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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19화 (120/225)

119화 상흔 (3)

“저거 알인가?”

모양새만이 그러할 뿐이었다. 표면을 덮고 있는 건 붉은 살점이었다. 거기다 마치 심장처럼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었다. 평야에 가득 쌓여있던 시체들이 액화하고, 액화한 그것들은 바닥 위를 가로지르며 저 정체불명의 알에 모였다.

“영주님! 이대로 놔둬선 안 됩니다!”

그때 제스가 달려와 타티아나 영주에게 외쳤다. 타이아나 또한 지금 상황이 정상적인 것이 아님은 눈으로, 또 피부에 와닿는 저릿저릿한 감각으로 알았다.

“모두 불을 지펴라! 액체가 모이지 않게끔 막아!”

타티아나는 곧장 지시를 내렸다. 정확히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어도, 평야 위로 가득한 사악한 마나의 흐름과 시체가 녹는다는 것 자체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녀의 명령에 횃불을 들고 있던 병사와 용병들이 바닥을 기어가는 액체에 불을 지졌다.

치이이이이!

검붉고 끈적한, 시체가 액화한 그것이 불에 닿자 지독한 연기를 내뿜었다. 가까이 있던 자들이 얼굴에 그 연기를 맞자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아아악!”

“눈! 내 눈!”

그 참혹한 모습에 마찬가지로 불을 들고 다가가던 사람들이 뒤로 분분히 물러섰다.

병사, 용병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액화는 빠르게 정체불명의 살덩이 알에게 몰려갔다. 그 속도가 무척 빨랐다.

날붙이를 내리쳐도 통하지 않고, 도리어 튀기라도 하면 사람에게 달라붙어 녹아내렸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또 새로운 알 같은 것이 생겨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체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크기였다.

“이런, 모두 물러서라! 액체와 알은 건들지 말고, 다른 시체를 불태워!”

타티아나는 곧장 문제를 깨닫고 다른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미 전파된 지시에 새로운 명령이 전달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결국 남은 마력을 끌어모아 커다랗게 외치고 나서야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다수의 사상자가 나온 후였다.

“이쪽으로 모이세요!”

사라넨이 외치면서 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빛과 함께 연둣빛의 기류가 병사와 오크들 사이를 빠르게 돌았다. 핏방울이 기화한 기체가 시체들에게 파고들지 못하게 조치함과 동시에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마법이었다.

그럼에도 평야 건너편에 새로이 생겨난 알들은 이미 크기는 물론이고 숫자마저 불어나 있었다.

이윽고 가장 커다란 알이 갈라지고, 그 안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한 알몸의 여인이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지니고, 전신에 끈적한 붉은 체엑을 뚝뚝 떨어트리는 여자.

등 뒤에 숨겨져 있던 피막의 날개가 펼쳐지고, 여인이 눈을 떴다. 머리카락과 같은 진홍빛 눈동자.

그림자로 모습을 감추고 사태를 주시하던 칼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괴물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주억거렸다. 여인의 손은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으나, 곧 피부 이곳저곳이 울룩불룩 일어나더니 퍽, 터져나갔다.

텅 빈 손목과 늘어진 근육, 신경 다발. 그러나 곧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바닥에 쏟아졌던 피와 살점이 떠오르더니 다시 뼈와 근육을 이루며 손을 재생했다.

“몸이 너무 불안정하군. 조금 더 영양을 보충해야겠어.”

붉은 눈동자가 반대편을 향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벌레들이 보였다. 인간, 오크, 그리고 그녀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박쥐 한 마리까지.

모두 다 갈아 마시면 조금 더 완벽한 육체가 될 것이다.

***

러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울창한 수림 한가운데에 있었다. 검은 결계가 있던 장소에서부터 곧장 빠져나와 흑마력이 가장 강력하게 밀집되는 곳으로 달려가던 참이었다.

언제부턴가 바닥에 낮게 흐르는 검푸른 연기 비슷한 안개가 흐르기 시작했다. 손으로 휘저어도 흩어지지 않고, 도리어 손에 달라붙는 농밀한 안개였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

러셀은 손에 잉크처럼 묻어난 흑마력을 유심히 살폈다.

비가 내리지도 않았는데 바닥은 축축했고, 곧게 서 있는 나무들은 음산한 기색을 뿌렸다.

그는 손바닥을 털고는 코트 자락에서 나힐니르를 뽑아들었다.

“올 거면 빨리 와라. 바쁘니까.”

틈새에서 끔찍한 외양의 괴물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끼아아아악!”

귀곡성과 비슷한 괴성이 울리자 순간 머리가 띵하고 현기증이 몰려왔다. 음성 자체에 내포된 사악한 마력이 감각을 헤집고 흐트리려는 것이다.

그는 바로 마력을 고막에 둘러 보호한 다음 머릿속으로 침투한 마기를 몰아냈다.

“더럽게 못생겨졌군.”

생김새는 오크와 비슷했지만 피부 위로 단단한 외골격 같은 것이 감싸여져 있었고, 사지의 끄트머리는 갈고리나 송곳, 커다랗게 휘어진 도끼날 같은 것으로 변형되어 있었다. 마치 들고 있던 날붙이가 그대로 손에 녹아든 듯한 모습이었다.

변형된 괴물들은 모두 쏘아진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고, 사지 끝에 달린 흉악하게 변형된 팔다리는 하나 같이 급소를 노리며 꽂혀왔다. 생전의 기술들을 그대로 계승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러셀은 이 괴물들이 켈파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행했던 마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켈파그의 머릿속에서 뽑아놓은 주술에 대한 기억 중 몇몇이 그의 답을 긍정했다.

놈들의 피부를 덮고 있는 외골격은 강철만큼이나 단단하고, 신체 능력은 이전보다 세 배 이상 강화되었다. 변이된 오크들의 전신에서 짙푸르게 타오르는 흑마력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수십 개가 넘는 공격들이 러셀 하나를 노리고 쏟아져 내렸다. 러셀은 금방이라도 그 모든 공격들에 급소가 찔리고, 팔다리가 떨어지고, 얼굴과 심장이 관통당하며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러셀의 눈이 자청색의 빛으로 물들었다.

의지에 따라 일어난 마력은 언제든지 그의 제어에 따라 순한 말처럼 움직였다.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화산처럼 강력하면서도 도도한 물줄기처럼 매끄럽게 순환하는 마력이 근육과 신경을 보조했다.

주관 시간이 가속되었다. 정상적인 속력을 박탈당한 괴물 오크들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하지만 그 시간의 괴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카아아악!”

나무 사이로 농밀하게 흐르는 흑마력의 기운이 러셀을 붙잡아 당긴 것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으로 파고든 끈적한 기운이 러셀의 마력 순행을 붙잡고, 근육의 힘을 풀어버리며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반면 괴물 오크들의 몸놀림은 이전보다 더욱 빨라진 듯했다.

그렇다고 러셀의 단련이 헛되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흡, 하고 숨을 참은 러셀이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양손으로 쥔 나힐니르의 칼자루를 앞으로 뻗자 묵색의 대검이 그 크기만큼이나 길쭉한 검신으로 괴물 오크 하나의 복부에 파고들었다.

넓적한 검폭에 의해 놈의 허리는 삼분지 이가량이 그대로 끊어저 버렸다.

러셀은 멈추지 않았다. 내디딘 발에 힘을 주자 오른다리가 지면 깊숙이 파고들어가는 느낌이 전달되고. 그대로 왼쪽으로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덮쳐오던 모든 괴물 오크들의 육체가 그 궤적에 걸렸다. 그리고 퍼버버버벅, 하는 소리와 함께 놈들이 뒤로 죽 밀려났다.

허나 찌르기에 허리가 갈라져 죽은 놈과 달리, 이번에는 죽은 놈들이 많지 않았다. 달려든 놈들은 모두 제각기 사지와 연결된 날붙이를 들어 막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거기다 갈수록 변형이 지속되는 것인지, 이제는 오크의 원형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고 외양이 뒤틀리더니, 끄르륽 거리는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한 놈이 러셀의 가까이에 붙었다. 양팔을 쫙 벌린 채 육탄돌격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 그를 죽인다기보다는 움직임을 묶어놓겠다는 것 같았다.

러셀이 그놈을 상대하면 다른 괴물들이 사각에서 파고들어 그의 옆구리나 다리, 등짝을 쑤실 계획으로 보였다.

그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작금의 전장이 그에게 그리 유리하다할 것은 없는 게 맞았다.

시야는 흑마력의 농밀한 안개가 짙게 차오르며 러셀의 마안마저 차단하려 했고, 숨은 마음대로 쉴 수도 없었다. 아까 한 호흡 들이마신 것이 그의 신체에 남은 숨 전부였다.

팔다리를 잡아채는 흑마력의 압력은 마치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하진 않았다.

남은 마력량도 절반 가까이 회복되었을 뿐,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러셀은 새벽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싸움을 이어나간 것이었다.

삶과 죽음의 줄다리기에서, 죽음 쪽으로 추가 계속 매달리는 상황. 어떤 마법사나 기사를 여기다 데려놓는다고 해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아니 시체라도 온전히 보존될수 있을까 싶었지만.

죽음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상황에서 러셀의 투지는 더욱 빛을 발했다.

러셀은 밀고 들어오는 괴물을 향해 마주 돌진했다. 그의 왼 주먹이 그를 억누르려는 흑마력에도 불구하고 쏜살같이 뻗어나가 괴물의 안면을 틀어잡았다.

눈구멍과 광대뼈를 뚫고 들어간 놈이 끼에에엑 비명을 질렀다. 몸부림을 치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하지만, 러셀의 손아귀는 마치 강철 바이스처럼 조여져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러셀은 힘을 주어 안면 뼈를 바스라트렸다. 콰득. 침묵한 채 혀를 축 늘어트리게 된 괴물을 왼쪽으로 휘두름과 동시에, 그의 대검이 종과 횡을 그리며 그어졌다.

쉬아아악!

흑마력이 엉겨있는 안개를 가르며 나타난 섬광에 팔과 어깨가 잘려 나간 괴물들이 물러섰다. 그때 공중에서 그를 덮치는 괴물이 있었다.

기린처럼 목이 길어지고 머리에는 웬 뿔이 달린 놈이 목만큼이나 길쭉길쭉한 팔다리, 거기에 달린 사마귀의 낫같이 생긴 팔다리를 매섭게 휘저으며 달려든 것이었다.

러셀은 왼손에 쥐고 있던 시체를 놓아버리고는 놈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뻐엉-!

러셀의 마력이 깃든 손바닥에서 흐릿한 자청빛이 번쩍이고, 공기가 출렁이는 동심원을 그렸다. 그리고 충격파를 정통으로 맞은 기린 목 괴물은 전면 상체가 산산이 부서져 육편을 뿌리며 뒤로 날아가버렸다.

칼리스덴 도시에서 카루곤을 처음 만나 습득하게 된 후부터, 바실리스크와 로고스의 언데드를 상대로 싸우는데도 도움이 되었던 기술이었다. 마법이 아니라 현상을 의지와 마력으로 빚어내어 발출한 기술.

작정하고 마력을 날려서 터트린 충격파에 일순 모든 흑마력 안개가 반구를 그리며 물러났다. 그에 맞춰서 괴물들 또한 물러서며 으르렁거렸다.

러셀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들이마셨다. 물러났던 안개가 빠른 속도로 다시 조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염병.”

이쯤되면 산맥에 퍼트렸던 모든 흑마력과 괴물을 모아 러셀을 죽이기 위해 밀집한 것 같았다.

숨을 참은 상태 그대로인 러셀에게 괴물들이 계속 달려들었다. 이전보다 수가 줄었지만, 저 안개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것으로 보아 보충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그리고 아무리 러셀이라도 숨을 참고 계속 싸우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하늘은 구름으로 덮이며 점점 어두컴컴해졌다. 가뜩이나 밝은 낮에도 어두운 곳이 숲속인데, 태양마저 가려지자 그야말로 밤이라도 찾아온 듯한 어둠이 러셀을 음습했다.

시야는 마안으로도 꿰뚫어볼 수 없을 만큼 두터워진 안개 벽으로 막혔다. 그의 눈이 자청빛으로 빛나면서 흑마력을 몰아내도 끝없이 몰려왔다.

마나의 흐름을 보고 투시력으로 꿰뚫어보려고 해도, 거의 다른 세계에 떨어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밀도 있는 흑마력의 벽이 그의 눈을 가리기 시작한다.

감각이 점차 희미해졌다. 숲에서 나는 특유의 향과 젖은 흙바닥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뭉개지며 흩어진다. 후각이 차단되자 미각, 그리고 청각과 촉각마저 아련해졌다.

러셀은 아예 모든 오감에서 신경을 꺼버렸다. 그리고 기감氣感, 마력 감지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주위의 이지러진 풍경이 도리어 사라졌다. 그리고 눈과 다른 감각으로 볼 때보다 더 선명해진, 마치 푸른 아지랑이 같은 것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맹인 검사가 심안을 뜬 게 이런 건가, 하는 심정으로 러셀은 싸웠다.

점차 차오르는 숨, 쥐고 있는지 놓쳐버린 건지 분간이 안 가는 칼자루, 마찬가지로 죽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미 죽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암흑과 같은 심연 속에서 그는 전투를 이어나갔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여기서 이렇게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는가.

왜 집을 나오고, 바람과 비를 맞으며 노숙을 하고, 때로는 괴물과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가.

그런 것 상관없이 그저 편한 집, 가문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새어머니 또한 그를 꺼려하긴 했지만, 면전에 대고 욕을 한 적은 없었다.

남동생, 여동생은 모두 그를 잘 따랐다. 누나는······. 뭐, 알아서 잘 지내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그가 여행을 시작한 이유. 이 답도 없는 방랑을 시작한 이유는, 이대로 살다가 죽으면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찜찜한 마음 한 구석은 그냥 무시해도 좋았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전생을 기억하는 환생자였고, 현재 그의 모든 사고방식은 전생에 고속 기차, 버스 한 번 못 타본 젊은 청년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러셀은 그래서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후회하지도 않았다. 결국 나와서 많은 인연들을 만났으니까.

그때, 하늘에서 한 줄기의 벼락이 떨어졌다.

곧게 떨어지던 벼락은 중간에서 나무의 뿌리처럼 수십 개로 분화하더니 그대로 지상에 내리꽂혔다.

동시에 러셀은 꽉 막혀있던 모든 감각들이 원 상태로 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러셀!”

그는 고개를 들었다. 먼저 주변에 가득한 괴물들의 시체가 보였다. 동물과 곤충, 그리고 둘을 잘 주물렀다가 가장 위협적인 것들만 돌출시키게 만든 외형들.

러셀의 나힐니르에 죽은 놈들이 둥글게 쌓여서 참호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참호 너머에는 벼락에 타 죽은 사체가 그득했다.

위로 시선을 돌리자 시커멓게 타버린 나뭇가지들이 원형의 구멍을 내보인 채 흩날리고 있었다. 회색빛의 구름 아래로 둥둥 떠 있는 한 소녀가 보였다.

“거기서 뭐해, 바보 멍청이!”

아엘라시스였다. 한껏 마력을 내뿜고 있는지 머리카락이 물에 잠겨있는 것처럼 둥싱둥실 떠올라 흐느적거리고 있었고, 귀에 달린 귀걸이에서는 빛이 반짝였다.

“한참 찾았잖아!”

지상에 내려선 아엘라시스가 러셀에게 폭 안겼다. 아엘라시스 특유의 보드라운 살과 달콤한 향기가 훅 느껴졌다.

러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녀가 내려서자 흑마력은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천적을 만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어떻게 찾았어?”

“몰라! 그냥 기분 나쁜 기운이 계속 한 곳으로 모여들길래, 거기가 러셀이 있는 곳인가 하고 와봤어!”

기특하다. 러셀은 참았던 숨을 내쉬고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엘라시스를 살피다가 그녀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말했다.

“칼리아는?”

“언니는 카이 있는 쪽으로 갔어. 거기도 뭔가 이상한 마력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나한테는 일단 러셀에게 먼저 가보라고 해서.”

“그거 안 좋은데.”

지체할 시간이 없다. 소환은 이제 막바지가 되었을 것이다. 켈파그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신의 동족과 생명을 희생시켜 불러낸 악마.

겔리오투스가 800년 전 칼리아에게 접근해 그녀를 흡혈귀로 만든 이유. 뛰어난 마법사이자 군주였던 칼리아에게서 새로운 괴물 종을 탄생시키고, 그 유전 형질을 손에 넣은 악마가 바로 겔리오투스다.

오랫동안 형체 없이 지하와 그늘 속을 기어 다니던 악마가, 이제 육체를 얻었다. 하나의 종족을 모두 멸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으면서.

신을 잊어버린 종족, 오크를 꾀어내는 것은 악마에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인간과의 갈등을 부추기는 것 또한.

신의 영향력을 피해 온전한 모습으로 지상을 활보할 수 있기 위해, 악마는 부정형의 육체를 탈피하고 땅을 걷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육체를 얻기 위해 겔리오투스는 지금의 상황을 준비한 것이었다.

“아엘라. 남은 거리는?”

“얼마 안 돼.”

“그럼 아까처럼 숲의 마기를 다 흩어버릴 수 있나?”

“응.”

아엘라시스가 전방으로 마력을 투사하자, 검푸른 안개가 밀려나다가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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