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45화 (146/225)

145화 이상현상 (3)

‘내가 병신이었구나!’

토드는 절실히 실감했다. 이방인, 러셀이라는 이름의 저 남자가 저렇게까지 강력한 힘을 지닌 전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신성력으로 그를 꿰뚫어 볼 수 없고, 그의 방어막도 부수고 들어온 마수들을 대검과 도끼 두 자루로 춤을 추듯 농락하고 학살하며, 그를 훌쩍 넘어 저 거대한 멧돼지 마수마저도 단번에 머리를 박살 내어 죽였다.

게다가 무슨 수로 마수의 돌진을 막은 것인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러셀의 바로 뒤는 아니었음에도 러셀에게 머리를 숙이고 길쭉한 엄니를 들이밀며 돌진해가던 멧돼지 마수는 오금을 저리게 하고 오줌마저 찔끔 지릴 만큼 두려웠다.

그런데도 그는 무슨 기술을 쓴 것인지 몸에는 상처 하나 내지 않고 돌진을 멈춰 세운 것이다. 러셀의 발뒤꿈치 뒤로 부채꼴 모양으로 쫙 퍼지고 갈라진 바닥의 모양만이 저 기술의 여파가 아닌가 할 뿐이었다.

멧돼지 마수를 죽인 러셀은 마수의 두개골 속으로 파고 들어가 있던 자신의 오른손을 뺀 다음 탈탈 털었다. 검은 피와 타버린 뇌 조각들을 턴 러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 사람들의 멍한 얼굴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수 셋이 날뛰고 있다가 일단락에 마무리된 덕분인지 그 고요는 아까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러셀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오른발을 살짝 들어 내려찍었다. 그러자 쿵-하는 울림과 함께 투명한 파동이 그로부터 퍼지며 넓은 동심원을 그렸다.

그러자 넋이 나가 있던 마을 주민들의 표정이 돌아오기 시작하더니, 뒤늦게 다친 부위의 고통을 자각한 듯 곡소리를 내며 쓰러지거나 가족들을 챙기는 등 소란스러워졌다.

러셀은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가 엉거주춤 서 있는 토드를 보고 손을 까딱거렸다. 토드는 그 손짓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달려왔다.

“예, 예. 부르셨습니까?”

갑자기 존칭하는 토드를 물끄러미 보던 러셀은 뒤의 마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남은 마수들 사체 좀 가지고 외곽으로 와주시오. 확인할 것이 있으니.”

“아, 예. 더 시키실 것은···?”

“없소.”

토드는 갑옷과 무장을 내려놓지 않은 장정 여럿을 불러다가 아엘라시스가 떨어뜨린 새 마수를 끌고 오라 지시했다. 마을에서 꽤나 위치가 있었는지 마을 사람들은 토드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은 피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토드는 능숙하게 손짓을 하고, 겁에 질려 흩어졌던 자경단원이었던 주민들을 골라 사람들을 안정시켰다. 그다음은 부상을 입은 자들을 모으게 해서 기도를 외우더니 상처를 치료해 나갔다.

“끝났어?”

“어. 고생했어.”

“뭘. 별 것도 아니었어.”

그때 이루실이 마을 반대편에서 날뛰던 말의 형태를 한 마수를 사슬로 칭칭 감아 끌고 왔다.

마치 거미가 사냥감을 잡은 것처럼 고치가 된 말은 목이 잘려져 있었고, 잘린 목은 이루실의 손에 잡혀서 혀를 축 늘어트린 채 죽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감히 러셀과 일행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어물쩍거렸다. 마을을 초토화시키던 마수 세 마리를 잡아줬음에 분명 은인이긴 했으나 두려운 것 또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그거 들고 이리 와봐.”

러셀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않고 외곽으로 향했다. 러셀은 한 손으로 멧돼지 마수 사체를 잡아 질질 끌었고, 뒤에서는 장정 서넛이 새 마수를 붙잡고 낑낑거리며 뒤를 따랐다.

“어, 어디다 놓으면 되겠습니까, 나리?”

“여기다 놓으시오.”

“옙.”

“수고했으니 그만 물러가도 좋소.”

“아, 알겠습니다.”

러셀의 말에 새 마수를 끌고 온 장정들은 급하게 손과 옷을 털어 묻은 깃털과 마수의 피를 털어내더니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외곽에 널브러져 죽어 있는 또 다른 마수 사체들을 보고 겁에 질린 것 같았다.

마수들의 사체는 그 생김새도 가지각색이었다. 원래의 형태에서 덩치만 커다래진 것도 있었지만 피부가 검게 변색되어 있거나 새로운 신체 기관이 더 생겨있기도 했다.

특히 아엘라시스가 하늘에서 엎치락 뒤치락거리며 싸웠던 독수리와 유사하게 생긴 마수는 다리가 세 개에 발톱은 여섯 개, 날개는 두 쌍이었다.

과한 마력의 상승작용에 의해 유전자가 변형되고 새로운 기관이 더 생겨날 정도의 반응을 얻었다는 것일 텐데.

“러셀, 뭐해?”

“잠깐 살펴보고 있었어.”

뒷짐을 진 아엘라시스가 쪼르르 다가와 같이 기웃거렸다. 움직이는데 방해되지 않는 바지와 셔츠, 두터운 자켓이 너풀거렸다. 하얗게 출렁이는 백발 사이의 귀에는 에란디스 영지에서 러셀이 선물해주었던 작은 귀걸이가 반짝였다.

“뭘 살펴보는데?”

“얘네들의 마력 근원.”

러셀은 말로 그치지 않고 코트 안쪽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예전 에란디스 영지를 나설 때 맞닥뜨렸던 마적들에게서 얻었던 것 중 하나였다.

약간의 마력으로 단검을 강화한 러셀은 그대로 마수 하나를 골라 가죽을 가르기 시작했다. 뇌와 신경이 전격에 지져져서 그나마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멧돼지 마수였다.

두꺼운 가죽을 가르자 곧바로 검은 연기와 함께 타버린 근육, 내장들이 밀려 나왔다. 고약한 냄새에 아엘라시스가 표정을 찡그렸지만 러셀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속을 뒤졌다. 그리고 결국 그의 눈을 피해 계속 몸을 숨기고 달아나려 하던 것을 잡을 수 있었다.

“벌레? 벌레야?”

“흠···.”

러셀은 그의 손에서 힘없이 꿈틀거리는 벌레를 내려다봤다. 동그란 몸체에 사방으로 기다란 촉수 줄기를 가지고 있는 기생체였다.

눈이나 코, 입 같은 감각기관은 하나도 없고 그저 촉각으로만 주위 사물을 판별하는 듯했다.

그때 힘없이 축 늘어지려는 것 같았던 기생체가 갑자기 러셀을 향해 뛰어들었다. 놀란 아엘라시스가 곧바로 손에 전격을 일으켜 쏘려는 찰나, 러셀이 먼저 손을 뻗어 허공에서 기생체를 잡았다.

당장 죽을 것처럼 바들거리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파르륵 떨며 사방팔방으로 가느다란 촉수 줄기를 휘두르는 모습에 아엘라시스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으에에··· 진짜 끔찍한데.”

“물러나 있어.”

러셀은 허공에 잡아둔 그대로 마력을 뽑아내 기생체를 감쌌다. 촉수 다발들이 한데 모여 꽉 묶이고 나자 벌레는 이렇다 할 움직임도 취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잠시 그 벌레를 바라보던 러셀은 곧 그 벌레의 생명력이 점차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숙주가 죽고 나서도 금방 죽는 것은 아니고 곧장 새로운 숙주를 찾아 덤벼들긴 하지만, 애초에 오랫동안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기생체는 결국 추욱 늘어져 죽었다. 생명력의 반응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마수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러셀은 기생체를 마력의 불로 태워 죽이고는 일어섰다.

“인위적으로 마수를 만들어낸다라···.”

***

마을에 여관 겸 선술집은 하나뿐이었다. 곰발톱이라는 이름의 선술집이었다. 간판에 곰의 발톱 자국같이 네 줄기의 선이 날카롭게 그어져 있는 것이 보였는데, 아마 그린 게 아니라 정말로 곰이 그은 것 같았다.

곰발톱 여관의 1층은 층고가 높았다. 일행 중 가장 키가 큰 러셀도 여유롭게 고개를 들고 팔까지 위로 쭉 뻗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문을 열자 위에 달린 작은 쇠종이 딸랑 소리를 내며 울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시선을 모았다.

“어서 오세··· 요···.”

늦은 오후, 저녁 준비를 위해 바쁘게 탁자를 닦고 의자를 정리하던 중노미와 여급들이 들어선 일행을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당장 몇십 분 전 마을을 때려 부수던 마수들을 죽인 사람들이 아닌가.

이미 들어와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도 러셀 일행을 쳐다봤다. 주민들도 보였지만 그들은 한둘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상행이나 여행 등의 이유로 이 마을에 들린 외부인들 같았다.

행색을 보아하니 마수들의 습격에 도망치려다가 일이 해결된 것을 알고 다시 눌러앉은 모양새였다.

러셀과 일행, 그리고 데이지와 데이브 남매는 점원들이 안내해주는 데로 창문 반대편 벽면에 자리한 테이블로 향했다.

“···저 사람들이···.”

“그래? 마수를 물리친···.”

“엄청 예쁜데? 귀족인가?”

“야야, 눈 돌리지 마. 허리춤에 칼 있다···.”

“난 칼 없냐? 닥치고들 있어···.”

러셀과 일행들을 보고 이목이 쏠리고 저들끼리 쑥덕거리는 소리가 안개처럼 깔렸다. 하지만 감히 먼저 나서서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 깜냥은 없는 듯 조용히 앉아서 훔쳐보기만 할뿐이었다.

원형 테이블에 앉으니 여급 하나가 다가왔다. 품이 넓은 상의와 기다란 치마, 머릿수건을 머리에 묶은 주근깨 소녀는 쟁반을 품에 안고 서서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나리들. 곰발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희 마을을 구해주신 것도 감사드리고요.”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였다가 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희 여관에서 유명한 건 산딸기랑 버찌, 무화과를 담가서 만든 브랜디랑 갈색 보리로 만든 밀 맥주, 그리고 닭고기가 있어요···.”

러셀이 뒤를 슬쩍 보니 술과 음식을 소개하는 여급 뒤로 모여든 어린 중노미와 다른 점원들이 보였다. 아마 점원들 중 가장 고참이거나 가장 막내일텐데, 말을 약간 더듬으면서도 곧잘 매뉴를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고참인 듯했다.

“뭘 주문하시겠어요?”

“난 그 산딸기 주! 그리고 다른 술들도 다!”

아엘라시스의 외침에 여급의 눈이 데구루 굴러 그녀를 향했다. 보기에는 가장 어려보이는 여자가 각종 술을 다 마시고 싶다 하니 놀란 것일까.

이루실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브랜디 한 병과 술잔 인원수만큼 돌려줘. 돼지고기 스튜랑 양파, 연어랑 송어구이도 똑같이 해주고.”

“아,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그날 하루 최고 매출을 달성한 사실에 입꼬리를 실룩거린 여급은 입안으로 주문한 매뉴를 중얼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저, 저희들 것은 안 시켜도 되는데···.”

“괜찮아, 먹어. 다쳤잖아. 다쳤을 때는 잘 먹어줘야 해.”

데이브가 죄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이루실이 고개를 저었다.

곧 음식이 나왔다. 작은 마을의 여관 식당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맛은 훌륭했다.

식사를 다 마치고 각자 술잔 하나씩 붙잡은 일행들은 노곤한 기운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황혼이 찾아오면서 구름도 조금씩 개인 듯 창문을 통해 주황 빛깔의 노을빛이 찾아들었다. 식당 안에는 점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마수를 처치한 일행이 이곳에 있다는 소문이 퍼진 듯했다. 하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들에게 감히 다가서지는 못한 채 웅성거리거나 눈치를 보았다.

중노미나 여급들은 어쨌든 손님들이 늘어나는 턱에 바쁘게 움직이면서 새로 들어온 주문과 다 먹은 식기를 치웠다.

1층 식당의 중앙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난로에서는 장작이 타며 소리를 냈다.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가 닫히며 종이 울렸다. 들어선 사람은 눈밑이 거뭇해진 토드였다. 얼마나 뛰어다녔던 것인지 그새 살이 좀 빠진 듯했다.

초록색의 사제복도 땀과 흙먼지에 절어 더러웠다. 그의 곁에는 다른 사람도 같이 있었다. 풍성한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였다.

두 사람은 여관 안을 둘러보다가 러셀 일행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왔다. 그리고 데이브, 데이지, 아엘라시스, 칼리아, 이루실, 러셀을 순차적으로 보더니 러셀에게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제 이름은 폴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의 장을 맡고 있습니다. 토드 사제님에게 들었습니다. 저희 마을을 구해주시고, 마수를 물리쳐 주신 게 기사님 맞으시지요?”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교회에서 파견된 분이십니까?”

“내가 성기사로 보이시오?”

러셀의 복장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은 뒤로 묶어서 정리했고, 얇은 코트에 흰색 셔츠, 벨트와 가죽 바지, 부츠 차림이었다.

기사로 보기에는 힘들고 여행자가 더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등이나 허리춤에 매인 칼 한 자루 없는 것도 그러했다.

하지만 토드에게 이미 언질을 들었던 것인지 무기가 없는 것은 폴에게 특별한 의문점이 아니었던 듯했다. 폴은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비밀리에 파견되신 분일 수도 있지 않으십니까?”

“이단심문관이나 악마 사냥꾼을 말하는가 보군. 그런 것 아니오. 그냥 북부로 가는 여행자요.”

“그, 그러시군요···.”

폴은 토드와 눈을 맞추고 소리 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토드 또한 예상했던 것이 틀리자 조금 당황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루실이 입을 열었다.

“교회에 성기사를 요청한 적 있나요?”

“그렇습니다. 여기 계신 엔리르를 모시는 토드 사제님에게 부탁드려서 다른 대교회 쪽에 성기사나 악마 사냥꾼을 파견해달라고 요청드렸지요. 다만 2주가 넘게 아무도 와주지 않아서, 저희끼리도 고심이 많은 참이었습니다.”

그때 가만 듣고 있던 토드가 나서서 말했다.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도와달라고?”

러셀이 반문하자 토드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이 마수들은 평범한 마수들이 아닙니다. 짐승에서 마수로 변이되면 사람에 대한 습격이 잦아진다고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수가 늘어나는 것은 확실히 비상식적입니다. 숲에 제가 설치한 결계 또한 인위적으로 파손된 흔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데이브나 데이지 같이, 사냥꾼들이나 벌목꾼들이 오가다가 실수로 해제한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마수들의 짓이 분명합니다. 염치없지만,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보수는 당연히 드리겠습니다.”

러셀은 그 부탁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누나, 괜찮겠어?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나야 너랑 더 있을 수만 있으면 어떤 일이 나도 괜찮아.”

아엘라시스는 브랜디를 홀짝이며 손가락으로 오케이 싸인을 그렸다. 러셀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우리도 가는 길 내내 이런 일들이 벌어질 것 같으니 미리 예방한다 치겠소. 도와주지.”

그 말에 폴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