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헤딜룬드 (5)
처음 데커즈라는 이름의 저 젊은 마법사를 만났을 때부터 러셀은 그를 주시했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흐릿하게 보이던 데커즈의 신체와 그 주변에 아지랑이를 일으키는 마력의 작용을 눈여겨보았다.
흔히들 마법사라 하면 준비하는 자, 라고 부른다. 시간과 재료가 충분히 있는 마법사가 틀어박힌 던전, 혹은 공방에 쳐들어간다면 설사 대마법사라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러셀의 눈이 순식간에 주변의 공간을 훑었다. 그 시선은 곧 접견실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성주에게 향했다.
그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문을 열어준 하인이 그들을 졉견실의 소파로 안내했다. 성주 겔러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들이 앉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파렐스처럼 금발이었지만, 많이 탁해진 지금은 거의 갈색으로 보였다. 눈 또한 파란 눈이었으나, 뒤편의 창문에서 비치는 햇살을 맞은 얼굴은 상대적으로 음영이 져 있어서 그저 어두운 색으로 보였다.
성주가 말했다.
“그래, 파렐스. 5년 만이구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나이가 든 것이 보여. 그래도 아직 젊긴 하다만.”
“···그러는 형님은 많이 늙으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일이라면, 뭐 많았지.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는 이런 좋은 자리에 위치한 도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활발히 다른 도시와 교역을 이어나가지 않았지.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 그리고 그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왔던 안전주의 때문에.”
“예.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형님은 성주가 되면 당장에 문부터 열어젖힌 다음 여러 도시와 소통해야 한다고 하셨죠.”
성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 바로 옆에 강이 있는데, 그걸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지. 그저 유적을 발굴하고 거기서 나오는 골동품이나 팔아먹으면서 말이야. 언제까지 유적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어. 한정된 자원을 모두 까먹으면 용병과 모험가들도 훌쩍 떠나버리겠지. 난 내가 할 수 있는 자원을 다해 도시를 발전시켰다.”
“잘하셨습니다. 저라면 이렇게까지 못했을 겁니다.”
성주는 잠시 미소를 지으며 파렐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러셀 일행을 보며 말했다.
“이분들은 누구시냐?”
“아, 여기부터···”
“난 그쪽 마법사한테 볼 일이 있소.”
파렐스의 말을 끊고 러셀이 말했다. 당황하는 파렐스와 의외로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성주를 제치고, 러셀은 데커즈를 바라보았다.
“이 반지. 그쪽이 회로를 새긴 거, 맞나?”
데커즈는 러셀이 품에서 꺼낸 반지를 보고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렇다면?”
“이 반지를 가진 놈은 인간을 사냥하는 쓰레기더군. 오는 도중 만나고 오는 길이다. 그리고 그 놈이 이상한 말을 했지. 자신이 사냥한 인간을 납품하는 마탑이 있다고. 실험체나 노예를 목적으로.”
“······.”
“이 근처에 있는 도시는 헤딜룬드 뿐이고, 마탑 또한 여기 하나밖에 없지. 결정적으로 여기서 느껴지는 마력의 성질이 당신의 것과 같아. 해명할 수 있나?”
가만히 듣던 데커즈가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걸 왜 내가 해명해야 하는지는 둘째치고, 왜 그런 걸 생판 타인인 사람이 신경 쓰는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 중에 자네 지인이라고 있었나?”
“말이 안 통하는 놈이군. 시답잖은 수작은 그만 부려라.”
“···뭐?”
데커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러셀은 신경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앉아있던 이루실과 아엘라시스도 서서 성주와 데커즈를 향해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파렐스가 당황한 얼굴이 되어 러셀의 팔을 잡았다.
“무슨, 이게 뭐 하는 겁니까? 러셀?”
“정신 차리시오, 파렐스. 여기는 졉견실이 아니오.”
“예?”
말을 한 직후, 러셀의 전신에서 마력이 넘실거리며 새어 나왔다. 그러자 데커즈 또한 얼굴을 굳히더니 마력을 뿜어냈다.
카가가가각!
러셀의 마력과 데커즈의 마력이 졉견실의 방 중앙에서 맞부딪치며 끔찍한 소음을 흘렸다. 서로의 의지를 강제하기 위한 치열한 마력의 자리싸움에 접견실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탁자와 의자가 날아다니고, 벽에 걸려있던 그림과 천장의 샹들리에, 수납장과 소파가 마구 뒹굴었다. 하지만 그런 소란의 와중에도 성주는 의자에 앉은 모습 그대로였다.
성주의 옆에서 앞으로 두 손을 내뻗은 데커즈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이 공간은 허투루 만든 공간이 아니었는데.”
“보기보다 내 눈이 좀 좋은 편이라.”
여상스럽게 대꾸한 러셀이 조금 더 마력의 출력을 높였다. 두 사람의 마력이 맞부딪침으로써 흔들리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그때 이루실의 마력이 조형된 쇠사슬이 접견실 곳곳을 뚫고 나왔다. 그에 따라 데커즈의 마력이 크게 흔들리고, 기세 또한 약해졌다.
“이런.”
데커즈가 중얼거렸다. 한눈에 보아도 유지되고 있던 그의 주문이 깨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당황하던 파렐스도 접견실의 이상을 알아차렸다.
“이··· 이, 이게 뭡니까?”
“마법으로 만들어진 공간. 핵은 저기 앉아있는, 성주를 흉내내고 있는 골렘이군. 보시오.”
“예?!”
러셀의 손짓에 파렐스가 성주를 바라보았다. 성주의 모습은 아까와 달랐다. 러셀과 데커즈가 서로의 마력을 방사하며 맞서는 중에도 태연하게 앉아있는 성주 겔러드는, 그 피부가 벗겨져 안쪽의 금속 광택을 내고 있는 무기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두 벗겨진 게 아니라 군데군데 벗겨진 모습이 더 기괴한 모습을 자아낸다. 파렐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니, 저게. 분명 제 형님이셨는데···?”
“저건 당신의 형님이 아니오. 인간을 흉내 내고 겉가죽을 두른 것이지. 원래 나이대보다 훨씬 늙게 연출한 것도, 사실은 그 안쪽의 몸체를 노출하지 않게끔 조치한 것이고.”
러셀의 말에 두 손을 뻗고 있는 데커즈가 기가 막히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뭐 그런 것까지 알아봐? 뭐하는 놈이냐?”
러셀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이질적인 마력의 유동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알아본 것에 그치지 않고 접견실 전체가 여러 개의 술식으로 이뤄져 있는, 하나의 가상 공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기실 그도 예리해진 마력 감지가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정교하게 짜여진 가상 공간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방에 들어온 자들의 마력을 봉인함과 동시에 마도구의 발동을 억제하고, 정신을 잃게 만들며 육체에 대한 제어권까지 뺏는 그야말로 치밀하고 악독하게 짜여진 공간.
거기다 가상 공간의 핵을 이루고 있는 저 인간을 흉내내는 골렘 또한 거의 인간과 유사할 정도의 언어와 행동을 구사할 정도였다.
상체만 움직이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다른 행동을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이 공간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제약을 지니고 있었다.
“이거 단순히 마력 투사만으로는 안 되겠군.”
데커즈의 입에서 영창이 흐르고, 손이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마력이 휘몰아치고, 순식간에 열기가 치솟았다.
막대한 열풍이 데커즈가 자리한 공간에 자리하자 성주 겔러드를 흉내내고 있던 골렘의 외피가 녹아내렸다. 드러난 것은 금속성의 검은 광택을 빛내고 있는, 투박한 모양새의 인간형 골렘이었다. 가슴팍에는 초록색의 큼직한 마석이 박혀 있었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이 가상 공간을 유지함과 동시에 데커즈의 주문을 보조하고 있었다.
“뜨거운 맛을 한 번 보아야 한다면, 그렇게 해주겠다!”
불길처럼 일렁이는 열풍이 사방을 점하며 휘몰아쳤다. 그럼에도 접견실은 그을리거나 타는 기색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을 유지했다. 다만 강대한 마력의 충돌에 계속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아엘라.”
“응!”
닥쳐오는 열풍에 아엘라시스가 나섰다. 그녀가 크게 발을 내리찍자 그곳을 중심으로 새하얀 냉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바닥과 사물 모두를 하얗게 얼려가며 퍼진 냉기가 데커즈의 열풍과 맞닿자 엄청난 기세로 수증기가 발생했다.
자욱하게 가려진 수증기는 양 진영에서 다른 방식으로 사그라들었다.
여전히 냉기를 뿜어내고 있는 아엘라시스 덕에 러셀 쪽에서는 응결된 수증기가 얼음 알갱이가 되어 바닥을 구르고, 데커즈 쪽에서는 모든 수증기가 증발해버려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새끼라곤 해도 마법의 조종인 용이 직접 발한 냉기를 일개 마법사인 데커즈가 받아내는 광경. 그것은 이 기이하게 조성된 가상 공간과 아직도 망가지지 않고 핵으로서 중심추 역할을 다하고 있는 골렘 덕분이다.
러셀은 코트에서 나힐니르를 꺼내 들었다. 그 거대한 검이 전혀 나올 구석이 없는 코트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오자 데커즈가 헛웃음을 흘렸다.
“나보다 더한 놈이군.”
러셀이 한 방을 준비하고 있음을 눈치챈 이루실이 사슬을 더 생성해 손에 쥘 때, 러셀이 말했다.
“누나. 내가 가리키는 곳으로 사슬을 쏴.”
“알았어. 신호해.”
데커즈의 마력을 뚫고 날아간 사슬들이 이루실과 연결된 채로 접견실이었던 공간 이곳저곳에 틀어박혔다. 데커즈의 안색은 이제 굳어지다 못해 바위와도 같은 무정물이 된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이루실의 사슬이 박힌 곳이 이 가상 공간을 이루는 술식들이 위치한 곳, 마나의 흐름이 한 바퀴 휘돌고 멈췄다가 다시 뻗어나가는 교차로였기 때문이었다.
까드드드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나며 이루실의 하얀 쇠사슬이 공간을 통째로 감싼 다음 힘을 가했다. 그러자 접견실의 방을 묘사하고 있던 마력이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깨지며 균열을 만들었다.
“···너, 이 새끼!”
“진짜 얼굴로 보자고. 마법사 양반.”
대검을 쥔 러셀이 나힐니르를 역수로 들어올렸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일순 자청색의 빛을 발한다.
콰앙!
역수로 들어올린 나힐니를 바닥에 내리꽂자 그를 중심으로 투명한 파문이 일었다. 러셀의 손으로부터 검신을 거쳐 바닥으로 흘러가는 마력에 의해, 숨겨져 있던 술식의 문자와 기호, 문양이 줄지어 떠올랐다.
“이, 이건···!”
허공에 균열이 가고 바닥과 천장이 무너지자 마력으로 그를 보수하고 덧붙이던 데커즈의 표정이, 드디어 사색으로 물든다.
그가 방에 새겨 놓았던 술식과 초록색 빛을 띠면서 드러나기 시작하고, 동시에 초록색이 사라지면서 자색빛 마력이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아도 러셀의 마력에 의해 잡아먹히는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데커즈의 일그러진 얼굴이 러셀을 노려보았다. 눈에 어린 초록색 광망이 불타올랐다.
“계획을 방해하다니··· 곱게 죽지는 못 할 줄 알아라!”
쿠우우웅!
러셀의 말과 동시에 접견실에 가득 떠올랐던 술식의 빛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제 이 공간의 주인은 데커즈가 아니다.
“깨져라.”
공간을 부서트리는 데는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러셀의 의지를 담은 마력이 술식을 깨트림과 동시에, 천지사방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울리며 시야가 환한 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어?”
파렐스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들은 처음 들어왔던 접견실에 그대로 있었다. 다만 바뀐 점이라면 자리하고 있는 모든 사물들이 낡고, 부스러져 있었다는 것이다.
벽지는 모두 안쪽의 거친 회백색 벽을 드러내며 찢겨져 있고, 놓여져 있던 탁자는 다리가 모두 부러진 채 엎어져 있었다. 다른 가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러셀은 눈을 깜박거리는 일행을 뒤로 하고 방의 중심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데커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골렘.
그 가슴팍에 붙어있던 초록색 마석은 빛을 잃고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샤델록이라는 놈에게서 뺏었던 반지와 같은 상태.
드드드드드-!
그때, 갑자기 접견실과 성 전체를 흔드는 충격이 그들을 덮쳤다. 이루실이 창가로 다가가더니,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파렐스.”
“예, 예?”
“도시의 중심에 유적이 있나?”
“아, 예. 그럴 겁니다. 원래 유적이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된 것이라··· 그런데 그건 왜?”
이루실의 곁에 선 아엘라시스가 팔로 창가를 지탱하더니 훌쩍 몸을 띄웠다. 찰나지간 그녀의 파란 눈, 그 동공이 세로로 길쭉하게 가늘어졌다.
“오래된 것이 깨어나려고 해.”
“오래된 것?”
“응. 저 유적 안에 있어.”
그 사이 파렐스는 방의 중심에 여전히 앉아있는, 성주의 외견을 흉내 냈던 골렘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늘어트린 골렘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눌어붙은 피부가 이목구비를 장식하고 있는 골렘의 얼굴. 파렐스는 조심스럽게 그 겉가죽을 떼어다 손가락으로 문질러보았다.
“···진짜 사람의 피부, 인 것 같군요.”
“실험체로 사람을 잡아다 쓴 놈이니, 겉가죽을 발라낸 건 일도 아니었다는 거겠지.”
“···제 형님은··· 죽은 걸까요?”
“찾아봅시다.”
파렐스가 멍한 얼굴로 러셀을 올려다봤다. 러셀은 그보다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방문 바깥에서 무수히 느껴지는 인기척들.
하나 같이 그들에게 호의라고는 가지지 않은, 아니 생명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기이한 것들이 문 바깥에 있었다.
“우린 아마 절묘한 순간에 이 도시에 찾아온 것일지도 모르오. 이렇게 당신 형의 외견을 따라 한 골렘이 있는 것을 보면 꽤 오래전부터 이 도시의 통치자가 바꿔치기 당한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골렘이라는 것이 짧은 시간 내에 한 사람을 똑같이 따라 하고 묘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소. 아마 원본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 하기 위해 원본이 필요했을 터.”
“그 말은···!”
희망이 엿보이는 파렐스를 바라보며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겠지. 일단은 저 바깥의 놈들을 처리하고, 이 성을 뒤져봅시다.”
콰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골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앞에서 러셀은 묵색의 대검, 나힐니르를 힘있게 들어 올렸다.
검신의 룬이 반짝,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