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숲의 안쪽 (3)
쿵!
거구가 바닥에 무너지며 둔중한 울림을 냈다.
징글징글하게도 오는군. 러셀은 쓰러트린 마수의 몸통에서 대검을 뽑아 들었다.
초반에는 조금이나마 짐승의 형태를 가지고 있던 마수들이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냥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방금 죽은 이 마수도 다리가 여섯 개에 상체는 인간의 것, 팔은 세 개가 달린 괴물이었으니.
“비, 빌어먹을 인간! 끼르르르르···.”
“지, 지치지도 않는 건가? 께륵, 께륵.”
가지각색의 신음을 내뱉으며 마수들이 물러났다. 일부는 성대가 사람의 것을 닮았는지 말까지 했다.
팔이나 다리가 잘려 나가고 피를 질질 흘리는 놈들. 인간에 대한 살의와 식욕에 대한 감정만이 보여야 할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엿보인다.
“안 오냐?”
나힐니르를 허공에 휘둘러 검은 피를 털어낸 러셀이 마수들을 응시했다. 그의 뒤로는 이미 무수하게 죽어 나간 마수와 괴물들의 시체가 쌓여있었다. 그 시체들로부터 흘러나오는 피가 웅덩이와 작은 개울을 이뤘다.
“크륵, 께르르르···.”
이제까지 죽은 마수들보다 더 많은 마수가 러셀의 앞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어떤 마수도 섣불리 저 남자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하지만 패기 있게 말한 것과 달리, 러셀 또한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회복이 잘 안 되는데.’
알 수 없는 공간에 떨어진 지 삼십 분 남짓. 이 이상한 공간에서는 마력의 수발이 자유롭지 못했다. 대기 중의 마나 농도는 불쾌할 정도로 짙었고, 시시각각 피부 안쪽으로 침투하려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러셀은 이 알 수 없는 공간에 떨어지고 난 후 지금까지 마력을 운용하며 대기 중의 마나를 차단하고 있었다.
방해 요소는 그뿐만이 아니다. 과할 정도로 농도가 짙고 침입자에게 공격적인 대기의 마나 분포는 체외로 마력을 발출하는 것조차도 방해했다.
거기에 방어구인 코트의 수복도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갑옷으로의 변환 또한 불가능.
결과적으로 러셀은 항시 마력을 둘러 몸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덤벼드는 수십, 수백 마리의 마수를 상대하면서 효율이 절반으로 낮춰진 마력을 구현하고, 방어력 또한 기대하기 힘든 얇은 옷가지만 걸친 채 전투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의 마법사, 혹은 마력을 다루는 전사라면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전투 시 마력 회로를 따라 마력이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히 전신을 상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러셀이야 비범한 마력 감응과 조작을 통해 버티고 있지만, 이것도 영원히 할 수 있지는 않았다.
‘그럼 다 부수고 나가는 수밖에.’
다행히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에란디스 영지에서, 칼리아의 영역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이미 겪지 않았는가.
다른 점이라면 칼리아는 방대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마법을 통해 만들어져 있어 그 술자를 직접 타격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았다는 점이지만, 이 공간은 마수들의 숫자를 줄일수록 그의 운신의 제한도 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요지는 그가 먼저 집중력을 잃고 마력에 대한 통제력을 잃느냐, 아니면 이 공간의 마수들을 모두 쳐죽이고 탈출하느냐.
“후우우···.”
심호흡 한 러셀의 눈에 차츰 진보랏빛의 안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마력 회로에 마력을 돌리느라 마안의 발동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의 마안 발동이 일반적인 마법의 궤와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이뤄지는 것이긴 하나, 결과적으로 마력을 움직이고 세상은 관측하며 법칙을 일그러트린다는 점에서는 마법과 비슷하다.
슈아아아악!
당장 그의 눈으로부터 안광과 함께 마력이 번뜩이자 흉흉한 바람을 일으키며 러셀을 노리던 마나가 날카로운 칼날의 형상이 되며 날아들었다.
공간 자체가 살의를 가지고 가하는 공격. 러셀은 그 투명한 칼날들을 하나하나 쳐내거나 흘려내면서 주위를 훑었다.
시야조차도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고 그 이면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흑백으로 일렁이는 세상의 반대쪽, 동전과 같은 한 쌍을 이루지만 영원히 서로를 인식할 수 없는 이면세계. 그 세계를 들여다보는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희고 짙은 안개가 가득한 숲의 중심부에 들어섰을 때부터 인지하지도 못한 공간이동. 그리고 이면 세계로부터 전해져오는 불길한 마력의 기운과 이 공간에 가득한 마수들, 그 마수들 각각의 개체로부터 반짝이는 빛의 실선이 무수히 얽혀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실선들은 모두 마수들이 자리하고 있는 뒤편, 거대한 무언가에 잇닿아 있었다. 세계수가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커다란 나무와 비슷한 것.
하지만 진짜 나무는 아니다. 그보다는 살덩어리에 가깝다. 그리고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가 마수의 사체 속에서 꺼냈던 기생체의 기운과 흡사했다.
‘이계종. 저런 게 숲의 중심부에서 공간을 침식하고 있었군.’
러셀의 눈에는 이제 자신이 자리한 공간의 외곽이 보였다. 거대한 반구형의 공간이 숲의 가장 안쪽에서 자리를 잡은 채 퍼져나가고 있었다. 지름만 하더라도 족히 10킬로미터는 넘을 정도로 방대한 넓이.
그나마도 아직 완전히 확장된 것이 아니다. 저 이계의 괴물이 뿌리처럼 지반을 파고 들어간 채 대지의 지력과 마나를 빨아먹고 있었고, 그 뿌리가 닿아있는 면적은 침식하는 공간보다 더 넓은 반경으로 뻗어져 있었다.
러셀 일행이 들렀던 마을과 도보로 하루 거리에 떨어져 있는 다른 마을들까지 그 촉수가 닿아있는 것이 느껴진다.
방법은 별것 없었다. 여기 있는 기생체에 감염된 모든 마수를 죽이고, 그 중심의 이계종까지 죽이는 것.
어떻게 나갈지에 대해 계획을 세웠다면 속전속결로 빠져나가야 했다.
“크아아아아악!”
러셀의 마안이 마수들을 훑자 분위기가 차츰 바뀌기 시작했다. 마수들의 이성이 본능에 잡아먹히기 시작하고, 러셀을 향한 두려움의 감정이 희석된다.
마안이 마수들의 본능을 충동질하고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숨어들었던 흉성을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달려드는 마수들을 모두 쳐죽일 자신감이 없다면 도리어 마수들의 이빨과 발톱에 찢겨나갈지도 모르는, 자충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과격한 발상.
두두두두두두두-
지면을 떨어 울리며 마수들이 러셀 하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돌진을 방해하는 나무 같은 장애물도 없이, 너른 벌판과 같은 지형에서 한 점을 향해 나아가는 마수 무리.
찌잉-.
러셀은 관자놀이와 눈에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이래서 보지 않으려고 한 건데. 쯧. 어쩔 수 없으니까.’
그 중심에서 러셀이 무릎과 허리를 낮추고, 대검을 왼쪽 허리춤 아래로 길게 늘어뜨렸다. 흡 하고 숨을 들이쉰 러셀이 마력을 지면으로 내뿜었다,
꽝, 하고 발 구름 하나 없이 대지와 충돌한 마력은 그 반발력을 고스란히 러셀의 전신으로 밀어 올렸다. 러셀은 그 반발력에 저항하지 않았다.
마수들이 러셀을 덮쳤다. 그는 한순간에 위와 아래,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 전부가 거대한 괴물들의 몸통에 가려져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사지가 뜯겨나가도 목이 뽑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찰나.
발목과 무릎, 허리와 어깨에서 손으로 이어진 흐름이 대검에 깃들고, 대검이 횡으로 그어졌다.
쓰아아아아악!
대기가 갈라지며 끔찍한 비명을 내지른다. 러셀을 중심으로 번쩍이는 검광이 휘몰아치며 마수들이 튕겨 나갔다.
몸통에 커다란 상흔과 앞발, 다리가 잘려 나간 마수들이 비명과 함께 쏟아지는 피와 내장 조각을 게워내며 쓰러졌다.
러셀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마수들이 달려들며 외치는 알 수 없는 괴성,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들, 혹은 비명과 신음이 사방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거대한 악어의 주둥이가 러셀의 어깨를 물어왔다. 늑대 머리를 가진 마수가 갈퀴 손톱을 그에게 내리쳤다. 길쭉한 귀를 가진 토끼가 뒷다리로 바닥을 박차며 그에게 불꽃을 뿜었다. 날개가 달린 곰이 등 뒤에서 덮치며 앞발을 그에게 뻗었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공격에 러셀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이 공간에서는 코트의 방호력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양손으로 나힐니르의 길쭉한 칼 손잡이를 쥔 러셀은 전방으로 달려 나갔다. 제자리에서 저 모든 공격을 받아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그는 분쇄기처럼 앞을 관통하며 어깨를 물어오는 악어 머리를 종으로 갈랐다. 세로로 길쭉한 단면이 벌어진 악어 마수가 쓰러지고, 러셀은 그 아래를 빠져나옴과 동시에 몸을 돌린 다음 횡으로 나힐니르를 그었다.
보통 사람은 들기조차 힘들 대검이 갈대라도 된 듯 가볍게 허공을 베자 그에 걸린 늑대 마수의 허리가 두 동강이 나 쓰러졌다.
“다리, 다리를 잡아라!”
“죽여! 살코기를 뜯자!”
“팔, 다리를 찢어라! 머리를 부수고 뇌수를 마시자!”
새끼들이 먹는 취향하고는.
러셀은 그의 살점을 뜯고자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드는 마수들의 머리를 순차적으로 쪼개주었다.
이제까지 그가 여정 동안 익혔던 마법이나 속성력의 구현은 효율이 높지 않았다. 믿을 것은 단 하나, 성인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단련해온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러셀은 현생의 육체의 성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움직여야 효율적인지, 어떤 방식으로 마력을 운용해야 더 빠르고, 더 강하게 다룰 수 있는지.
그것은 누가 가르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력을 운용하고, 팔다리를 놀리면서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이렇게 마력을 꼬으면 어떨까. 여기서는 마력의 확산을 잠깐 억눌렀다가 터트리면 어떨까.
전생에 읽었던 많은 판타지 무협 소설들 또한 미지의 기운이었던 마나와 마력을 다루는 데 있어 커다란 도움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시야 가득히 휘둘러져 오는 가지각색의 공격들. 길쭉한 발톱, 날카로운 깃털, 몸에서 쏘아낸 가시, 주둥이 속에서 이중으로 튀어나오는 속이빨, 갈라진 팔다리에서 허연 뼈를 칼처럼 뽑으며 찔러오는 것까지.
그러나 러셀은 그 모든 공격을 모두 읽어냈다. 발톱은 고개를 젖히는 것으로 피하고 깃털은 검면을 세워 막으며 가시는 몸을 돌려서 흘려냈다. 이중으로 튀어나온 속이빨은 왼 주먹으로 어퍼컷을 날려 잇몸과 이빨을 함께 박살내고 뼈칼을 찔러오는 놈은 똑같이 검극으로 맞부딪쳤다.
그의 대검이 춤을 추는 것처럼 낭창하게 휘었다. 막대한 힘으로 휘둘러지는 검날이 일순 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근방에 자리한 모든 괴물의 허리가 똑같이 잘렸다.
마치 미리 합을 맞추고 짠 것처럼 믿기지 않는 동작을 연이어 선보인 러셀이었지만, 피를 본 나머지 마수들은 더 흥분한 것인지 침을 튀겨대며 러셀에게 이빨을 들이대었다.
그 중구난방으로 돋은 날카로운 이빨과 역겨운 입 냄새에도 그는 표정 한 번 찌푸리는 것으로 반응한 뒤, 왼 주먹을 들었다가 내리쳤다.
쾅, 하고 머리가 목 깊숙이 파고든 마수가 두 팔을 휘적거렸다. 그 마수에게 사타구니부터 정수리까지 올려 베기로 두 동강을 낸 러셀은 이어서 달려드는 마수의 해일 속으로 달려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후욱, 후우···.”
숨을 몰아쉰 러셀이 칼자루를 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전신에 가득한 마수의 검은 피가 얼굴을 가로지르며 뚝뚝 떨어졌다. 코트에는 마수의 살점과 피, 내장 조각이 묻어 더러웠다.
쉬지 않고 달려든 마수들의 공세가 드디어 끝을 보였다. 그 와중에 끝장낸 마수를 하나하나 세고 있던 러셀은 지금까지 죽인 마수의 숫자가 대략 삼백 마리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입가를 비죽였다.
“이 정도면 정말 산맥이나 숲의 짐승들을 전부 다 마수로 탈바꿈한 것 같은데··· 생태계 사슬이 엉망이 되겠군.”
그거야 러셀이 알 바는 아니다. 또 그렇게 빈 자리에는 다른 짐승들이 들어올 테니 공백이 오래 유지되지도 않을 터.
문제는 이렇게 강력한 마수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이계종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다른 북부의 영주들은 이 사태를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는지였다.
이만한 괴물이 나타난 것을 몰랐다는 것도 문제고 알았다고 해도 문제다. 이 침식 공간을 빠져나가면 누나를 자하드 가문에 되돌리는 것 말고도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음머어어어!”
한 마수 하나가 괴성을 질렀다. 두려움과 불안에 젖은 동족들을 고취시키겠다는 듯 우렁차게 소릴 지른 마수는 곧바로 러셀에게 돌진했다.
검은 물소 같은 외형이지만 이족 보행을 하고 있고, 허리 양쪽으로는 뼈로 이뤄진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머리에는 나선형으로 삐죽 솟은 뿔이 검푸른 불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흑우 왔냐.”
러셀은 대검을 다잡았다. 꽤 까다로운 놈이었다. 생김새도 흉악하기 그지없는 놈이 날기까지 하는데, 저 뿔이 아주 성가셨다. 마수들의 틈 속에서 얍삽하게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놈이었는데, 이제는 다른 마수들이 모두 죽으니 자신이
“이번에는 안 놓친다.”
“움머어!”
화르르륵!
기합 같은 울부짖음과 함께 나선형의 뿔에 맺혀있던 검푸른 불길이 두 개의 선을 그리며 쏘아졌다. 러셀은 몸을 날리며 그 불길을 피해냈다.
저 불길은 그의 마력 권역으로도 완전히 상쇄시킬 수 없었다. 보호막 또한 소용없다. 마력 자체를 살라 먹는 성질의 불길이었기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예로부터 불과 얼음의 대결은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라이벌 관계지.
러셀은 대검을 바닥에 꽂았다. 하얗고 짙은 안개가 흐르는 이 공간 속에서 무성하게 자라나 있던 나무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모두 마수들만이 자리했다.
흙과 이끼, 크고 작은 돌멩이와 굵은 뿌리가 튀어나와 있던 숲의 바닥도 사라지고 어둠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나힐니르가 바닥을 가르자 그 주위의 검은 액체가 불에 대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로 밀려났다. 나힐니르의 검신에서는 달의 룬이 희미한 빛을 계속해서 발하고 있었다.
러셀은 그 반응을 통해 이 공간이 사악한 마력, 즉 악마나 이계의 알 수 없는 기운을 통해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러셀의 감각으로도 언제 이 공간에 빠진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교묘했고, 시간 감각도 헝클어져 있었다. 체감 시간으로는 30분 정도가 흐른 것 같았다. 하지만 바깥의 시간도 똑같이 흘렀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화르르르륵!
짧은 상념을 마친 즉시 러셀의 손이 코트에서 하얀 도낏자루를 쥐고 빠져나왔다. 그의 방대한 마력이 끝없이 마지막 서리에 주입되자 도끼가 웅웅-하는 소리를 내며 하얀 파동을 퍼트렸다.
푸화아악!
도끼날에서 뿜어진 냉기의 파동과 검푸른 화염 두 줄기가 부딪쳤다. 불과 얼음의 충돌로 무지막지한 양의 수증기가 발생하며 시야를 가렸다.
뜨거운 수증기가 차가운 안개를 만나자 물방울이 되어 떨어져 지면을 적셨다. 찰박, 찰박하고 발이 웅덩이를 밟으며 물 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후웅-하고 바람이 불면서 주위에 있던 모든 안개와 수증기를 밀어냈다. 그 중심에 멀쩡한 신색의 러셀이 서 있었다.
무리없이 자신의 화염을 막아낸 것에 놀랐는지 마수가 뼈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가죽이나 깃털 하나 없는 앙상한 뼈에 화염과 비슷한 검푸른 기운이 깃들고, 마수는 그대로 날아올라 러셀에게 돌진해왔다.
“음머-!”
“빨리 와라.”
도끼 자루를 고쳐 잡은 러셀이 바닥을 박차고 마주 날아올랐다.
쾅-!
공중에서 이루어진 격돌. 마수와 러셀의 신형이 다른 방향으로 튕겨나 바닥에 떨어졌다.
러셀은 왼쪽 옆구리의 코트 자락이 찢어졌고, 마수는 날개 하나가 부서져 날갯죽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음머어어엉-!”
분노로 눈이 뒤집힌 놈이 팔로 땅을 짚더니 콧김을 후욱 뿜어냈다. 허연 콧김과 함께 눈에 붉은 광망이 어리더니 그대로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러셀은 옆구리를 짚고 서 있다가 한순간 도끼를 던졌다. 빛의 원반이 된 도끼가 날아들자 물소 마수는 전신에서 불길을 일으켰고, 그대로 뿔로 도끼를 쳐내는 데 성공했다.
훙훙훙 하고 날아간 도끼를 일별하지도 않은 마수가 승리를 직감하며 가까워진 러셀의 가슴에 나선형의 뿔을 박으려 할 때.
번개같이 움직인 러셀의 양손이 나선형의 뿔을 잡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발의 위치가 뒤바뀌고, 허리가 비틀렸다. 마수의 시야에 세상이 빙글 돌면서 위와 아래가 자리를 바꾸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게 생전에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등짝부터 바닥에 부딪힌 마수의 척추뼈가 모조리 박살났고, 동시에 러셀은 뿔을 잡은 손에 힘을 준 다음 비틀었다. 와드득, 소리가 나고 물소의 머리가 180도로 회전했다.
“후우우···.”
긴 숨을 내쉰 러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많았던 마수들은 모두 죽었다. 그리고 침식 공간의 마나는 아까보다 그 흉포함이 덜해져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마시며 달아오른 마력 회로를 식힌 러셀이 다른 쪽으로 양손을 뻗었다. 그러자 멀리 날아갔던 도끼와 바닥에 꽂혀 있던 대검이 돌아와 그의 손아귀에 잡혔다.
“가볼까.”
무기를 갈무리한 러셀은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점차 무시무시한 기세를 풍기기 시작한 침식 공간의 안쪽, 이계종을 향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