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떠나는 길 (4)
어릴 적의 일이지만. 러셀은 이루실을 상대로 이긴 적이 없다. 육체적으로는 분명 그가 뛰어났으나, 마력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밀렸던 게 사실이었다.
구현究現 능력. 마력을 유형화하여, 물리적인 실체를 가질 수 있게하는 능력. 검이나 신체에 마력을 담는 것과는 그 궤가 다르고, 오히려 마법사들의 마법과도 비슷한.
하지만 술식과 영창으로 현상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과 의지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조형 능력. 그것이 이루실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구현 능력 중 가장 빈도수가 높게 등장하는 것은, 바로 하얀 쇠사슬이다.
촤르르르륵-!
이루실의 손에서 투명한 마력이 올올이 풀려나오더니, 그대로 색과 물리적인 실체를 입고 쇠사슬이 되어 손에 감겼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검은 옷차림에 상반되는 하얀 사슬. 그렇기에 오히려 더 섬뜩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루실이 러셀의 앞에 섰다.
갑자기 벌어진 남매의 대치에 일행들은 다급히 거리를 벌렸다. 당황한 사람들이 저마다 말을 쏟아냈다.
“어, 뭡니까? 저만 상황 못 따라가는 건가요? 둘이 갑자기 왜 싸우려는 거죠?”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다.”
“어? 칼리아 언니가 왜? 러셀이랑 뭐 했어?”
“아니, 뭘 하긴 했는데···”
“설마 그건가요?”
“그게 뭔데, 사라넨?”
“음······.”
자연의 수호자로서 생명의 잉태를 수없이 봐온 드루이드가 침음을 삼킬 때-
러셀과 이루실이 맞붙었다.
러셀의 신형이 뒤로 주욱 밀려났다. 그들이 있는 곳은 라함 영지 앞의 널따란 평야 지대였다. 이틀 간 병사와 농부들이 힘을 합쳐 괴수와 인간들의 시체를 불태웠기에, 들플과 들꽃이 자라났던 곳에는 까맣게 탄화되어 바스락거리는 조각들과 탄 내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파바바바바박!
러셀이 뒤로 물러나는 방향의 앞, 일직선으로 쇠사슬들이 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전방위로 덮쳐오는 사슬들을 유연한 몸놀림으로 피한 러셀이었지만, 사슬들의 수는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곧 위와 아래, 좌우로도 피할 수 없을 만큼 날아드는 사슬들. 맑은 하늘과 새털 구름, 그 사이에서 그림자를 드리우며 사슬들이 러셀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따다다다당!
그 많은 사슬들의 머리가 일제히 튕겨 나갔다. 허공으로 몸을 비틀리거나 바닥에 내리꽂혀졌다.
어느새 러셀은 코트 속에서 나힐니르를 빼들고 있었다. 사슬들을 튕겨낸 것이었다. 러셀의 길쭉한 팔과 그보다 기다란 검이 이어지니 마치 창을 쥔 것처럼 공격의 범위가 늘어났다. 그리고 그는 창을 휘두르는 것 이상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파앙-!
길쭉한 칼자루를 양손으로 잡고 넓적한 검신을 휘두르자 공기가 터지는 소리를 내고, 그 공기의 여파에 밀린 사슬들이 맥을 못 추고 비산했다.
그저 공기의 밀도로 밀어낸 것이 아닐, 공간 자체에 충격을 가하면서 퍼트린 마력파가 공기를 매질로 타고 사슬을 밀어낸 것이었다.
사슬들을 벗겨내고 선 러셀이 바로 섰다. 양손으로 쥔 대검은 아래로 늘어트렸다. 언뜻 보면 아무런 자세도 잡혀 있지 않는 듯한 무방비한 모습. 그러나 러셀의 전신에서 뻗어져 나온 마력은 공간을 점유하고 선을 그리며, 모든 방향으로의 동작을 취하는 러셀의 모습을 그려냈다.
자신의 심상과 육체, 마력이 같이 움직이며 그려낼 동작들을 계산하며, 그는 생각했다.
이루실과 싸우는 건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대련을 했던 것이 2년은 되었으니까. 그때 러셀은 하루빨리 집을 나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고, 이루실은 후계자가 되기 위한 준비에 바빴다.
마지막으로 싸웠을 때 이겼던 건, 이루실이었다. 당시의 러셀은 잘 단련된 육체와 검술을 지니고 있었지만, 마력을 다루는 데는 아직 서툴렀다.
마안을 사용했다면 어렵지 않게 이겼을 것이지만, 과거 몇 번의 사고를 통한 경험으로 그는 눈을 사용하는데 자제하고 있었다.
결국 사슬에 의해 꽁꽁 묶이게 된 그를 향해 환하게 웃는 이루실.
‘거봐. 내가 이겼지?’
그런 그녀를 향해 러셀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못 당하겠네요.’
그러나 당시부터 2년이 흐른 지금. 러셀의 무력은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루실의 손에 직접 쥐어진 사슬이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날아들었다. 이제까지 바닥이나 허공에서 마력을 구현시켜 만들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세.
커다란 지름을 그리며 날아드는 사슬은 막는다고 완전히 막아지는 것이 아니다. 길게 연결되어 있기에 결국 칭칭 감기게 된다. 방법은 아예 맞지를 않던가 중간부터 잘라내는 것뿐.
사슬은 까다로운 무기다. 마치 채찍처럼 모든 방향으로 유연하게 휠 수 있으면서도 그 단단함 때문에 쉽게 잘라내기도, 그리고 벗어나기도 어렵다. 그만큼 사용하는데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천부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타고난 이루실의 재능은 마치 손발처럼 자유자재로 수십 개의 사슬을 다뤘다.
러셀은 이루실이 직접 손에 쥐고 휘두르는 사슬 외에도 시도 때도 없어 바닥과 하늘에서 치솟고 내리꽂히는 공격들을 피하거나, 흘려냈다.
쿵-!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나아가면서 발목과 무릎, 허리와 그 위의 상체를 비틀면서 두 팔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러셀의 나힐니르가 선을 그었다.
카가가가가가강!
그럴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사슬들이 사냥감을 잡지 못한 채 머리가 비틀리고, 궤도가 틀어진 채 애꿎은 흙과 돌, 모래를 박살냈다.
이루실의 하얀 쇠사슬들은 분명 강력하게 러셀의 주위를 잠식해나가고 있었으나, 일정 반경 이내에 들어가면 힘을 잃고 흐느적거리거나 맥을 못 췄다.
러셀의 두 눈동자가 자색의 빛을 흘리며 유성 꼬리 같은 은은한 흔적을 허공에 남겼다. 그를 보며 이루실은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는 그 눈을 쓰는 데 별로 괴로워하지 않는구나.”
멀리 있음에도, 사슬의 숲을 뚫고 들려오는 누나의 목소리에 러셀이 조용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과거에 안주해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 튼튼한 두 다리가 있는데, 나아가야지.”
이루실 또한 러셀의 선명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나아감의 끝에 무엇이 있는데?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날씨, 딱딱한 바닥, 아침의 찬 이슬, 일관성 없이 덤벼드는 괴물들,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전부잖아?”
이루실의 말이 맞았다. 그가 집을 나오면서 상상했던 모든 것들은 조금 더 혐오스럽고 기괴한 형태로 그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그것들 또한 러셀이 바라고 또 겪고자 했던 풍경이었다. 전생의 그는 영상, 사진, 모니터 속 너머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것들.
그것들을 지금은 바로 코앞에서 보고, 냄새를 맡고, 심지어는 만지거나 후려칠 수도 있었다. 가장 좋은 건 역시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의 몸은 바라는 소망 대부분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넘쳤으니.
한 발짝, 한 발짝. 러셀은 무수히 날아드는 사슬들을 빗겨내고, 튕겨내고, 때로는 마력으로 억누르면서 다가갔다. 무수히 덮쳐오는 것만큼이나 그의 전신 또한 무지막지한 속도로 흔들렸다.
범인의 눈으로 보면 옅은 흐릿한 잔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숨을 한껏 들이쉬고, 무호흡으로 몸을 움직이는 러셀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피가 세차게 전신을 돌고, 남아 있는 산소가 펌프질 되며 심장을 들락거렸다.
하얀 쇠사슬이 천지사방을 물들이고, 그 한가운데 속에서 묵색의 대검을 휘두르며 묵묵히 나아가는 남자.
승부는 한순간에 결판이 났다. 이제까지 대응이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러셀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루실조차 그 빠르기를 확실히 짐작해낼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그러나 넓게 퍼트려져 있는 그녀의 사슬들은 단지 공격과 방어를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루실의 마력을 받아 구현된 그 하얀 쇠사슬은 그녀에게 사방의 정보를 전달해주는 감각 기관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뒤에서 짓쳐드는 러셀을 가까스로 잡아낼 수 있었다.
콰앙-!
이제까지 나지 않던 커다란 소음이 평야를 울렸다. 빼곡하게 일어선 쇠사슬의 벽이 일어나 나힐니르를 막고 있었다. 들풀과 들꽃, 탄화된 숯덩이들, 옅게 일어난 먼지가 한순간에 밀려 나가고.
이루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사슬을 뚫기 직전 막힌 나힐니르. 그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다급히 몸을 돌린 순간, 러셀의 커다란 주먹이 날아왔다.
이루실의 손등이 그 주먹을 쳐냄과 동시에 그녀의 반대편 주먹이 러셀의 턱을 노리고 쏘아졌다. 부지불식간에 파고들어온 기습적인 주먹에도 불구하고, 이루실의 육체는 그 공격을 피해냄과 동시에 반격까지 행한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육체를 단련해옴과 동시에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허나 러셀은 왼손바닥으로 그녀의 주먹을 막아내고, 잡았다. 그리고 끌어당겼다.
이루실은 확 끌려가는 것에 저항하지 않고 되려 몸을 날렸다. 러셀의 힘은 자신보다 윗줄에 있다. 끌려가는 것에 저항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미는 것이 균형을 어그러트리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러셀은 끌어당기는 것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리는 누나를 보며 씩 웃었다. 그에게 싸움은 이제 생의 한 목표가 된지도 오래.
악마나 괴물과 싸웠을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그를 달구고, 흥분시켰다.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른 이루실의 가벼운 몸짓은 곧 다리를 굽히고 무릎을 세워, 러셀의 관자놀이를 노리는 치명적인 일격이 되었다. 제대로 맞는다면 바위라도 박살 낼 위력이 담긴 무릎차기.
러셀이 그것을 고개 숙여 피하자 그의 긴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뒷머리를 스치는 매서운 무릎차기에 머리카락 몇 올이 베어질 정도로, 그녀의 공격에는 날이 서 있었다.
이루실이 그의 주먹에 잡혀 있는 손에서 마력을 방출했다.
펑, 소리와 함께 러셀의 손이 튕겨나가고 이루실은 자유를 되찾았다. 동시에 바닥에 착, 하고 가라앉고는 그녀의 기다란 다리가 회축을 돌며 바닥을 쓸었다.
이루실의 다리에 어린 투명한 마력의 파장이 들풀과 꽃을 가르며 러셀의 다리를 노렸다. 러셀은 펄쩍 뛰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루실이 노린 것이었다.
언제 바닥을 쓸었냐는 듯 멈춘 그녀의 다리가 곧바로 위를 향해 치솟았다. 바닥을 손으로 짚은 이루실이 핸드 스프링을 하듯이 허리를 구부렸다가 펴낸 것이었다.
그 일련의 동작들에는 한 점의 군더더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짜고 친다고 해도 이보다 매끄러울 수는 없을 공격. 하지만 러셀은 그 모든 움직임과 투로를 읽고,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다.
배와 가슴 사이, 명치를 노리고 날아드는 발끝을 오른팔의 전완을 이용해 어깨 너머로 넘긴다. 동시에 옆구리에 장전된 왼주먹이 텅 빈 이루실의 등허리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다급히 공중에서 몸을 튼 이루실의 팔이 엑스자로 교차하고.
투쾅!
이루실의 몸이 훌훌 날다가 바닥을 긁으며 떨어졌다. 겨우 자세를 갖추고 바닥에 짙은 스크래치를 남긴 이루실이 몸을 세웠다. 여기까지, 고작 3초의 공방이었다.
이루실은 달달 떨리는 팔에 힘을 주었다. 통증이 있지만, 심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타격도 아니었다.
마력을 두른 보람도 없이 러셀은 단순히 근력만으로 그녀를 날렸다. 그녀의 뼈와 근육, 신경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을 상황에서 러셀은 그저 타점에 주먹을 대고 밀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오히려 러셀이 이루실을 봐주고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교차한 팔을 내렸을 때, 발에 마력을 집중시킨 러셀이 바닥을 박차고 화살처럼 쏘아졌다.
신형이 길게 늘어나는 착시 현상이 보일 정도로 빠르게 날아온 러셀의 주먹이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 대각선으로 치솟았다.
촤르르르르르-!
쇠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무수한 사슬들이 생성되더니 러셀의 온몸을 구속했다. 그에게 밀려 바닥에 떨어졌을 때부터, 대지에 심어두었던 마력이 현상을 벗고 탈피하며 구현된 것이다.
그그그극-
그러나 사슬은 러셀을 구속한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피부 위, 몇 센티의 간격을 두고 그에게 닿지도 못했다. 러셀의 마력이 사슬을 밀어내고, 구속을 벗겨내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마안이 번쩍였다. 마나와 마력의 흐름을 보고 간섭하는 힘이 러셀의 손에 자색빛으로 어렸다.
챙그렁!
산산조각나는 사슬들. 이루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제까지 한 번도 파훼되지 않았던 사슬의 연결 고리가, 마력의 구조가 바스러졌다. 그것도 러셀이 장난처럼 내리그은 손짓 한 번에.
그리고 부서진 마력을 다시 끌어모아 사슬로 구현할 틈도 없이, 이루실의 이마에 툭, 하고 뭔가가 닿았다.
러셀의 검지였다. 그가 말했다.
“내가 이겼어.”
동생의 담담한 말. 이루실은 고개를 들었다. 러셀의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자안은 여전히 빛나고, 숨소리는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러셀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멀리, 그리고 더 높은 곳에 서 있었다. 한순간 그의 움직임을 놓치고, 날아든 대검의 궤적에 놀라 세운 쇠사슬 벽을 만든 순간.
감각과 감각, 공격과 방어의 미묘한 틈을 뚫고 러셀의 신형은 그녀의 뒤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살기를 띄운 전투였다면 이미 목이 날아가거나 심장이 꿰뚫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네. 내가 졌구나.”
이루실은 한숨을 쉬며 물러섰다. 러셀은 모든 수를 쓴 것도 아니었다. 일전 겔리오투스라는 악마와 맞설 때 다뤘던 커다란 외날 도끼. 도끼날에 어리는 서리와 한기를 보아 대단한 마도구임이 분명했다.
저 커다란 대검 또한 그러했으나, 러셀은 시종일관 쇠사슬의 공격을 맞받아치거나 흘려내는 데만 썼을 뿐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도 않았다.
막판에 날아든 것조차 그녀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그 검극의 끝은 분명 이루실의 몸이 아닌 바로 옆의 바닥을 겨냥하고 있었으니.
찰나의 순간, 공격의 경로를 제대로 읽지도 못했을 정도로 러셀의 움직임이 빠르고 교묘했으며, 그녀의 판단을 읽어낼 정도로 수 싸움에서도 능해졌다는 증거였다.
그 결과에 이루실은 오히려 안도와 기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왜? 그를 데려가지 못함에 슬픔과 아쉬움보다, 더 강해진 동생을 보고 기쁨을 느낀 것일까.
그녀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정말 많이 강해졌네. 아버지도 상대가 될까 싶을 정도야.”
“그 정도는 아니야.”
“아니긴. 그 도끼도 그렇고, 눈도 그렇고. 아직 쓰지 않은 수가 많다는 것 정도는 알아. 날 상대한 것도 봐준 거잖아.”
러셀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이루실쯤 되는 강자 앞에서는 실력을 숨기는 게 더 어려운 법이었다.
그와 이루실이 대강 싸움을 멈춘 듯하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일행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푸르륵, 투레질을 하며 다가온 크라이가 머리를 비볐다.
“어우, 손에 땀을 쥐고 보는 싸움이었습니다.”
제스가 다가와 너스레를 떨자 다른 사람들도 다가와 한 마디씩 보탰다. 파렐스야 이전부터 이루실의 실력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이루실을 이기는 러셀의 모습이 어지간히 압도적이었는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사라넨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며 마력의 잔향을 살폈고, 그런 과정에서 러셀이 직접적으로 투사한 마력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루실은 머리칼을 한 차례 쓸어넘긴 다음 러셀에게 말했다.
“좋아. 널 데려갈 수 없다는 건 납득했어. 돌아가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씀드려도, 이해하시겠지. 어머니는 오히려 기뻐하실 테고.”
“그럼?”
“겨울. 딱 겨울까지만 같이 다니고, 돌아갈게. 그 정도는 괜찮지?”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