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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22화 (123/225)

122화 재회 (2)

***

“아으, 머리야.”

하얀 비늘을 가진 용이 머리를 흔들며 일어섰다. 그녀는 현재 커다란 구덩이에 들어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엘라시스는 두 앞발을 머리에 대고 끙끙거렸다. 숲에서 오랜만에 변신을 풀고, 러셀을 등에 태운 다음 전속력으로 날았다.

그리고 온 힘을 모아 악마한테 브레스를 날렸고, 머리를 얻어맞았다.

콰앙!

용의 머리가 퍼뜩 올려졌다. 인근에서 무시할 수 없는 마력 파동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끙차.”

구덩이를 기어나온 아엘라시스가 파장이 터진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회청색의 눈을 크게 떴다.

“와.”

거기엔 괴상한 모습이 된 괴물이 있었다. 하얀 사슬에 칭칭 감겨서 빠져나오려 애쓰는, 하지만 그럴수록 사슬이 더 감겨와 자가당착적인 상황에 빠지기만 할 뿐이었다.

아엘라시스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저 멋들어진 사슬을 누가 만들어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

“이루실?”

러셀이 중얼거렸다. 틀림없었다. 아직 멀었지만, 거리는 그의 눈에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거진 나무 틈 사이로 빠져나오는 두 개의 인영. 하나는 남자였고, 하나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러셀의 1년 전 기억 속에 남겨두고 온 모습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새카만 흑단 같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와 황금 비율을 이루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커다란 눈, 오똑하면서도 시원하게 내리뻗은 코, 붉은 입술.

결정적으로, 그녀가 내뿜고 있는 강력한 마력의 파장. 오해할 수 있는 외모와 마력이 아니었다.

캬아아아아악!

그때 괴성이 들려왔다. 하얀 쇠사슬에 온몸이 칭칭 감겨져 있는 악마, 겔리오투스였다. 아니, 이제는 악마라고 불러도 될지 의심스러운 형태를 띄고 있는 괴물.

러셀은 일단 괴물인지 악마인지 모를 놈한테 눈을 돌렸다. 그의 자청색 마안이 빛나고, 왜 이놈이 이따위로 변한 것인지 그 흐름을 읽어냈다.

곧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진 채 몸부림치는 괴물의 속이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겔리오투스가 저리 끔찍하게 변하게 된 이유는 두 개였다.

첫 번째는 역시 육체를 만드는 재료로 다수의 오크를 썼다는 것에 있다. 아마 인간보다는 오크가 더 유전적으로 월등하기 때문인지, 체력과 근력, 골격근의 향상을 위해 베이스를 오크로 설정해두었다.

마력 회로 같은 것이야 악마의 비정형 육체가 스며들면서 자연히 해결되는 것이고.

그러나 그 오크의 시체를 액화시켜 주문으로 가공해 만든 육체라는 점이, 도리어 오크 종족의 신인 불칸의 힘이 간섭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두 번째는 겔리오투스가 미리 박아놓은 여러 개의 생명의 돌들. 인간을 제물로 생명력을 뽑아내 만든 생명의 돌이 가진 능력은 육체에 기생하면서 부여하는 막대한 재생 능력과 마력이다.

불칸의 성력에 의해 붕괴하는 육체의 수복을 무리하게 끌어모으는 과정에서 이도저도 아니게 된 것이, 작금의 저런 외관인 것이었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겔리오투스는 아까부터 말이 아니라 괴성만 토해내고 있다.

그어어어어어.

몸부림을 치며 사슬을 벗겨내려 하고 있었지만, 사슬은 마치 거미줄처럼 더 꽉 조여들면서 겔리오투스의 운신을 제한했다.

러셀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남은 마력을 끌어모아 몸을 날리자 겔리오투스 또한 러셀의 살의를 읽고 반응했다.

그가가가가가!

어떤 짐승도 내지 않을 괴이한 소리와 함께 겔리오투스의 전신에서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그로 인해 피부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던 사슬들이 풀리고, 사슬에 감기지 않은 검붉은 피부에서 끝이 송곳처럼 날카로운 촉수 줄기가 튀어나왔다. 러셀의 몸이 그 무수한 촉수들에 휘감긴 순간.

파바바박!

잘게 쪼개진 육편들이 사방으로 퍼지고, 그 안에서 멀쩡한 신색의 러셀이 드러났다. 어느새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검은 갑주가 광택을 흘리며 자리하고 있었다.

날렵하고 날카로운 디자인에 이음매와 틈새도 없이 전신을 보호하는 갑주.

대검과 도끼로 촉수의 공격 세례를 걷어내고, 그 밖의 것들은 코트를 변환시킨 갑주로 막아낸 러셀이 다시 무기를 휘둘렀다.

하얀 궤적을 그리는 도끼와 거대한 묵색의 검신이 쉼없이 악마의 몸체를 타격했다. 비명을 지르는 겔리오투스가 몸부림을 쳤지만, 악마의 다리를 묶고 있는 사슬이 행동을 강제했다.

콰앙!

그의 도끼가 마력을 받아 하얗게 달아올랐다가 그대로 악마의 등짝에 내리꽂혔다. 단단한 외피는 도끼질 한 번으로 깨지지 않았다.

“안 깨지면, 깨질 때까지 친다.”

러셀의 근육이 일순 부풀어며 막대한 힘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벼락같은 기세와 빠르기로 도끼와 대검의 연격이 쉼 없이 작렬했다.

쾅! 쾅! 쾅! 쾅!

등판 곳곳에서 얼굴을 내민 생명의 돌이 응축되었던 마력을 풀어 헤치며 겔리오투스의 육체를 강화하고 외피를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연속되는 러셀의 힘을 이기진 못했다. 거기에 불칸의 성력에 의해 붕괴된 근육과 피가 아직까지 악마의 몸속에서 날뛰고 있는 것도 한몫 했다.

콰앙!

결국 마지막 서리가 외피를 부수고 그 속살을 핥았다. 도끼날에서 타고 번지는 서리와 냉기를, 이번에는 떨쳐낼 수 없었다. 삽시간에 타고 번지는 빙결이 악마의 바깥과 안쪽을 모두 얼려가기 시작했다.

그, 카아아아아······.

그리고 입을 쩍 벌리고 비명이 되지 못한 고요 속의 괴성을 지르는 겔리오투스의 목구멍에 대검이 빨려 들어갔다.

푸욱!

파츠츠츠츠!

그리고 대검을 타고 흘러 들어간 벼락 줄기에 악마의 몸이 뒤틀렸다. 등판에 박혀있는 붉은 생명의 돌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악마의 타들어가는 살점이 꾸물거리더니 검신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벼락에 맞아 검은 타르 같은 액체가 되면서도 러셀을 붙잡으려는 타오르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때 아직껏 겔리오투스의 몸체를 꽁꽁 묶고 있던 사슬이 웅- 하고 진동하더니 안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공명하는 사슬들이 끊임없이 진동하며 마력파를 내뿜자 생명의 돌이 가진 마력이 분산되었다.

그 틈을 타고 러셀의 마안이 빛났다. 등판에 박혀있는 생명의 돌을 타고 연결되어있는 안쪽,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악마의 핵.

러셀의 마력이 그의 의지를 담아 칼끝에서 쏘아지고, 마력은 작은 러셀의 형상이 되어 깊고 깊은 악마의 중심부로 나아갔다.

-그만! 그만 해라!

문득 러셀의 머릿속에 음성이 들려왔다. 겔리오투스의 음성이었다. 악마의 목소리에는 공포의 감정이 흠뻑 젖어 있었다.

-나, 날 살려주면······!

“좆까 새꺄.”

러셀은 가볍게 악마의 애원을 물리치고 놈의 핵에 도달했다. 겔리오투스의 몸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가장 커다란 생명의 돌은 이미 한계에 달한 듯 보였다.

러셀의 눈에는 핵에 쩍쩍 그어져 있는 균열에 남아있는 기운의 잔재에서 불칸의 성력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잘 가라는 인사도 하지 않고 냅다 자신의 마력을 밀어 넣었다. 러셀의 마력이 전격의 속성으로 바뀌며 핵과 연결된 생명의 돌을 모조리 파괴해나갔다.

이렇게는 안 된다, 이렇게는!

악마가 고함쳤다.

-내가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보지도, 맡지도, 맛볼 수도 없고 느낄 수 없는 형체로! 수백 년을 기다려서 겨우 흡혈귀의 인자를 만들어 육체를 이루었는데!

꾸물거리는 살점들이 요동치며 순식간에 러셀을 집어 삼켜갔다.

-네 몸을 내놔라!

겔리오투스의 늘어진 살점이 촉수로 화하며 러셀의 몸을 덮고, 침식해나갔다. 어찌나 의지가 강력했는지 악마를 잡아당기는 사슬도 뿌리치고, 러셀의 전격마저 받아넘겼다.

마침내 러셀의 몸이 완전히 살덩이에 파묻힌 순간.

어둠 속에서 거대한 시선이 떠올랐다.

[그렇게는 안 되지. 누구도 이 아이의 꿈을 막을 수는 없어.]

-뭐?

알 수 없는 말에 악마가 되물었다. 겔리오투스는 방향이라고는 없는 어두운 공간 속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주했다. 무수한 눈동자가 드글거리며 하나의 거대한 눈을 이루는 존재를.

악마의 존재하지 않는 얼굴이 경악에 질렸다.

-도, 도대체, 이 인간은······?!

그리고 핵이 폭발했다. 악마는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의 범람 속에서 사그라드는 의식을 느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암흑으로 물들었다.

***

짜자자자작!

거센 전격의 줄기가 악마의 육체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마치 내부에서 천둥 벼락이 터지는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붉은 살덩이가 한순간에 꺼멓게 타오르고, 또 오그라들었다.

오그라들던 살덩이들은 점차 크기가 줄어들더니, 갑자기 폭발했다. 검은 단면으로 물든 살점들이 여기저기 튀며 그 잔해가 흩뿌려졌다. 거기 어디에도 악마의 기운은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거센 폭발의 충격과 함께 러셀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체감상 몇 분은 벼락을 내뿜으며 악마와 말까지 주고받았던 것 같은데, 실제로는 몇 초도 되지 않는 순간인 듯했다.

허공을 날던 러셀은 무거운 갑옷을 다시 코트로 변환시키고, 추락을 대비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몸을 칭칭 감는 뭔가가 있었다. 하얀 쇠사슬이었다.

“어.”

짧은 의문성만을 남긴 그의 몸이 빠르게 지상에 떨어지다가, 중간부터 속도가 줄었다.

“······.”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마력으로 조형한 사슬에 꽁꽁 묶인 러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러셀 또한 거진 1년 만에 보는 가족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가 초가을에 편지 한 장만 남겨두고 집을 나섰으니, 거의 8, 9개월 만이었다.

이루실은 그의 자색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잊지 않으려는 듯이 오랫동안. 그러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동생.”

그 옥음이 굴러가는 듯한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러셀이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누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너 보러 왔지.”

“집은 어쩌고 말입니까.”

러셀의 말에 이루실이 허리에 손을 얹은 삐딱한 자세로 섰다. 표정도 웃음을 지우고 입술을 삐죽 내민, 누가 봐도 나 삐졌소- 라고 주장하는 얼굴이었다.

“네가 박차고 나가준 덕분에, 내가 후계자가 되었어. 다음 가주는 내가 될 거다.”

러셀은 고개를 주억였다. 사슬에 의해 묶여 있으니 다른 행동을 하기도 어려웠다.

“잘 됐군요.”

“뭐? 뭐가 잘 돼? 러셀, 원래 후계 자리는 네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이런 식으로 나한테 후계자 자리가 돌아왔다고 내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

“제가 바라는 것에 가주 자리는 없습니다.”

“그럼 뭘 원하는데?”

두 남녀가 평이한 어조로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 파렐스가 헉헉거리며 도착했다.

“이루실 님! 아니, 그렇게 갑자기 달려가시면 저보고 어쩌라고···. 응?”

러셀의 눈이 막 달려온 자를 향했다. 이루실보다 약간 작은 키에 금발과 푸른 눈을 지닌 남자. 모험가 혹은 용병인지, 실용적인 갑옷과 칼을 찬 사내였다.

반대로 파렐스도 러셀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그의 퍼런 눈이 크게 뜨였다.

“허, 정말 그려진 그대로네요? 만날 그 작은 수첩 보면서 에이 설마 저렇게 생긴 사람이 어딨나 했는, 으겍!”

파렐스가 부자연스럽게 배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러셀이 눈을 돌리자 살짝 볼이 빨개진 이루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누님.”

“왜.”

러셀의 부름에 이루실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러면서도 대답은 빼먹지 않았다.

“일단 이것 좀 풀어주시지요.”

“안돼. 또 도망치려고?”

“못 도망칩니다.”

사실이었다. 지금 러셀은 그야말로 한 줌의 마력도 없었다. 직전 겔리오투스의 핵을 파괴하는 데 모두 썼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이루실은 러셀만큼이나 마력을 감응하고 조작하는데 능숙하던 초인이었다.

그녀가 직접 사슬을 쥐고 휘두르기 시작하면 북부 산맥에 남아나는 마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병사도 있었으니.

러셀 그조차도 가출하기 직전의 육체와 마력으로는 이루실과 맞붙어도 승패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긴 했지만······. 역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러셀!”

그때 소녀의 음성이 울렸다. 러셀과 이루실, 파렐스의 시선이 동시에 돌려졌다. 그리고 파렐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저저저저···.”

말을 잊은 것처럼 구는 파렐스를 타박할 수는 없다. 지금 지면을 박차면서 날아오는 커다란 용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테니까.

“너 누구야! 왜 러셀을 그딴 식으로 잡고 있는 거야!”

화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용이 날아왔다. 입에 마력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하얀 섬광이 번쩍이면서 타는 소리가 들렸다.

파츠츠츠츠!

용의 입에서 번쩍거리며 생성되는 벼락의 숨결에 파렐스가 펄쩍 뛰었다.

“으아아! 이, 이루실 님! 일단 그! 사슬, 사슬부터!”

“넌 누구니? 난 러셀의 누나인데.”

눈앞에서 날아든 용과 벼락의 향연에도 눈 하나 깜짝않던 이루실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 조용한 목소리에 아엘라시스의 입에서 전격이 사그라들었다.

“뭐, 뭐라고? ···요?”

“얘 누나라고.”

“······.”

침묵하던 아엘라시스가 가만히 고개를 내려 이루실을 살폈다.

“하나도 안 닮았는데? ···요?”

이루실이 볼을 긁다가 말했다.

“그렇게 안 닮았나? 뭐, 배다른 자식이기도 하니까.”

“배다른··· 자식?”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울 것 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엘라시스에게 러셀이 말했다.

“아엘라. 그쯤하고 돌아와. 이 사람은 내 누나가 맞아.”

그의 확답이 떨어지자 아엘라시스는 겸연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하얀 빛이 반짝하고, 용이 있던 자리에는 십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백발의 소녀가 서 있었다.

소녀는 쭈뼛거리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정말 러셀의 누나예요? 예쁘게 생기긴 했는데······.”

“어머, 고마워. 너도 엄청 귀여워.”

“···헤헤. 그래요?”

아엘라시스는 눈을 깜박이며 앞의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이제까지 만났던 그 어떤 여자와도 다른 분위기가 그녀에겐 있었다.

옆에서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파렐스가 중얼거렸다.

“아니, 나만 놀란 거야? 용 보고 놀란 거 나밖에 없어?”

이루실은 가만히 아엘라시스를 바라봤다. 칼리스덴이라는 이름의 도시에서 용이 나타나고, 그 용을 러셀이 직접 죽였다고 했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몇 달 만에 만난 동생에게 들을 말이 아주 많았다.

“러셀 님, 해내셨군요.”

사라넨을 부축한 채 제스가 다가와 말했다. 사라넨은 얼굴 색이 창백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몸을 가누고 있었다.

“그쪽은? 괜찮아진 건가?”

러셀의 물음에 사라넨이 파리한 얼굴로 답했다.

“네. 악마의 마기가 사라지니 한결 편해졌습니다. 제스 님의 성력과 칼리아 님의 마법 덕분에 목숨은 구했습니다.”

드루이드야 자연의 수호자라 불릴 만큼 강력한 존재이다. 이제까지는 숲과 산을 더럽히고 있던 악마의 기운 때문에 제 기력을 못 냈지만, 러셀이 겔리오투스를 죽이고 난 후에는 그럭저럭 기운을 되찾은 듯 싶었다.

“그런데 러셀. 왜 그러고 있는 거냐?”

세 사람의 시선이 여전히 사슬에 묶여 있는 러셀에게 향했다. 그는 여전히 아엘라와 대화를 나누는 이루실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영지로 돌아갑시다. 저기 카이와 다른 오크들도 챙겨서. 그리고, 제스.”

“예?”

“아까 오크 쪽 주술사 하나를 족치고 알아낸 정보가 하나 있소. 하일른 경에 대한 거요.”

제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뭐라 말을 하려다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당장 듣기에는 부상자들이 많았다. 죽은 자들에 대한 예우도 진행해야 하고, 영지로 돌아가 타티아나 영주에게 결과에 대해서도 말하고, 차후 대책도 논의해야 했다.

러셀과 일행들은 전장에서 벗어나 영지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종일 이어진 전투의 피로로 모두 말도 못 할 만큼 지쳐 있었다.

“이렇게 안 잡아도 도망 안 갑니다.”

“못 믿겠는데.”

사슬이 풀린 러셀은 이루실에게 팔짱이 끼인 채 걸었다. 이루실 또한 여자치고 키가 꽤 큰 편이라 그런지, 둘이 나란히 걷는 모습이 어색하진 않았다.

뒤에서 칼리아와 아엘라시스가 그런 둘을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저 여인이 누군지 아느냐?”

“어, 누나라고 하던데.”

“러셀의?”

“응.”

“흠.”

칼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진홍빛 눈동자에 의구심이 어렸다.

“내 알기로 남매의 사이가 좋은 경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고 들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배다른 누나라는데?”

“······.”

“그런데 배가 다르다는 게 뭔 뜻이야?”

비가 내릴 듯 말 듯 간을 보는 듯했던 하늘은 결국 비를 내리지 않았다. 그런 구름도 있는 법이다.

하루가 저물고, 밤이 찾아오면서 자연스럽게 깃든 어둠이 구름의 명암을 분간했고, 그 틈 사이로 별들이 반짝 빛났다.

모든 두 발 달린 존재들이 떠나고 침묵하는 평야에는 산맥을 타고 불어온 바람과 그 바람에 스치며 흔들리는 들풀, 그리고 천천히 썩어가는 사체들이 있었다.

육체를 갈망하던 악마가 죽고 남은 자리는 폭탄이 터진 것같이 파헤쳐진 구덩이와 검게 탄화된 살점만 남아 바스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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