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탐색을 위해서는
***
파렐스는 앞서 달려가는 이루실을 따라가느라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이, 이루실! 뭐 이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겁니까!”
파렐스의 물음에도 이루실은 답하지 않고 달려가기만 했다. 그마저 파렐스의 뜀박질에 맞춰서 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이 징글징글한 숲을 빠져나가 영지에 도착했을 것이다.
“에이익!”
그를 알기에 파렐스 또한 젖 먹었을 때의 힘마저 끌어오는 심정으로 바닥을 박찼다. 그나마 이루실과 다니는 동안 전투는 실컷 해왔고, 또 종종 그의 마력을 그녀가 보조해 줬기에 이렇게 달릴 수 있었다.
파렐스는 이루실에 대해 추리하고 있던 몇 가지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생각을 가졌다.
‘절대 평범한 무관 집안 사람이 아냐······. 신분도 그리 낮지는 않을 것이고.’
귀족임은 진즉에 알고 있었으나, 저 강력한 마력과 신체 능력은 또 다른 문제다. 초인이 되는 비술인 마력운용법은 무로써 일가를 이룬 귀족들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이 이치.
다만 파렐스는 이때까지 저렇게 완숙하면서도 경지에 오른 마투사를 본 적이 많이 없었다.
‘거기다 저렇게 눈에 띄는 외모라면, 아마 북부 쪽일 가능성이 높지. 그렇다면 공국의 귀족가 중 한 사람인가.’
생각을 이어가면서 달리고 있던 그때. 이루실이 숲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곧 파렐스 또한 숲을 나왔다. 그리고 드러난 정경은 충격적이었다.
“이, 이게 뭐야?”
가장 먼저 맡아진 것은 비릿한 피 냄새. 그리고 싸움으로 인해 달궈진 마나가 휘몰아치고 있는 대기였다. 아직 숙련자라고 이르기는 힘든 파렐스의 피부에도 소름이 돋을 만큼, 오싹오싹한 마나가 평야 위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아아아아아-!
그리고 전장에 중심에서 싸우고 있는 두 존재가 보였다.
“세상에, 저게 뭐람.”
파렐스가 질린 목소리를 내었다.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파렐스 또한 길 위에서 수많은 괴물들을 봐왔다. 그럼에도, 지금 보이는 저 괴물은 압도적이었다.
2미터는 되어 보이는 키에 검은 피부,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근육, 커다란 피막 날개.
숲과 산에서 느꼈던 모든 사악한 기운이 저 검은 피부의 괴물에게 모여들고 있었다.
“악마네.”
“예? 악마요?”
“응.”
그런 악마와 싸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놀라웠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파렐스는 그가 긴 꽁지머리를 휘날리며 커다란 대검과 도끼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보통 사람은 쥐고 휘두르기도 힘들 대검을 한 손으로 휘두르고, 또 다른 손에는 길쭉한 자루에 큼직하고 흉악한 외날의 도끼를 쉬지 않고 내리긋는다.
양손에 무기를, 그것도 그 용도가 완전히 다른 검과 도끼라는 이질적인 날붙이를 제 몸같이 다루는 남자. 그 남자의 몸놀림에 악마는 별 수도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밀리기만 했다.
“엄청나군요, 저 사람.”
“내 동생이야.”
“그렇군요······ 예엑? 저 사람이 말입니까?”
“응. 그새 더 강해졌네. 아버지한테 꽁꽁 묶어서 데려간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못 지킬 수도 있겠는걸.”
이루실이 중얼거린 그때, 낭패를 본 듯한 비명이 울리고 악마의 육체가 울그락불그락 꿈틀거렸다.
날개 두개가 도끼에 의해 찢겨지고, 어깻죽지 하나가 대검에 의해 몸과 작별인사를 한 직후였다.
-크륵, 크윽, 이렇게,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어떻게 얻어낸 신체인데, 이렇게는-!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력을 통한 악마의 울부짖음은 이곳에 서 있는 자, 주저앉은 자들 모두에게 잘 들렸다.
그리고 악마의 몸이 괴상한 모습으로 변태하기 시작했다. 땅에 흐르는 피가 악마에게 모여들더니 몸통이 커지고, 커다래진 몸통에서 네 개의 다리가 피부를 찢고 튀어나왔다.
점차 더 끔찍하고 혐오스런 형태로 변해가는 악마를 보며 이루실이 중얼거렸다.
“저건 놔두면 안 되겠어.”
“예?”
파렐스의 의문이 끝나기도 전에 이루실, 그리고 그녀의 마력이 움직였다.
팍!
이루실의 발이 지면을 내리찍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쏜살같이 악마에게 튀어 나가고, 수십 개의 하얀 쇠사슬이 지면에서 튀어나와 악마를 묶었다.
이후 벌어진 일들 또한 파렐스의 넋을 빼놓기에는 충분한 광경들이었다.
이제 겨우 마력을 이용해 신체의 특정 부위, 혹은 무기를 강화하는 그에게 이루실과 그녀의 동생이라는 남자가 다루는 마력의 범위와 효용은 눈알이 툭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경이로웠다.
지정한 좌표에서 사슬을 뽑아 악마를 구속하고, 때로는 직접 손에서 생성해 사지를 잡아당기거나 피부에 파고들어가 진동을 이용한 공명으로 육체의 결집을 무너트리게 하는 것도 그랬지만.
마도구가 확실해 보이는, 손잡이가 길쭉한 도끼를 무슨 투척 도끼마냥 던지고, 거기서 또 엄청난 서리를 뿜어내게 하는 남자는 도대체 가진 능력이 몇 개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화룡점정은 묵색의 대검이었다. 거의 파렐스, 자신의 몸통에 가까울 정도로 무식하고 커다란 검은 그보다 더 유려할 수 없는 선을 그리며 악마를 난도질하고 입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귀청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하얀 백색의 전격이 악마의 몸을 찢고 나와 사방을 섬광으로 물들이며 발광했다.
푸슈슈슈슈······.
점차 몸집을 불려가는, 혐오의 결정체 같던 악마는 결국 이루실의 동생이라는 남자에 의해 명을 달리했다.
이후로도 갑자기 웬 용이 날아와 벼락을 뿜으려 하다가 작은 백발의 소녀로 변하기도 하고, 갈색 피부에 검은 문신을 새긴 오크가 털털거리며 걸어와 러셀과 주먹을 맞대고, 웬 청년이 초록색 머리의 여자를 부축하며 다가오기도 했다. 도대체가 의미를 알 수 없는 구성뿐이었다.
파렐스는 그의 옆에서 걸어가는 키 큰 남자를 힐끔거렸다.
가만히 보면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어디 사교계에서 귀부인이나 후리고 다닐 법한 얼굴이, 악마나 괴물을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검과 도끼를 휘두른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았다.
“러셀이오.”
“예, 예?”
“뭔가 묻고 싶어하는 얼굴이기에.”
“아, 예. 제 이름은 파렐스입니다. 아까는 대단하더군요. 살면서 당신 같은 전사는 처음 봤습니다.”
정말 그러했다. 이름 난 기사들도 아까와 같은 상황에 던져다 놓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러셀이 물었다.
“어떻게 같이 다니게 된 것이오? 원래 동행을 두는 데 까다로운 사람인데.”
“아, 그게 또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말이죠.”
파렐스는 그가 처음 이루실을 만나게 된 경위를 소상하게 풀어냈다. 러셀은 파렐스가 보기보다 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영지의 관문에 가까워지자 타티아나 영주가 몸소 달려 나와 일행들을 맞이했다. 아직 벗지 않은 갑옷이나 허리춤의 칼을 보니 여차하다 싶으면 지원군을 이끌고 돌진할 생각이었던 듯했다.
영주가 직접 일행들에게 병사의 호위를 붙여주고, 그들은 영지 안으로 들어섰다. 하루 만에 돌아온 것이지만 거의 며칠은 바깥에 있다가 온 듯했다.
바깥의 상황을 어렴풋이만 아는 영지민들은 불안하고 두려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관문과 성벽 밖에서 괴물들의 울음 소리, 병사와 용병들의 고함 소리가 한데 뒤섞여서 들리니 퍽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영주는 부관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용병에게 보수와 관련한 지침을 하달한 다음 병사들을 병영으로 이끌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일행은 바로 영주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러셀은 눈을 떴다.
‘여긴?’
그는 어두운 공간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러셀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꿈, 자각몽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몸은··· 움직이지 않는군.’
자각몽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진 않았다. 시각 외의 감각들은 모두 아련했다. 러셀은 찬찬히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싸움이 끝난 지 벌써 하루가 지났다.
겔리오투스에게서 승리한 그들이었지만, 몰골은 패잔병이나 다름없었다. 러셀조차 악마의 주먹질을 얻어맞고 내상이 도질 정도였으니. 단련된 몸뚱아리가 아니었으면 한 방에 맞고 상반신 반쪽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격이었다.
다른 일행들 중 가장 부상이 심한 건 사라넨이었다. 다행히도 겔리오투스가 죽자 악마의 지배하에 있던 마기가 모두 사라졌고, 제스의 성력으로 치유를 마칠 수 있었다. 그래도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지금은 영주관의 빈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칼리아는 언제나처럼 모두의 시선이 없는 틈을 타서 러셀의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카이는 첸파와 그들의 부족 전사들을 데리고 영지의 한 켠에서 임시 숙소를 배정받았다. 괴물들과 싸우는 와중에 죽거나 다친 이들이 많았기에 그들 또한 휴식을 취해야 했다.
러셀은 차츰 꿈이 사그라들고 의식이 부상하는 것이 느껴졌다. 자각할 수 있다고는 하나, 의지대로 하늘이나 땅을 만들 수도 없고 전생의 세상을 투영할 수도 없는 암흑뿐인 공간.
하지만 도리어 러셀은 그 어둠이 편안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 편안함 속에서 조금씩 되돌아오는 감각을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이번 싸움으로 인해 얻은 것이 있었다. 일단 지금의 육체가 가진 한계를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벽을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전까지는 벽이 없다 생각하고 질주해왔는데, 오거 라쉐와 악마 겔리오투스와의 싸움에서 현재 그가 이뤄놓은 몸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더 얼마나 단련을 해야 할지도.
마력에 대해서는 꽤 괜찮은 성과를 이뤘다. 일단 감각권의 경계가 늘어나고, 영역 내의 수발이 자유로워졌다. 익숙하게 다뤄왔던 대검 나힐니르와 도끼 마지막 서리에도 마력을 불어넣었다면, 감각이 닿는 범위 내에서 허공을 격하고 불러들일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게 무협 소설에서 나오는 허공섭물과 같은 원리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이기어검과 같은 고절한 수법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건 던진 걸 다시 손으로 불러들이는 것뿐이었으니까. 소설 묘사로 보면 검이 알아서 적도 죽이고, 더 나아가면 검술 같은 것도 펼칠 수 있게 된다는데.
러셀에게는 아직 멀고도 먼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멀다는 사실이 그에게 좌절이나 절망을 안겨준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아직 걸어가야 하는 길이 한참은 남아 있음을, 그리고 그 아득한 거리에서 도리어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꼈다.
신비와 괴물, 신과 악마, 초인들이 날뛰는 세상에서 태어난 것을 알고 흥미와 호기심을 알았던 그때처럼.
자신의 몸이 그런 신비를 모두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천재적이라는 사실을 체감하고, 기쁨에 몸을 떨었던 것처럼.
그때 의식의 부상이 끝나고, 러셀은 잠에서 깼다. 깨자마자 육체의 통제권, 사방의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검은 눈동자였다. 투명하고 맑은 검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뭐하시는 겁니까, 누님.”
“오랜만에 만난 동생 무릎베개 해주고 있지. 예전에는 많이 해줬잖아?”
“옆방에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몰래 들어왔지.”
그녀라면 능히 가능하다. 어렸을 때부터 발소리, 인기척 하나 내지 않는 이루실에게 얼마나 장난을 많이 받았는지 모른다.
거기다가 영악하기는 또 얼마나 영악한지. 도저히 애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성숙한 짓들을 그 대단한 재능으로 펼치는 탓에 곤욕을 치른 적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후, 하고 숨을 내쉰 러셀이 일어나려 하자 이루실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이마를 밀었다. 이마에 닿는 서늘한 감촉.
“안돼. 더 누워있어.”
“얼마나?”
“내가 만족할 때까지.”
그러고는 이루실은 러셀의 머리카락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쓰다듬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녀의 눈동자가 허튼 짓을 하면 이대로 머리 가죽을 벗겨버리겠다는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몸의 상태가 만전은 아니기에, 차마 거절하지 못한 그는 감각만 퍼트려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았다.
춤추는 곰 여관의 특실이었다. 어제 하룻밤은 영주관에서 지냈지만, 아무래도 계속 지내기에는 껄끄러워 나온 참이었다.
제스와 사라넨은 영주와 상의할 것이 남아 나왔고, 러셀은 아엘라시스와 함께 여관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이제 막 아침이 밝아온 참인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제비꽃 같은 색이었다. 특실의 한켠에 놓인 침대에는 아엘라시스가 방만한 자세로 누워서 도롱도롱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어제 용으로 돌아가 브레스를 뿜었던 것이 알게 모르게 피곤함으로 쌓인 것인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자고 있었다.
“저 아이, 용이던데. 칼리스덴에서 만난 거야?”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존댓말 할 거야? 예전처럼 해.”
“누님. 전 이제 가문을 나온 사람입니다. 차기 가주에게 감히 그럴 수는···.”
“그렇게까지 나랑 거리를 두려고 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가주가 된다고 해도, 내가 네 누나고 네가 내 동생이란 건 변하지 않아. 그렇잖아?”
러셀은 말없이 그의 누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침의 햇살을 등지고 있기에 이루실의 얼굴은 음영에 가려져 어두웠다. 하지만 러셀의 눈은 그 음영 너머의 슬픈 표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
결국 진 건 러셀이었다. 그가 슬쩍 고개를 돌리고 말하자 이루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의 얼굴을 껴안아 버렸다.
“진작 좀 이러면 좀 좋아?”
“윽, 이루실. 나도 이제 스물 하나인데 이런 건 좀···.”
“네가 스물하나든 서른하나든 나한테는 그냥 동생일 뿐이야. 내가 직접 기저귀도 갈아주고, 밥도 먹이고, 목욕도 같이 한.”
러셀은 한숨을 쉬었다. 가족 중에서 이루실은 가장 대하기 어려운 일원이었다. 아버지 라하르트야 가주로서의 일이 많고, 러셀을 데려온 경위가 워낙 불가사의한 면이 있어 데면데면한 편이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러셀 님? 저 제스입니다.”
“칫.”
이루실이 힘을 풀고, 러셀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열자 초췌하지만, 그런대로 기력을 회복한 제스가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아냐. 하일른 경 때문이겠지.”
제스가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러셀은 켈파그의 뇌리를 마안으로 헤집으면서 그의 신원을 알아냈다고 제스에게 말했다.
원래 제스의 임무가 라함 영지의 변고와 악마의 흔적, 그리고 실종된 하일른을 찾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래도록 인내한 것이다.
“맞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일단 아침부터 먹고 얘기하지. 나도 기억을 정리할 시간이 조금 필요해.”
“······알겠습니다. 먼저 내려가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