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31화 (132/225)

131화 헤딜룬드 (4)

그 뒤로 이루실이 탄 말과 파렐스가 탄 말이 뒤따랐다. 내리막길에 약간 빨랐던 속도는, 다시 약간 높은 동산을 오르면서 느려졌다.

곧 그들은 동산의 위에 서게 되었다. 그 아래로 탁 트인 시야, 그리고 호수와 숲, 동산이 어우러진 평야가 보였다.

그 평야 한가운데에 오래된 도시가 보였다. 기나긴 시간과 역사 속에서 어떤 왕국의 수도, 혹은 괴물들의 근거지로도 쓰였던 도시는 이제 인간들만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단단한 성벽 안쪽으로 나무나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보였다. 들쭉날쭉한 크기와 높이 덕분에 통일감이라고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미묘한 일체감을 주는 도시였다.

아침의 햇살이 도시의 윤곽선을 뚜렷하게 빛내고 있었고, 그렇기에 도시의 성벽은 원래 색깔보다 조금 더 희게 질려 있었다. 러셀의 경이적인 눈에는 저 멀리 있는 도시의 사람들이 보였다.

성벽과 망루를 오가며 경계를 교대하는 소수의 병사나 시장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오가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각자의 삶을 살며 각자의 문제에 골몰하는, 그와 별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도시를 바라보는 러셀의 양옆에 나란히 이루실과 파렐스가 섰다. 파렐스가 중얼거렸다.

“···헤딜룬드.”

러셀이 그를 보자 파렐스는 약간 멍한 얼굴로 그 도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그리움과 아련함이 읽혔다.

“왜 그러시오?”

“···아, 아닙니다. 그냥··· 오랜만에 와서요.”

러셀의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는 아엘라시스가 파렐스를 보며 말했다.

“표정은 그렇지가 않은데? 무슨 헤어진 전 애인 본 얼굴이야.”

러셀과 파렐스, 심지어 이루실마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응? 그냥, 왠지 그럴 것 같았어.”

파렐스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전 애인이라.”

러셀은 굳이 파렐스에게 말의 뜻을 묻지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말해주지 않겠는가. 말하지 않는다면 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여기선 천천히 가지. 햇살이 좋군.”

네 사람은 천천히 걸어가는 말을 재촉하지 않고 헤딜룬드로 다가갔다.

날씨는 그야말로 화창했다. 구름은 태양을 피해 천공의 구석에서 떠돌고 있었고, 하늘은 푸르렀다. 불어오는 바람은 동산과 언덕에 자라난 풀의 향기를 등에 업었다.

칼리아는 햇빛을 피해 러셀의 그림자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러셀의 피로 새로 만들어진 육체는 흡혈귀였을 때의 부작용을을 거의 극복했지만, 아직 환한 태양 빛은 거부감이 든다고 해서였다.

오래된 도로 위를 꾸준히 걸어가자 그만큼 성벽이 가까워졌다. 한 갈래로만 나 있던 길이 점차 늘어나고, 그 길 위에서 걸어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소나 말이 이끄는 크고 작은 수레, 마차들이 소리를 내며 굴러가고 나귀의 등에 짐을 얹고 고삐를 끄는 농민들이 보였다.

그때 이루실이 다가와 말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지? 뭔가 소란스럽던데.”

“밤중에 도적들을 좀 만났어.”

“도적들?”

이루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의 흰 손이 러셀의 팔을 퍽, 쳤다.

“그걸 혼자 가면 어떡해. 날 깨웠어야지.”

“···누나. 나 강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러셀은 이루실의 도끼눈에 슬쩍 시선을 피했다.

“다음에는 깨울게.”

이루실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들은 이제 관문으로 줄지어 들어서는 행렬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다.

헤딜룬드 시로 들어가는 행렬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성문 앞에는 가슴팍과 허리에 징을 박은 누비 갑옷, 양식이 똑같은 철 투구를 쓰고 기다란 창을 세워 둔 병사 하나가 서 있었다.

푸석한 피부와 약간 충혈된 눈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병사의 시선이 러셀 일행에게 닿았다.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렐스 님?”

일행의 시선이 파렐스와 병사를 번갈아 쳐다봤다. 파렐스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하지만 곧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베크론! 잘 있었습니까?”

“아니, 파렐스 님이 여기에··· 이봐! 거기 아무나 한 명 나와봐!”

베크론이라 불린 병사가 소리치자 성문 한쪽에 세워져 있던 초소에서 어린 병사 하나가 허겁지겁 뛰쳐나왔다.

“부르셨습니까?”

“어. 여기서 나 대신 들어가는 사람들 좀 보고 있어.”

“아, 알겠습니다.”

어린 병사에게 창을 넘겨준 베크론은 일행들을 보다가 더 놀란 얼굴이 되었다. 파렐스보다 머리 반 개는 더 큰 키에 넓은 어깨, 코트와 옷으로도 숨기기 어려운 탄탄한 근육을 지닌 러셀. 거기에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지닌 미인 이루실과 백발의 소녀 아엘라시스까지.

보기 드문 외모의 일행들이니 베크론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가 파렐스에게 말했다.

“이분들은 누구십니까?”

“인연이 닿아 만난 사람들입니다. 잘 지냈습니까, 베크론? 웬일로 내성 경비가 아니라 외성 경비를 맡고 있군요?”

“저야 잘 지냈습니다. 외성 경비는, 뭐 내성에 있는 다른 병사들이 많아져서···”

“그렇군요. 아, 성주 님께 제가 왔다는 소식은 전하지 마세요.”

“예? 왜···”

“그냥 잠깐만 있다가 가는 겁니다. 성주 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군요.”

“···알겠습니다.”

베크론의 배웅을 뒤로 하고, 러셀 일행은 도시 성벽 안으로 들어섰다.

“성주와 아는 사인가 보군.”

러셀의 물음에 파렐스는 겸연쩍은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사실 제 형입니다.”

“형이라고?”

“예. 나이 차이가 조금 많이 되는··· 제 어머니가 둘째 부인이셨죠.”

이쪽도 이복형제였군. 러셀은 이루실을 힐끔 보았다가 물었다.

“형제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소?”

“원만했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열 살이었으니까요. 늦둥이 동생인 저를 아껴주셨죠. 그런데 제가 성인이 될 때쯤에는 저를 보는 눈길이 썩 곱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다음 성주를 임명하는 날짜가 자꾸 미뤄지고, 형님과 저에 대한 시험을 많이 내릴 때부터 그러더군요.”

“······.”

“그래서 그냥 제 발로 걸어 나왔습니다. 이미 형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고 저는 거기에 혼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냥 용병 일이나 하면서 돈 좀 모아보자 하고 나와버렸지요.”

러셀은 새삼스런 눈으로 파렐스를 바라봤다. 의외로 그와 겹치는 부분이 꽤 있었다. 이복동생이라는 것도 그렇고, 위에 형제가 있다는 것도 그렇고, 후계에 대해 시끄러워지니 나와버린 것도 그랬다.

“돈을 모은 다음에는?”

“뭐, 어디 좋은 영지에 정착하는 거죠. 장원이나 저택을 사서. 하인이나 서넛 부리고, 아름다운 부인과 자식들 얻으면 괜찮을 것 같아서.”

“꿈 같은 바람이군.”

“그렇지요? 자, 그럼 먼저 여관을 잡아봅시다. 이쪽입니다.”

파렐스가 길을 잘 안다는 것처럼 그들을 안내했다. 러셀과 이루실, 아엘라시스는 그 뒤를 느릿하게 따라갔다.

그들 주변으로 많은 사람이 지나갔다. 화려한 조끼와 바지를 입은 상인, 머리에 까치집을 만든 어린 농부, 용병들까지.

“용병들이 꽤 많은데. 일거리가 풍부한 곳인가 봐.”

이루실이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무장을 한 이들의 비율이 꽤 되었다. 그중에는 이종족들도 섞여 있었다.

후드로 얼굴을 가렸지만 가벼운 걸음과 몸놀림에서부터 요정임을 짐작할 수 있는 자들 몇몇과 짤막한 다리로 퉁탕거리며 걸어가는 난쟁이 서넛. 어디서 맥주라도 마시고 온 것인지 벌게진 얼굴로 무리를 짓는 그들은 갑옷과 도끼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앞장서던 파렐스 또한 그들을 본 것인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헤딜룬드 시에는 아직 개발 중인 유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발굴되는 골동품들이 고고학적 가치가 있어서 각지의 전문가들이 모여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가끔이지만 마도구도 나올 정도이기도 하고요. 그래봤자 작동도 안 되는 것들이 대다수이긴 하지만···”

낮으로 넘어가는 시간대에도 골목과 골목의 사이에는 얇고 속이 비치는 옷을 입은 창부들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했다.

그녀들의 목적은 주로 초짜임이 분명한 어린 용병들이었다. 막 칼과 피, 땀과 강철의 세계에 입문한 어리숙한 남자들. 그런 남자들은 창부의 손길을 애써 뿌리치지 못한 채 같이 시시덕거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오늘 나 장사 그만둔다는 말로 주위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이국적인 외모의 상인도 있었다.

사람들의 활기가 눈과 귀, 코로 스며들어오는 도시의 일상이었고, 그것은 오래되어 보이는 성벽과 건물들과는 상반된 모습으로 일행들에게 다가왔다.

그런 도시를 파렐스는 놀람과 그리움이 담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루실이 주위를 보다가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사람들이 많네. 활기차고.”

“그러게요. 제가 떠나올 때보다는 확실히 그렇군요. 그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형님이 도시를 잘 다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갑자기 좌우로 비켜서기 시작했다. 뭔가에 화들짝 놀란 듯 분분히 물러나는 그들의 표정에 긴장감과 두려움이 비쳐 보였다.

“뭐지?”

다가오는 자들은 병사 다섯과 로브를 입고 있는 큰 키의 사내였다. 로브의 사내와 러셀의 눈이 마주치고, 사내의 입가가 길쭉한 호선을 그렸다.

파렐스가 길을 막고 선 병사들에게 물었다.

“뭡니까? 왜 길을 막고 서는 겁니까?”

“당신이 성주 님의 동생이군. 맞나?”

“···맞습니다만.”

“성주 님이 부르시네. 같이 가지.”

“내가 온 걸 성주 님이 아신다고요? 당신은 누굽니까?”

로브의 사내가 말했다.

“성주의 마법사, 데커즈일세. 답이 되었나? 어서 가지. 그쪽 일행들도.”

데커드가 손짓하자 병사들이 척척 움직여 러셀 일행을 감쌌다. 언뜻 보면 호위라도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들이 어디론가 가지 못하게 막는 모양새였다.

파렐스가 굳은 얼굴로 다가와 러셀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여기 온 걸 어떻게 알았는지···”

“난 알 것 같군. 그리고 그건 파렐스, 당신 잘못이 아니오.”

러셀은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보며 미소를 띠고 있는 데커즈에게 송곳니가 드러나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반지의 마력 회로에서 느껴지던 마력이 저 마법사에게서 똑같이 느껴졌다.

거기다가 그가 가진 마력은 상당했다. 젊어 보이는 외모에 비해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러셀이라는 이단아가 이미 있긴 했지만 그는 워낙에 수라장을 거쳐온 역전의 전사라는 점이 달랐다.

본래 마법사가 마력을 키우고 용량을 넓히기 위해서는 타고나는 것과 가진 주문의 세계가 비교도 할 수 없이 커야 하는데, 데커즈는 둘 모두 아니었다.

“일단 가보지. 여관은 나중에 찾아봅시다.”

병사들의 호위 겸 포위를 받으며 러셀 일행은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말에 타 있었고 병사들은 걸어갔기에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 때문에 좁아 보이던 길은 병사와 마법사 데커즈가 앞장선 것만으로 비켜주면서 넓어지고 있었다. 도시의 시민들은 감히 구시렁거리지도 못한 채 그들을 흘끔거렸다.

마법사에 대한 두려움이 엿보이는 표정들이었다. 단순히 마법사를 두려워한다는 것보다는, 데커즈라는 인물에 대한 두려움.

내성으로 가는 길은 잘 다듬어진 판석들이 깔려 있었다. 병사들의 군화와 말들의 발굽 소리가 따각거리며 소리를 냈다.

외성보다는 낮지만, 훨씬 잘 관리되고 깨끗한 내성의 성벽을 넘어서자 한쪽에 세워진 마구간이 보였다.

“말은 저곳에 세워두시오.”

말들을 마구간에 놓은 그들은 곧 내성의 성주 접견실에 들어서게 되었다. 접견실은 화려하고 고풍스러웠다.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푹신한 의자에 앉은, 옆머리에 희끗한 새치가 돋은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러셀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가 헤딜룬드의 성주, 겔러드였다. 파렐스의 말대로라면 나이차이는 10년 밖에 차이 나지 않을 텐데, 그는 사, 오십 대의 얼굴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는 들어서는 일행들을 보다가 파렐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파렐스. 거진 4, 5년만인가?”

“···형님. 많이 늙으셨군요.”

파렐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겔러드를 바라보았다. 겔러드는 털털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런 편이지. 이 자리라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쉬운 자리는 아니더구나.”

꼭 그 자리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러셀은 접견실을 가로지르며 성주의 뒤에 서는 마법사 데커즈를 가만히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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