로부터 발현된 심상이 영역이라는 형태로 주위에 덧씌워졌다. 그 이질적인 현상에 데이브와 데이지는 물론이고 칼리아와 아엘라시스도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기도를 통해 신과 일시적으로 맞닿아 있는 토드만이 그런 현상을 알아채지 못하고 신성력을 불어넣고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감은 러셀의 의식이 마력을 통해 이루실의 체내에서 눈을 떴다. 실제로 눈을 뜬 것은 아니지만 마력에 그의 심상을 담아 의지를 통해 주변의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마력을 통한 감응력과 통제력이 한 층 더 질이 높아졌음을 시사하는 현상이었지만 러셀은 그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바로 앞에서 우글거리고 있는 흑마력의 덩어리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흑마력 덩어리를 보면서 러셀이 떠올린 것은 아까 기절했을 때의 기억이었다. 무저갱과 같이 사방이 암흑으로 물든 공간에서, 지평선 너머 균열을 뚫고 들어오려던 거대한 그림자.
지금 그의 앞에 있는 흑마력은 그 그림자 덩어리와 비슷하게 넘실거리며 이루실의 혈관과 내장, 근육과 신경을 태우고 파괴하려 하고 있었다.
무조건적인 파괴를 통해 스스로의 덩치를 불리고 종국에는 이 작은 세계를 수중에 거두려는 의지가, 저 흑마력으로부터 느껴진다.
그럴 수는 없지. 러셀은 의지를 단단하고 날카롭게 세웠다. 곧 그의 인식 저편에서 연둣빛의 신성력이 파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흑마력은 자신을 정화하고 살라먹는 신성력에 저항하면서 이루실의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수십, 수백 개의 갈라진 촉수가 끝에 날을 세우며 달려든다.
러셀은 그 모든 공격을 하나하나 쳐냈다. 바깥에서의 러셀의 코와 입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마력 회로에서 불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이 사지를 휘돌다가 팔과 손을 통해 이루실의 체내로 스며 들어갔다.
그럼에도 흑마력의 저항은 거셌다. 러셀은 하나하나 촉수들을 쳐내다가, 이런 식으로는 이루실과 그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음?”
이변을 알아챈 것은 토드였다. 그는 흑마력의 기세가 점차 거세지다가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을 알아챘다. 모든 길이 틀어막히자 더욱 날뛰던 것이, 길이 하나 열리자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거기가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한 것인지 마치 기생체처럼 숙주를 파괴하려 들던 흑마력이 향한 곳은 바로 러셀이었다.
흑마력의 덩어리가 심장 부근에서 멀어지고 러셀을 통해 넘어가자 곧바로 이루실의 숨소리가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제 불길은 러셀에게 옮겨갔다.
“러셀?”
조심스럽게 사태를 바라보던 칼리아가 러셀을 불렀다.
러셀은 흑마력을 오른손으로 받아들인 채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질척하고 끈적거리는, 오른손의 신경과 근육을 모두 잡아먹고 자신의 지배하에 만들려는 흑마력의 악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 또한 러셀이 의도한 바였을 뿐이었다. 내내 감고 있던 러셀이 눈을 떴다. 자청색의 눈동자가 선명한 안광을 담고 오른손, 그리고 그 안에 깃든 흑마력을 응시했다.
화르륵-하고 그의 손에서 자청빛의 불길이 타오르고.
끼아아아악-
귀신의 귀곡성과 같은 비명 소리가 러셀의 영역 안에서 메아리쳤다. 음파가 빠져나가지 않았기에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러셀 뿐이었다.
만약 이 소리가 새어 나갔다면 레이스나 만드라고라의 비명을 들은 것처럼 데이브와 데이지는 즉사했을 것이었다.
마지막 단말마를 끝으로 흑마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차츰 색깔을 되찾는 오른손을 바라보면서 러셀은 이 흑마력에 깃든 지독한 사념과 악의를 생각했다.
최소한 수천 명 이상을 고통에 밀어넣고 생명을 착취해야만 이런 지독한 마력이 탄생할 것이다.
중요한 건 그 로브를 쓴 놈은 살려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러셀은 주먹을 꾸욱 쥐었다.
완전히 동이 튼 바깥으로 노란빛의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며 교회를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