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상흔 (4)
***
정체불명의 존재가 알에서 나온 직후부터, 하늘은 심상찮은 기색으로 으르렁거렸다.
평범한 사람들, 그러니까 마력을 각성하지 못한 자들도 피부 위로 흐르는 짜릿한 정전기를 느꼈다.
비각성자들도 그러할진대, 마력을 각성하고 다루는 술사나 전사들을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 모두 막 등장한 저 날개 달린 여인 형상의 괴물을 보며 침음했다.
사라넨이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꽉 맞잡으며 말했다.
“저것입니다. 라하무른 산과 산맥 모두에 흑마력을 만들게 하고, 괴물을 만들고, 오크를 불러 모은 게.”
자연을 수호하는 종족, 드루이드인 그녀에게 느껴지는 저 악마의 존재감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산맥에 널리 퍼져있던 흑마력이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평야에 쌓여있던 시체들은 지금 이 순간도 녹아서 흘러가고 있다.
그에 따라 약화되었던 숲의 지배력이 다시 강해졌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힘이 소용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앞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악마의 앞에서는 무력감만 들 뿐이었다.
“정신 차리시오, 드루이드!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소.”
첸파가 사납게 고함치며 가슴을 두들겼다. 그러자 그의 뒤편에 서 있는 오크 전사들도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허나 모두들 정상적인 몸 상태는 분명 아니었다.
큼직한 칼자국은 예사에, 손목이나 팔이 날아간 자들도 있었다. 첸파는 아예 헤손과의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었다.
“맞소. 그리고 신이 우리를 보우하실 것이오.”
카이가 첸파의 옆에 섰다. 갈색 피부에 그려진 검은 문신들이 꿈틀거리면서 새로운 도형과 문자를 그렸다.
“이게 이 전장의 마지막 전투요. 조금만 버팁시다.”
“버티면? 뭐가 달라집니까?”
사라넨의 물음에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이 왼편의 숲을 향했다.
“우리의 가장 큰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것. 그게 지금의 목표요.”
“······러셀을 말함입니까? 그는······.”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는 커다란 거인과 싸우고 있을 때였다. 평야의 끝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충격과 진동을 일으키며 싸우던 두 존재의 전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대단했다.
차츰 평야의 중심과 가까워지더니, 어느 순간 숲으로 파고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몇 번 둔중한 울림이 있고 난 뒤에는 잠잠했다. 숲에서는 누구도 빠져나오지 않았다.
“죽지 않았을 거요.”
첸파가 피딱지가 앉은 눈을 긁으면서 물었다.
“어떻게 확신하나? 솔직히, 라쉐 그 오거는 진정 거인족의 후손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은 강자인데.”
“러셀 그 남자가 이전에 싸웠던 것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한 괴물이라 해도 충분히 살아남았을 거요.”
“꼭 러셀만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제스가 칼집에 꽂아 넣었던 칼을 촤앙, 빼면서 앞으로 나섰다.
“우리의 전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드루이드인 사라넨 님이 계시고, 불칸의 새로운 대전사가 된 카이 님도 계시죠. 저 또한 미약한 힘일지 몰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주님?”
“불렀나?”
“영주님께서는 남은 병력을 인솔하시어 영지 안쪽으로 대피하시기를 권고드리겠습니다.”
타티아나 영주는 제스의 말에서 전해져온 의도를 못 알아챌 정도로 둔한 지도자가 아니다. 솔직히 지금 남은 병사와 용병들은 곧 있을 전투에 있어 도움이 될 가능성이 적다.
아니 방해가 될 확률이 더 높다고 할 것이다. 마력을 다루는 전사들도 악마의 마기에 휩쓸리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력도 각성하지 못한 일반 병졸들과 용병들은 순식간에 아군에서 적군으로 돌변할 것이다.
아군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괴물로 변이되는 것만큼 위협적인 일도 드물 것이다. 교회의 성기사로서 제스는 그런 일을 많이 겪었다.
예전, 임무를 받고 악마 토벌을 위해 파견되었던 마을 하나가 오히려 통째로 악마에게 넘어가 있던 적이 있었다.
도움은 되지 못해도 방해는 되지 않으리라 여겼던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괴물로 변태해서 달려들었을 때는 정말.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
“지금 내게 도망치라는 건가,”
타티아나가 제스를 노려봤다. 허나 제스는 그런 영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도 이제 풋내기 성기사가 아닌 것이다.
“영주님의 병사들은 지쳤습니다. 중상을 입은 자들은 제가 치료를 했지만, 그래도 신속히 요양을 취해야 합니다. 이 상황에서 검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병력의 증강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제 말을 따라주십시오, 영주님. 영지로 돌아가시고, 방벽을 강화하십시오.”
흔들리던 타티아나 영주의 눈이 뒤를 향했다. 지친 병사들이 부들거리는 다리로 서 있었다.
구름에 의해 해가 가려져 정확한 시간은 짐작이 힘들었지만, 최소 서너 시간 이상을 괴물과 함께 뒹굴었다. 싸우고 있을 때야 전투에 의한 흥분으로 피로를 깨닫지 못해도, 소강 상태가 지금은 잊었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을 것이다.
변변찮은 마법사도 존재하지 않는 타티아나 영주에게 이제와서 저들을 북돋게 만들 마법은 있지도 않았다.
“자네 말대로 하지. 저 괴물을, 악마를 물리쳐주게.”
영주의 말에 사라넨과 카이, 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자연과 신을 모시는 수호자, 대전사, 성기사로서 악마의 준동은 쉬이 넘길 수 없는 사건이다.
“나와 내 부족 전사들은 함께 가겠소.”
첸파가 말했다.
“우리는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소.”
이동은 신속하게 전개됐다. 영주와 병사, 용병들이 빠르게 영지로 물러나고, 남은 자들은 평야의 중심에 서서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악마를 향해 다가갔다.
마기를 풀풀 날리고 있는 악마는 자신을 멀리서부터 포위해오는 그들을 보면서도 별반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먹음직스런 한 상이 저절로 차려지는 것을 보듯 흐뭇해 보였다.
하지만 사라넨은 다른 것을 알아냈다.
“아직 저 괴물은 움직일 수 없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보세요.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 공중으로 떠올라서 날아다니려는 동작은 보이지 않아요. 애초에 날개가 그리 크지도 않고. 거기다 저 괴물의 다리와 땅으로 이어지는 살덩이의 연결로 보아, 제대로 된 육체를 만든 게 아니예요. 시간이 더 필요하던가, 아니면 재료가 다 필요한 것이겠죠. 지금 들어가면 죽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 말이 맞다, 자연의 수호자야.”
갑자기 나타난 인기척에 사라넨이 펄쩍 뛰었다. 성기사인 제스와 첸파 또한 그림자에서 불쑥 솟아난 여인을 보고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누, 누구십니까?”
“저 괴물과 생긴 게 비슷한데. 한 패인가?”
나타난 것은 칼리아였다.
“내 이름은 칼리아라고 한다. 저 악마와 볼 일이 있지.”
“그게 무슨 말인가? 한 패라는 건가, 아니라는 건가?”
“그만.”
그때 카이가 끼어들어 말했다. 그러자 첸파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카이에 대한 예의와 존경이 묻어나오는 태도였다.
“카이. 이자가 누군지 아시는거요?”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 중 한 명이오.”
그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이어지지 않았다. 첸파는 대전사인 카이가 그리 말하자 물러났지만, 제스와 사라넨은 칼리아에게 가까이 가지 못했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긴 했지만 가진 분위기가 인간과는 상이한 탓이다.
“난 저 악마, 겔리오투스에 의해서 흡혈귀라는 종이 되었던 사람이다. 아주 오래전에 그리 됐지. 지금 저 악마가 어떻게 비정형의 영靈 상태에서 육체를 가지고 지상을 활보할 수 있게 됐는지에 대해 말하겠다.”
칼리아는 빠르게 말했다.
“악마의 이름은 겔리오투스. 내게 거래를 제안했고, 난 복수심에 매몰되어 그의 힘을 받아들였다. 그의 마기와 내가 가진 주문에 의해 난 인간이 아닌 새로운 종으로 탈바꿈되었고, 뱀파이어라는 종족이 되었다. 이전에도 흡혈을 통해 생을 연장하고 불사를 추구하는 괴물은 있었지만, 난 조금 더 특별했던 것 같다. 번식과 개체 수를 늘리는 것이 불가능한 그들과 달리, 난 내 힘의 영구적인 소모를 통해 수직적인 지배관계가 연결되는 혈족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겔리오투스는 그런 칼리아의 피에 흐르는 주문적 물성을 뽑아내기 위해 그녀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영의 형태로 떠도는 자신에게 육체라는 새 옷을 입히기 위해서.
“다만 악마가 미처 내 몸을 강탈하기도 전에 난 스스로 봉인에 빠져들었다. 복수의 허무 따위와는 상관없이, 살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지. 아마 그 덕분에 겔리오투스도 새로이 육체를 얻지 못하고 방황한 것 같은데.”
하지만 겔리오투스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칼리아의 주문과 자신의 주문을 결합, 인간의 생명력을 뽑아내 결정화 시킬 수 있는 생명의 돌 주문을 만든 것이다.
그 돌들을 이용해 봉인에 빠졌던 칼리아를 일깨우고, 주문 한 줄도 외우지 못했던 인간이나 오크들을 흑마법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겔리오투스는 더 나아가 자신의 육체를 조형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이 지금 저 앞에서 손을 가다듬고 있는, 날개 달린 여인의 몸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놈은 죽을 수 있게 되었어. 아마 그것까진 생각하지 못했을 테지.”
칼리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과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외모의 악마를 바라보았다. 검은 피막 날개와 검은 피부, 그리고 머리에 돋아난 뿔까지.
그러나 여기 모인 인물도 만만찮은 자들은 아니었다. 카이, 사라넨, 제스, 첸파, 칼리아까지 다섯이 제각기 꼭짓점을 맡아 악마에게 좁혀 들어갔다.
그때까지 악마는 조용히 살점을 꾸물거리며 다리에서 상체로 액화된 시체들과 피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럴수록 검은 피부색은 더 짙어졌고, 피막 날개는 더 두꺼워졌으며 뿔은 크기를 키워갔다.
한없이 고조되어가는 날카로운 공기. 섣불리 움직이면 그 날서린 침묵에 피부가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악마는 물끄러미 자신을 포위한 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변질한 박쥐, 가증스런 태양의 기사, 잡신의 대전사, 자연의 꼬맹이, 전향한 오크라. 악마를 막는 용사 일행으로는 보이지 않는 구성인데.”
대꾸 없이 제스의 검이 먼저 뻗어졌다. 황금빛의 성력을 태우며 검이 횡으로 그어지자 겔리오투스는 자신의 팔을 들어 그를 막았다.
카앙!
팔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었으나 제스는 개의치 않았다. 곧바로 오른발을 내딛고, 왼다리에 힘을 주며 왼팔에 들린 방패를 후려쳐갔다.
“커헉!”
제스가 구겨진 방패와 함께 뒤로 날아갔다. 땅과 연결되어 있던 다리를 풀어낸 악마가 발차기를 날린 것이었다.
“하테르마, 에쏜!”
사라넨이 두 손바닥을 겔리오투스에게 내밀었다. 녹색빛 광채와 섬광이 쏘아지자 악마는 피막 날개를 앞으로 감싸 전면을 막았다.
콰아아아아-!
연둣빛의 광선을 쏘아내는 사라넨의 입가에서 피 한줄기가 흘렀다. 이제까지 싸우면서 고갈된 마력을 억지로 쥐어짜 내느라 입은 내상이었다.
제스가 튕겨나가고 사라넨이 악마의 발을 묶은 사이 카이와 첸파가 달려들었다.
그때 겔리오투스가 지면을 내리치고, 동시에 악마의 주변에 무수하게 돋아나 있던 알들이 폭발했다.
“큭!”
사라넨 또한 발밑에서 터진 폭발에 주문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휘청였다.
“끼애애애애액!”
폭발한 알들 사이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사지도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괴물들은 뭉개진 하반신을 두 개의 팔로 이끌며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하아아아아아아!”
첸파의 기합과 함께 한줌 남은 그의 전사들이 제각기 검과 도끼, 망치를 들고 괴물들을 맞이했다. 카이에 의해 우룩크에서 오크로 돌아온 갈색 오크들도 전장에서 주워들은 무기를 쥐어들고 괴물을 처 죽여 나갔다.
아까 전 처음 커다란 알이 생겨났을 때부터 평야를 타고 흐른 사라넨의 마법이 더 이상의 시체가 액화되는 것을 막기는 했지만, 그 잠깐 사이 악마가 모아들인 피와 생명력은 많은 양이었다.
그만큼 지면 아래에서 알의 형태로 있다가 부화하여 솟아나온 괴물들도 많았다. 발목이 깨물린 오크들이 눈에 불을 켜며 칼을 휘둘렀다.
오크들이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괴물 새끼들을 상대하는 동안 칼리아, 제스, 사라넨, 카이는 겔리오투스를 상대했다.
칼리아가 씩 웃었다.
“피에 대해서는 나도 한 가락이 있지.”
그녀가 손바닥을 모두 지면에 대자 악마에게 빨려들어가던 마력의 흐름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칼리아의 지배력이 닿은 피가 겔리오투스에게로 향하던 순환을 움찔, 하며 멈추더니 도리어 칼리아에게 흘러 들어갔다.
그런 상태로 영창하자 겔리오투스는 육체의 재생과 수육이 조금씩 늦어지는 것을 깨닫고 칼리아를 돌아보았다.
“너, 은혜도 모르는 잡것아. 감히 내 대계를 800년이나 뒤로 미룬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날 이용해서 육체를 차지하려 들었던 놈에게 듣기는 싫은걸.”
칼리아는 한 입으로 주문을 외우면서도 악마에게 이죽거린 영창을 마친 후 시동어를 외쳤다.
그녀의 주문과 함께 사방의 그림자들이 요동치며 악마를 조여들었다. 라쉐를 상대했을 때와는 달리 평야에 가득한 피와 생명력이 그녀의 주문을 도왔다. 겔리오투스가 자신의 육체를 만들기 위해 모아두었던 마력을 칼리아가 강탈, 이용한 것이다.
“감히.”
악마의 전신에서 검푸른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와는 다른 색깔의 흑마력에 악마의 모습은 기이하게 일렁거렸다.
그림자를 불태운 악마의 앞에 불칸의 붉은 성력을 온몸에 두른 카이가 달려와 주먹을 내리꽂았다.
탁!
집채만한 바위도 부술 만한 괴력이 담겨져 있던 주먹이, 악마의 손아귀에 잡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불칸의 성력이 겔리오투스의 육체를 태우려 했으나, 그보다 수복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악마의 머리카락이 공중에 떠올라 흐느적거리고, 붉은 눈동자에서 마력이 폭사했다.
“하찮은 잡신 따위의 성력으로는 날 태우지 못해.”
꽈앙!
악마가 내지른 공격에 카이가 아까의 제스처럼 뒤로 훌훌 날아갔다. 그를 대신해서 체력을 회복한 제스가 돌진했다. 찌그러진 방패는 버리고, 검을 양손으로 든 채였다.
“하아압!”
찬란한 노란 빛의 성력을 칼에 둘러, 마치 빛으로 만들어진 듯 빛나는 검이 휘둘러졌다.
터엉!
겔리오투스의 오른손에 제스의 검이 잡혔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태양의 성력은 악마의 마력을 녹임과 동시에 손바닥을 가르며 팔뚝까지 베어내는데 성공했다.
처음으로 겔리오투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건 좀 아픈데.”
쨍그랑!
그때 제스의 검이 두 동강 나며 부러졌다.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제스의 눈이 크게 뜨이고, 무방비한 그의 복부에 악마의 왼주먹이 쏘아졌다.
쾅!
피를 뿜으며 제스가 뒤로 데굴데굴 구르다가 축 늘어졌다. 길게 이어진 핏자국이 그의 심각한 상태를 대변했다.
파바바바바박!
허공에서 울리는 파공성에 겔리오투스가 고개를 들었다. 녹색 빛으로 단조된 마력 화살이 수백 미터 상공에서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카이와 칼리아, 제스가 공격하는 동안 마력을 비축해 구현한 사라넨의 마법이었다.
“부족해.”
허나 겔리오투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검은 손을 허공에 올려그었다.
푸화아아악!
그 순간 겔리오투스가 하늘로 던진 마기가 급격하게 몸체를 부풀리더니 날아드는 화살을 모두 막아냈다. 마치 칼리아의 그림자 주문을 그대로 이어 받아 쓴 것 같은 모습이었다.
퍼버버버벙!
화살은 막힌 것과 동시에 터지더니 자욱한 초록빛의 바람 칼날을 만들어 겔리오투스에게 날아들었다. 엄청난 절삭력에 악마의 피부마저 생채기가 날 정도였다.
“깨애애액!”
“끄액, 끄애액!”
휘말린 괴물들이 두 개 이상의 조각으로 썩둑 잘리며 비명을 지르다가 죽어갔다. 그러나 그렇게 죽은 괴물들은 또다시 액화되어 겔리오투스에게 흘러갔다.
“칵!”
사라넨이 숨막히는 비명을 토했다. 바람 칼날을 모조리 피한 겔리오투스의 급속 기동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라넨 님!”
피를 토하던 제스가 외쳤다.
“드루이드의 생명력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는데. 이런 맛이었군.”
사라넨의 등을 뚫고 나온 손을 주억거리며 겔리오투스가 웃었다.
“응?”
쉬아아악!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늦게 들리고, 겔리오투스의 몸이 훅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악마는 뒤로 수십 미터는 떨어진 자리였다. 가히 엄청난 속도였다.
“이런.”
겔리오투스를 물러나게 만든 칼리아가 사라넨을 살폈다.
가슴과 등이 뻥 뚫린 상처 너머로 붉은 피가 울컥이며 쏟아지고 있었다. 당장 조치하지 않으면 드루이드라도 곧 죽을 치명상이었다.
“그림자를 부으라, 죽음을 거슬러.”
칼리아의 주문에 사라넨의 그림자가 뭉클거리며 일어나 구멍을 매웠다. 그러자 흐르던 피가 멎고 창백해지던 피부가 잠깐이나마 혈색을 되찾았다. 그러나 응급조치일 뿐이다.
“너도 맛있어 보이는데.”
귓가에서 들린 나지막한 속삭임에 칼리아가 벌떡 일어서며 검을 휘둘렀다. 곧 그녀의 눈이 부릅 뜨였다. 악마는 칼리아의 칼끝 바로 위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거래를 기억해라. 네 존재의 역설을 깨달으라. 넌 내 일부가 될 것이다!”
쭉 뻗은 악마의 손이 수십 갈래의 촉수로 분화되어 칼리아를 덮쳤다. 칼리아는 쥐고 있던 검에 마력을 주입해 터트림과 동시에 딛고 있는 대지에서 피를 뽑아 올려 새로운 무기를 만들었다.
“크하악!”
딛고 있던 칼이 터지면서 튄 파편에 겔리오투스가 처음으로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전면에 빼곡이 생긴 파편이 악마의 몸에 무수한 상흔을 만들고 피를 흘리게 했다.
“큭!”
파편에 찢기지 않은 촉수들이 쏘아져오자 칼리아는 손을 아래에서 위로 휘저으며 그림자로 이뤄진 벽을 생성했다.
파각!
물질화를 거친 그림자의 벽이 순식간에 깨어지고, 벽을 부순 촉수들에 피로 만들어진 혈창이 핏빛 섬광을 그리며 허공을 난자했다.
후두둑 떨어진 촉수들에 안심할 사이도 없이, 날아든 악마의 날아차기에 칼리아 또한 복부를 가격당하며 땅바닥에 튕겼다.
그렇게 모두가 쓰러졌다. 입과 코, 눈에서 피를 흘리며.
그들의 힘은 악마에게 닿지 못했다. 태양의 성력은 구름과 마기에 갇혔고, 불칸의 성력은 약했다. 드루이드의 힘은 마기의 침식을 버티지 못하고 억눌려졌다.
그렇게 검푸른 흑마력에 휩싸여 있는 악마가, 촉수들을 뻗어 그들의 목을 쥐고 들어 올렸다.
“끄으으으······.”
네 명이 그렇게 촉수에 목과 사지가 묶인 채 허공에 떠올랐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평야 위를 지나갔다. 네 개의 커다란 날개, 유려하게 뻗은 목과 하늘거리는 긴 꼬리.
평야에 있는 모든 눈 달린 자들이 위를 올려다봤다. 겔리오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응?”
그림자의 형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한 사내가 회색의 먹구름을 배경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사내의 한쪽 팔이 흐릿해졌을 때, 악마의 가슴팍에 백색의 외날 도끼가 박혀 들었다.
“큭!”
그리고 도끼에서 서리와 냉기가 엄청난 속도로 퍼지며 악마의 몸을 얼려 갔다. 가슴과 배, 팔과 다리를 넘어 촉수들까지 희게 물들어 딱딱하게 굳은 채 냉기를 흩뿌렸다.
“부숴!”
촉수가 무력화된 것을 깨달은 자들이 기합성을 내질렀다. 제각기 마력과 성력, 근력으로 구속을 풀어낸 자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하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린 겔리오투스가 거친 손놀림으로 가슴팍에 박힌 도끼를 빼려는 그때, 되려 도끼가 위로 쭉 딸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끝에는 아직 떨어지고 있던 사내가 자신의 머리카락만큼이나 새카만 검신의 대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악마의 입, 전신에서 막대한 양의 마기가 구형으로 터져 나오며 사위를 진동시켰다. 사내는 그 구형의 파동에 물러서지 않고 대검을 내리쳤다.
묵색의 칼날에 마기의 파동이 찢어지고, 그대로 나아가 악마의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갈라졌다.
두 쪽으로 나뉘는 악마의 단면에서 피와 내장이 적나라하게 흩뿌려졌다. 그럼에도 악마는 죽지 않았고, 양옆으로 멀어지는 얼굴의 붉은 눈동자는 사내를 끝까지 보고 있었다.
세로로 갈라진 두 개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만나는군, 러셀. 아주 좋은데?”
“더 좋게 만들어주지.”
그런 악마의 눈동자를 사내의 대검이 가로로 그어졌다.
네 조각으로 박살 난 눈동자에 제각각의 보랏빛 눈이 선명하게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