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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38화 (139/225)

138화 유적 (6)

탁탁 손을 턴 러셀은 손을 들었다.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던 도끼가 척, 하고 그의 손에 잡혔다. 러셀은 마지막 서리의 도끼날을 살폈다. 끈적한 체액이 도끼날에 묻어 있었다. 손가락을 대자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도끼를 뿌려 체액을 털어낸 러셀은 주변을 가볍게 돌아보았다. 넓은 시야에 무너진 건물과 그 잔해가 비쳤다.

루-바쿰니오라 어쩌구 하던 부유 유적은 그 지진과 진동의 세기가 많이 약해졌다. 데커즈의 의식이 날아가고 웬 이상한 놈이 그 빈 육신을 차지했을 때부터 그랬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챈 누군가가 마법을 이어가던 데커즈를 강제로 밀어내고 들어오면서 의식이 멈추고, 부유를 위해 떨리던 지면도 가라앉았다.

사위는 고요했다. 직전까지 너무 큰 소음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인지, 작은 소리도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진의 원인과 유적을 찾아왔던 모험가들 내지 용병들, 혹은 유적을 발굴하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은 각자 주저앉은 채 러셀과 데커즈의 시체를 번갈아봤다. 그들은 엉거주춤 일어서면서도 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러셀!”

그때 이루실이 훌쩍 다가와 그를 살폈다. 얼굴에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까 데커즈의 오른손이 그의 가슴팍을 훑은 것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가슴! 가슴 괜찮아? 어? 옷 벗어봐, 빨리!”

“아니, 누나 괜찮은···”

호들갑을 떠는 이루실에게 밀린 러셀은 하는 수 없이 코트를 벗고 찢어진 안쪽 상의와 왼쪽 가슴에 난 상처를 내보였다. 너덜너덜해진 상의와 탄탄한 근육으로 꽉 찬 상체가 드러났다.

이루실의 하얀 손이 상처 위에 가볍게 얹어졌다. 약간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에 러셀은 움찔 떨었다. 그가 다시 옷을 갈무리하면서 말했다.

“애초에 그리 깊게 나지도 않았어. 그냥 생채기 정도···”

그의 말이 맞았다. 원래부터 강건했던 그의 신체는 벌써 피가 멎고 딱지가 져 있었다. 툭툭 털어내자 어느새 뽀얀 살이 올라와 있어서, 약간 하얗다는 것 빼고는 다른 피부와 그리 차이나지도 않았다.

“···조심했어야지.”

“응?”

약간 낮고 무겁게 울리는 목소리에 러셀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얼굴을 푹 숙이고 있던 이루실이 갑작스레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약간 상기된 얼굴, 눈가에는 물기가 어려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그 모습에 러셀은 잠깐 멍한 얼굴이 되었다.

이루실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조심해. 알았어?”

“···그래.”

“너 어디 다치거나 그러면 나 미쳐버릴 거야.”

“알았어.”

이루실은 곧 몸을 돌렸다. 귓불이 약간 빨간 것이 부끄러운 듯했다. 뒷머리를 긁적인 러셀은 죽은 듯 누워있는 데커즈의 시체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 아직 있지?”

그는 데커즈의 몸을 빙글 뒤집었다. 반으로 갈라져 미간 사이가 넓어져 있었고, 좌우로 멍한 눈이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죽은 것으로 보기 충분한 몰골이었다.

“안 속는다.”

그때 갑자기 눈알이 휙 돌더니 정확히 러셀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코까지만 갈라져 온전함을 유지하고 있는 입술에서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러셀은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내는 놈을 내려다봤다.

“나도 그게 신기해. 가는 길마다 네놈들이 있으니 말이야.”

러셀은 다리를 굽혀 쭈그려 앉았다. 데커즈의 몸은 무리하게 마력을 이끌어 낸 후유증을 치르는 듯 이상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푸른 핏줄이 시커멓게 변색 되더니 가뭄에 찌든 논바닥처럼 쩍 갈라졌다. 그리고는 발끝, 팔의 뜯겨진 절단면에서부터 우수수 부서져 내렸다.

“뭐가 목적이냐?”

“···뭐···?”

러셀을 눈에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라보던 시체의 허연 눈알이 흔들렸다. 러셀은 말을 이었다.

“타락한 용을 깨워서 도시 하나를, 나아가 북동부를 쑥대밭으로 만들려 하고. 북부의 마을에서는 오래된 대악마를 깨워 악마종의 소굴로 만들려 하고. 중부에서는 고대의 흡혈귀를 깨워 뱀파이어의 도시로 만들려 했지. 이후에는 신을 잃어버린 오크를 선동해 인간들과 전쟁을 일으키려 했고. 맞나?”

“······어떻게. 설마, 그걸 전부, 네놈이···?”

“보기보다 정보는 조금 느린 편인가 보군.”

“큭, 이런 놈이··· 억? 어어억!”

러셀의 마안이 빛을 내자 갑자기 놈이 비명을 질렀다. 놈의 허연 눈깔에 옅은 보랏빛이 반점처럼 퍼져가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놓아라! 놓으란 말이다!”

“갈 땐 가더라도 선물은 받고 가야지.”

푸화악!

시체에서 격렬한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허연 눈깔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그 불꽃을 타고 올랐다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러셀은 마안을 꺼트렸다. 밝은 대낮에도 선명하게 빛나던 빛이 꺼지고, 원래의 눈으로 돌아왔다.

“완전히 죽은 거야?”

이루실이 타박타박 걸어와 물었다. 아까 보인 행동이 부끄러운지 시선을 그에게 향하지 않은 채였다.

“어.”

데커즈의 몸을 조종하던 놈은 사라졌다. 죽은 것이 아니라 몸에서 떠난 것이었다. 물론 가기 전에 나름대로 타격을 입혀놓은 상태였다.

데커즈의 시체를 조종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는 점과 시체 속에 러셀이 밀어넣은 마력의 순환작용으로 놈은 극심한 고통과 통증을 얻고 사라졌다.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서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 것이다.

러셀은 시체에서 더 뭔가가 일어나거나, 다시 움직이려는 낌새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몸을 뒤졌다.

곧 러셀의 손에 석판 하나가 들렸다. 부유성은 아까부터 떨리기만 할 뿐, 이제는 떠오르지 않았다. 간헐적인 진동은 이어지고 있으나 그게 전부였다.

이제 이 골렘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시간이었다. 데커즈의 최근 기억 속에서 이 석판을 뽑고, 마력과 생명의 돌을 주입하니 골렘들이 작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골렘들을 조종하는 법도 이 안에 적혀져 있었다. 피를 한 방울 떨어트리면 그 피의 주인을 인식해 명령을 따르는, 단순하지만 아주 확실한 구조. 거기다 골렘의 명령권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서는 전 주인을 죽여야만 이뤄진다는 것도 특이했다.

“저···”

문득 그를 부르는 소리에 러셀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죽을 뻔한 사람들이 겸연쩍게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해 줘서 고맙습니다.”

서넛 정도 되어 보이는 그들은 바로 직전 러셀과 데커즈의 싸움,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시체가 벌떡 일어나 자신들을 헤치려 하는 것에서 자신들의 손으로는 전혀 낄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물러나시오. 가능하다면 멀리.”

“뭐, 뭘 어쩌시려는 겁니까?”

“이 떠오르는 짓거리를 막아야지. 저 골렘들도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고.”

러셀이 쥐고 있는 석판을 몇몇 사람들이 탐욕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기 있는 골렘들은 그 자체만으로 막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수천 년 전에 잃어버리고 소실된 마도 시대의 마법들을 다시 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골렘을 이루고 있는 재료 자체가 귀한 금속과 알 수 없는 것들의 집합체였다. 거기에 골렘이 입고 있는 갑옷들과 그 양식 또한 미술사들이나 역사가들, 고고학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학술적 자료가 될 것이었다.

예닐곱 명의 사람들은 잠시 러셀의 손에 쥐어진 그 석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뭔가 기이한 힘과 분위기가 석판에 머물러 있었다. 바라보면 볼수록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몇몇 사람들의 손이 허리춤에 놓인, 또는 등 뒤에 매인 칼의 손잡이에 닿았다.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 느리면서도 확고한 움직임이었다.

이루실이 그것을 보고 입매를 꿈틀거리며 손을 주억거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마력을 뿜어내 사슬을 휘두를 것 같았다. 그런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러셀이 발을 굴렀다.

쿵-하고 둔하고 무거운 진동이 러셀로부터 울려 퍼졌다. 그 울림에 사람들의 눈이 퍼뜩 뜨여졌다.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러셀이 말했다.

“안 가시오?”

러셀의 보라색 눈이 고요하게 빛나며 그들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자신의 머릿속을 흐리게 만들던 안개 같은 것이 물러나는 것을 느꼈다.

“아, 아. 가야지. 가야지요.”

“가겠습니다. 구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황급히 달려왔던 이들은 실력과 경험, 강함의 차이를 깨닫고 터덜터덜 물러나 유적 입구를 떠났다. 러셀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다가 석판을 내려다보았다.

뭔가에 홀린 듯하던 그들의 행동은 확실히 수상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이 들고 있는 이 석판과 관계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석판을 보아도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이게 저 골렘들하고 같이 있던 석판이라 이거지? 어떻게 쓰는 지 알아?”

러셀은 이루실의 물음에 석판을 갈무리했다. 혹시 그녀에게도 이상증세가 나타날까 봐서였다.

“어.”

“어떻게?”

“방금 알았어.”

러셀은 머릿속 한구석에 뭉쳐놓았던 데커즈의 기억을 조금씩 풀어 헤쳤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인격의 혼동이 와 이지를 상실해버리거나, 미쳐버릴 수도 있는 짓거리였다.

그러나 러셀은 그런 기억들을 너끈히 견뎌내고, 필요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분리했다. 데커즈라는 사람이 쌓아온 일생은 삭제하고 마법과 관련된 지식만을 남겨놓는 작업이었다.

곧 러셀의 손이 마력에 푸르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는 손바닥을 석판 위에 올렸다. 그저 진회색의 돌덩이 같았던 석판은, 러셀이 흘려보내는 마력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푸른 선을 그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작동을 멈추고 정지되어 있던 골렘들의 고개가 들렸다. 여전히 투구의 T자 홈에는 붉은빛이 번쩍거리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러셀과 이루실을 적대하면서 병장기를 올리지는 않았다.

“가자.”

러셀이 명령을 내리자 골렘 군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사람의 생명력을 억지로 뽑아 만들어진 생명의 돌을 가슴팍에 장착한 골렘들.

러셀은 그 골렘들을 이끌고 유적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 입구는 아주 크고 넓었고, 아래로는 많은 수의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크기와 높이 모두 균일하게 제작된 계단은 오랜 세월 동안 부서짐 하나 없이 멀쩡했다.

계단의 끝에서 그들은 희미하게 빛이 비쳐 들어오는 공동으로 들어섰다. 공동은 그들이 내려온 입구와 계단길보다 훨씬 넓고 거대했다.

위로 커다랗게 반구형으로 올라가는 공동의 벽과 천장은 일견 아무런 장식도,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러셀의 눈에는 그 장식 없는 벽 안쪽에 숨겨진 기하학적인 마법진의 선이 보였다.

그 선들은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모여 삼각형과 사각형, 오각형의 도형을 커다란 원 하나에서 무수히 그리다가 다시 벽을 타고 내려와 공동의 바닥으로 이르렀다.

그 선들이 둥글게 뭉쳐있는 자리는 본래 두 발 달린 무언가가 오랫동안 서 있었던 듯 발자국 모양만 깨끗했다. 골렘들이 서 있던 자리였다.

다시 공동에 이르자 러셀이 뭐라 명령을 내릴 새도 없이 골렘들은 척, 척 하고 걸어가 원래 자신의 자리였던 곳에 섰다. 백 기가 약간 안 되는 골렘들이 서 있는 모습은 언뜻 보면 아무런 규칙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러셀은 그것이 올바른 위치라는 것을 알았다. 골렘들이 제자리를 찾자 멈춰져 있던 장치들이 일제히 돌아가면서 벽 안쪽의 선들에 마력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몇몇 선들은 빛나지 않고 침묵했다. 러셀은 그것이 자신과 이루실이 박살 낸 골렘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적지 않은 숫자의 빈자리가 있었고, 그 자리 아래로 지나가는 선들은 침묵한 채 마법진을 가동시키지 않았다.

러셀은 천천히 걸어가 골렘들이 서서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는 장소로 향했다. 마치 제단처럼 선 구조물인 그것은 공중의 한가운데 있었다.

계단을 오른 러셀은 원래 뭔가가 놓여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석판의 크기와 딱 맞는 홈을 발견했다. 그는 석판을 그 자리에 놓았다.

쿠구구궁-

공동이 한차례 크게 떨리며 진동했다. 러셀은 석판이 놓인 제단, 그리고 그 제단 아래 직통으로 연결되는 지하 깊숙한 것을 감지했다.

오랜 잠을 방해한다는 듯 뒤척거리는 고대의 존대. 잠에서 깰 듯, 말 듯 비몽사몽한 순간에 러셀이 늦지 않게 내려와 석판을 끼워넣고 다시 잠을 활성화 시킨 것이다.

러셀조차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그 존재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드는 듯했다. 쿵, 쿵 뛰던 심장 박동이 느려진다. 죽지는 않으나 살아있다고도 하기 어려운 가사 상태. 러셀은 그 미세한 움직임을 숨 죽이고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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