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칠흑 너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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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등정을 마치고 서쪽으로 침몰을 시작했다.
두텁고 짙은 회색 먹구름 사이로 황혼의 붉고 노란빛이 비쳤다. 틈새를 겨우 비집고 뛰쳐나온 그 빛들은 그 경계가 뚜렷했다.
하지만 몰려드는 구름은 빠르게 그 틈새마저 메워버리며 빛을 가렸다. 이제 하늘은 삭막한 회색의 물결에 갇힌 채 꿈틀거릴 뿐이었다.
“하악, 하악, 하악, 하악.”
그 하늘 아래를 데이지가 거친 숨을 내쉬며 달렸다. 그녀가 달리고 있는 곳은 울창한 침엽수림이었다. 단단하고 높게 솟아오른 기둥 같은 나무들을 뒤로 넘기며 그녀는 가슴이 터지도록 달렸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침은 말라붙어 나오지도 않았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기도와 폐가 칼칼했다. 훤히 드러난 얼굴은 코와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언제 벗겨졌는지 알 수도 없는 신발 탓에 왼쪽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아니 발바닥뿐만 아니라 다리와 팔 모두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바로 뒤에 사나운 추격자들이 달음박질치는 소리가 들렸다.
크르릉··· 컹!
늑대들이었다. 회색과 갈색, 짙은 회색이나 붉은 갈색에 가까운 털을 가진 늑대들. 일고 여덟마리 쯤 되는 늑대들이 수림 사이사이를 달리며 데이지를 몰고 있었다.
“하악, 하악, 하악···”
데이지는 울었다. 빨간 뺨에 축축한 눈물이 더해지자 얼굴은 더 시려졌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데이지가 숲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오빠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부터 숲에 맹수들이 늘어났다. 늑대는 물론이고 거의 혼자 살거나 가족 단위로 사는 곰까지도 종종 눈에 띄었다. 그녀가 사는 마을을 큰 곰 발바닥 마을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것도 곰을 다 잡아 씨를 말린 이후에는 그냥 마을 이름이 되어버린 것에 불과했다.
어디서 갑자기 이렇게 맹수들이 넘어오는 걸까? 마을 사람들은 점점 순록이나 토끼 같은 초식, 잡식 동물들을 다 잡아먹어 버릴 기세로 나타나는 짐승들을 보며 불안해했다.
그러다 결국 사냥꾼인 데이지의 오빠가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아직 어린 그녀는 오빠의 죽음을 믿지 못했다. 아빠와 엄마 없이 단둘이서만 살아왔는데, 결국 또 혼자만 남아버렸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기 싫었다.
그래서 오빠에게 간간이 배운 활과 화살, 작은 단검을 들고 숲으로 들어왔지만. 오빠의 흔적은 찾지도 못하고 결국 늑대들에게 쫓기게 되었다.
“하악, 하악···”
데이지가 달리기를 멈췄다. 어디서부터 길을 잃은 것인지 마을로 향하는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사방으로 가득 찬 침엽수들은 그 생김새가 모두 비슷비슷했고, 그렇기에 앞으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인지도 헷갈렸다.
아르르르르···
아마 같은 장소를 빙빙 돌고 있던 것이 맞을 것이다. 데이지는 어느새 두꺼운 나무들 사이에서 슬금슬금 나오는 늑대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오빠는 늑대들이 사냥할 때 몰이사냥을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순록이나 멧토끼, 혹은 멧돼지처럼 기동력이 좋은 초식 동물들을 사냥할 때면 곧게 달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끔 방향을 틀게 하면서, 결국 지칠 때 덮쳐버린다는.
오빠도 그렇게 죽었을까? 자신처럼 죽어라 달리다가, 힘에 부쳐 넘어진 순간 일제히 덤벼든 늑대들에게 죽었을까? 날카로운 이빨에 목덜미가 꿰뚫리고, 발톱에 피부가 베이고, 사지가 뜯겨서···.
데이지는 눈물을 팔로 쓱쓱 닦았다. 불투명하고 흐렸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그녀는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며 침을 질질 흘리는 늑대를 노려보았다.
“혼자는 안 죽어.”
자신에게 말하듯이 혼잣말을 내뱉은 데이지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칼집에서 단검을 꺼냈다. 병으로 죽은 부모가 남매에게 유일하게 남긴 유품. 그 익숙하디 익숙한 칼 손잡이의 가죽이 손바닥에 착 감겨들었다.
데이지는 단검을 양손으로 쥔 다음 자세를 낮췄다. 그녀의 그런 자세를 보자 늑대들은 걸음을 멈췄다. 그때 무리 중 가장 커다랗고 털에 윤기가 도는 늑대 한 마리가 짧게 끊어지는 울음소리를 냈다.
“······?”
곧바로 늑대들이 다 덮칠 줄 알았던 데이지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무리 중에서 가장 작고 왜소한 늑대 한 마리가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데이지와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서고 으르렁거렸다.
“···하. 지금 저거랑 나랑 싸움 붙이는 거야?”
데이지는 이를 악물었다. 저 우두머리 늑대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 작은 늑대랑 자신을 싸우게 한다는 것은 알았다. 뭣 때문일까? 자신감이라도 붙여주려는 걸까?
고작 가장 작은 늑대에게 선심 쓰듯이 상대를 붙여주면서 죽이게 만드는, 자존심을 높여주려는 먹잇감. 데이지는 손가락이 새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줬다.
작고 왜소한 늑대는 주춤거리며 다가오다가, 뒤를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그녀만큼이나 겁에 질린 듯 보였다. 하지만 우두머리 늑대와 다른 늑대들은 조용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데이지가 몸을 날린 것은 그 작은 늑대가 고개를 돌리기 전이었다.
“으아아악!”
기합을 지르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비명 같은 기합을 지르지 않았다면 팔다리는 돌처럼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캥!
화들짝 놀란 늑대가 다시 앞을 쳐다봤을 때 데이지는 이미 칼을 아래서 위로 찔러 올리고 있었다. 목표는 목이었다. 목젖의 왼쪽, 머리와 심장, 몸통과 사지로 이어지는 가장 큰 혈맥이 지나는 곳.
데이지의 오빠가 잡아온 사냥감의 숨통을 끊을 때 그녀의 손을 이끌어 직접 짚어주었던. 바로 그 지점을 향해 데이지는 온힘을 다해 단검을 내질렀다.
푸욱, 하고 단검이 털가죽과 근육을 뚫고 들어갔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생명을 찌르는 느낌에 데이지는 전율했다.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 단검은 그녀의 신체 일부가 된 듯했다. 짤막한 검신으로부터 전해져오는 두근거리는 맥박의 진동과 치솟은 뜨거운 피가 손과 팔뚝, 어깨를 거쳐 머리에 닿았다.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예민해진 감각이 그 정보들을 데이지의 머리에 욱여넣었고, 그렇기에 그녀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크아악!
늑대는 목에 파고든 차가운 날붙이에 소스라치고 고통에 울부짖으며 날뛰기 시작했다. 데이지는 금방 그 늑대의 발버둥에 나가떨어졌다.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지만 데이지는 다급히 다리를 움직여 일어섰다. 그러나 바로 늑대가 덮쳐오는 바람에 다시 뒤로 넘어졌다.
“꺄아아아아악!”
높고 새된 비명이 침엽수보다 높이 올랐다. 데이지는 왼팔을 빠득빠득 물고 있는 늑대의 주둥이를 보며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왼팔은 금세 너덜너덜 해져갔다. 근육이 상하고 뼈가 부서지면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고통의 감각이 송곳처럼 머리를 찔러댔다.
“아으으윽!”
그러나 데이지는 아직 단검을 오른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번쩍 들렸다가 늑대의 왼쪽 눈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늑대 또한 비명을 지르면서 튕기듯 물러섰다. 데이지는 가까스로 일어나다가 고개를 숙였다. 눈물과 콧물, 땀이 비오듯이 후두둑 쏟아졌다. 왼팔은 어깨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드러난 왼팔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감각은 통했지만 거기서 올라오는 것은 끔찍할 정도의 고통밖에 없었다.
가슴과 배, 그리고 허벅지에도 늑대의 발톱이 할퀴어 성하지 않았다. 입고 있던 옷은 넝마 조각이었고,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피 때문에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그녀는 점차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데이지는 울분과 두려움, 분노를 담아 늑대를 노려봤다. 왼쪽 눈을 잃은 늑대가 똑같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은 여전히 두려웠다.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날 가망이 아예 없다면, 그렇다면 먼저 죽은 오빠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고 싶었다.
“아아아아악!”
영혼을 토하는 듯한 외침에 왼쪽 눈을 잃은 늑대가 움찔했다. 데이지는 덜렁거리는 왼팔에 휘청거리면서도 똑바로 늑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다가 애꾸 늑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직 한쪽 눈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늑대는 데이지가 시야의 사각에서 단검을 찌르는 것을 놓쳤다. 데이지의 단검이 늑대의 연한 뱃가죽을 꿰뚫고 들어왔다.
헉, 하고 숨을 들이쉰 늑대는 바로 앞 데이지의 왼쪽 어깨를 물었다. 하지만 배를 계속 찔렀다가 나오는 단검 세례에 턱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차가운 어둠이 눈꺼풀을 덮었다.
“하악, 하악, 하악, 하악···.”
데이지는 축 늘어진 애꾸눈 늑대 시체에 깔려 그대로 주저앉았다가 뒤로 누워버렸다. 보이는 것은 하얀 하늘과 검은 나무들, 그리고 가느다란 초록색 나뭇잎들이었다.
이제는 통증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왼쪽 팔은 그저 욱신거리기만 했고, 전신은 뜨거우면서도 오한이 찾아와 섬뜩섬뜩했다.
크르르르르···.
사박, 사박 하고 물러나 있던 늑대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데이지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입꼬리를 당겨 미소 비슷한 것을 지으려 했다.
“한 놈은, 죽였어···”
이제 자신도 죽게 되리라. 죽으면 어디로 갈까? 마을의 유일한 교회 사제 시아토 아저씨가 말했던 것처럼 드높은 천상으로 가게 될까. 아니면 술꾼 돌리치가 푸념하던 것처럼 지하에 떨어지게 될까.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데이지!”
아, 벌써 오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곧 만날 수 있는 것일까.
“데이지!”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돼, 오빠. 나 이제 죽었어.
“데이지! 정신 차려! 데이지!”
데이지는 눈을 끔벅거렸다. 아까부터 환상으로 치부했던 오빠의 얼굴, 그 이목구비가 뚜렷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덤벼드는 덩치가 커다란 멧돼지 같은 크기의 늑대도.
켁!
그때 늑대가 단말마를 내지르며 두 개로 쪼개졌다. 데이지의 눈에는 뭔가 빛살 같은 것이 늑대를 스쳐간 것 말고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두 개로 쪼개진 늑대를 기점으로 우두머리 늑대가 긴 하울링 소리를 내뱉더니, 그대로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치던 늑대 한 마리의 등판에 다시 한번 빛살이 내리꽂혔다. 데이지는 그제서야 그게 도끼라는 것을 알아봤다.
자루가 길고 도끼날 또한 큼직한, 벌목 도끼보다 더 큰 전투용 외날 도끼.
“여기는 뭐 이렇게 늑대가 많아? 아까는 곰이더니.”
낮은 목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나타나 죽은 늑대에게서 도끼를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훅,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됐다.
깨깽, 캥캥 거리는 소리가 침엽수림을 소란스럽게 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사람보다 훨씬 덩치가 커다란 늑대와 남자 하나뿐이었다.
“덩치는 또 산 만하군. 뭘 잘못 먹었나.”
커다란 늑대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는 모습에 데이지가 신음을 내뱉으며 그를 가리키려 애썼다. 그녀의 몸짓을 알아차린 것인지 데이브가 그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 저분, 엄청 강하시다.”
“뭐···?”
데이브의 말대로였다. 데이지가 눈을 돌렸을 때 본 것은 높게 뛰어올라 앞발톱을 내려찍는 우두머리 늑대와 도끼를 오른쪽 허리 아래로 늘어트린 남자의 모습이었다.
동시에 하얀 궤적이 우두머리의 커다란 몸을 사선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남자는 가만히 서서 오른팔만 치켜 든 자세로 서 있다가 고개를 까딱이며 목근육을 풀었다. 그러고는 마법 같은 손놀림으로 도끼를 어디론가 사라지게 하더니 터벅터벅 걸어왔다.
“러셀 님!”
“동생이 맞나?”
“예, 예! 제, 제발 좀···”
“많이 다쳤군. 아엘라. 네가 와봐라.”
“응. 헉, 피··· 엄청 다쳤네.”
어안이 벙벙한 데이지의 옆으로 다른 인기척이 나타났다. 눈만 돌려 살피자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다가와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음, 음. 잘 될 거야. 데이브도 내가 고쳤, 아니 치료했거든.”
데이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백발의 여자를 보다가 다시 데이브를 쳐다봤다.
“나··· 안 죽은 거야?”
“안 죽어!”
곧 백발의 여자가 손바닥을 펼치더니 연녹색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데이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법’을 보았다.
“와···”
연녹색 빛의 알갱이들이 살갗에 닿자 찢어지고 패인 살들이 놀라운 속도로 아물었다. 가슴과 배, 팔다리에 났던 자상에 피딱지가 앉았다.
“왼팔은 심각하군.”
그때 도끼를 날렸던 남자가 걸어와 쭈그려 앉았다. 데이지는 저도 모르게 그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이제까지 살면서 저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이었다.
데이지가 보거나 말거나 남자는 피부가 벗겨져 근육이 드러나고 뼈까지 부서져 살갗을 뚫고 나온 왼팔을 유심히 보더니 데이브에게 말했다.
“이름이 데이브라고 했지?”
“예, 예! 그렇습니다!”
“네 동생 꽉 잡아라. 이거 뼈를 맞춰야 해. 안 맞추고 치료하면 못 움직인다.”
“아, 알겠습니다.”
데이브는 사냥꾼이다. 다리가 부러진 초식 동물들은 살아남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그는 바로 데이지의 너덜거리는 옷을 한움큼 찢더니 그대로 그녀의 입에 물렸다.
오가는 대화를 못 알아듣고 있던 데이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남자가 왼팔을 건들자 잊고 있던 통증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뼈를 맞추기 시작하고.
뿌드드득!
“으읍··· 으으으읍!”
데이지는 몸 안쪽에서 울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통증에 까무룩 기절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