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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18화 (119/225)

118화 상흔 (2)

***

크레이터를 벗어나 숲을 달리던 러셀이 팔을 위로 들었다.

“그워어어어-!”

나무로 위장하고 있던 타락한 나무 정령이 위장을 풀고 커다란 주먹을 내리친 것이다.

쿠웅!

만만찮은 충격이 울렸지만, 러셀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다. 코트의 방어력도 방어력이지만, 그 위로 얇게 도포된 마력이 모든 충격을 흘려냈기 때문.

촤악!

푸른 섬광과 함께 재차 주먹을 들려던 타락한 나무 정령이 반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마지막 서리나 나힐니르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손에 집중시킨 마력을 칼날처럼 유형화시켜 베어버린 것이다.

러셀은 곧게 세운 수도 위로 활활 타오르는 마력을 보다가 꺼트렸다.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마력의 형상을 구현하는 것은 어지간한 의지력 없이는 힘든 일이다. 일정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외기의 발현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

마력 유형화는 제대로 된 깨달음이 없다면 쉽게 고체화가 되지도 못한다. 오랫동안 검을 든 검수조차 앎이 충분하지 못하면 검에 검기를 씌울 수 없다.

오크인 쟈드무가 흑마력으로 이뤄진 검기를 두르긴 했으나, 막판에는 그 앎이 부족해 결국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고 스러졌다.

신체나 무기 위로 마력을 유형화시키는 건 상상이상으로 소모량이 크다. 강화된 신체나 무기에 또 한 번 마력을 씌우는 일이니.

러셀이 나무 정령을 하나 쓰러트리자, 여기저기서 또 다른 정령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멀쩡했던 흙바닥이 진흙과 늪으로 가득해지고, 나무의 생김새가 기이하게 뒤틀리면서 주변의 나무들과 합쳐지기도 한다.

러셀은 라하무른 산과 산맥에 들어서면서부터 뿌려져 있던 광대한 마기가 속속들이 모여들고, 그것이 이 일대의 숲을 통째로 침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본래대로라면 상당한 시간에 걸려서 뿌려놓았을 마기를 이렇게 급격히 회수하고, 자아가 없는 정령들을 타락시킬 만큼의 변화.

당연히 예상치 못한 변수, 러셀의 존재 때문 아니겠는가.

인위적으로 창조된 숲의 악의를 맨몸으로 맞으면서 러셀은 씩 웃었다.

“환영 인사가 좀 늦었어.”

허나 부족하다. 턱없이.

벼락과 냉기, 충격파가 숲을 뒤흔들었다.

수십 줄기의 덩굴이 러셀을 칭칭 감았다. 그대로 짜부라트리려 힘을 주지만, 안쪽에서 터져나온 전격에 의해 감전되고 타오르며 조각조각 부서졌다.

끈적이는 타르와 진흙을 흘리는 늪 정령이 독소가 가득 함유된 연기를 내쉬지만, 곧바로 냉기에 의해 결정이 얼어붙어 바닥에 떨어졌다.

벼락과 냉기를 한 몸에 두른 그의 모습은 감히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을만큼 압도적이다.

마지막 일격은 그가 들어 올린 흰색의 도끼였다. 팔을 위로 치켜 올린 도끼에서 무채색의 파동이 뿜어진 것과 동시에, 막대한 서리의 폭풍이 숲 한쪽을 하얗게 물들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계절이 비껴간 듯한 풍경속에서 러셀은 도끼를 갈무리 한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정령들이 압도적인 폭력에 휘말리며 분쇄되고 난 후.

러셀은 결계 인근에 도착했다. 점차 가까워지는 건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비릿한 혈향과 살 썩는 냄새가 짙게 풍기기 시작했으니.

쿠궁!

거기다 간헐적으로 지진까지 발생하는 중이었다. 그리 강하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러셀의 기준. 평범한 자라면 균형을 잃고 나자빠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뭔가 또 수작을 부리려는 듯한 낌새에 러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또 무슨 지랄을 하려고······.”

눈에 마력을 집중시키자 마안이 활성화되었다. 자색의 눈이 안광을 흩뿌리며 허공을 훑었다. 아까부터 전장에 가득 차 있던 마기의 흐름이 모두 이 결계가 있는 방향으로 집결 중이었다.

러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어느새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짙은 구름이 가리고 있었지만 시간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날 밤부터 잠도 자지 않고 싸우는 중이다. 혹시 몰라 칼리아에게 부탁을 하고 정찰을 보냈고, 이후 바로 오크들의 준동을 알아차린 다음 전투를 시작하지 않았나.

안 그래도 칼리아를 보낼 때 대가를 준비해두라고 단단히 들어두었기에 그에 대한 준비도 해놔야 했다. 저번 산장에서부터 벼르고 있던 것 같은데······.

얼마나 빨리 실신을 시키느냐, 혹은 쥐어 짜이느냐······.

칼리아에게 경험이 있어 보이진 않았으니 승부를 이어가면 그의 필승이겠으나, 또 그녀의 종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로부터 흡혈귀라하면 서큐버스나 인큐버스처럼 쾌락을 다양한 방식으로 투사할 수 있는 밤의 귀족이었으니.

러셀은 고개를 흔들고는 상념을 떨쳐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바로 앞의 검은색의 결계에 손바닥을 댔다.

그는 마법을 모른다. 주문이나 술식, 영창 또한 아는 바가 없다. 다만 러셀에게는 마력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마안이 있을 따름.

간단한 계통의 치유 마법이나 염동력, 그리고 벼락과 냉기 등의 속성을 다룰 수 있는 건 그의 재능과 눈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여느 마법사를 월등히 상회하는 감응력과 조작력이 있다. 마법은 결국 의념과 마력을 통해 구현되는 세계의 비틀림. 주문과 영창, 시동어는 의념을 확고히 해서 세상에 선언하게 도와주는 매개체다.

그보다 강력한 의념과 의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섬세한 조작력이 더해진다면. 마법은 발현된다.

러셀은 곧장 결계의 구조를 더듬어나갔다. 손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온 그의 마력이 결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탐색하고 침식하고 제어를 시도한다.

검청색의 마력 회로가 결계의 표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직선으로 이어지다가 꺾임을 반복하면서 무수한 갈래를 이어나가는 선들.

그 선들에 러셀의 마력이 깃들었다.

파칫!

강력한 저항에 러셀의 손바닥이 튕겨져 나왔다.

하지만 그 구조 자체는 이미 러셀의 머릿속으로 들어온 다음. 러셀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좋아. 힘으로 때려 부수면 된다는 거군.”

그의 주먹에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하고, 곧 마력의 성질은 전격으로 변환되었다.

파지지지지직-!

일전 흑마법사 루가네스가 만들어낸 군육체를 한 방에 박살 냈던 벼락의 철권. 그 전격이 다시 한번 그의 주먹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르릉!

귀청을 찢는 소리와 함께 러셀의 주먹이 허공을 격하며 쏘아졌다. 중첩된 두 개의 충격파만이 러셀이 얼마나 빠르게 주먹을 날렸는지 짐작할 수 있을 따름.

한계를 넘어선 마력의 포화에 결계의 방어막은 너무나 쉽게 깨지고 말았다.

허공이 깨져나간 것처럼 결계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역 오망성으로 만들어진 마법진과 다섯 개의 석탑.

그리고 막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균열, 그리고 마법진의 가운데에 서 있는 큼지막한 스테프를 든 오크다.

러셀은 곧바로 저 중심의 오크가 켈파그라는 오크임을 알아보았다.

정체모를 새의 깃털로 장식된 망토와 커다랗게 휘어진 고목나무 지팡이를 든 오크 주술사.

그리고 그 주변에는 수십의 오크들이 쓰러져 있었다.

“네놈······!”

러셀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눈가를 좁혔다. 아까까지 울리던 진동이 멎어 있었다. 그리고 결계 내부 안쪽에는 어떤 악마의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어라!”

그때 켈파그의 스테프가 러셀을 향했다. 그 끝에서 엄청난 열기가 집약되더니, 집채 만한 불덩이가 생성되었다.

휘몰아치는 열기에 삽시간에 주변의 모든 것이 타올랐다. 동족들의 시체가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

곧 불덩이가 쏘아지고, 러셀은 금방이라도 그에 휩쓸려 한 줌 재가 되어버릴 듯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쏜살같이 날아가던 불덩이의 속력이 점차 늦춰지더니, 완전히 멈춰버렸다. 그리고 푸확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허공에 무수한 아지랑이와 열기를 분산시키는 그 끝에 한 손을 들고 서 있는 러셀이 있었다. 옅은 자색 빛을 눈에서 흘리는 러셀이 손을 휘저었다.

놀랍게도 그 손짓에 마나의 배열이 흩어지면서 불덩이를 이루던 술식이 완전히 파훼되었다.

“말도 안 돼······!”

경악한 켈파그였지만, 놀람의 감정에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다시 지팡이를 곧추세운 다음, 손으로 수인을 맺고 입으로는 영창하면서 다음 마법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어떤 마법도 러셀에게 닿지 못했다.

대지를 뚫고 오른 나무뿌리는 러셀의 발에서 뿜어진 충격파에 의해 부서지고, 산성 용액은 어디선가 꺼내든 하얀 도끼에 의해 얼어붙은 다음 바닥에 떨어졌다.

켈파그에게 다가가는 짧지 않은 거리 동안 수십 개의 마법과 주술이 러셀을 노리고 날아들었으나.

마법과 주술이 엮여져 있는 술식을 육안으로 보고 마력으로 타격해서 부술 수 있는 러셀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컥!”

성큼성큼 걸어간 러셀은 한 손으로 켈파그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큭, 큭, 큭. 괴물을···, 소환했지.”

“무슨 괴물?”

러셀의 물음에도 켈파그는 몸을 떨며 웃기만 했다.

쾅!

“커억!”

러셀이 켈파그의 목을 틀어쥔 채로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그 충격에 마법진이 흐트러지고 석탑이 부서졌다.

“무슨 괴물?”

“커헉, 큭. 죽여라.”

러셀은 죽이라는 말에 반대편 손을 들었다. 검지 하나만을 세우더니 그대로 켈파그의 이마에 가까이 가져갔다. 검지 끝에 푸른 전광이 맺어졌다.

“그그극그그그그그극!”

켈파그의 몸이 요동쳤다. 하지만 러셀의 커다란 손이 그의 목줄기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기에 헛된 몸부림이었다.

“눈을 떠라.”

뭔가를 느낀 듯, 전격에 의해 온몸의 신경과 근육이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켈파그는 눈을 뜨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목이 붙잡히고, 전신에 전격이 내달리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다.

결국 부들거리는 켈파그의 흰자가 돌아오며 러셀의 마안과 마주쳤다. 자청색의 빛이 번쩍이는 마안이 켈파그의 눈을 꿰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악!”

전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이 켈파그의 뇌리에 작렬했다. 그 사이 러셀은 켈파그의 무너진 정신 방벽 너머로 침투하는데 성공했다. 사실 러셀 스스로도 될지 안 될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한 일이다.

게다가 완전히 다른 종족의 정신을 강제로 살핀다는 것이 러셀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러셀은 획획 스쳐 지나가는 켈파그의 생을 주의깊게 들여다보지 않았다.

필요한 건 가장 최근에 켈파그가 행한 일. 그것 하나만 알아내면 되었다.

“끄어어어어······.”

수천, 수만 개의 달군 바늘 끝이 뇌와 온몸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켈파그의 숨이 넘어갔다. 산채로 머리를 가르고 뇌를 직접 가르는 끔찍함이다.

“그, 그만······, 그만······!”

곧 러셀의 눈에서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가 손아귀에서 힘을 풀고 일어섰다. 러셀의 손이 목에서 풀리고, 전격이 사라졌음에도 켈파그는 일어서지 못했다.

켈파그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로지 암흑, 그리고 그 암흑의 중심에서 번쩍이고 있는 자색의 눈이었다.

“네 하잘 것 없는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렇게 많은 동족을 희생시켰으면서. 제 고통은 참아넘길 수 없는 모양이군.”

켈파그는 대답도 할 수 없는 정신이었다. 러셀은 그를 차가운 얼굴로 바라보다가 도끼를 들었다.

촤악!

하얀 궤적이 수십 번 번뜩이고, 켈파그의 온몸이 하얗게 얼어 부서졌다.

켈파그의 시체를 일별한 러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법진이 연결된 흔적을 찾아내었다.

이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은 결계를 통해 러셀의 시선을 묶고, 그를 유인한 것이었다. 진짜 흑마력의 집합체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 생성되게끔 전이시켰다.

러셀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켈파그가 균열 속의 존재에게서 받은 씨앗이 발아했다면, 더 이상의 시간은 지체할 수 없었다.

***

갑작스럽게 일어난 지진 이후, 중력을 거스르고 떠오른 핏물들. 거기다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에서 사악한 의념을 띄고 휘몰아치는 마나.

떠오른 핏물들은 곧 붉은 기체가 되더니 죽은 시체들에게 스며들었다. 그러자 시체들 또한 둥둥 떠오르더니, 어느 한점을 기준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콰득, 콰드드득!

괴수, 괴물, 인간과 오크 가릴 것 없이 핏물이 기화하여 스며든 시체들은 한데 동그랗게 뭉치더니 어떤 형상이 되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알?”

그 말대로 그것은 알과 비슷했다. 그러나 모양만 비슷할 뿐, 그것은 피와 살덩이가 한데 엉긴 끔찍한 무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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