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침식의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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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여파는 먼 거리에서도 관측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러셀과 그 일행이 광대한 숲의 안쪽, 쿠헬라움토의 침식 공간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그 공간은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방대한 지름의 면적 위로 세계와 유리되는 경계가 처져 있었고, 표면은 일렁이는 검은색 파동을 그렸다. 중심에 선 육십 미터가 넘는 길이의 기둥 같은 것이 공간을 검게 물들이면서 잠식해나가는 주체였다.
그때 검은 공간 중심 속에서 눈부신 섬광이 한 차례 번쩍, 하고 빛났다. 그러더니 기둥이 무너지고 이어서 세계와 유리되어 있던 반구형 결계 또한 부서지기 시작했다.
몇 킬로미터가 넘는 지름의 반구형 결계인 동시에 공간을 잠식하고 먹어 치워가던 이계가 힘을 잃고 사그라지고 있었다. 곧 소리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
폭풍 같은 충격파가 일어나며 숲을 들썩이게 했다. 단단히 지반에 뿌리를 뻗어 지탱한 나무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고, 그보다 못한 작은 나무들은 통째로 뽑혀 나가며 충격파에 휘날렸다.
산새들이 귀청이 찢어지라 울면서 하늘로 쏟아졌고, 다리를 가진 동물들은 충격파와 지진을 피해 달음박질쳤다.
한 차례의 대이동 후, 섬광과 바람을 동반한 충격파가 사그라들었다. 수십 미터 위까지 치솟은 흙먼지가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잠시 후 드러난 것은 거대한 크레이터였다. 넓고 완만한 크레이터에는 나무나 바위, 계곡과 골짜기가 모두 산산이 조각나고 파헤쳐져 엉망이었다.
그리고 크레이터에 비하면 작게 꼬물거리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
“어.”
고개를 갸웃한 아엘라시스가 고개를 들었다.
“공간이··· 무너지고 있는데?”
칼리아 또한 주변을 돌아보며 끄덕였다.
“그렇구나. 중심축이 방금 무너졌어. 아무래도 러셀이 이 이상한 공간의 주인을 쓰러뜨린 것 같구나.”
마법사인 칼리아는 한눈에 작금의 상황을 알아차렸다. 무너지는 공간을 따라 일정한 패턴을 그리던 마력들이 힘을 잃고, 그에 따라 관측할 수 없었던 공간의 윤곽을 읽을 수 있었다.
드드드드드드···.
지면을 흔드는 지진이 일어나며 모든 것이 떨렸다. 지평선 저편에서 하얀빛이 일면서 경계가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이루실이 그걸 보며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거야?”
“이리 모여!”
이루실의 물음에 아엘라시스가 양손을 위로 올렸다. 하얗고 작은 손으로부터 투명한 보호막이 생성되며 세 사람을 반구형으로 감쌌다. 거기에 칼리아가 손을 휘두르자 그로부터 뻗어나간 빛이 구체형의 입체 마법진을 형성, 아엘라시스가 만든 반구형의 위로 또 하나의 보호막을 겹쳐 올렸다.
오오오오오오오!
기이한 소리와 함께 넓은 범위에 걸쳐서 침식을 이뤄가던 공간이 무너지고 깨져나가면서 무수한 파편이 흩날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야가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모두를 덮쳤다.
“윽.”
새하얀 섬광에 눈을 감았다가 뜬 세 사람 앞에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들은 거대한 크레이터에 있었고, 크레이터 바깥으로 침엽수들이 서 있었다.
하늘은 구름이 걷혀나가 맑았다. 서쪽 저편으로 태양이 가라앉으며 붉은빛을 내고 있었고, 하늘은 그 붉은빛과 푸르름이 섞인 오묘한 색깔을 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궁···
이계의 침식이 물러가고, 그 자리를 본래의 세계가 다시 균열을 매웠다.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공간 자체가 우르릉거리며 우는 진동에 주변이 덜덜 떨다가 차츰 가라앉았다.
이제까지 그들을 보호하던 역장을 치운 칼리아가 크레이터를 훑었다.
“밖으로 나온 것 같구나. 어마어마한 여파였어.”
“러셀은 어디 있어?”
“저기, 저기 있는 것 같은데.”
이루실의 손가락 끝에 러셀이 누워 있었다. 그의 양옆에 나힐니르와 마지막 서리가 검신과 도끼날을 바닥에 박은 채 세워져 있었다. 세 사람은 곧장 달려가 누운 러셀을 내려다보았다.
“러셀! 일어나!”
“얘 왜 이러고 있어? 러셀! 일어나!”
“의식이 아예 없는 상태구나···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데.”
그는 크레이터의 한가운데에 누워 있었고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의 상체에 올라탄 아엘라시스가 찰삭찰삭 뺨을 때렸으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 일어나···.”
“울상짓지 말고, 아엘라. 비켜보렴.”
아엘라시스가 물러나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이루실이 손을 목에 대었다. 힘차게 뛰는 맥박이 전해져오는 것에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자. 마을로 돌아가서 제대로 된 검사나 치료를 해야겠어. 업을 수 있게 도와줘.”
그리 말한 이루실은 나힐니르와 도끼를 칼리아와 아엘라시스에게 맡긴 후 러셀의 몸을 번쩍 일으켜 자신의 등에 업었다.
“안 무거워?”
“괜찮아. 칼리아, 방향이 어느 쪽이야?”
“······.”
이루실의 물음에 칼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아한 표정이 된 아엘라시스가 칼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칼리아?”
“뭔가가 오고 있느니라.”
아엘라시스와 이루실의 고개가 칼리아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넓디넓은 크레이터의 지평선 아래로 붉은 태양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크레이터의 지평선에 삐죽삐죽한 가시처럼 솟아나 있는 침엽수들은 그 붉은 공을 쿡쿡 찌르면서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하늘과 대지를 적시는 새빨간 빛은 세상 전체를 주홍빛으로 물들이며 그 면적을 키워나갔다.
그때 길쭉하고 거대한 그림자가 주홍빛 대지를 어둠으로 물들였다. 누군가 황혼빛을 등지며 다가오고 있었다.
“사악한 흑마력이 느껴지는구나. 평범한 자가 아니다.”
“흑마력?”
칼리아의 중얼거림에 아엘라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 그녀의 평범했던 인간의 눈동자가 파충류처럼 위아래로 날카로운 가느다란 동공이 되었다. 그러면서 희미한 마력이 깃들어 안광이 났다.
칼리아와 마찬가지로 굳은 표정이 된 아엘라시스가 말했다.
“···언니 말이 맞아. 어둡고··· 짙어. 그리고 차가워. 이런, 이런 마력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두 마법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이루실이 눈을 깜박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그때 노을빛을 가리며 다가오고 있던 자가 훅, 하고 사라졌다. 동시에 눈을 크게 뜬 칼리아가 들고 있던 나힐니르를 휘두르면서 아엘라시스와 이루실을 밀어냈다.
직후 굉음이 터졌다.
꽝!
아엘라시스가 마지막 서리를 쥔 채 엉덩방아를 찧고 이루실은 러셀을 업은 그대로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 로브와 후드를 뒤집어 쓴 자가 칼리아와 대치하고 있었다.
광택 하나 반사하지 않는 로브는 끝자락이 어두운 연기로 변하며 흔들거렸고, 머리에 뒤집어 쓴 후드 아래는 어둠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 안쪽에서 빛나는 것은 붉은 색으로 빛나는 두 개의 안광이었다.
그 붉은 눈이 넘어진 아엘라시스, 대치하고 있는 칼리아, 그 뒤로 물러서 있는 이루실과 등에 업힌 채 의식이 없는 러셀을 훑었다.
그림자 속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 있던 나무. 너희들이 추방시켰나?”
심연 속에서 올라온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울리자 지면과 공기가 부르르 떨렸다. 마치 공간이 그의 목소리에 진저리를 치는 듯했다.
칼리아는 이를 악문 채 대검을 맨손으로 쥐고 있는 검은 로브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순간 다리에 힘을 주며 허리를 비틀고 손목을 돌렸다. 그러자 묵직한 대검이 사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면서 그의 목을 베었다.
훙-하면서 공기가 갈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검은 로브의 사내는 간단하게 고개를 뒤로 젖히는 것만으로 검격을 피해냈다. 그리고 왼손을 앞으로 뻗어내며 마력을 휘둘렀다. 새카만 붓칠을 하는 것처럼 새카만 마력이 사방을 뒤덮었다.
그에 지지 않고 칼리아 또한 칼자루를 왼손으로 고쳐 잡은 다음 오른손을 내밀었다.
콰아아아앙-!
터져나오는 폭발. 귀청을 먹먹하게 울리는 굉음과 충격파에 모두가 뒤로 물러나거나 나뒹굴었다.
자욱하게 일어났던 흙먼지는, 검은 로브의 사내가 가볍게 휘두른 손짓 한번에 가라앉았다. 그가 멀찍이 물러나서 자신을 노려보는 세 여인에게 다시 물었다.
“대답해라. 여기 있던 세계를 침식하는 세계수, 쿠헬라움토. 너희들이 추방시켰냐고 물었다.”
“그렇다.”
나힐니르를 바닥에 박아넣고 폭발의 위력을 해소시킨 칼리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겔리오투스와 계약했던 고대의 인간···. 흡혈귀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꽤 특이한 신체 구조를 가졌군.”
칼리아가 눈을 크게 뜨며 동요했다. 어떻게 알아본 것인지는 몰라도 저 검은 로브의 사내는 지금 칼리아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냈다. 악마와 계약을 하면서 흡혈귀가 되었던 칼리아였지만, 현재는 아니었다.
흡혈귀의 특성, 흡혈과 박쥐로 변신할 수 있는 변신 능력이 있기는 했지만 통상적인 약점인 햇빛에 거의 완전한 면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면으로 노을빛을 받고 있으면서도 멀쩡할 수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칼리아를 바라보던 검은 로브의 사내가 이번에는 큼직한 하얀 도끼를 들고 있는 백발의 여인에게 향했다. 그의 붉은 두 눈이 휘어지며 눈웃음을 그렸다.
“이건 또 뭔가. 어린 용이로군. 모두 숨어들거나 사라진 줄 알았는데··· 맹약을 하지 않은 개체가 아직 남아있었나? 운이 좋군. 여기서 용을 만나게 될 줄이야.”
그는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아엘라시스에게 다가갔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후드 두건 속에서 붉은 안광을 내뿜자 아엘라시스의 표정이 멍해졌다.
“꺼져라!”
그때 바닥을 박찬 칼리아가 나힐니르를 들고 그대로 내질렀다. 검신 위로 일어난 검붉은 마력이 검극으로 모여들며 일점에 집중되고, 거기서 무시무시한 광선이 쏘아졌다.
일점에 집중되었던 극한의 관통력이 담긴 대검이 덮쳐오는 모습은 검은 로브의 사내마저도 경시할 수 없는 기세가 담겨 있었다.
푸화아악-!
그때 검은 연기로 흩어지는 로브의 끝자락이 급속도로 확장되더니 그대로 하늘을 향해 치솟는 검은 파도가 되어 나힐니르를 막았다.
퍼어엉!
그러나 나힐니르는 그 검은 파도를 꿰뚫었다. 하지만 칼리아는 급격히 온몸에 제동을 걸며 대검의 경로를 틀 수밖에 없었다. 검은 파도에 녹아있던 흑마력이 나힐니르의 끝을 아엘라시스에게 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엘라! 도끼를 들어!”
칼리아의 외침에 아엘라시스는 다급히 마지막 서리를 들어올렸다. 직후 그녀의 도끼와 칼리아의 대검이 충돌했다.
“꺄아악!”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나간 아엘라시스가 바닥을 뒹굴었다. 이를 간 칼리아는 아엘라의 상세를 살피기도 전에 뒤로 돌아 대검을 들었다.
직후 번뜩인 섬광이 칼리아의 지근거리에서 폭발하고 칼리아는 뭔가에 얻어맞은 듯 뒤로 날아갔다.
“신기한 무기들이군. 마음에 들어.”
퍽!
고개를 주억거리던 검은 로브의 사내가 부지불식간에 허리를 숙였다. 그가 아래를 보니 바닥을 뚫고 나온 하얀 쇠사슬이 보였다. 그것이 자신의 복부를 강타한 것을 깨달은 그는 고개를 들었다.
러셀을 바닥에 곱게 눕혀놓은 이루실이 막 그에게 달려와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흡!”
짧고 강한 기합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검에 실린 힘과 마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화르르르륵!
그때 검은 로브의 사내 전신에서 검은 마력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살아있는 불길로 화하며 칼리아의 칼을 막아냈다.
“넌 뭐냐?”
“알 거 없어!”
불꽃을 뿌리친 이루실은 멈추지 않고 공세를 이어나갔다. 달아오른 칼이 멈추지 않고 휘둘러지며 수많은 선을 그렸다. 하지만 검은 로브의 사내는 흑마력을 휘두르며 그녀의 공격을 하나하나 쳐냈다.
촤르르르르르르!
하지만 바닥을 뚫고 올라오며 공간을 점하고, 이동할 수 있는 길을 제한하며 자신의 공격 선상에 몸을 들이밀게 만드는 사슬들은 감히 그조차도 얕잡아 볼 수 없었다.
“이런.”
“잡았어.”
검은 로브의 사내가 침음성을 내뱉음과 동시에 이루실이 중얼거렸다. 어느새 사내의 주변으로 빼곡하게 일어선 사슬들의 숲. 동시에 이루실의 마력을 받은 사슬이 일제히 공명을 시작하고, 그러자 대기가 흔들리면서 시야를 일그러뜨렸다.
순간 이루실의 눈이 파란 색으로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이루실의 몸이 가속하면서 무수한 잔상을 그렸다.
퍼억!
검은 로브의 사내가 인지했을 때는 그녀의 칼이 가슴팍을 꿰뚫은 후였다.
“···알 것 같군. 기이한 마력 조형, 검은 머리카락, 북방의 외모···. 이런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사는 곳은 그리 많지 않지.”
허나 가슴팍을 꿰뚫렸음에도 사내의 목소리에는 고통이나 죽음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흠칫한 이루실이 물러나려던 순간, 번개처럼 뻗어진 사내의 손이 이루실의 목을 틀어잡았다.
“컥!”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뭐 하는 놈들이냐? 되다 만 흡혈귀에다가 어린 용 새끼, 북부인의 조합이라니. 무슨 연유로 이런 이상한 조합이-”
꽈르르르르릉-!
그때 하얗게 번쩍이는 섬광과 천둥이 세상을 뒤덮었다. 검은 로브의 사내는 그 벼락을 직격으로 맞더니 크레이터 바닥을 갈아엎으며 긴 고랑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