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헤딜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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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길 중에 갑자기 벌어졌던 이루실과 러셀의 싸움이 끝나고. 일행들은 다시 각자의 말에 올라타 길을 나섰다. 도중에 사라넨이 갈라져 숲으로 들어갔다.
“고마웠습니다, 러셀. 언제나 자연의 가호가 함께하길 빕니다.”
“그래. 너도 잘 지내길 바라지.”
러셀과 일행들에게 작별 인사를 마친 드루이드 사라넨은 그대로 숲속으로 사라졌다. 우거진 나무와 수풀 사이로 연두색 머리카락이 출렁이다가 자취를 감췄다.
갈림길에서 제스 또한 말머리를 바꿨다.
“저는 이쪽으로 가겠습니다.”
“대교회로 가시오?”
“예. 하일른 경의 실종을 알리고, 다른 교회 지부에 연락해서 새로 들어온 소식이 없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행운을 빌지. 조심하시오.”
“예.”
인사를 나눈 제스가 자신이 타고 있는 백마의 옆구리를 짧고 강하게 쳤다. 다그닥다그닥 거리며 하얀 말과 성갑을 입은 성기사가 길을 떠나고 구릉 너머로 멀어져갔다.
아엘라시스가 러셀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거야?”
사실 정해진 곳은 없었다. 에란디스 영지를 나오자마자 마적단에, 흑마법사와 얽히고 악마를 잡으러 여기까지 온 것이었으니까.
그때 가만히 있던 파렐스가 손을 들었다.
“혹시 갈 곳이 없으시면, 근처의 헤딜룬드라는 도시로 가지 않겠습니까?”
일행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이루실과 칼리아, 아엘라시스, 러셀 등 네 명의 눈이 몰리자 파렐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모두 요정과 비견해도 모자라지 않는 외모의 소유자들이 바라보니 괜히 긴장되었다. 그 자신도 그리 모자란 얼굴이 아닌데도 말이다.
아엘라시스가 안장에 팔꿈치를 얹고 물었다.
“어떤 도시인데? 재밌어? 특산품이 뭐야? 맛있는 술이 있나?”
그 속사포 같은 질문에도 파렐스는 개의치 않고 부드럽게 웃었다.
“중부의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이면서, 지하 미궁과 살아있는 던전, 고대의 유물이 아직 발굴되고 있는 도시입니다. 수많은 모험가와 용병들의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근처에 큰 호수와 강도 있고, 포도와 사과 등 과일이 잘 자라는 곳이죠. 과일주가 유명합니다.”
“가까운 곳이오?”
파렐스는 러셀의 물음에 그를 보며 말했다.
“멀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동쪽으로, 그러니까 라하무른 산맥을 넘어가면 나오는 도시입니다. 여기 라함 영지와도 교류를 맺고, 다른 지방으로 이어지는 도시들과도 무역으로 연결되어있는 꽤 큰 도시죠.”
러셀은 이루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딜 가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칼리아 또한 마찬가지였고, 아엘라시스는 과일주라는 말에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 또한 정확하게 어디로 가야겠다는 목적지를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언제나 여행이었고, 여행은 과정으로써 여행자들을 이끌 뿐이었다.
아직 못 본 도시와 이종족들은 넘치도록 많다. 그것들 얼굴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럼 가보지. 헤딜룬드라는 도시로.”
다섯 명은 그렇게 가도를 향해 달려갔다. 정오에 올라선 태양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
그리고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수정구로 비춰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그들이 가는 방향을 보고는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수정구의 안쪽이 검게 물들었다가 푸른 빛만이 일렁거렸다.
그리고 수정의 푸른 빛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자가 맞는가?
사내가 대답했다.
“예. 찾고 있던 그 남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회유의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어딘가에 머무르는 것을 싫어하는 듯합니다.”
-자네가 직접 본 그 자의 실력은 어떤가? 우리의 예상보다 높은가?
“그렇습니다.”
남자는 잠시 러셀이라는 이름의 사내의 위용을 회상했다. 높다란 성벽에서 떨어졌음에도 아무렇지 않고, 빠른 속도로 괴물들을 향해 돌진하던 뒷모습.
대검과 도끼를 든 쌍수의 자세로 괴물들을 학살하고, 오크 전사를 상대하며 결국에는 오거까지 죽여버렸다. 그가 아는 한, 제국군의 만 부장쯤은 되어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무위였다.
그러나 제국의 만 부장의 평균 나이대가 오십 대가 넘고, 모두들 격전을 치러 온 노장인 것을 생각하면 러셀의 무력은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이 있었다.
고작 이십 대의 청년이 이룩해놓기에는 상식적이지 않은 실력.
산장에서부터 봐온 것이긴 하나, 이미 봤다고 놀라움이 희석되는 일은 없었다.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그의 묘사를 전해 들은 수정구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음성을 전했다.
-그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자들은?
“그림자를 다루는 그림자 술사 하나와 번개와 냉기를 다루는 마법사 하나,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머리의 여인과 금발 머리 사내가 새로 합류했습니다.”
-알겠다. 머지않아 우리 쪽에서 사람을 보내겠다. 새로 갱신되는 정보는 바로 올릴 수 있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남자, 렘파드는 수정구에서 마력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산장에서부터 상단 행렬에 동참해 라함 영지까지 온 그는, 이후 라함 영지에 쳐들어온 오크와 괴물들의 전투 속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것은 그가 제국의 군대에 있을 때 이미 치렀던 무수한 전투의 경험과 제국의 군인들이 공통으로 배우는 간단한 마력연공술을 하루도 빠짐없이 단련한 덕분이기도 했고, 실상 전쟁 자체에 그리 의욕적으로 나서지 않고 후방에서 얼쩡거린 덕분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타 다른, 마력을 다루지 못하고 몸으로 때우는 대다수의 용병들보다 전공이 뛰어나 부사관이 직접 내려준 포상금을 적지 않게 타 먹을 수는 있었다.
그는 빛이 꺼진 수정구를 보며 중얼거렸다.
“북부의 공국을 다스리는 가문, 그것도 자하드에서 가출한 도련님이라. 그리고 그 도련님을 잡으러 온 후계자. 공국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아니면 그냥 철없는 자식 하나를 잡으려 위험을 감수한 건가··· 정보가 너무 없어.”
곧 렘파드는 품에 수정구를 집어넣은 다음 여관을 나섰다. 그리고 포상금으로 산 말의 등에 안장을 매고 등에 올랐다.
“가자.”
알 수 없는 비밀을 품고, 렘파드는 말을 몰아 관문을 나섰다.
***
러셀과 일행들은 이틀 동안 가다 쉬기를 반복하며 꾸준히 가도를 걸었다. 사람과 마차, 말이 오갈 수 있게 정비를 해두었다고는 하나 산길은 산길이었다. 아스팔트 정도의 평탄함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완연한 여름이라 낮이 길어지긴 했어도, 숲과 숲 사이의 가도에는 여전히 일찍 밤이 찾아왔다.
모두 모닥불을 피운 다음, 주변에 둘러앉아 저녁 준비를 했다. 사실 준비는 러셀과 파렐스가 도맡았다. 칼리아야 까마득한 옛날의 군주였을 뿐이고, 아엘라시스는 소금과 설탕도 맨눈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 용이었다.
파렐스가 괜찮은 솜씨를 발휘했다.
“하하, 이루실과 러셀을 찾는 동안에도 거의 제가 저녁을 차렸죠.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루실은 요리를 못하기 때문. 어떤 멀쩡한 음식 재료도 그녀의 손을 거치면 기괴한 잡탕이 되고 마는 것을, 러셀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고생이 많았겠소.”
“하하하···”
러셀이 고기를 잘라서 넣자 그는 힘없이 웃으며 국자로 스튜를 떠서 그릇에 담았다. 라함 영지에서 잡다하게 산 채소와 염장 고기를 잘라 넣고 끓이자 훌륭한 냄새가 위장을 자극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숲 벌레 소리가 아스라하게 울려 퍼졌다.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모닥불이 타올랐다. 그 위로는 불티가 튀어 허공에 알 수 없는 별자리를 수놓다가 사라졌다.
일행들은 잠자리 순번을 정하고 모포로 파고들었다. 곧 곤한 숨소리가 바닥을 낮게 흘렀다.
러셀은 언제나처럼 그의 품을 파고드는 아엘라시스를 한 손으로 안고, 다른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밤하늘로 시선을 돌리면 진짜 별자리가 보였다. 비록 그가 아는 별자리는 하나도 없었지만, 이곳에도 각자의 신화와 전설이 저 밤하늘의 별들 사이에서 숨을 쉬고, 걷거나 때로는 뛰어다니고 있었다.
별들의 틈 사이로는 멀고 먼 은하수가 빛나고 있었다. 러셀은 아득한 거리 너머에서 자신의 생을 보내오는 별과 성운을 볼 때마다 저곳에 그가 알던 태양과 행성들이 있지 않을까 상상하곤 했다.
가끔은 꿈속으로만 남은 문명의 이기가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스마트폰은 참 그리웠다. 병약한 그가 그나마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 중 하나였으니.
즐겨보던 소설들의 완결을 보지 못한 것이나 시리즈 영화의 후속편들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갈 것이냐 물으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결국 쓰러져 죽을 몸뚱이보단, 주먹 하나로 괴물 대가리를 터트릴 수 있는 지금이 더 삶을 사는 것 같았으니까.
문득 러셀의 시선이 숲으로 향했다. 일견 보이는 숲은 별달리 특별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숲은 그저 숲이었다.
커다란 나무 밑동과 기둥, 무성한 줄기와 나뭇잎을 머리에 이고 조용히 서 있는 숲. 이때까지 괴물의 습격 한번 없었던 곳이었으나, 그의 감각은 그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
“진짜야? 여자가 그렇게 많다고?”
짐승 가죽들을 여러 장 교차한 옷을 입은 남자가 솔깃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의 물음에 소식을 물어온 자가 손짓과 발짓을 해가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검붉은색 머리 하나, 백발 머리 꼬마 하나, 검은 머리 하나. 이렇게 셋입니다.”
“남자는?”
“둘입니다. 하나는 덩치가 산 만 하고, 하나는 적당하죠. 적당한 놈은 장검이랑 작은 방패를 들고 있는데, 큰 놈은 그런 것 없었습니다. 그냥 코트 차림이었어요.”
무장을 안 했다는 말에 짐승 가죽을 입은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제 보니 그 새끼가 제일 병신 같은데. 산을 지나는데 칼 하나도 안 들고 다닌다고?”
“뭐 어떻습니까. 편하고 좋지요. 잘만 하면 노예로라도 팔아먹을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애들 불러 모아.”
“알겠습니다.”
***
라함 영지를 떠난 지 나흘째 저녁. 러셀이 문득 몸을 일으키자 불침번을 서고 있던 파렐스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부러트리고 있던 삭정이를 마저 넣고 말했다.
“러셀? 안 자고 있었습니까?”
“음.”
러셀은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자고 있던 아엘라시스를 내려놓은 다음, 그 위에 모포를 덮어주었다.
그 다음에는 바로 그의 오른편에서 러셀과 딱 붙어 자는 이루실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이루실은 야영을 시작한 날부터 러셀의 곁에 딱 붙어 자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줄곧 겪었던 일이긴 했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이럴 줄은 몰랐지만. 이루실은 러셀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더 즐기는 듯 그의 옆자리를 고수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러셀은 모닥불로 걸어와 앉았다. 그리고 모닥불 너머, 어둠이 내려앉은 숲 저편을 힐끗거리며 파렐스에게 말했다.
“헤딜룬드라는 도시까지 얼마나 남았소?”
“아, 이제 다 왔습니다. 여기가 지금 펜마우르 산줄기의 중간쯤이니까, 내일 아침이나 낮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도시의 치안은 어떤 편이오?”
뜬금없는 물음이었지만, 파렐스는 턱에 손을 대고는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도시 자체가 용병들이 많이 드나드는 만큼 칼잡이들도 많고, 상행이나 상단의 호위 병력으로도 많이 고용되지요. 성주가 개인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병사들도 있고··· 기사도 한둘에서 셋은 있는 걸로 압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근방의 숲이나 산까지 관리하기는 힘들겠군.”
파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게다가 요즘 왕국의 정세도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왕과 신하들 간의 신경전이 거세지고 있답니다. 후계 문제 때문에 그렇다는군요. 왕은 1 왕자를 후계로 밀고 있지만, 카나바스 대공은 2 왕자를 후계로 밀고 있으니.”
“제국도 후계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던데. 여기도 그런 모양이군.”
“뭐, 귀족 집안이라는 것들이 다 그런 것들 아니겠습니까. 그런 거 머리 아파하면 그냥 집 나오는 거죠···.”
그 말을 하는 파렐스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어쨌든, 그래서 요즘은 특히나 길을 걸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도시와 영지들이 모두 몸을 사리다 보니 근처의 치안까지 유지하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자기네 병사들을 더 늘려서 입단속을 시키려 들지···. 어, 어디 가십니까?”
그가 몸을 일으키자 파렐스가 어리둥절한 눈이 되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볼일만 보고 오지.”
“아, 화장실입니까? 알겠습니다. 숲이 어두우니 조심··· 내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늦지 않게 오십시오.”
러셀은 고개를 끄덕이곤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무와 수풀들 탓에 모닥불은 금세 희미해져 주황색의 불빛이 되어 어른거렸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코트 덕에, 러셀은 순식간에 숲의 어둠과 동화되어 스르륵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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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떠나간 라함 영지 앞의 평원. 숲과 가까운 곳, 러셀이 겔리오투스를 죽인 곳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끝이 다 헤진 검은 후드와 망토를 뒤집어쓴, 키가 큰 괴한이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건가, 겔리오투스. 그 오랜 세월 동안 육체를 가지겠다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그대가. 고작 여기서 초라한 결말을 맞이하는가?”
중얼거리던 괴한은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주문을 읊거나, 수인을 짜서 알 수 없는 마력의 점과 선, 면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 괴한은 어떤 지점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곳은 검게 타버린 숯덩이 같은 것들이 이리저리 널려있는 곳 한복판이었다. 무척 강한 열기가 녹이고, 충격으로 구덩이가 생겨버린.
벌써 며칠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아른거리는 마력의 잔향은, 이곳에서 대단한 격전이 일어났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괴한은 자신의 주문이 여기서 크게 어그러지는 것을 감지하고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대고 앉았다.
한참 후, 괴한은 손을 바닥에 떼었다. 그의 손에는 땅속에 파고 들어가 있던 작은 살점 하나가 들려 있었다.
“···겨우 찾았군. 그렇게 깊은 땅속까지 숨어들다니··· 어지간히 무서웠던 모양이야.”
놀랍게도 괴한의 손바닥 위 분홍색 살점은 아직 생명력이 있다는 듯이 꿈틀거렸다. 괴한이 중얼거렸다.
“흡혈귀의 인자와 생명의 돌, 죽은 자들의 사념을 이용한 사령술, 거기다 키메라 연금술까지···. 잡다한 걸 넣으니 불안정해지긴 했어도, 끈질김 하나는 손에 넣었어. 겔리오투스.”
그것은 분명 겔리오투스의 살점이지만, 겔리오투스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육체를 염원하던 악마는 분명 죽었다. 이 살덩이는 그냥 본능과 꺼져가는 생명력을 붙잡고 꿈틀거리는, 벌레만도 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쓸 곳이 없는 것은 아니지.”
괴한은 작은 플라스크 안에 그것을 넣고는 품에 넣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괴한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치솟아 괴한을 가리고, 그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괴한이 사라진 자리에는 풀과 흙모래가 소용돌이 모양으로 헤집어진 흔적밖에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