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떠나는 길 (3)
문득 칼리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하얀 얼굴의 반은 달빛에 비춰서 빛났고, 나머지 반은 음영 속에 묻혀서 어두웠다.
알 수 없는 침묵이 둘 사이를 메웠다. 러셀은 갑자기 왜 이런 침묵이 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섣불리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칼리아의 검붉은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었다. 촉촉한 눈동자. 마치 뭔가를 바라는 듯, 갈망하는 듯한 시선이 러셀을 올곧이 바라보았다. 그때 칼리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알고 있느냐?”
“···뭘?”
“지금, 다른 이들은 그대의 치료를 기다리다가 잠들었다. 그대의 누나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상태가 호전되는 것을 보고 괜찮다고 말해주었지. 그래서 모두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다가 막 잠자리에 든 참이노라.”
“고생이군. 아엘라는?”
“먼저 잠들었다. 이루실이 데려가 같이 자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한 발짝 더 다가와 러셀에게 몸을 붙였다. 칼리아의 가슴이 러셀의 가슴에 닿았다.
“그러고 보니, 아엘라가 말하던데. 네가 날 사흘간 빌리기로 했다면서.”
“맞다. 우리가 못다 이룬 것들이 남아 있지 않느냐?”
“그건, 그렇지.”
그때 칼리아의 손이 러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녀의 발뒤꿈치가 사뿐히 들리고, 입술과 입술이 겹쳐졌다.
복도의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달빛의 각도가 틀어질 때쯤, 겹쳤던 두 사람의 그림자가 떼어졌다. 러셀은 코 바로 앞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칼리아의 눈을 보며 씩 웃었다. 칼리아가 입술을 핥은 다음 말했다.
“사흘은 다음으로 하자.”
“다음인가?”
“그래. 아침까지 이제 여섯 시간밖에 안 남았구나.”
대충 달의 위치와 기울기를 본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 들어서면서부터 칼리아는 이제까지 못 이뤘던 일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거칠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상대는 러셀이었다. 그의 힘은 칼리아도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마력은 칼리아가 더 위였다. 평상시였다면 비등비등하거나 러셀이 조금 더 앞섰을 것이나, 방금 타티아나를 치료하고 나온 이후라 그도 마력이 간당간당했다. 그래서 둘의 싸움은 거의 같은 수준에서 이뤄졌다.
러셀이 힘으로 짓누르면 칼리아가 마력으로 회복한 채 솟구쳐 그를 압도했다.
두 사람의 엎치락뒤치락은 아침 햇살이 방을 비출 때까지 지속됐다. 싸움은 마력을 모두 소진한 칼리아가 그의 등을 탁탁 치는 것으로 끝났다.
“분하다···”
그녀의 중얼거림에 러셀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니, 이게 뭐라고 분해? 자기도 즐겨놓고선.”
“그래도 말이다! 마력을 썼는데도 지다니. 어떻게 된 몸뚱아린지 모르겠구나.”
칼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옛날의 육체를 지니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시 태어난 몸이다. 그것도 러셀의 피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육체.
“···그러고 보니, 그대는 참 신기한 인간이다. 아니, 순수한 인간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워.”
“······.”
그녀의 중얼거림에 러셀은 침묵했다. 사실 그도 자신의 신체나 마안 등, 이상한 점이 많다는 점은 자각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소문들도 그러했다.
일주일간 실종되었던 아버지가, 갑자기 갓난아기를 들고 나타났다는. 아버지의 강력한 명령에 모두가 쉬쉬하지만, 사람의 입을 모두 다 틀어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거기다 아기가 자라날수록 성숙해지는 외모와 기이한 눈을 보면 정말 악마와의 사이에서 나온 아이라는 말이 돌지 않는 것도 이상할 노릇이었다.
“난 인간이야.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한.”
“······그래, 알겠다. 날 이길 정도로 강력한 인간이니 내가 여기 누워있는 거겠지.”
툴툴거린 칼리아의 입술이 러셀의 목을 타고 올라가 그의 뺨과 이마를 콕콕 쪼았다. 마치 새끼 새가 어미 새에게 먹이를 갈구하듯 재촉하는 입맞춤에 러셀이 화답했다.
그쯤 해서 러셀의 귀에 분주한 사람들의 발소리와 인기척이 잡혔다. 아침이 밝으면서 영주관의 사용인들이 일행들을 깨우고 있는 것이었다.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는 하녀들은 청소를 끝마치고 식사 준비를 위해 삼삼오오 모여서 주방으로 떠나고, 하인들은 밤새 내렸던 이슬과 먼지를 치우고 정돈 중이었다.
“칼리아.”
“알겠다.”
칼리아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자신의 그림자를 넓게 퍼트렸다. 그러자 흐트러졌던 침대 시트와 쫙 펴지고,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던 옷가지가 정리되었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일어나 그림자의 손이 잡은 옷을 하나씩 입었다. 칼리아의 그림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 묵은 공기를 빼내고 환기까지 시켰다.
“편리한데.”
“내가 좀 대단하느니라.”
칼리아가 우쭐거리는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러셀은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의 감각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감각을 피할 수 있는 실력자는 이 영주관 안에 많지 않았다.
“······.”
이루실은 방의 가운데에서 옷을 입고 있는 러셀과 칼리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하얀 얼굴, 그리고 흑색의 눈동자가 둘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러셀은 마치 부인에게 바람을 피다 들킨 남편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물론 이루실은 그의 아내가 아니라 누나였고-배가 다르긴 했지만-칼리아는 바람난 여인이 아니었다.
“누나. 내가 설명할게. 얘 이름은 칼리아라고···”
어째서 나오는 말조차 바람기를 해명하려는 듯한 어조여서 러셀 스스로도 당황하고 있을 때, 이루실이 먼저 등을 돌렸다.
“준비하고 나와. 영주가 부르니까.”
그리고 이루실은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칼리아가 러셀을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왜 내가 상간녀가 된 듯한 기분인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무서운 소리 하지 마.”
***
타티아나 영주는 평소보다 향유를 꼼꼼히 바른 상태로 식탁에서 러셀과 일행들을 맞이했다. 어째서인지 러셀을 똑바로 바라보며 은근히 옷깃을 펄럭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몰려오며 러셀의 코를 간지럽혔다.
“뭐하십니까, 영주님?”
“···아닐세.”
타티아나 영주의 행동에 호위기사 요르드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요르드는 왼쪽 팔에 부목을 대고 있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멀쩡한 신색으로 서 있었다.
기사로서 한시라도 호위를 늦출 수 없다는 태도이긴 했지만, 저래 가지고 누가 누굴 지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엘라시스가 러셀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뭔가 몸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애. 러셀, 네가 한 거야?”
“그래.”
타티아나의 피부는 어제와는 딴판이었다. 마치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광택이 돌았다. 푸석푸석 했던 회색의 머리카락도 싱그러운 윤기가 흐르며 찰랑거렸다. 모두 러셀이 어제 뚫어준 마력 회로 덕분이었다.
환골탈태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수준의 효과를 받은 것은 확실해보였다. 아엘라시스가 부러운 듯 말했다.
“러셀, 러셀. 나도 러셀한테 받을 수 있어?”
“뭘?”
“뭐긴, 어제 저 영주 님 한테 한 거 말이야.”
“넌 이미 용이라서 더 뚫고 말 것도 없어.”
마법의 조종인 용에게 무슨 회로를 뚫겠는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그녀는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지혜를 깨우치고 최강의 육체로 탈바꿈되는 용이었다.
“그럼 난 언제 강해져?”
“글쎄다.”
물론 나이를 먹었을 때 한정으로, 아직 아엘라시스는 태어난 지 이제 1년차도 되지 않은 어린 새끼용에 불과했다. 그녀가 정말 어머니 이스메니오스 만큼의 박력을 보여주려면 최소 몆백 년은 필요할 것이다.
“큼, 다 왔군. 러셀. 라함 영지를 지켜준 것도 모자라, 내 용태까지 봐주고 치료를 해준 점. 정말 고맙고, 감사하네. 제스 경과 드루이드 사라넨도,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네.”
영주가 직접 고개를 숙였다가 올리자 제스와 사라넨도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영주님. 루테온을 따르는 성기사로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드루이드로서 자연이 맺어준 인연을 외면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요. 오히려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할 따름입니다.
러셀도 담담하게 고개를 마주 숙였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영주 님. 이 영지를 덮치려던 오크 부족의 뒤에 제가 쫓고 있던 악마가 있었기에 단연 영주 님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타티아나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악마라. 그래, 그러고 보니 전쟁의 막바지에 그런 일이 있었지. 어찌 된 일인지 알려주겠나? 그리고 자네 옆의 여인들은 또 누구인지도 소개해줬으면 좋겠는데.”
러셀의 있는 식탁의 한쪽에는 그의 옆으로 아엘라시스, 칼리아, 제스가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이루실과 파렐스, 사라넨이 앉아 있었다. 타티아나는 이루실과 칼리아에 대해 물은 것이었다.
“악마의 이름은 겔리오투스로, 제가 에란디스 영지를 떠나고 나서 얽힌 악마입니다. 다행히 어제 죽일 수 있었지요. 여기 있는 칼리아는 제가 라함 영지에 오기 전 에란디스 영지에서 같이 여행에 나선 동료입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사람은, 제 누나입니다.”
누나라는 말에 타티아나 영주가 이루실을 쳐다봤다. 이루실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루실입니다.”
간단한 소개였지만, 척 보아도 그녀의 용모나 자태는 평범하지 않았다. 매끄러운 긴 흑발도 그렇고, 하얀 얼굴에 이지적인 눈썹, 커다란 눈과 오똑한 코, 빨간 입술 등. 여러모로 귀공녀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서 예사 신분이 아님을 짐작하게 했다.
타티아나는 이루실과 러셀을 비교해보았다. 러셀 또한 잘생기긴 했으나, 그 외모가 길과 방랑을 하느라 거칠어진 사자와 같다면 이루실은 공작새 같았다.
···식사가 끝난 후, 타티아나가 물었다.
“혹시 바로 떠나는가?”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볼 일은 모두 끝났으니까요.”
“어디로 갈지는 정해두었나?”
러셀은 이루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으로 가야겠습니다.”
“북쪽이라. 알았네. 가기 전에 반델로부터 보상금을 받고 가도록 하게.”
***
“괜찮으시겠습니까, 영주님?”
“뭐가 말이에요, 반델?”
반델은 그에게 존댓말을 하는 타티아나에게 약간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녀는 단둘이 있을 때는 오랫동안 자기를 모신 늙은 기사에게 말을 높여 불렀다. 아무리 반델이 괜찮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반델은 그가 젊을 적 따랐던 선대 영주님의 딸이, 이렇게 장성한 것을 보며 아쉬움에 슬퍼할 따름이었다.
“러셀이라는 남자 말입니다. 붙잡으면 큰 보탬이 될 겁니다.”
“푸, 반델. 아저씨도 믿지 않는 말은 하지 말아요. 용살자가 뭐가 아쉬워 우리 영지에 남겠어요? 그것도 저렇게 대단한 가문의 남자가.”
모두가 떠난 뒤, 타티아나 그레이스는 영주의 집무실에 달린 테테라스에 서 있었다. 그 아래로는 그녀가 다스리는 영지의 모습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높은 지대에 지어진 영주관,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층의 방에서 타티아나는 대로를 타고 걸어가는 러셀 일행을 바라보았다.
“이루실이란 이름이 그렇게 흔한 이름도 아니고. 산골짜기 영지의 영주인 나한테도 이름이 들려올 정도의 사람이잖아요. 무려 북부 공국의 공녀 중 한 사람인데.”
“하지만 영주 님께서도 그자에게 마음이 있는 듯하여···”
“윽. 그렇게 티가 났어요?”
“식사 내 그를 훔쳐보았잖습니까.”
“···그냥. 아버지가 떠오르더군요.”
“예?”
반델의 물음에 타티아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영지를 구하고 떠나가는 남자의 등을 쳐다보았다.
“언제 한번 다시 들러준다 했으니.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영지를 번영시켜야죠. 돌아왔을 때 깜짝 놀랄 수 있도록.”
아버지의 소망을 넘어, 이제는 자신의 소망이 된 꿈. 여인은 그렇게 뭐라 특정할 수 없는 마음을 깊은 곳에 묻었다.
***
하늘은 맑았다. 드문드문 이어진 새털구름이 떠다니며 한가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러셀은 오랜만에 다시 만난 크라이의 안장에 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크라이도 오랜만에 등에 러셀을 태워서 기분이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행은 모두 러셀과 제스, 사라넨, 칼리아, 아엘라시스, 이루실, 파렐스 이렇게 7명이었다. 드루이드인 사라넨을 숲에 배웅할 겸, 그리고 카이와 오크들의 부족도 한번 들릴 겸 해서 같이 나오게 되었다.
이루실이 말을 타고 다가와 물었다.
“북쪽으로 간다면. 가문으로 돌아오겠다는 말이야?”
러셀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언제까지 나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어?”
“···그건 왜?”
“겨울 전까지는 돌아가야 할 테지. 매년 겨울마다 윗쪽에서 내려오는 마수들이 있으니까.”
북부의 공국, 아소르는 아운힐나르 산맥을 타고 내려오는 마수들, 북방의 야만족들을 막고 있는 방패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여섯 개의 가문이 있고, 그와 이루실은 자하드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이루실은 다음 대 가주인 바, 오랫동안 나올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이루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겨울 전까지는 돌아가야 해.”
“미안하지만, 누나. 난 다시 가문에 돌아갈 생각은 없어. 여기서 확실하게 말해둘게.”
“···왜?”
러셀은 다시 하늘을 보았다. 정처 없이 바람에 밀려 어디론가 사라지는 구름.
“난 이 세상을 좀 더 돌아보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나온 거야. 누군가의 강요나 요청으로 다시 돌아갈 거면 나오지도 않았겠지.”
“······.”
이루실은 멈춰 섰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녀를 보며 러셀도 멈춰 섰다.
드드드드드.
그녀의 발밑 바닥이 우르르- 진동했다. 이루실의 손아귀에는 어느새 하얀 색의 쇠사슬이 쥐어져 있었다.
"내가 아직 진짜 강요라는 걸 해본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한 번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