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숲의 안쪽 (2)
음험하고 고요한 숲에 진동과 소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곰의 일격에 구덩이가 생기며 나무들이 우지끈, 부러졌다. 날렵한 동작으로 공격을 피한 이루실이 입가를 닦았다.
손등에 붉은 핏지국이 묻어났다. 내상을 입은 것은 아니고, 그저 입술이 찢어져서 난 상처다. 이십 분 전에 토드에게 보호막과 축복을 받아놓지 않았다면 고작 이 정도 상처만 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흥.”
무릎과 허리를 낮추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숲 중심부에서 밀려든 마수들에 의해 일행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마수의 숫자는 무척 많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 넓은 숲에서 사는 모든 짐승들이 모여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백 마리 이상인 것은 확실했다.
“우어어어엉···”
바닥을 내리쳤던 곰이 앞발을 들었다. 깊은 구덩이가 패일 정도로 내리친 마수의 앞발도 성치 않았다. 넘치는 힘을 견디지 못한 가죽이 찢어져 그 안의 근육과 허연 뼈가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곧 치릭, 치리릭 소리와 함께 급속도로 가죽과 근육이 손상을 복구하고 재생되었다. 그냥 마력을 각성한 마수라면 저런 재생력을 가질 리가 없었다.
“그 벌레 때문인가.”
이루실 또한 러셀이 말해주었기 때문에 마수의 몸속에 이상한 기생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확한 용도는 아직 모르지만 단지 마력을 각성한 것 이상의 재생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 기생체 덕분일 가능성이 컸다.
“그워어어엉!”
재생을 마친 거대한 곰이 재차 달려들었다. 비정상적으로 부푼 근육과 그 근육의 크기를 다 덮지 못한 가죽, 듬성듬성 난 털과 입에서 질질 흐르는 침. 크기 또한 4미터에서 5미터 사이는 될 정도로 크다.
어디를 보아도 정상적인 마수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이 정도면 인간을 잡아먹은 것 이상으로 같은 동족끼리도 포식한 게 아닐까 싶다.
이루실은 늘어트렸던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손끝에서 연결되어 있는 마력의 형상이 순식간에 단단한 쇠사슬로 변모하며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터더더더덩!
뱃가죽을 노린 공격이었으나 쇳덩이가 울리는 소리만 들렸다. 말 그대로 쇳덩이처럼 단단해진 가죽이 사슬을 튕겨낸 것이다. 그러나 타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마수의 속도가 약간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루실은 허리춤에 매여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이루실과 마수가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것도 잠시, 뒤늦게 마수의 어깨에서 검은 피가 터져 나왔다.
이루실은 마수가 재생할 틈을 주지 않았다. 곧바로 뒤돌아선 그녀가 다시 가속했다. 그녀의 각력을 견디지 못한 흙바닥이 펑 소리를 내며 비산했다.
마력과 허벅지 근육의 힘으로 쏘아진 그녀의 속도는 일순 화살을 능가했다. 그때 마수는 경이로운 신체능력으로 이루실을 감지하고 멀쩡한 왼쪽 앞발을 휘둘렀다.
허나 이루실 또한 살아온 삶의 궤적 중 상당 부분을 마수와의 싸움에 얼룩져 있는 전사였다.
이루실의 칼이 비스듬한 선을 그렸다. 머리를 향해 뻗어져 오는 앞발은 그 가볍고도 허술해 보이는 동작에 밀렸고, 거기에 가죽이 포를 뜬 것처럼 그대로 벗겨져 나갔다.
간단한 동작으로 두 개의 앞다리를 쓸 수 없게 만든 이루실은 순식간에 마수의 품 안쪽까지 들어서 있었다. 공격을 가하기에는 너무 짧은 거리였지만 이루실은 상관하지 않았다.
마수에 비하면 너무나 가녀리고 얇은 그녀의 주먹과 무릎이 순차적으로 마수의 몸통을 직격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두껍고 커다란 곰의 몸이 울리며 뒤쪽으로 충격파가 전해졌다. 투명한 마력의 파동이 스쳐간 나무가 부르르 떨며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떨어트렸다.
그 사이 앞다리를 재생한 마수가 이루실을 껴안으려는 듯이 발톱을 세웠다. 그녀가 아래로 몸을 낮추자마자 날카롭게 뽑힌 네 개의 발톱이 교차하며 파공성을 냈다.
교차 된 앞다리의 틈 속을 번개같은 이루실의 발차기가 날아들고 마수는 머리가 뽑혀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턱이 위로 젖혀졌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루실에게 분노한 마수가 우렁찬 울음을 내뱉었다. 일전 마을을 덮쳤던 멧돼지 마수가 발했던 것과 유사한 소리가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고 반구형으로 내뿜어졌다.
공중에서 재비를 돌며 내려선 이루실이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동시에 옅게나마 남아있던 엔리르의 축복이 남은 힘을 다하며 번쩍였다.
콰아앙!
흙더미와 부서진 나무들이 전방위로 날아가고, 잔해를 흩뿌렸다. 축복의 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낀 이루실이 꿇었던 한쪽 무릎을 피고 일어났다.
마수를 중심으로 10미터 정도의 공터가 생겨버린 장소가 바로 앞에 있었다. 마수로서도 가진 마력을 털어놓는 공격이었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루실은 울렁이는 속을 다스리면서 식도로 올라오는 작은 핏덩이를 뱉었다. 순간 마력을 두른 칼로 충격파를 흘려내긴 했으나 완전히 흘리지는 못했다.
“크어어엉!”
몸을 추스르던 마수가 한순간 몸을 날리며 공격해왔다. 계속해서 공격해도 죽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조급해진 듯 아까보다 확연히 동작이 커진 앞발 휘두르기였다.
이루실은 그 공격을 옆으로 비껴서는 것만으로 피해내고는 칼을 휘둘렀다. 아까 베였던 어깨가 다시 한번 베이면서 검은 피가 뿌려졌다.
그녀의 칼은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넘어가면서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수 또한 육중한 무게를 밀고 들어오며 공격해왔지만 아까처럼 가볍게 흘리는 이루실의 칼날에 가죽과 근육이 함께 베이면서 애꾿은 재생력과 마력만 낭비하게 될 뿐이었다.
어느 순간 이루실이 오른발을 들었다가 바닥에 내리꽂았다. 쿵-하는 울림과 함께 허공에서 아지랑이가 일렁이더니 하얀 쇠사슬이 생성되며 마수의 가죽을 뚫고 박혀들었다.
“크어엉!”
고통에 울부짖은 마수가 뒤를 돌아보며 사슬을 빼내려 했지만, 어느새 무수하게 만들어진 사슬들이 이어서 마수의 몸통에 꽂혔다.
“그어어엉-!”
마수가 몸부림치자 무지막지한 괴력에 사슬들이 딸려 나가며 바딕이 뒤집어졌다. 하지만 이어서 더 많은 사슬들이 마수를 감자 더 버티지는 못했다.
쿠웅, 하고 마수의 무릎이 꿇려졌다. 이루실은 사지가 사슬에 꽉 묶인 채 펼쳐진 마수를 내려다보다가 그 머리에 칼을 꽂아넣었다.
뇌가 파괴당한 마수는 몇 번 꿈틀거리다가 눈알이 뒤로 돌아가며 죽었다. 이루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꽂아넣은 칼에 마력을 주입하고, 폭발시켰다.
쿵, 하고 마수의 커다란 몸체가 들썩였다. 그리고 마수의 눈과 코, 입, 귀에서 검은 피가 줄줄 새어나왔다. 마력을 체내에서 폭발시켜 심장과 내장, 그리고 아직 살아있을지 모를 기생체를 끝장낸 것이었다.
소리 없이 칼날을 빼낸 이루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곰 마수 외에 그녀가 쓰러트린 무수한 사체가 널려 있었다. 그 참사를 잠시 지켜보던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천둥과 벼락 소리를 듣고는 그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꽈르르르릉!
성인 여성이라기에는 어리고, 그렇다고 소녀라고 말하기엔 성숙한 여자의 손끝에서 전광이 어리더니 그대로 벼락이 되어 뛰쳐나갔다.
커다란 늑대가 벼락에 직격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뒤쪽에서 달려들던 세 마리의 다른 늑대들은 벼락을 피한 채 공중에 뜬 아엘라시스를 향해 뛰어올랐다.
유려한 비행으로 늑대들의 공격을 피한 아엘라시스였지만, 곧 늑대들이 주둥이를 벌린 다음 냉기를 분사했다.
푸화아악!
세 방향에서 쏘아진 냉기의 숨결이 아엘라시스를 덮쳤다. 하지만 냉기는 아엘라시스를 얼음 덩이로 만들지 못했다.
“이것들이 지금 누구한테 냉기를 쏘아대는 거야? 엉? 이 멍멍이들아. 혼 좀 나볼래?”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세 개의 냉기 숨결이 소용돌이를 치며 한데 모였다. 아무런 발판도 없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백발의 소녀를 중심으로 냉기는 세 개의 투명한 얼음구가 되어 빙글빙글 돌았다.
태양을 공전하는 행성들처럼 돌아가던 얼음구가 늑대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빵!”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온 얼음구에 늑대들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머리나 몸통에 꽂힌 얼음구는 털가죽에 닿은 순간 퍽, 하고 깨지면서 수만 개의 결정이 되더니 그대로 늑대를 얼려버렸다.
세 마리의 늑대가 얼음덩이가 되었을 때, 벼락에 튀겨지던 남은 늑대 한 마리가 바닥을 박찼다. 아엘라시스는 한 입에 삼켜버릴 수 있는 거대한 주둥이가 쩌억 벌려졌을 때.
촤악!
피륙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늑대의 허리가 절단되었다. 쿵, 쿵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두 동강이 난 늑대가 흙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늑대 사체는 기묘한 생김새가 되어 있었다.
털가죽이 완전히 쪼그라들고 피가 완전히 빠져나간 듯했다.
“고마워, 칼리아 언니.”
“그래.”
길게 늘였던 창날을 가까이 댄 칼리아가 혀로 그 피를 핥았다. 몇 번 입을 다시던 그녀는 이내 퉤, 하고 피를 뱉어냈다.
“썩 좋은 맛은 아니구나.”
“아니 그걸 왜 핥아?”
“궁금해서 말이다.”
허공에서 내려선 아엘라시스가 지면 몇 센티를 남겨둔 채 묻자 칼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보아도 이렇게 갑자기 마수가 급증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루실의 말을 들어보았을 때도 그렇고. 원래 마수라는 건 드문 짐승이야. 오히려 괴물들이 더 많지. 평범한 짐승들이 마력을 접하고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의 확률도 낮고, 그 확률을 뚫고 이렇게 신체가 거대해진다거나, 마력을 다룰 줄 알게 된다거나 하는 건 내가 알기로 전례가 없는 일이야.”
“하긴. 아까 냉기 뿜을 때는 나도 조금 놀랐어.”
아엘라시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끄덕였다.
냉기의 속성력을 가진 것도 신기한데 그걸 뿜어내고, 아엘라시스의 벼락을 정통으로 맞고도 한번에 죽지도 않았다.
그녀들의 주위로는 커다란 늑대 사체 말고도 다수의 마수들이 널브러져 죽어 있었다. 모두 원래의 모습에서 세 배, 많게는 네다섯 배 이상 거대해졌고 다리가 더 늘어나거나 털가죽이 비늘 가죽으로 변모한 놈도 있었다.
“급격한 마력의 확장으로 새로운 신체 부위가 생겨나거나 변이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고. 무엇보다.”
칼리아의 창날이 허리 위쪽, 상체만 남은 늑데 사체를 쿡 찔렀다가 뺐다. 창끝에는 말라 비틀어진 기생체의 사체가 꿰여 있었다.
“이런 이상한 기생체가 더 그런 변이를 가속화시키는 것 같구나. 이 중간계의 괴물은 아니야. 느껴지는 마력의 파장을 보아 아마 지하나 다른 이계의 괴물 중 하나인게 분명해.”
“그럼 이 마수들을 만들고 있는 괴물이 우리 세계의 생명체가 아니라는 말인거네?”
“그래. 똑똑한 걸, 우리 아엘라.”
“우악!”
손에 쥐고 있던 창을 흩어버린 칼리아가 아엘라시스를 확 끌어안았다. 그러자 아엘라시스의 얼굴이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묻혀버렸다.
“으, 이런 것 좀 하지, 말라니깐!”
“앗, 어딜 만지니.”
“꺄우우우!”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벗어나려는 아엘라시스와 그녀를 꽉 안은 채 놔주질 않는 칼리아.
“뭣들 하고 있어?”
“아.”
그때 나무들 사이로 이루실이 나타났다. 오는 동안 또 격전을 치룬 것인지 옷에는 피와 살점이 묻어 있었다.
“러셀은?”
그녀의 물음에 칼리아와 아엘라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마수들한테 휩쓸리다보니 여기에 있었어.”
“나도 그렇느니라.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아엘라를 도우라는 말이었지.”
그녀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짙은 안개는 물러가 있었다. 그런 그게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숲의 중심부를 향해 모여든 것이었다.
“뭔가 느껴져?”
“아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구나.”
아엘라를 풀어준 칼리아가 경계를 가르고 선 흰 벽 같은 것 앞에 섰다.
“별일 있겠느냐. 이 나를 쓰러뜨린 사내다.”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게 몇 개 있지. 나한테는 러셀이 그런 사람이야.”
이루실은 러셀을 떠올렸다. 아주 어릴 적의 아기 때부터, 점차 커가면서 자라는 모습까지. 그녀는 그 모든 시절을 함께한 가족이었다.
동시에 한때는 왜 가족일까, 하고 원망스런 마음을 가지기도 했던 존재이기도 했다.
러셀의 존재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명석한 두뇌나 성숙한 육체는 그렇다 쳐도 나이와 맞지 않는 언동이 그랬다.
거기다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선천적인 능력, 그 눈에 관련된 일 때문에 러셀은 가문을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다시 누나인 자신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언제까지나 그와 같이 다니고 싶었지만. 이루실은 고개를 저었다.
“벌써 흩어진 지 삼십 분이 지났어. 이 숲은 이미 마경이야.”
“틀린 말은 아니니라. 마수들의 근본원리가 이계의 괴물인 것을 보아하면, 이 안개조차도 이계에서 흘러나온 것일 수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