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이상현상
씩씩거리며 다가오던 초록색 사제 옷의 대머리, 토드는 곧 그의 앞에 우뚝 서 있는 러셀을 보고 걸음을 늦춰갔다.
토드는 멀리서 봐도 눈에 띌 정도로 덩치가 컸다. 거의 러셀과 근접한 키와 덩치였는데, 마을 사람들의 앞에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 갈색 머리, 빨강 머리, 노랑 머리, 남색 머리 등 가지각색의 머리카락들 사이에 있으니 툭 튀어나온 반짝거리는 대머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옆에서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러셀이 슬쩍 보니 이루실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왜?”
“아냐.”
러셀은 뒤를 가리켰다.
“들어가 있어. 무슨 일인지 알아볼게.”
“혼자 괜찮겠어? 누나가 안 도와줘도 돼?”
“괜찮아. 아엘라랑 칼리아도 한번 봐주고.”
“알았어, 알았어.”
이루실이 오두막 문을 열고 들어가자 때마침 대머리 사제 토드와 다른 마을 사람들 대 여섯이 러셀의 앞에 섰다. 그들은 오두막을 빙 둘러싸고 싶은 듯 보였으나, 바로 앞에 서 있는 러셀 때문에 그러진 못 하고 있었다.
러셀의 입가에서 피어난 흰 연기가 어둑한 하늘 아래서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그때 토드가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나섰다.
‘시발, 뭔 덩치가···?’
토드는 자신보다 눈높이가 위에 있는 러셀을 보고 눈가를 꿈틀거렸다. 척 보기에도 범상찮아 보이는 놈이 짝다리를 짚고 서서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기다란 머리카락은 뒤로 묶어 정리했고, 얼굴은 재수 없었다.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것이 육중한 호랑이를 연상케 했다.
토드는 옆과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큼큼 헛기침을 했다.
“난 우리 마을의 사제, 토드요.”
아까와는 달리 예의를 갖춘 인사에 러셀 또한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러셀.”
간단하게 이름만 말하는 러셀을 토드는 찌푸린 눈으로 살펴보았다. 귀족처럼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차림새는 남루했다. 야영을 하다 온 것인지 바지나 상의에 풀 쪼가리 같은 게 묻어있기도 했다.
그가 알기로 귀족이라는 것들은 기사 둘, 셋에다가 하인을 수십 명은 데리고 다니면서 더러운 건 질색하는 놈들이었다. 이렇게 꼬질꼬질한 옷들로 걸어 다니거나 말을 타고 이곳거곳을 떠돌아다니지 않았다.
토드가 말했다.
“당신들이 밖에서 왔다는 이방인인가?”
“그렇소만.”
“보시다시피 난 성직자요. 신 엔리르를 모시고 있지. 사냥의 신, 엔리르를 모른다고 하시진 않겠지?”
“모르오.”
“모른다고?”
“난 신학자가 아니오. 신들 이름 하나하나 다 외우고 다니기에는 좀 바쁘게 살아와서.”
“이···”
토드는 러셀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러셀은 그 화난 눈을 뚱한 시선으로 맞받아쳤다.
“잠시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난 그 뒤쪽에 먼저 볼 일이 있소.”
“무슨 볼일?”
러셀의 물음에 대머리 사제 토드를 따라온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들고 있던 것을 치켜들었다.
“뭐긴 뭐야! 숲의 분노를 산 놈들이 죽지 않고 살아온 것 때문 아니야!”
“이대로 가면 다 죽어! 다 죽기 전에 저놈들을 내보내야 해!”
러셀은 자기 할 말만 해대는 마을 사람들과 토드를 쭉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오? 숲의 분노라니?”
“이방인들은 알 것 없소. 자, 난 할 말 다 했으니 비키시오!”
러셀은 점차 가까워지는 그들을 보다가 체중을 싣고 있던 왼다리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약간 비틀리게 서 있던 자세가 똑바로 됐고, 러셀은 거기서 오른발을 약간 앞으로 내디뎠다.
탁, 하고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는 작은 소리가 났다. 마을 주민들은 듣지 못했지만 토드는 그 작은 소리가 들렸다.
러셀이라는 남자로부터 뻗어져 나온 마력의 파문이 가장 먼저 토드에게 닿자 그의 눈에 저절로 흰빛이 어렸다. 그가 모시는 신의 힘이 눈에 깃든 것이었다. 토드는 멈칫했다.
‘···뭐지?
범상찮은 분위기를 지닌 만큼 마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긴장하고 있던 토드는 재빨리 성력을 더 끌어올려 눈에 담았다.
허나 성력이 깃든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보았는데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오직 어둠뿐이었다.
마치 그림자가 인간의 형상을 이루고 서 있는 듯한, 혹은 인간의 경계를 띠고 오려진 다른 차원의 일면이 나타나 있는 듯한··· 그런 알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힘든 단편적인 장면만이 눈에 담겼다.
반면 러셀 또한 상대방이 자신을 관찰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볍게 마력의 파문을 일으켜 토드라는 성직자를 훑어보려 했는데 곧바로 대응한 것이다.
이제까지 마력으로 자신을 관찰한 자들은 많았지만, 신성력을 이용한 기술로 자신을 보는 자는 눈앞의 대머리가 처음이었다.
여전히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담배를 입에 문 러셀의 눈에 천천히 희미한 빛이 깃들었다.
그러자 단순히 마력을 눈에 담은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세상의 이면이 그의 시야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고 주위의 모든 것이 흑백으로 물들었다.
그저 짙고 옅음만이 전부인 세상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깔을 지닌 존재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눈이 살짝 좁혀졌다.
’저건 뭐지?‘
커다란 사슴 머리를 한 거인의 반투명한 형상··· 그 연둣빛의 형상이 대머리 사제의 머리 뒤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커다란 망치와 길쭉한 자루를 한 손에 들고 있는 사슴 머리 거인. 상체는 터질 듯한 근육으로 우락부락했고, 그 아래의 하체는 연기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 그 반투명한 형상 또한 러셀을 바라보았다. 사슴의 커다랗고 텅 빈 동공에서 노란빛이 번쩍였다.
돌처럼 굳은 러셀의 눈이 크게 떠지는 것을 발견한 토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제서야 위대한 신의 힘을 느낀 것에 러셀이 넋을 놓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러셀의 두 눈에 희미한 빛이 어리기 시작한 것을 본 그의 미소가 흐려졌다.
러셀의 자청색 눈이 마력을 받아 보랏빛으로 번쩍였다. 정체 모를 사슴 머리 거인의 눈빛과 러셀의 마안이 부딪친 순간, 느려졌던 시간이 제 속도를 되찾았다.
퉁!
러셀과 토드의 사이에서 투명한 파동이 터졌다. 러셀은 한 발자국 물러났고, 토드는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나 머리를 짚었다.
시야가 어질어질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썰물처럼 쓸려나간 신성력의 여파에 눈이 아프고 머리가 욱신거렸다.
러셀 또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성직자와의 성력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가. 이제까지 악마나 괴물들의 마력을 상대했던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악마의 것이 스며 들어오는 물처럼 날카로웠다면, 신성력은 배척하는 것에 가까웠다.
“큭···.”
토드가 고개를 들자 관자놀이를 짚은 러셀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토드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가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에 주먹을 꽉 쥐었다.
둘의 눈이 마주친 것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다른 마을 주민들이 보기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본 순간 뒤로 물러나 머리를 짚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제님? 괜찮으십니까?”
“어디 아프신 거 아녀유?”
“저 놈이 이상한 짓 한 겁니까?”
“아, 아닐세, 펜슨. 뒤로 물러나 있어. 괜찮네.”
그때 러셀의 감각에 이상한 기척들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살의와 허기, 굶주림, 인간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
날카롭게 치솟는 감각의 경고에 러셀은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치하다 말고 갑자기 애먼 숲을 바라보는 그의 행동에 토드와 마을 주민들 또한 어리둥절한 눈으로 똑같이 고개를 돌렸다.
오십여 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에 경계선으로 그어진 듯이 솟아나 있는 나무들 사이로 어두운 형체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짙은 나무들의 그림자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가지고 일어난 것 같았다.
크르르르···.
곧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수들이었다. 검게 물든 흰자위에 붉게 물든 동공이 희미한 빛을 뿜었다. 곰, 늑대, 사슴, 토끼, 올빼미 등 육식과 초식, 잡식을 가리지 않은 짐승들이 마력에 중독되어 숲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마, 마수들이다!”
“도, 도망쳐! 마을에 알려!”
“같이 가!”
곡괭이나 벌목 도끼 등을 가지고 왔던 주민들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는 마을 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다만 대머리 사제 토드는 도망치지 않았다.
“빌어먹을,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뭘 안단 말이야? 저 남매들이 숲에서 잡아 먹혔어야 했다고?”
“적어도 결계는 깨지 말았어야지! 요즘 숲에서 얼마나 많은 마수들이 나타나고 있는 줄 아나?”
“결계?”
“그래! 염병할 것들이 함부로 숲을 나다니면 애써 만든 결계가 흩어진단 말이다···.”
버럭 소리지른 토드는 다급히 손을 들어 합장하고는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까 러셀이 봤던 반투명한 연녹빛의 사슴머리 거인의 형상이 다시 어른거렸다가 사라졌다. 토드의 전신에 연녹빛의 빛이 아지랑이처럼 스멀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타 사제들에게서는 보기 힘들었던 모습이었다. 그들은 대개 성력으로만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이나 기도를 행할 뿐이었다.
그 사이 숲에서 나온 마수들이 어슬렁거리며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걸음걸이는 느렸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자 급격히 빨라졌다.
그런 마수들 앞에서 토드는 몸을 덜덜 떨기는 했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이윽고 기도를 마친 것인지 그가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비-엔리르-투르마! 삿된 것은 물러날 것이다!”
토드의 손에서 튀어나간 빛들이 허공에 요상한 형상을 그리더니, 그대로 마을 외곽을 막는 반투명한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그런 보호막에 마수들이 부딪치자 쿵, 쿵 하는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보호막은 효과적으로 마수들을 막아내는 것 같았다.
“큭, 으으윽···.”
투실투실한 토드의 턱살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러셀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그의 마안과 부딪쳤을 때에 비해 발하는 기세나 성력의 양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보호막이 점점 밀리고 있었다. 그에 따라 토드의 발과 다리 또한 뒤로 슬금슬금 밀려났다. 러셀은 그의 눈동자가 앞과 뒤를 오가며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저 대머리 사제가 도망치지 않은 이유는 그저 다른 마을 주민들이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뿐이라는 것도. 마을 외곽에 사는 다른 주민들이나 사냥꾼 남매의 위안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했다.
러셀은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가 탓, 하고 바닥을 박찼다.
뒤에서 토드가 의문성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지만 흘려 넘겼다. 그는 순식간에 보호막을 지나쳐 계속 머리와 몸통을 꼬라박고 있는 마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워어어엉!”
“카르르르르!”
육식 동물이고 초식 동물이고 할 것 없이 거칠어진 성대를 가진 마수들이 그에게 돌진했다. 러셀의 양손이 코트 속으로 들어갔다가 번개같이 출수했다.
좌우로 크게 벌려진 그의 손에는 도끼와 검이 각각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붙이들의 궤적에 있던 모든 마수들의 신체가 한 부위, 많게는 두 부위씩 잘려 나가며 허공을 날았다.
꽥꽥 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마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러셀의 신형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달려든 곰 세 마리의 머리가 순서대로 쪼개졌다. 도끼에 날아간 세 개의 머리는 바닥에 뒹군 즉시 얼어붙었다.
그 얼어붙은 머리를 짓밟으며 거대한 몸집의 순록이 몸집만큼이나 큰 뿔을 들이밀었다. 그 옆에는 각각 늑대 두 마리가 침을 질질 흘리며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있었다.
먼저 순록 옆의 늑대 둘에게 도끼와 대검을 던져 침묵시킨 러셀은 바로 앞까지 치달은 순록의 두꺼운 뿔을 손으로 붙잡았다.
무어어어어-!
그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순록이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전차처럼 밀어붙였다, 러셀은 무식하게 그 힘에 맞대응하지 않았다
잠깐 버티는가 싶었던 그의 다리와 허리가 유연하게 비틀리더니 순록의 몸이 그대로 하늘을 날았다. 짙은 구름낀 하늘을 발 아래에 둔 순록의 눈이 멍청해졌다.
콰앙!
순록의 등짝부터 떨어진 바닥이 움푹 패였다. 정신을 못 차리는 순록의 머리통에 러셀의 발이 떨어졌다.
콰직, 하고 박살난 짐승의 뇌와 피가 바닥에 검붉은 꽃을 피웠다. 마수들의 움직임이 주춤거렸다.
벌써 목이 잘려 널브러진 곰이 세 마리에, 머리와 등짝에 도끼나 대검에 꿰여 죽은 늑대, 가장 커다랗고 살기에 차 있던 순록 마수도 머리가 박살나 죽었다.
하지만 그 흉성이 어디 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 남은 마수들이 한꺼번에 러셀을 향해 덤벼들었다. 러셀은 목을 까딱거리다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바닥에 박혀있던 대검이 저절로 날아와 러셀의 손아귀에 감겨들었다. 무릎을 낮춘 러셀의 다리가 한바퀴 원호를 그리고, 한껏 젖혀진 허리와 어깨, 팔이 그 원심력을 받아 회전했다.
마수들의 습격은 몇 분 되지 않아 진압됐다. 보호막이 깨진 충격에 주저앉아 있던 토드는 입을 쩍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모든 마수를 박살낸 러셀은 검과 도끼를 회수한 다음 터벅터벅 걸어와 토드 앞에 섰다.
“설명 좀 해주셔야겠어. 왜 숲의 짐승들이 저 난리들인지. 결계는 또 뭔 말이고.”
토드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