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유적 (5)
***
쿠드드드드드-
갑작스러운 떨림과 진동은 도시 헤딜룬드 전체를 뒤흔들었다. 여기저기서 건물이 무너지고, 그 건물에 사람이 깔려 다치는 등의 소란이 일어났다.
“아아악!”
“사, 살려줘!”
“엄마! 엄마아아!”
지진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갈팡질팡했다. 그 와중에 쓰러진 벽이나 돌, 지붕에 깔려 쓰러지거나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혼란을 더 해갔다.
그때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푸른 마력의 파동이 퍼졌다. 그러자 무너지던 건물들이 중력을 거스른 채 둥둥 뜨고, 주저앉아 있던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모두가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한 백발의 소녀가 허공에 둥둥 뜬 채 눈을 빛내고 있었다. 소녀의 머리에는 작지만 날카로운 뿔이 하얀 머리카락 틈새에서 삐져나와 있었다. 동공도 세로로 날카롭게 그어져 반짝였다.
마력의 푸른 파동은 그 뿔 달린 소녀로부터 계속 나오고 있었다.
“요, 용족?”
“드래코니안인가?”
소녀는 자신을 멍하니 보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뭘 멍하니 보고 있는 거야? 빨리 일어나서 도망쳐! 도시 외곽으로!”
화들짝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이를 찾은 부모들이 황급히 고개를 꾸벅였다가 길을 따라 멀어졌다.
그런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엘라시스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도시의 중심 쪽에서 심상찮은 마력의 울림이 느껴졌다. 아마 그녀의 보호자인 러셀과 누나인 이루실이 싸우고 있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아엘라시스는 섣불리 날아가지 않았다. 러셀이 그녀를 파렐스와 성주에게 남겨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 스스로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엘라시스! 서쪽 지구는 모두 대피가 끝났습니다!”
그때 아래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말을 타고 있는 파렐스가 두 손으로 확성기 모양을 만들어 외치고 있었다.
“이제 위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북쪽 지구요!”
그는 남은 병사 모두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해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동서남북 모두로 병사를 조금씩 떼어 보내기보다, 아엘라시스와 칼리아에게 남은 구획 하나를 맡게끔 해서 일을 분담화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대피는 보다 빠르게 이뤄졌다.
아엘라시스가 위에서 고개를 까딱였다.
“알았어.”
파렐스는 곧바로 말을 박차 남쪽 지구로 향했다. 내성에서 빠져나온 직후, 겔러드 성주와 파렐스는 지진에 의해 혼란스러워하는 시민들을 다독이고 병사들을 동원해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라는 명을 내렸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도시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우선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동쪽 지구로는 박쥐로 변한 칼리아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저 멀리서 그림자의 물결이 일면서 쓰러지는 건물을 받치고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이 보였다.
물질화가 이뤄진 그림자는 마치 파도처럼 높게 일어나 사람들을 태웠다. 정체 모를 검은 액체의 범람에 비명을 지르던 사람들이, 자신을 해하려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용의 시야로 도시를 한눈에 살펴보던 아엘라시스는 자신들 말고도 다른 마법사들이나 전사들이 몸을 내빼는 것이 보였다.
유적을 탐사해 온 사람들 같았다. 그 와중에 몇몇은 되려 지진의 근원지를 향해 내달렸다. 유적에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을 알고는 그 비밀을 알기 위해 가는 것이었다.
“앗, 저···”
그들을 향해 손을 뻗던 소녀였지만, 이미 그들이 잡기에는 너무 빠르고 멀리 가는 것을 보고는 단념했다. 어쩔 수 없었다.
“에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혀를 찬 아엘라시스는 거기까지 보다가 자신이 가야 하는 북쪽으로 날아갔다. 도시는 넓었고,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많았다. 마력을 각성하고 다루는 자들이야 지진 속에서도 한 몸 빼낼 수 있는 자들이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이 훨씬 많았다.
***
“그륵, 케엑···”
한 손만으로 목이 잡힌 데커즈가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그와 러셀의 키 차이는 컸고, 그만큼의 거리가 땅에서 멀어져 있었다. 데커즈는 발로 러셀을 퍽, 퍽 걷어찼다. 하지만 벽을 친 것처럼 되려 그의 발이 더 아파왔다.
숨이 막히는 고통에 마법사의 손이 러셀의 팔을 움켜쥐거나 할퀴었지만, 검은 코트로 보호되고 있는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문과 수인을 맺는 것은 턱도 없었다.
데커즈의 목을 꽉 죄고 있는 러셀의 왼손에서 무수한 송곳처럼 찔러 들어오는 마력이 회로를 막고 찢으면서 마법적 근원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생명에는 직접적인 영향이 가지 않게 조절하니, 그야말로 경지에 이른 마력조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보여라.”
고통 때문에 하얗게 질려가는 데커즈의 얼굴이 러셀의 섬뜩한 얼굴과 가까워졌다. 한쪽 눈이 역안 형태로 뒤집어진 채 데커즈의 얼굴이 러셀의 동공에 담겼다.
그 소름끼치는 눈앞에서 데커즈는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언젠가, 저 눈을 마주했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 저런 눈을 봤지? 기억 속에는 전혀 없었다. 그때 잊혀진 장막이 걷히는 것처럼 누군가 닫아두었던 문이 열렸다. 데커즈 자신조차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하려 하면 도리어 다른 곳으로 주의가 돌려지게끔 하는 주문이 그의 정신에 걸려 있었다.
-헤딜룬드로 가라.
‘헤딜룬드? 거기가 어디···’
-그곳에 네가 바라는 고대의 유물들이 있다. 가서 그걸 차지해라. 내전을 일으켜라. 목표는 시트러스 지방과 아소프, 네스투코 영지다. 고대의 유물들이 있으면 손쉽게 점령이 가능할 것이다.
‘시트러스··· 아소프··· 네스투코···’
-가라.
그리고 데커즈는 헤딜룬드에 도착했다. 그리고 미지의 목소리, 이제는 잊어버린 목소리가 남긴 단서를 찾고 겔러드 성주와 함께 유적을 발굴했다.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유적의 내부는 손쉽게 데커즈의 눈앞에서 열렸다. 그리고 수천 년 전의 골렘들도,
“으으, 으아아아···”
하릴없이 신음을 토하는 데커즈의 눈알이 좌우로 휙획 돌아갔다. 자신조차 잊고 있던 기억과 살아온 생애가 통째로 타인에게 빼앗기고, 읽히고, 분석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독자가 읽으려는 대로 가만히 페이지가 넘겨지는 것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배웠던 마법과 주문은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러셀의 마안은 그런 데커즈의 정신방벽을 뚫어갔다.
이상한 놈이다. 러셀은 생각했다. 마력을 다루는 술사든 전사든 한계를 넘게 되면 자신의 몸에 특별한 영역을 구축한다.
마법사에게는 자신이 곧잘 다루는 속성력, 혹은 학파에 따른 주문 세계가 될 것이다. 탄탄하게 쌓아 올렸다면 섣불리 정신 방벽은 뚫기 어렵다. 물론 러셀이야 태어났을 때부터 지니고 있던 기이한 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아무튼 데커즈의 주문 세계는 여러 개의 천을 억지로 엮은 것처럼 헐거웠고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일전 오크 대주술사의 정신을 열어젖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악마 겔리오투스와 거래를 했던 오크 주술사는 자신과 같은 부족 오크들 전체를 희생해서 러셀에게 복수를 위한 주술을 마친 뒤였다. 그렇기에 러셀의 마안이 손쉽게 정신을 헤집을 수 있었다.
그런데 데커즈의 주문 세계는 반대로 여러개의 맞지 않는 주문들이 혼합되어 있어 난잡했다. 어떤 것은 골렘과 관련된 것이었고, 어떤 것은 연금술, 어떤 것은 마도구 제작 및 연성, 어떤 것은 흑마법의 생명력 탈취···
마법사가 많은 주문을 아는 것이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구축할 수 없다.
마법은 세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마력이라는 재료로 규칙을 재배열하는 것. 자신의 작은 세상을 더 큰 세계에 편입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마법은 취소되고, 술자는 타격을 받는다.
“그륵, 그르르륵···”
그런 면에서 데커즈의 주문과 마법들은 호환되지 않는 것들이 억지로 잇고 붙여져 있었다. 애초에 체내의 마력조차도 그의 마력이 아니다.
마치 누군가 써먹을 마법사를 인위적으로 급조한 것 같은···
러셀의 눈이 가늘어진 그때, 데커즈의 축 늘어진 몸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듯 요동쳤다.
“끄, 끄아, 아아아아!”
동시에 그의 가슴팍 안쪽에서 심상찮은 주문의 파동이 터져 나왔다. 러셀은 그의 목을 잡은 손에서 힘을 푼 다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놓았음에도 데커즈의 몸은 바닥에서 십 센치 가량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거나 한 것은 아닌 듯 발작은 이어지고 있었고, 눈은 흰자로 완전히 돌아가 부들거렸다.
그그그그긍.
그때 아직 무력화되지 않은 골렘들 수십 기가 육중한 몸체를 일으키며 다가왔다. 주인의 변고를 알아차리고 다가오는 것인지 저마다 손에 쥔 병장기의 끝은 러셀을 향하고 있었다.
한쪽에서 골렘들을 부수고, 때에 따라선 사지를 구속한 채 바닥에 쓰러트리고 있던 이루실이 보였다. 그녀라고 해도 이 골렘들 전부를 쓰러트릴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뭐, 뭐야 이것들은?”
“골렘?”
“무슨 골렘들 양식이··· 이거 언제적 거야? 유물인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유적 입구에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유적과 던전을 헤매는 모험가들이었다.
각자 마력 수준이 낮지 않은 그들은 제각기 로브나 마도구, 갑옷 등을 차려입은 채 지진의 근원지로 찾아온 것이다.
그때 데커즈의 손과 팔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아까까지 허우적대고 있던 몸놀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교한 기술이 스며든 몸짓에 러셀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데커즈는 러셀의 왼손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까이 달려들어 러셀에게 주먹을 뻗었다. 그 심상찮은 기세에 러셀이 팔뚝을 들어 주먹을 막았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러셀의 몸이 밀렸다. 호리호리한, 단련을 하지 않은 마법사가 냈다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힘. 러셀은 코트의 방호력을 뚫고 전해진 충격에 데커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존재가 지금 데커즈의 몸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벌써 단말로서의 기능이 나타나면 안 되는데.”
“누구냐?”
러셀의 물음을 무시한 데커즈의 몸이 바닥을 박차고 돌진해왔다. 러셀은 가만히 서서 빠르게 가까워지는 그를 응시했다.
먼저 공격한 것은 데커즈의 몸을 조종하는 놈이었다. 검은 마력이 손에서 뭉치고, 뭉친 그것은 순식간에 짐승의 발톱 형상을 이루며 러셀의 목과 배를 노렸다.
단단하게 굳혀진 마력의 발톱에 공기가 갈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허나 그 발톱은 러셀의 배와 목을 베지 못했다.
공격의 궤도를 미리 읽은 러셀의 두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분명 데커즈의 발톱보다 느리게 움직였지만, 러셀의 손은 발톱이 향하는 경로를 먼저 선점해서 그 공격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교차해오는 두 팔을 바깥으로 밀어내버려 훤히 열린 가슴팍에 러셀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강맹한 주먹은 당장이라도 데커즈의 가슴을 터트리고 큼직한 구멍을 뚫을 것 같았다.
위기를 직감한 데커즈의 몸이 상식을 무시하고 움직였다. 더 짙고 많은 마력이 그의 피부와 근육을 찢고 튀어나오면서 바깥으로 밀어진 팔을 억지로 안으로 끌어당겼다.
러셀의 오른 손목을 붙잡은 데커즈는 곧바로 러셀을 확 끌어당기려 했다. 거력처럼 일어난 검은 마력이 러셀의 몸을 잠시나마 데커즈에게 가까워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데커즈의 반대편 손이 날카롭게 세워져, 그 끝을 러셀의 심장으로 겨눴다.
손끝에서 칼날처럼 솟아난 마력이 거리를 좁히며 쏘아졌다. 놀랍게도 러셀의 코트가 베이고, 그 안쪽의 셔츠와 피부까지 그 마력의 칼날에 상처 입어 피를 튀겼다.
잠시 고요가 그들 주위에 머물렀다. 데커즈는 몸이 부들거릴 정도로 힘을 주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거, 대단한, 힘이로군.”
말이 중간중간 끊겨서 나올 정도로 힘을 주는 데커즈의 모습은 아까와는 확연히 달랐다.
온몸의 피부는 창백해졌는데 푸른 핏줄은 선연히 올라와 울룩불룩했고, 눈과 코, 귀에서는 검은 핏물이 주륵 흘러나왔다. 흰자와 검은자의 경계는 사라지고 오로지 허옇기만 했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힘을 주는 데커즈의 오른손 끝은 러셀의 가슴팍 코트를 찢고 피부에 생채기를 내는데 그쳐 있었다. 그의 왼손이 데커즈의 오른손목을 꽉 쥐고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득, 소리를 내며 데커즈의 오른손목 뼈가 바스러지고 근육과 신경이 쥐어짜였다. 그러면서도 데커즈는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러셀은 이미 그 몸의 본래 주인이 죽었음을, 그리고 남은 생명력 모두를 뽑아 썼음을 알아차렸다.
“크하아아아!”
그때 데커즈의 숙여졌던 고개가 들려지면서 입을 쩍 벌림과 동시에 벌레떼를 뿜어냈다. 무수한 날갯짓 소리가 우렁찬, 엄지 손가락보다 큰 벌레떼가 날카로운 집게 입과 독가루룰 뿜으며 러셀의 얼굴에 날아들었다.
러셀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오른 손목을 휘릭 돌려 역으로 데커즈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데커즈는 순식간에 양 팔목이 러셀에게 잡혀 꼼짝 못 하는 처지가 되었고, 그런 데커즈에게 무릎이 날아들었다.
가죽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데커즈의 몸이 검은 피를 먹물처럼 뿌리며 바닥을 굴렀다. 팔꿈치부터 뜯겨나간 양팔에서 피가 주루룩 쏟아졌다.
데굴데굴 구르던 데커즈는 어느 순간 다리를 쭉 피며 일어섰다. 하지만 힘으로 뜯겨나간 양팔의 균형이 맞지 않아 비틀거렸다.
“큭큭큭, 아바돈의 벌레를 정통으로 맞았으니 아무리 너라도··· 응?”
하얀 흰자만 남은 데커즈의 푸른 핏줄 돋은 얼굴이 고개를 갸웃했다. 벌레떼를 얼굴에 정통으로 뒤집어 뼈만 남아 있어야 할 러셀이 쓰러지지 않고 계속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 벌레들은.”
거기다 그가 거추장스럽다는 듯 손을 휘휘 저어버리자 악마의 벌레들이 맥을 못 추고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더니 그대로 바들거리다가 죽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게 다야? 뭐 이상한 발톱 뽑아서 휘적거리다가 벌레 토하고, 그러는 거?”
놈에게 러셀이 다가가며 말했다. 양팔이 뜯겨 날아간 데커즈는 몸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더 알고 싶으냐? 그럼···”
뭐라 더 말을 이으려는 놈의 머리통에 뭔가가 콱, 하고 틀어박혔다. 러셀이 던진 도끼, 마지막 서리였다.
머리 절반에 도끼날을 품은 데커즈의 시체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갑자기 손으로 바닥을 짚는 네 발 형상을 취했다. 그러자 뜯겨나간 단면에서 검은 마력의 형상이 뭉치며 그대로 팔과 손이 되었다.
그리고는 바닥을 박차며 러셀과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간 그 방향에는 유적이 이상 현상의 원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달려온 도시의 모험가들이 있었다.
“어, 어어?”
“뭐야, 시발! 저 괴물 왜 이리로 오는 거야!”
머리에 큼직한 도끼를 꽂은 그대로 달려가는 모습에 잠시 벙쪄 있던 러셀이 손을 뻗어 도끼를 불렀다. 도끼와 데커즈를 한꺼번에 끌어오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상황은 뜻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사족보행을 시작한 데커즈의 몸에서 일어난 마력이 도끼와 연결되어 있던 러셀의 마력을 끊어먹더니 도끼를 머리에 매단 채 그대로 사람들을 덮쳤다.
“으아악! 뭐야!”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데커즈의 몸이 더 빨랐다. 아까처럼 검게 일어난 마력의 형상이 발톱 모양이 되어 모험가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으려는 순간.
공중에서 날아든 사슬이 데커즈의 손목에 감겼다. 다른 한 편에서 이루실이 양손으로 사슬을 형성해 날려 데커즈를 붙잡고 있었다.
“큭···”
데커즈는 이루실이 뒤에서 잡아당겨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 굉장한 근력에 이루실의 발이 바닥을 파고들며 깊은 고랑을 만들었다.
그때 러셀의 신형이 데커즈의 바로 위 허공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뒤로 한껏 젖힌 어깨를 한 번에 내질렀다. 주먹이 데커즈의 머리통을 강타하고, 그 충격에 도끼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꽝!
데커즈의 몸이 닿은 지면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움푹 팼다. 먼 거리를 순식간에 달려온 러셀이 손을 탁탁 털며 허리를 폈다.
“새끼, 성가시게 하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