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21화 (122/225)

121화 재회

선명하게 비쳤던 것도 잠시. 조각난 겔리오투스의 육체가 엄청난 속도로 회오리치더니 십여 미터 뒤에서 다시 검은 피부의 악마 형상을 이뤘다.

등을 찢고 나온 날개가 유려하게 펄럭이고, 고리형의 충격파를 터트리며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그리고 아직 떨어지고 있는 러셀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하하하하-!”

반사적으로 대검을 들어올리는 러셀을 노리고 광소를 터트리는 겔리오투스의 신형이 번개처럼 쏘아진다.

악마의 팔과 대검이 부딪치며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이 터졌다.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숫자를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의 연격이 러셀을 덮쳤다.

울컥, 하고 치밀어오르는 핏물을 러셀이 힘주어 삼켰다. 아까 라쉐의 공격을 흘려내면서 가라앉혔던 내상이 방금의 공격으로 다시 일어났다.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마력을 돌렸다. 절반 조금 남은 마력이라지만, 싸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충분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싸웠을 것이다.

콰앙!

충돌로 인해 떨어지던 러셀의 몸이 다시 공중으로 치솟았다. 일전의 충돌에 의해 다른 방향으로 튕겨졌던 겔리오투스가 돌아와 주먹을 날린 것이었다.

“하하! 좀 더, 좀 더 날뛰어봐라! 이 몸을 다시 한번 갈라보란 말이다!”

그 아래에서 악마가 날개를 접었다가 아래로 확, 하고 내리며 위로 날아왔다.

부아아아악!

북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겔리오투스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모든 방위를 점한 채 밀려오는 검은 선들. 그 매섭게 쏟아지는 공세 속에서도, 러셀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파지지지지직-!

러셀의 전신에서 벼락이 물결을 치며 번뜩였다. 일전 카루곤의 특기 마법, 천벌을 받았을 때부터 터득했던 전격의 속성력. 그때 이후로 톡톡히 제값을 다 해온 벼락의 힘이다.

그가 분배한 일정량의 마력이 전격으로 변화하고 체내를 내달렸다.

겔리오투스의 마법과도 같은 공격이 러셀의 전신에 작렬하고, 러셀이 벼락을 몸에 두르기까지 찰나의 시간.

회색 먹구름이 짙게 낀 하늘 아래에서, 검은 선과 푸른 선이 수십, 수백 차례 번뜩였다.

눈먼 충격과 굉음의 향연이 메아리친다. 쉬지 않고 폭발하는 충격파가 퍼져나가며 구름을 흩었다. 그러나 짙은 구름은 그 일부만 밀려났을 뿐, 여전히 두터운 몸체를 과시하며 부풀었다.

“크······.”

전방위를 압박해 들어오는 공격. 점도 아니고 선도 아니며 면에 가까운 마기의 폭력.

그러나 러셀은 그 공세의 틈으로 대검을 밀어 넣었다. 언뜻 보면 수세에 몰리다가 상처 입을 것을 감안하고 억지로 가한 공격 같았지만.

그것은 의외로 절묘하게 모든 공세를 차단함과 동시에, 그 속에 있는 몸통을 타격하는 일격이었다.

콰앙!

러셀과 겔리오투스의 몸이 동시에 뒤로 밀려났다. 그가 검격을 내지른 것처럼, 악마 또한 타격을 입혔다.

“아하하하! 좋아! 한 번 더······?”

자세를 잡던 겔리오투스의 말끝이 흐려졌다.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광경에, 커다란 무언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환상적인 생김새를 그대로 이식한 듯한 파충류의 머리. 세로로 날카롭게 그어진 회청색의 눈동자와 백색의 비늘. 네 개의 칼날 같은 날개와 길쭉한 목과 꼬리.

마치 끓어오르던 백색의 쇳물이 그대로 역동성을 그리며 여섯 개의 꼭짓점을 이룬 듯한 형상.

즈즈즈즈즈즈즈즈즉-!

달궈진 무쇠 후라이펜에 물방울 튀기는 소리가 났다. 용의 입안에서 몸서리치는 벼락의 춤사위였다. 비늘 위를 타고 흘러나온 전격의 줄기가 단 하나도 바깥으로 튀지 않고 그대로 용의 입안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전류가 번뜩이는 섬광과 소음이 귀청을 찢는 듯하다. 그아먈로 현재 아엘라시스가 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위대한, 마법이자 한 종족이 선천적으로 가진 권능.

[용의 숨결]

콰아아아아-!

겔리오투스가 뭐라 외쳤으나 그 소리는 바로 묻혀버렸다. 백색의 용이 내뿜은 숨결에 직격당한 악마가 뒤로 밀려났다.

하얀 전광의 끝에서 검게 타오르고 있는 구체가 벼락을 막아내고 있는 악마의 형상을 언뜻 비췄다. 그리고 형상에서 검은 창이 쏘아져 숨결을 뿜어내고 있던 용의 머리를 후려쳤다.

컥!

용의 신음과 함께 회색 먹구름 아래를 하얗게 덧칠하던 선이 점차 가늘어지다가 끊어지고, 겔리오투스는 훌훌 떨어지다가 먼 평야에 떨어졌다. 적잖은 충격에 깊은 구덩이가 파이고, 동심원을 그리는 흙먼지가 확 하고 일다가 가라앉았다.

같은 순간, 러셀과 용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쿠웅!

충돌음. 풀썩 일어나는 먼지를 헤치며 러셀이 작은 구덩이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가슴팍에 선명한 주먹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대검을 날려 겔리오투스의 상체애 대각선의 베기를 날렸을 때. 그 또한 상처를 도외시한 겔리오투스의 주먹에 얻어맞은 것이었다.

러셀이 퉤, 하고 뱉는 침에 끈적한 피가 섞였다. 농도가 짙고 까맣다. 그리고 곧바로 마안으로 악마가 떨어진 방향을 살폈다.

“······안 죽었군.”

놀랍게도 겔리오투스는 아엘라시스의 숨결을 정통으로 맞고도 살아 있었다. 악마가 가진 힘과 무수한 생명을 바쳐서 얻어낸 술식, 그리고 생명의 돌이 가진 힘인 듯했다.

러셀은 아까 대검으로 겔리오투스의 몸을 갈랐을 때, 그 단면에서 무수히 반짝이던 붉은 수정들을 떠올렸다. 아마 그것들이 악마에게 상극과도 같을 성력의 반발작용이나, 용의 마력 또한 견딜 수 있는 힘을 공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겔리오투스가 저 멀리 떨어지자 지상의 괴물들이 오크와 싸우던 것을 멈추고 우르르 몰려갔다.

힘겨운 전투를 벌이던 오크들이 여기저기서 털썩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적지 않은 숫자의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죽어 있었다.

그때 첸파가 헐떡이며 다가왔다. 자신의 피와 괴물의 피로 샤워를 하다시피 해서 더러웠지만, 얼굴은 여전히 투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그대가, 아까 쟈드무를 죽인 그 자로군. 맞, 는가?”

러셀은 그보다 커다란 오크를 쳐다보다가 뒤로 시선을 돌렸다.

“물러서 있으시오. 지금은 내가 상대하지.”

다른 때 같았으면 인간이 무슨 주제로 상대하겠느냐고 물었겠지만, 첸파는 말없이 부족 전사들을 추스르고 물러났다.

악마가 불러낸 괴물과 싸우면서도 첸파는 틈틈이 다른 전장을 살폈다. 검은 날개와 피부,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악마가 손과 주먹을 내뻗을 때마다 그 강력했던 성기사와 드루이드, 불칸의 대전사가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일면식도 없었던 정체불명의 여인이 분전했으나, 그녀 또한 상처를 입히는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저 사내가 그런 악마를 일도양단해버렸다. 거기다 수차례 접전을 벌이고는 저 멀리 튕겨내 버렸다.

지금은, 이 사내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러셀은 쓰러진 자들을 살폈다.

몸을 일으키고 있는 카이와 아직 드러누워 있는 사라넨, 그런 사라넨에게 비척거리며 걸어가는 제스. 모두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실력자들이었으나.

전장 자체를 자신의 수육장으로 만들어버린 저 악마에게 닿기는 요원한 듯했다. 아까 그런 겔리오투스의 몸을 반쪽으로 쪼개긴 했으나, 칼날에 와닿는 느낌은 가벼웠다.

아마 일부러 맞아준 것일 터. 쪼개지면서까지 러셀을 노려보고 히죽 웃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겔리오투스에게는 방금의 공격도 쉬이 넘길 수 있었던 일격이라는 거겠지.

“괜찮나?”

그의 물음에 칼리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강하구나. 이때를 위해서 저만큼이나 많은 마기를 생산하고, 생명들을 희생시켜온 것이겠지.”

러셀 또한 켈파그의 기억을 헤집으며 알게 된 사실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넨 님! 정신 차리십시오!”

그는 곧장 제스에게 향했다. 제스는 사라넨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성력을 쏟아 내고 있는 중이었다.

러셀 또한 한쪽 무릎을 꿇고 사라넨을 살폈다.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상태. 그림자가 구멍을 틀어막고 더 이상의 피가 새어 나오지 않게 막고 있지만, 안색은 더없이 창백했다.

제스가 침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저 악마의 공격에 당했습니다. 최대한 성력을 붓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심장과 마력 회로 쪽에 타격을 입은 것 같습니다.”

제스의 말을 들으며 러셀의 마안이 발동됐다. 통상적인 시야가 이지러지고,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에너지가 잡힐 것처럼 눈에 들어왔다.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심장과 가까운 곳에 구멍이 났고, 폐와 근처의 마력 회로가 뜯겨나가면서 마력이 줄줄 새고 있는 상황.

칼리아의 마법 덕분인지 더 이상의 출혈과 마력 누수는 없었지만, 임시방편일 뿐. 그나마 지금 제스의 신성력이 거칠게 뜯겨져 나간 상처의 단면을 조금씩이나마 재생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속도가 전처럼 빠르진 않았다.

“큭, 크흐으······.”

제스 또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무리하게 성력을 받아들이고 치유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지, 눈과 코, 입에서 선혈이 한 방울씩 뚝뚝 흐르고 있었다.

러셀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떨어진 구덩이에서 겔리오투스가 나오고 있었다. 막대한 양의 수증기가 넘실거렸다.

지글거리며 끓는 피부에서 수포가 올라오며 고름을 터트리다가 굳고, 다시 뜨거운 열기에 의해 녹으면서 흘러내린다.

“용의 숨결이라. 짜릿하긴 했지만, 아직 너무 어리군.”

작게 속삭이는 소리지만, 러셀에게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잘 들렸다.

러셀은 힐끗 시선을 돌렸다. 겔리오투스의 창에 맞아 떨어진 아엘라시스는 아직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전류의 여파가 타닥거리며 파란 스파크를 빛내자 그 위를 검은 손이 쓸어내렸다. 그러자 몸부림치던 전류가 실처럼 가늘어지다가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수증기는 계속해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신의 신진대사가 극한으로 활성화되어서 남은 전류를 몰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생명체가 내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고온에 딛고 있는 먼지가 불타 스러지고, 아지랑이가 짙게 일렁거렸다.

저벅, 저벅.

구덩이를 걸어나와 평평한 대지에 선 악마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후으으으음. 살아있다는 느낌. 이 선연한 공기와 부슬부슬한 풀바닥의 감촉. 거기에 날 죽이겠다고 몰려든 놈들까지. 과분한 생일 선물이군. 그렇다고 뜯어보지 않을 순 없지.”

겔리오투스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걸어올 때마다 발자국에 검푸른 불길이 일렁거리며 타올랐다.

그때, 그런 악마의 뒤편에 커다란 형체가 나타났다. 카이였다.

“······!”

기합도 지르지 않고 내지른 카이의 주먹에는 붉은 성력이 타오르고 있었다.

쿵!

주먹과 악마의 손바닥이 마주했다. 겔리오투스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아까도 말했을 텐데. 하찮은 잡신 따위의 성력으로는-.”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곧바로 카이의 왼주먹이 악마의 얼굴을 갈겼기 때문이었다. 검은 피부가 주욱 밀려나며 입 안쪽의 이빨을 보였다.

“······흐. 그래, 찢어서 먹어주겠다.”

섬뜩한 엄포에도 카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바로 주먹과 발길질이 악마에게 쏟아졌다. 제대로 된 권각술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펼쳐내는 것도 아니었다.

전신의 힘을 한 점에 담는 원리도, 상대방의 내부에 충격을 주는 묘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일격일격에는 자신의 종족과 신을 모욕한 악마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연타가 이어질수록 악마의 모습은 엉망이 되어갔다. 그러나, 일방적인 공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탁!

카이의 두 팔목이 겔리오투스의 손에 잡혔다.

“잘 놀았다.”

콰드득!

악마의 비웃음과 함께 카이의 손목이 압착기에 들어간 것처럼 짓눌리고 으깨졌다.

“끄으으으윽!”

“어설프긴 했지만.”

겔리오투스의 손끝이 수십 개의 촉수로 변하더니, 그대로 카이의 몸에 파고들었다. 촉수가 꿀렁이면서 카이의 피를 빨아내기 시작하자 악마의 상처가 급속도로 재생하기 시작했다.

그때, 푸른 스파크의 잔상과 함께 러셀의 모습이 둘 사이에 나타났다. 악마의 눈이 크게 뜨여지고, 번쩍이는 검광이 시야를 가득 매웠다.

콰릉!

뒤늦게 터진 공기의 폭발이 천둥소리를 담고 으르렁거렸다.

“인간!”

겔리오투스 또한 짐승처럼 으르렁 거리는 순간, 자욱하게 일어난 흙과 모래 먼지를 뚫고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거대한 묵색의 대검, 나힐니르였다.

“커헉!”

가슴팍에 대검을 꽂은 채 악마가 저 멀리 날아갔다. 그 틈을 타 러셀이 쓰러진 카이를 살폈다.

사라넨과 마찬가지로 그리 좋지 않았다. 두 팔은 걸레짝이 되었고, 불칸의 성력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당장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건 분명했다.

그때 카이가 말했다.

“지금, 이라면. 놈에게 이길 수 있소.”

“뭐?”

“놈의 육체가 만들어진 방식에는, 분명 우리 종족의 피와 살점이 들어갔을 것이오. 아까, 놈에게 잡혀서 피를 내줄 때 피만 내준 것이 아니오. 남은 모든 성력을, 같이 주입했지.”

카이가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씩 웃었다.

“방금과 같은 재생은 힘들 것, 이오. 최소한 내 동족들의 살점이 놈의 신체를 이루고 있는 이상.”

“알았다. 쉬고 있어.”

러셀은 일어나 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대검을 잡고 낑낑거리던 겔리오투스가 그에게 딸려왔다.

“크윽!”

나힐니르의 칼자루가 러셀의 손에 잡히기 직전, 악마는 용케 그를 끌어당기던 인력에서 벗어났다.

“커헉, 쿨럭! 뭐냐, 왜 재생이······?”

시커먼 피와 살점을 토한 겔리오투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가슴팍을 더듬은 그때, 러셀의 발길질이 작렬했다.

쾅!

악마의 몸이 위로 떠올랐으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엑스자로 교차한 팔이 막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러셀의 공격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흡!”

치솟는 핏물을 억눌러 삼키며 러셀이 몸을 날렸다. 아까도 카이를 구하기 위해 무리했던 신체가 작작 좀 하라는 듯 비명을 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움직여야 했다. 카이가 두 팔을 희생하면서 만든 기회를 헛되이 날리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겔리오투스의 소리침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아까까지 진득하게 눌어붙어 있던 오만함과 느긋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러셀의 대검이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악마의 마력이 폭발했다.

지금 이 순간, 서로의 목숨만을 노리는 강대한 힘이 격돌하고 공간을 밀어젖혔다. 그러나 힘의 균형은 어그러져 있었다.

“큭, 이게, 무슨······!”

겔리오투스는 연신 당황하며 몸을 움직였다. 아까처럼 제대로 된 재생이 이뤄지지 않았다. 검은 피부 아래서 결합되어 있는 살점들이 악마의 의지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카이의 피와 생명력을 빨아들이면서 같이 들어온 불칸의 성력이 악마의 내부에서부터 요동치며 결속을 파괴하고 있었다.

러셀이 백색 도끼를 던졌다. 허공에 허연 서리를 흩뿌리며 날아든 도끼에 겔리오투스가 대경실색하며 몸을 땅바닥으로 던졌다.

고꾸라지는 악마의 날개를 도끼가 찢으며 날아가고, 겔리오투스의 비명이 울렸다. 장애물 하나 없는 평야에서 비명은 메아리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손을 뻗어 날아간 도끼를 다시 부른 것과 동시에 대검이 악마의 오른팔 어깨죽지를 훑고 지나갔다. 단단한 피부에 커다란 검흔이 나며 팔이 덜렁거렸다.

“크하아아악!”

위기를 느낀 악마가 입에서 커다란 고함과 함께 마력을 토했다. 마력에 실린 날카로운 칼날과 독이 러셀을 덮쳤으나, 곧 세로로 곧게 세운 나힐니르의 칼날에 둘로 갈라지며 별다른 피해를 입히진 못했다.

“크륵, 크윽, 이렇게,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어떻게 얻어낸 신체인데, 이렇게는-!”

겔리오투스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악마의 몸이 울룩불룩하고 부풀었다. 그러더니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다.

질량을 무시하고 증식해나가는 모습에 러셀마저 눈살을 찌푸릴 정도.

사악한 주문의 영창이 이어지며, 악마의 피부 속에서 꿈틀거리던 불칸의 성력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 그의 마안에 보였다.

동시에 악마의 몸속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소용돌이가 생겨나며 남은 근육과 피를 한데 그러모으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그 끝에 나타난 것은 여섯 개의 다리로 서서 꿈틀거리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검붉은 촉수가 다리와 몸체 곳곳에서 꿈틀거리고, 다리가 지탱하고 있는 몸통은 마치 거북이 등딱지 같았다.

그 등딱지의 맨 위에는 여섯 개의 붉은 수정이 박혀서 빛을 흘리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크르르르······.”

그 괴상한 모습으로 변한 악마가 막 러셀에게 달려드려는 찰나.

촤르르르르르륵!

청명한 소리가 울리며 지면에서 방대한 양의 흰색 쇠사슬이 솟아 겔리오투스의 몸체를 칭칭 감기 시작했다.

그 익숙한 기술에 기시감을 느끼며, 러셀은 뒤를 돌아보았다.

숲에서 나오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한 사람은 정말 지금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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