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칠흑 너머
아직 살아있을 적의 데커즈는 이 부유 유적이 고대 마도 도시의 잔재라고 했다. 루-바쿰니오라라고 했던가. 그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고대의 제국이나 문명, 마도 시대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거나 불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주 가끔 구전이나 누군가의 기록에서만 간간이 언급될 뿐.
러셀은 천천히 잦아지는 지하의 존재를 응시했다. 그때 그 지하의 존재의 감각이 그를 덮쳐왔다.
훙-
바람 한 점 통하지 않을 공동에 돌풍이 몰아쳤다.
“러셀! 이게 뭐야?”
“···가만히 있어.”
제단에 양손을 올린 러셀은 순식간에 필요한 것을 알아냈다. 필요한 것은 제물이었다. 제단의 모양새를 미루어보아 짐작했지만, 다시 마법진을 가동시키고 유적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제물로 필요한 생명력은 엄청났다. 최소 다섯 명 이상의 사람 목숨을 희생시키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과 희생된 자들의 원념, 원한이 생성하는 사기와 흑마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러셀은 당장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잡아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검지와 중지를 모아 검결지를 만든 다음, 왼손바닥에 깊게 상처를 냈다.
“러셀, 뭐 하는···?”
“누나, 잠깐만.”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이루실을 진정시킨 러셀은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를 제단과 석판 위에 떨어트렸다.
우우웅-!
한 방울씩 떨어트릴 때마다 반응하던 제단은 곧 소음과 함께 새로운 빛의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러셀은 고작 피 몆 방울로 제단에 필요한 제물의 기준을 맞춘 것이다.
애초에 러셀 스스로도 자신의 몸이 지니고 있는 이질적인 힘과 생명력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고, 그건 성공했다.
만약 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냥 봉인되어 있는 저 존재를 맞닥뜨린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저것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 시점에서 깨우는 건 이 세상에 혼란을 일으키려는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도움을 주는 짓일 수도 있었다.
마법진이 다시 가동되는 것을 확인한 러셀은 손바닥에서 흐르던 피를 멈추고 지혈시켰다. 깊게 그어진 상처는 곧바로 아물어버렸다.
그때, 러셀의 시야에 전혀 다른 게 비춰보이기 시작했다. 뭐지?
그는 흔치않게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보이는 시야에 집중했다. 그러자 석판과 제단, 그 너머가 보였다. 칠흑 같은 어둠을 넘어, 그는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짙푸르게 타오르고 있는 두 쌍의 눈동자. 총 네 개의 눈들이 러셀의 자안을 마주 보고 있었다.
-누구···
러셀은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목소리는 아주 어렸다. 성별은 알 수 없었지만, 십대의 소년이나 소녀의 목소리 같았다.
그때, 러셀의 마안과 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하는 찰나의 순간 인지 속도가 한없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방이 색을 잃고 거무튀튀한 흑백으로 물들었다.
기이이이잉···
오래된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느려졌다. 러셀의 이상을 알아차리고 그를 향해 팔을 들어올리는 이루실도, 공동의 바닥과 벽, 천장을 아우르는 거대한 구형의 마법진도.
마력과 대기의 마나도 정체되는. 아주 미세한 시간의 흐름만이 느껴졌다. 한없이 분할된 체감의식 속에서 러셀은 자신이 거대한 어둠의 한복판에 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어둠을 가두고 있는 구형의 마법진이 보였다. 기하학적인 도형과 선, 문자가 배열되어 빼곡하게 새겨진 마법진. 하지만 부분부분, 누군가 미처 채워놓지 못한 것처럼 구멍이 나 있는 곳도 있었다.
러셀과 이루실이 파괴한 골렘들 때문에 활성화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구형의 마법진 속에서 뭔가가 몸을 일으켰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 편린만으로도 커다란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충 8미터에서 9미터 정도의 체고와 부피를 가진 그것은 사자의 머리와 몸통에 용의 비늘이 덮였고, 등짝에는 박쥐의 날개, 꽁무니에는 악어의 꼬리가. 독수리의 다리와 발톱을 가진 괴물이었다.
“······.”
러셀은 그 거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러 종을 한꺼번에 뒤섞어 주물거리다가 툭 튀어나온 듯한 모양새. 그가 이전 삶에서 보았던 그리스 신화의 상상 속 괴물, 키메라의 모습과 비슷한 괴물이었다.
그리고 러셀의 눈에는 저 괴물 속에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 또한 보였다. 어떤 방식으로 만든 것인지 짐작도 안 그 군영체群靈體들은 순간순간마다 남녀노소의 얼굴들이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괴물의 몸만큼이나 끔찍하고 잔혹한 영들의 몸이 괴물의 몸속에 갇혀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데커즈의 몸을 빌린 놈이 저 괴물을 가지고 뭘 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유적을 띄우는 것과 별개로, 저 봉인되어 있던 괴물을 조종이라도 하려던 것일가.
아니면 그저 중부에 풀어 헤친 다음 사람들을 헤치게 만들고 혼란을 가속시키려는 것이었을까.
이 헤딜룬드 도시가 무너지면, 이 도시를 중심에 두고 있는 다른 세 개의 도시들도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왕권의 권력은 이리저리 찢겨져 약해졌고, 영주와 성주들에게는 충분한 물자와 군대가 있다.
어쩌면 저 괴물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군벌이 일어설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 되면 왕국의 혼란은 더할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빠져들 것이고, 그 과정이나 결과에서 배후 세력은 원하는 것을 얻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뭐 하는 잡놈들인지는 몰라도 이딴 짓거리들이 그의 여행길에 크나큰 장해물이 된다는 것은 확실했다.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길 내내 피 냄새를 풍기며 다니는 것도 사양이었다.
물론 정확하고 확실한 증거나 연결고리의 흔적이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러셀이 방랑을 하는 도중 들린 마을이나 도시, 영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같이 평범한 자들은 인생에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하는 사건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직전 데커즈와 싸우고, 또 그 몸을 단말로 지칭하는 놈과 싸워서 퇴치하면서 그는 알 수 없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이전 에란디스 영지에서 칼리아를 깨우며 생명의 돌을 뿌리던 회색 갑주의 놈. 그놈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짧은 듯 긴 상념을 마친 러셀은 고개를 들어 괴물을 응시했다.
-······.
처음 말을 걸어왔던 것과 달리 괴물은 천천히 감기는 눈으로 러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러셀은 그 눈에서 한 가지 소망을 읽었다. 그건 바로 죽음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잠과 꿈을 헤매고 있는 괴물은, 지금 그에게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안식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러셀은 지금 이 공간이 저 오랜 괴물의 소망이, 찰나간 약해진 마법진의 틈을 타고 새어나와 러셀과 그의 눈에 닿으면서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죽고 싶은 건가?”
-······.
괴물은 말이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을 끔벅거렸다. 네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닫혔다가 천천히 열렸다.
러셀은 저 괴물이 누구의 손에 의해 창조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몇백 년 전의 나라에서 어떤 실험과 연구가 있어 저런 괴물이 만들어지고, 유적의 아래에 봉인되어 골렘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 건 시간의 토사 아래에 너무 깊게 묻혀서 파고들 엄두도 못 내는 지층에 있었다. 그리고 러셀은 그런 것을 직접 파헤칠 생각은 없었다.
러셀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의지에 따라 구형의 마법진이 움찔, 하고 출렁였다. 하지만 언제 출렁였냐는 듯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다시 한번 의지를 발했다. 그러자 다시 마법진은 출렁였다.
룬어와 도형들의 배열이 그의 손짓, 의지에 따라 흐트러지려하고 있었고, 러셀의 힘에 저항했다. 러셀은 천천히 그 마법진의 목적을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골렘이 한 기도 파손당하지 않고 온전히 자리로 돌아와 마법진을 구축했다면 이런 식의 간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진은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원인은 지상에서 러셀에게 완전히 부서져 한 축을 구성하지 못하는 골렘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러셀이 흘려 넣은 피로 인해 마법진의 구성에 그의 의지가 파고들 구석이 생김으로써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오던 연결 고리가 끊어지기 시작했다.
와드드드득.
소리가 나지 않는 공간에서 소리가 나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러셀은 손을 움켜쥐었다. 구형의 마법진 정면이 완전히 부서지고 커다란 틈이 생겼다. 러셀 한 사람쯤은 가볍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부서진 마법진에서 풀려나온 마력이 그의 의지에 따라 손안에 뭉쳤다. 뭉쳐진 마력은 순식간에 새파란 전광을 흘리는 전격의 창으로 변모했다.
파직, 파지지직.
러셀은 마법진이 완전히 부서져 구속이 풀리고 자유를 되찾아가는 괴물 앞에 섰다. 구속이 풀리며 팔다리를 자유롭게 놀릴 수 있을 것이건만, 군영체를 지닌 일그러진 괴물은 그저 멍하니 몸을 늘어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괴물의 가슴팍에 닿고 전격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전격은 순식간에 괴물의 심장에 닿고, 그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게 만들었다.
쿵- 하고 투명한 파동이 괴물을 중심으로 해서 구형으로 퍼져나갔다.
괴물의 눈동자 네 개가 부릅 뜨였다가 다시 힘을 잃었다. 완전히 감기는 눈동자 속에서 러셀은 고마움의 감정을 읽었다.
우르르릉-
어둠 속 공간이 흔들렸다. 러셀은 의식을 반전시켰다. 일순 가라앉았던 그의 몸과 의식이 공간을 뚫고 위로 솟아올랐고 러셀은 눈을 떴다.
“러셀! 괜찮아? 방금···!”
“괜찮아. 일단 나가자. 무너질 거야.”
러셀과 이루실은 유적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나오는 뒤편으로 공동의 천장이 무너지고 돌덩어리가 우수수 떨어졌다. 오래된 제단과 골렘들은 그 돌덩어리들에 차츰 가려졌다.
두 사람이 완전히 빠져나오자 유적의 입구에서 자욱한 흙먼지가 훅 끼쳐 나왔다.
“콜록, 콜록. 먼지. 뭘 한 거야?”
“다른 놈들이 와서 똑같은 짓 하려는 걸 막았어.”
“골렘들?”
“그것도 있고.”
러셀은 완전히 막혀버린 유적의 지하 입구를 내려다봤다. 전처럼 발굴을 하려고 해도 공동의 마력과 제단이 완전히 부서졌기에 파고 내려가는 것은 힘들 것이다.
또 골렘이나 마도구를 얻겠다고 설치는 놈들이나 봉인된 괴물을 깨우려는 시도도 헛수고로 돌아갈 것이다. 괴물은 그 소망에 따라 러셀이 죽음을 주었기에 그랬다.
이루실이 가까이 다가와 그를 올려다보았다. 궁금함이 가득한 그 얼굴에 러셀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지하 아래에 봉인되어 있던 괴물이 있었어. 아마 그걸 노렸던 것 같아. 아까 마법사의 몸을 조종했던 놈.”
“그걸 어떻게··· 아. 그 눈으로 본 거야?”
“응.”
“···정말 예전하고는 많이 달라졌네.”
이루실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러셀을 보다가 말했다.
“그럼 마법사, 이름이 데커즈라는 그놈은 아래에 뭐가 있던지는 몰랐던 건가?”
“그랬던 것 같아. 자기가 끌고 올라온 골렘들이 아래에서 마법진의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눈치던데.”
“어떻게? 마법사잖아. 마력과 주문, 마법진에 대해서는 알아야 할 게 많을 텐데.”
팔짱을 낀 러셀이 한 손으로 입술을 잡아당겼다.
“이상한 점이 많은 놈이긴 했지. 지식이 편향되어 있었어.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런 식으로만 가르쳤던 것처럼. 아니면···”
“아니면?”
“그렇게 주입을 당했다거나.”
“주입을 당해?”
러셀은 말을 아꼈다. 데커즈를 은밀하게 조종하던 놈들의 세력이 데커즈와 똑같이 마법사를 양산할 수 있다는 말은 무력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게 간단할리는 없고, 수많은 생명의 피와 흑마법, 금술이 동원되어야 할 일일 테지만.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놈들이 그런 과정을 어려워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
도시의 혼란은 나흘째가 되어서야 완전히 가라앉았다. 다행히 데커즈가 러셀에 의해 빠르게 죽었기에 그의 마법이 끊겼고, 유적의 부유는 멈췄다.
하지만 간헐적인 지진이 계속 발생하면서 건물이 무너졌고, 그에 깔려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나왔다.
파렐스와 겔러드 성주는 병사들과 함께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혼란을 잠재우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러셀과 이루실, 아엘라시스와 칼리아 또한 도왔다.
나흘째의 해가 지평선 너머로 기울어지고서야 혼란은 가라앉고, 무너진 건물들은 대강 보수할 수 있었다.
러셀은 균열이 간 내성의 벽을 보다가 그 옆의 계단 참에 주저앉았다. 지대가 높은 곳에 세워진 성주의 성답게, 아래로 도시의 정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여기저기 여관이나 식당, 집이 무너져 휑해진 자리가 보였다. 몇몇 인부들이 자재 나르는 것을 멈추고 저녁 식사를 하러 모이는 것도 보였다.
석양의 붉은 빛이 서쪽에서 기울어지고, 그에 따라 도시의 그림자도 같이 기울어졌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들은 그런 붉은 빛을 받아 환하게 타오르며 천천히 흘렀다.
도시 곳곳에서 음식을 굽고, 끓이고, 데치며 나는 구수한 냄새가 가득 퍼졌다.
“여기 있었군요.”
그때 그의 옆에 누군가 걸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파렐스였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얼굴에는 검댕이 묻고 머리카락도 먼지가 묻어 엉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